인간성이란 단어를 떠올리면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대개는 인성이나 성품, 혹은 도덕성을 기준으로 삼아 그것을 평가하려는 경향이 있겠지요. 그러나 이 책이 말하는 인간성은 그런 고상한 가치와는 조금 다릅니다. 오히려 우리가 쉽게 외면하려 했던 인간 본연의 솔직한 모습들을 들춰내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과 불공평한 삶 속에서 느끼는 억울함과 슬픔, 때로는 숨기고 싶은 비열함까지. 이 책은 그러한 부정적인 감정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인간다움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행복과 불행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에서 벗어나, 삶을 더 넓게, 더 깊게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행복을 기준으로 삶을 평가하려 들지만, 이 책은 오히려 불행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진실, 그리고 그 진실이 가져다주는 위안을 이야기합니다. 한 장 한 장을 넘기며 만났던 명대사들은 제게도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습니다. '나는 지금의 내 불행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사람들이 흔히들 이야기하는 행복만을 맹목적으로 좇는 삶이 꼭 옳은 걸까?' 같은 생각들이 머릿속에 맴돌았죠...
이 책은 1998년에 처음 출간되었지만 오늘날까지도 스테디셀러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오래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결코 낡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시간의 흐름을 초월하는 깊이와 진솔함이 있습니다. 책을 읽다 보면 1990년대의 감성이 자연스레 떠오르기도 합니다. 등장인물들의 대사 하나하나가 흡사 SNL에서 들을 법한 서울 사투리처럼 친근하고 정겹게 다가옵니다. 그렇게 슬픔 속에서도 나에겐 위로를 자아내는 순간들.. 그 위태로운 균형이 어쩌면 이 작품이 지닌 매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책은 저에게 단순히 '좋은 책'이라는 평가를 넘어 '인간'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넓혀주는 귀한 경험을 선물했습니다. 읽는 내내 느껴지는 진솔한 감정들 그리고 그 감정들이 던지는 질문들은 제 삶의 방향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만들었습니다. 마치 오래된 나무의 나이테처럼 이 책도 시간이 지날수록 더 단단해지고 깊어지는 이야기를 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도 이 책을 통해 삶과 인간다움에 대해 조금 더 깊은 사색의 시간을 가져보시길 바랍니다.

 

 

 

안진진이 김장우와 나영규 사이에서 누구를 자신의 짝으로 받아들일지 고민하는 장면은 단순히 누군가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녀 자신의 삶의 방향과 결핍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에 대한 깊은 질문으로 다가옵니다. 두 남자는 서로 대조적이면서도 그녀의 내면에 자리한 두 가지 상반된 욕망을 상징하는 듯합니다.
김장우는 순수함과 자유로움을 대표합니다. 그의 어리숙한 모습은 때로 그녀에게 안쓰럽게 다가오지만 동시에 진진이 관계를 주도해야 하는 부담을 느끼게 합니다. 반대로 나영규는 경제적으로 안정적이고 모든 것이 철저히 계획된 인물입니다. 그의 삶은 안정적이지만 그 안정 속에서 안진진은 자신이 너무나도 수동적인 존재가 되어가는 불안감을 느낍니다. 자신의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했던 말처럼요.. 자신은 죄수고 당신은 간수같다고...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가 했던 이 대사를 김장우에게 했네요? 저는 이 부분도 이해가 안가는 모순중에 하나라고 생각해요. 누가봐도 나영규가 더 죄수과 간수를 보는 듯 하잖아요?)
어쨌거나 김장우냐, 나영규냐의 문제는 제 생각엔 곧 그녀가 어떤 결핍을 감수하며 살아갈 것인지 선택하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장우를 선택하면, 경제적 결핍이 따를 것이고 나영규를 선택하면, 자유의 결핍이 따르겠지요. (물론 이건 너무나 일차원적으로만 요약 한 것이고 이 안에는 매우 복잡한 심리선들이 담겨 있습니다.)
안진진이 결국 나영규를 선택한 이유는 그녀의 가족사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상상했습니다. 나영규를 선택한 것은 팩트지만, 왜 그러했는지에 대한 것은 사람마다 의견이 분분하겠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어머니와 쌍둥이 이모, 두 자매의 대비는 안진진의 선택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어머니는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하며 살아온 인물입니다. 그녀는 무질서하고 고된 삶 속에서도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쳤고 그 고통을 고스란히 안진진에게도 물려주었습니다. 반면 이모는 풍족하지만 이모부로부터 통제된 삶을 살아가며 어머니와는 정반대의 안정적이고 계획적인 이미지를 보여줍니다.
이런 두 여성의 삶을 가까이에서 보며 자라온 진진에게 경제적 결핍은 가장 견디기 힘든 두려움이었을 것입니다. 김장우와의 사랑이 자유롭고 행복해 보였지만 그녀는 어머니가 겪었던 고통을 다시 반복할 용기가 없었던 겁니다. 반면 나영규와의 관계는 자유로움을 제한당하는 느낌을 주었지만 어느순간에 그녀에게는 안정이라는 강력한 유혹으로 다가왔을 겁니다. 이 안정이 비록 숨이 막히는 삶을 암시할지라도 그녀는 그 선택이 가져다줄 안전함을 놓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안진진의 선택은 그녀가 사랑을 통해 무엇을 얻고 무엇을 포기할 것인지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그것은 단순히 남자 중 한 사람을 선택하는 일이 아니라 그녀 자신의 삶에 필요한 어떠한 결핍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대해 타협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이 결정을 통해 작가는 우리가 살아가며 맞닥뜨리는 모순을 극명하게 드러냅니다. 사랑이란 모든 것을 충족시키는 완벽한 해답이 아니라 어쩌면 결핍을 껴안는 과정이라는 사실을요... 과연 안진진은 나영규와의 앞으로의 삶속에서 행복할 수 있을까요? 사실... 저는 그녀의 미래가 잘 상상되진 않았습니다. 무언가를 얻는 다는 것은, 무언가를 포기한다는 것 이잖아요..
여러분은 인생에서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나요? 결핍은 피할 수 없는 삶의 일부이며 결국 그것을 어떻게 마주하느냐가 우리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본질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엔 아마도 안진진이 자신의 미래를 점쳐보기 위해 스스로를 대조(?)해 보았을, 이모에 대한 이야기를 해봅시다. 그런데 이모는 결국 극단적 선택을 하고 맙니다.
안진진의 이모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이유는 그녀의 삶이 철저히 통제되고 규격화된 환경 속에서 점차 자신의 존재감을 잃어갔기 때문이라고 느껴집니다. 그녀의 선택은 단순히 한순간의 절망이 아니라 오랜 시간 쌓여온 억압과 내면의 공허함이 드러난 결과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모는 안정적인 가정을 이루고 건축설계를 하는 이모부와 함께 경제적으로 풍족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풍족함은 동시에 그녀의 삶을 통제하고 모든 것을 예측 가능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녀의 삶은 외적으로는 완벽했지만, 내적으로는 자율성을 잃은 감옥 같았습니다. 모든 것이 계획되고 계산된 삶 속에서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를 잃고 자신의 욕망이나 감정을 표현할 여지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녀의 선택은 안진진의 어머니와 뚜렷한 대비를 이루며 두 사람의 삶이 어떻게 서로 다른 방식으로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어머니는 경제적인 결핍 속에서 고군분투하며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쳤다면 이모는 그 결핍이 채워진 환경 속에서 스스로를 잃어가는 고통을 겪었던 것입니다. 이 둘의 삶은 극단적으로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자신이 주체가 되지 못한 삶의 결과를 상징합니다.
또한 이모부와의 관계도 그녀의 선택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이모부는 계획적이고 규칙적인 삶을 지향했지만 그것이 그녀에게 안정이 아닌 억압으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그녀의 삶에서 '예측 가능성'은 더 이상 안정감을 주는 요소가 아니라 자신이 삶의 조연에 머물러 있음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족쇄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여지가 없는 삶을 살면서 점차 무기력함과 소외감을 느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모의 극단적인 선택은 단순히 그녀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인간이 가진 근본적 갈등과 욕구를 상징합니다. 그것은 자유와 안정 사이의 모순, 그리고 삶 속에서 진정한 주체로서 살아가기 위한 투쟁을 말해줍니다. 이모는 결국 자신이 잃어버린 자유를 찾기 위해 마지막 선택을 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녀의 선택은 삶의 풍족함과 안정감이 결코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책을 읽으며 작속 이모의 이야기를 마주하는 것은 다소 아리송 했습니다. 이 책을 읽어본 친구와 함께 이야기 하기를 "아주 배가 불렀다"며 농담을 했거든요. 사실 여전히 안진진의 어머니에 대한 기만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녀의 이야기는 우리가 삶 속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되새기게 합니다. 행복이란 단순히 결핍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는 순간에 찾아온다는 것을 말이죠.

 

 

 

이 책을 읽으면서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습니다. "누가 내 인생 하드모드로 현질도 안하고 키우냐"라는 우스갯소리요.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겪는 온갖 복잡한 감정과 고난들이 마치 게임의 하드모드처럼 느껴질 때가 있잖아요. 어쩌면 이 책 속 주인공들도 그런 하드모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하드모드에도 나름의 매력이 있다는 걸 이 책이 알려줬습니다. 단순히 게임을 클리어하는 것보다 그 과정에서 느끼는 긴장감과 성취감이 더 크듯이 우리 삶도 그렇지 않을까요? 아프고 고된 순간들이 쌓이면서 결국에는 나만의 이야기로 완성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제는 힘든 순간에도 묻고 싶습니다. "이건 또 무슨 퀘스트야?" 하고요. 슬픔이 와도, 아픔이 찾아와도, 그게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줄 경험치라고 믿기로 했습니다. 하드모드에서만 얻을 수 있는 레어템처럼 그런 순간들이 나중에는 나만의 특별한 보물이 되겠죠...
결국 인생은 하드모드로 설정된 채로도 계속 나아가야 하는 게임 같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이 모험이 끝나면, 지금의 모든 순간들이 나를 얼마나 성장시켰는지 깨닫게 될 거라고 믿습니다. 🌙

그리고 난... 모순 그 자체야...!

 

 

 

우리들은 남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자기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납득할 수 없어한다.

 

해질 녘에는 절대 낯선 길에서 헤매면 안 돼. 그러다 하늘 저켠에서부터 푸른색으로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가슴이 아프거든...

 

사람들은 작은 상처는 오래 간직하고 큰 은혜는 얼른 망각해버린다. 상처는 꼭 받아야 할 빚이라고 생각하고 은혜는 꼭 돌려주지 않아도 될 빚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장부책 계산을 그렇게 한다.

 

소소한 불행과 대항하여 싸우는 일보다는 거대한 불행 앞에서 차라리 무릎을 꿇어버리는 것이 훨씬 견디기 쉬운 법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솔직함만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솔직함은 때로 흉기로 변해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부메랑일 수도 있는 것이었다.

 

인생이란 때떄로 우리로 하여금 기꺼이 악을 선택하게 만들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모순과 손잡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주리는 정말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나의 불행에 위로가 되는 것은 타인의 불행뿐이다. 그것이 인간이다. 억울하다는 생각만 줄일 수 있다면 불행의 극복은 의외로 쉽다. 상처는 상처로밖에 위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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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영혜의 남편의 1인칭 시점으로 시작된다. 그는 영혜를 "그저 평범하고 수수한 여자"로 묘사하며 그녀를 선택한 이유를 설명한다.
그러나 이 '평범함'이란 단어는 오히려 그녀의 삶에 던져진 첫 번째 폭력을 암시한다. 남편에게 영혜는 독립적 존재가 아닌, 그의 안정된 삶을 보장해 줄 도구일 뿐이다.
영혜가 갑작스럽게 육식을 거부하고 채식을 선언한 것은 남편에게 충격으로 다가온다.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이라는 그녀의 새로운 정체성은 남편의 안정된 일상을 흔들며 갈등의 시작을 알린다.
특히 그녀의 결정은 남편의 개인적 불편함을 넘어, 가정 전체의 문제로 확대된다.
가족 식사 자리에서 아버지는 그녀의 채식행위에 대해 폭력을 휘두른다. 친정 아버지는 가부장제의 상징이자, 이 장면은 단순히 육식과 채식의 갈등을 넘어 전통적 가부장제와 개인적 자유의 충돌을 상징한다.
영혜가 손목을 그으며 저항하는 순간 그녀는 단순히 음식 취향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사회적 규율을 거부하는 존재로 변모한다.
이 장면은 그녀의 선택이 단순한 개인적 취향을 넘어서는 깊은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왜 우리는 누군가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하면 억압하려 드는가? 타인의 자유를 존중한다는 것이 사실... 그렇게나 많이 어려운 일인가? 조금만 생각해보자. 왜 그리 못견뎌하며 억압하려 드는걸까. 누가 칼이라도 들고 협박하던가?
영혜는 육식을 거부하며 육식문화와 가부장제라는 근대 문명의 억압을 거부한다.
그녀는 아버지의 폭력으로 상징되는 사회 규율에 저항하며 체제 밖으로 추방되는 인물이다.
그녀의 선택은 단순히 '채식주의'라는 단어로 설명될 수 없다. 나는 채식주의자라는 표현은 사실 매우 피상적인 형태를 꼬집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래에서 더 자세히 설명하겠다)
이는 근대 문명이 여성과 자연을 억압해온 방식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폭력이란? 상식, 육식문화와 가부장제로 대변되는 근대 문명, 인간의 생물적 조건으로서의 폭력 모두를 이야기한다.
인간은 다른 생명을 먹어야만 살아갈수있다. 즉, 생물학적 조건에서 야기되는 폭력은 가부장제가 사라져도 해소되지 않는 폭력이다.
인간은 결국 다른 유기물을 먹어야만 살 수 있는 잡식동물이라는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는 어떻게해도 폭력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엿볼수 있는 부분이 영혜에게 물어뜯긴 동박새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영혜는 자신의 둥근 젖가슴이 아무도 해치지 않아 좋다고하지만 몸이 야위자 뾰족해진 젖가슴에 대해 "뭘 찌르려고 이렇게 날카로워지는 거지?"하고 불안해 한다.
마지막 장면의 영혜의 노출된 상반신에서 드러나는 뾰족해진 젖가슴과 죽은 동박새를 통해 폭력성을 드러낸다.



2부는 형부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그는 예술가로서 영혜의 몸에서 발견한 몽고반점에 매혹된다.
이 반점은 단순히 신체적 특징이 아니다. 그것은 그녀의 타자성을 상징하며, 동시에 그의 금기된 욕망을 자극한다.
형부는 영혜를 "순수한 예술의 매개체"로 바라보며, 그녀의 몸을 꽃으로 치장해 자신의 예술로 재탄생시키려 한다.
우리는 형부가 그녀를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가 아닌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는 대상으로만 바라보고 있음을 알게 된다.
형부와 영혜의 관계는 애매하고 불편하다. 그들의 행위는 예술로 미화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윤리적 문제를 제기한다.
그녀의 동의와 자유 의지로 이루어진 듯 보이는 이 관계는 사실상 또 다른 억압의 형태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영혜는 점차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간다. 그녀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타자화되며,
더 이상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상태로 내몰린다. 결국 형부와의 관계는 그녀를 자유롭게 하기는커녕, 더 깊은 억압 속으로 밀어넣는 역설적 결과를 초래한다.
꽃이 되면 평화로워질줄 알았으나 결국 친언니 언니에게 캠코더 영상으로 큰 상처를 주고만다. 폭력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시도가 계속 또다른 폭력을 만들어낸다.
즉 폭력이 사회, 문화, 제도의 산물일 뿐만아니라 인간 삶의 근본적 조건이기도 하다. 채식주의자는 남성과 육식, 여성과 채식이라는 이분법적인 방법을 차용하는 듯 하면서 교묘하게 그것을 역설한다.
영혜와 형부가 육체적으로 결합하는 기괴한 장면에서 부분적으로 혼종성에 있다. 결합한건 인간의 몸이다. 그 결합은 성적 욕구에 의해 매개된다.
결합된 것은 동물적이다. 그러나 몸에 그려진건 꽃이다. 책에서도 "꽃과 짐승과 인간의 뒤섞인 한몸"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영혜가 몸에 꽃을 그린 J나 형부를 욕망하는 모습, 비쩍 마른 몸으로 정신병원에서 격렬히 몸부림 치는 모습도 이와 비슷한 효과를 자아낸다.



마지막 3부는 영혜의 언니인 인혜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인혜는 자신이 영혜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했음을 깨닫는다. 이 과정에서 영혜는 더 이상 인간 세계의 규율을 따르지 않으며, 음식을 완전히 거부한다.
그녀는 "식물이 되고 싶다"고 선언하며, 자연으로의 완전한 동화를 꿈꾼다. 그러나 이 꿈조차 이상적이지 않다. 영혜가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욕망은 인간과 자연의 경계에서 발생하는 또 다른 갈등을 보여준다.
그녀가 인간으로서의 삶을 거부하고자 하는 이유는 단순히 폭력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그 폭력을 완전히 소멸시킬 수 없다는 좌절감 때문이다.
영혜의 마지막 모습은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그녀는 활활 타오르는 나무를 응시하며 자신의 존재를 초월하고자 한다.
식물이 되길 원하지만 끝내는 동물일수밖에 없는 존재... 
한강 작가는 폭력이라는 개념이 완전히 사라진 세상을 망연히 꿈꾸기보다는 
인간 문명의 지반이 어떤 종류의 폭력들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직시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라고 말하고자 한 것같다.
위에서 말했듯 채식주의자라는 책의 제목은 피상적이다. 건강을 위해, 아토피, 알레르기 체질을 개선하기 위해, 환경을 보호하기위해 등등
여러가지 이유를 덧붙이지만 결국 채식주의자라는 단어는 영혜가 고기를 거부하는 이유를 속시원히 설명하지 못한다.
회사사람들과의 모임장소에서 영혜의 남편은 저런 피상적인 이유를 나열하며 영혜의 채식이유를 모임 사람들에게 설명한다.
그제야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있는 규범과 사상내에서 이해하고 영혜의 채식을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들인다.
인간은 자신이 알고 있는 개념 체계 내부에서만 타자를 이해할 수 있다. 언어로 대상을 파악하려는 시도는 그 대상의 실체를 언어 바깥으로 불가피하게 미끄러뜨린다.
나는 이 사실이 채식주의자 전체를 관통하는 문제의식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몽고반점에서 형부는 매우 이중적인 위치에 있다.
영혜의 식물성을 가장 먼저 알아보는 사람은 형부였다. 첫 만남 때부터 "야생의 나무 같은 힘"을 느끼고 영혜에게 몽고반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푸른 꽃이 열리는 장면을 떠올린다.
결과적으로 영혜가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게 만들어 준 것도 형부다. 형부는 "아무도 그녀를 도울 수 없었다.", "모든 사람이 철저한 타인 혹은 적이었을 것이다." 라는 표현을 하며 영혜의 처지를 이해하고 헤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부는 독자들에게는 왠지 불편하고 메스껍거나 역겨운 존재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형부가 철저히 자기의 시선에서 타자화된 영혜를 진단하고 욕망하기 때문이다. 형부는 영혜를 모든 욕망이 배제된 육체, 식물적 육체로 보지만 그건 영혜의 단편적인 부분일 뿐 그녀를 완벽히 이해한 것이 아니다.
완벽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부분은 아래 부분을 통해 알 수 있다.
영혜는 자신이 꿈을 꿔서 고기를 끊었다는 말이 타인들에게 이해받지 못할 것임을 잘 알고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혜는 형부에게 이에 대한 설명을 해주려하지만 형부는 "널 삼켜서, 널 녹여서 내 혈관 속에 흐르게 하고 싶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다 영혜의 말을 자장가삼아 잠이 드는 형부, 이는 결국 형부는 영혜에게 결국 '나'를 철저하게 타자화하는 타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인혜(영혜의 친언니)는 삶에 있어서는 안될 바람현장을 경험한(모르고 사는 것보단 어쩌면 들킨것이 다행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눈치채기 어렵지만 인혜는 영혜에게 치명적인 정신적 해를 입히는 인물이다.
캠코더를 발견하고 인혜가 남편에게 말하길 "아직 정신도 성치 않은 애를..."이라 말한다.
영혜를 비정상으로 판단하지만 사실 영혜는 회복중인 상태였다. 밥도 잘먹고 일자리도 구하기 직전이었고 형부를 통해 악몽도 점점 꾸지 않고 있었다.
"무섭지 않아요.. 무서워하지 않을거에요"
과정이 어찌되었든 결과적으로는 형부와의 만남을 통해 구원의 가능성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인혜는 그러한 가능성을 차단하게 되고, 그 이유는 단순 미움이나 괘씸보다는 반드시 치료가 필요하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알고있는 개념과 문화, 정서에서 이해하려는 태도는 결국 강제 입원이라는 폭력으로 이어지고 만다.
이 소설에서 영혜는 주요 서술자로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타인들에 의해 재현되는 영혜가 진짜 영혜인지를 의심하며 읽어야 한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영혜가 완전한 이상향을 좆고, 무해한 존재는 아니라는 것이다.
폭력의 질서에서 벗어나기 위해 식물되기를 꿈꾸지만 식물에게 일방적인 시선을 보내는 영혜의 모습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영혜는 세상의 나무들은 모두 형제 같다고 말한다. 이 말은 굉장히 생태주의적 표현이다.
식물들을 어떤 연대에 기반을 둔 평화로운 공동체로 보고 있다. 그러나 사실 이 소설에서 나무들은 굉장히 공격적이고 동물적이다.
소설 첫장면에 등장하는 나무들의 모습부터 그러한데, 영혜의 꿈속 나무들은
뾰족한 잎이 돋은 나무들을 헤치느라고 얼굴에, 팔에 상처가 났다라고 말한다. 가해의 굴레로부터 해방된 식물.. 물과 광합성만 필요한 식물.. 그런것은 사실 없다.
나무도 인간에게 상처를 준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대놓고 보여주면서 이 소설은 시작한다.
그렇다면 끝은 어떠한가?
"활활 타오르는 도로변의 나무들을, 무수한 짐승들처럼 몸을 일으켜 일렁이는 초록빛의 불꽃들을 쏘아본다:"
굉장히 역동적이며 위협적이다.
"짐승들처럼"이라는 표현을 대놓고 사용하며 동물 VS 식물에 대한 이분법에 균열을 낸다.
실제로 식물들의 세계를 보면 경쟁이 치열하고 살벌하다.
식물에게 평화나 연대같은 가치를 투영하는 것도 인간 중심적인 사유일 수 있다.
이러한 면에서 영혜의 나무가 되기가 실패한 이유는 어쩌면 자신이 동물이라는 현실을 외면해서뿐 아니라
나무들을 자신이 알 고 있는 나무라는 개념 체계 내에서만 바라보고 해석하는 폭력을 범했기 때문아닐까?
채식주의자는 폭력의 여러 형태를 다룬다. 그것은 물리적 폭력, 심리적 억압, 그리고 제도적 강요를 포함한다.



이 소설은 우리가 타인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때로는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특히 영혜라는 인물은 독자로 하여금 타자를 이해하는 데 있어 언제나 잠정적 한계가 있다는 점을 깨닫게 한다.
한강은 이 작품을 통해 독자들에게 묻는다. 우리는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아니면 우리의 틀 안에 맞추기 위해 그들을 재단하는가? 이 질문은 단순히 문학적 질문이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끊임없이 제기되는 도전이다.
우리가 불가피한 폭력의 요구를 기어이 감내하는 것과 타자를 함부로 의미화하지 않는 것은 양립가능하다.
이 소설은 영혜가 활활 타오르는 나무들을 대답을 기다리듯 쏘아보는 장면으로 끝난다.
이 장면은 나무 불꽃으로 표상되는 미지의 타자로부터 어떤 의미를 기대하면서도 언어의 한계를 의식하고 의미화를 유보하는 윤리를 보여준다,.
즉, 우리들의 의미화가 언제나 잠정적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면서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놓아야 한다.
둘째로 폭력이 삶의 근원적인 조건인 이상 우리에겐 폭력의 유무로 도덕적 선악을 단정하지 않는 새로운 의식이 필요하다.
여기서는 폭력의 발생자체가 아니라 누구의 누구를 향한 어떤 폭력인가가 주요한 문제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우리는 불가피한 폭력뿐 아니라 불가피한 돌봄의 연쇄에 의해서도 관계 맺고 있다.
폭력과 돌봄은 모두 삶의 근본적인 조건이지만 그 불가피성 내에서 우리는 누구와 어떤 관계에 연루될 것인지를 어느 정도 선택할 수 있다.
인혜는 이 기성적인 세계에 남아서 지우를 돌보기로 선택했다.
이 일은 가부장제가 부여한 노동이기도 하지만 인혜의 기쁨의 원천이자 삶을 어떻게든 붙잡아낼 책임을 스스로 부여한 결단의 결과이기도 하다.
우리의 살생을 완전히 속죄하기는 어렵겠지만 누구를 어떻게 돌볼 것인지를 선택하면서 폭력이라는 원죄가 유의미한 돌봄과 함께 순환하는 세계를 만들어야한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영혜는 더 이상 인간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 그녀의 존재는 인간과 자연, 폭력과 평화, 이해와 오해 사이에 놓여 있다.
독자들은 이 모호한 결말을 통해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한다. 채식주의자는 단순한 소설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와 그 복잡성을 탐구하는 하나의 거대한 질문이다.

 

 

 

이 책을 읽으며....
마치 영혜가 꿈속에서 고기를 거부하며 나무가 되고자 했던 그 갈망처럼,
나 또한 나를 옭아매는 것들을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을 느꼈다. 하지만 동시에, 영혜의 이야기는 내게 질문을 던졌다.
과연 벗어난다는 것이 가능할까? 그 과정은 정말로 평화로울까?

요즘의 일상 속에서 내가 선택한 것들조차 내가 아닌 누군가를 위한 것이 되어버리는 순간들.
마치 인혜가 가부장제의 틀 안에서 돌봄을 자신의 책임으로 받아들이듯, 나도 그저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은 나에게 선택의 무게를 다시금 돌아보게 했다. 영혜는 식물이 되길 원했지만, 결국 몸은 야위고 날카로워졌다.
그런 영혜를 바라보며 나는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지쳐가고 있는가?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영혜의 여정을 따라가며 나 또한 내 안의 폭력성을 마주했다.
폭력이라 하면 누군가를 해치는 직접적인 행위만 떠올렸던 내가, 사실은 나 자신에게 얼마나 잔인했는지를 깨달았다.
비교를 하며 무언가를 무가치하게 여기거나, 꿈을 스스로 묵살하며, 어떤때는 내 마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찔렀다.
그리고 나서야 깨달았다. 나를 돌보지 않는 것도 하나의 폭력이었다는 것을.

책의 마지막 장면, 활활 타오르는 나무들을 바라보던 영혜처럼 나도 불꽃들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싶었다.
그것은 단순히 절망의 상징이 아니라, 나를 묶었던 끈을 태워버릴 수 있다는 가능성이었다. 불꽃 속에는 미지의 타자, 새로운 해석, 다른 나의 모습이 있었다.
삶은 결국 폭력과 돌봄이 얽힌 복잡한 굴레다.
누구에게 돌볼 마음을 품고 누구를 해칠 위험을 안고 있는지를 고민하며 우리는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영혜의 이야기처럼 나도 내 삶 속에서 무엇을 돌보고 무엇을 놓아줄지 선택해야 한다.
지금은 조금 두렵고, 때론 불안하지만, 그 선택 안에 작은 희망이 있다는 것도 알 것 같다.

책을 덮으며 나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다짐했다. 언젠가 나도 활활 타오르는 불꽃처럼 나를 정의하려는 모든 의미를 태워버릴 수 있는 사람이 되리라고.
그리고 남겨진 재 속에서 나만의 의미를 새롭게 쌓아가리라고. 이 책은 내게 그런 희미한 빛을 남겨주었다.

 

 

 

 

그렇게 끝났다. 그날 이후 그들의 삶은 결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살아갔다. 등 뒤에 끈질긴 추문을 매단 채 가게를 꾸려나갔다. 시간은 가혹할 만큼 공정한 물결이어서, 안내로만 단단히 뭉쳐진 그녀의 삶도 함께 떠밀고 하류로 나아갔다.

 

 

 

그를 사랑한다는 확신이 그녀에게는 없었다.
그것을 부지중에 알면서 그녀는 그와 결혼했다.
혹 그녀에게는 자신을 좀더 위로 끌어올려줄 무엇인가가 필요했던 건 아닐까.

 

 

 

처음 얼마 동안은 여느 부부들처럼 그와 크고작은 언쟁을 하기도 했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체념할 수 있는 것들은 체념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그를 위한 것이었을까.
함께 살았던 팔년 동안, 그가 그녀를 좌절시킨 만큼 그녀 역시 그를 좌절시켰던 것은 아닐까.

 

 

 

문득 이 세상을 살아본 적 없다는 느낌이 드는 것에 그녀는 놀랐다. 사실이었다. 그녀는 살아본 적이 없었다. 기억할 수 있는 오래전의 어린시절부터, 다만 견뎌왔을 뿐이었다.

 

 

 

이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 더이상은 견딜 수 없다. 더 앞으로 갈 수 없다. 가고 싶지 않다.

 

 

 

그녀는 이미 깨달았다. 자신이 오래전부터 죽어 있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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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류진 작가의 '달까지 가자'에 이어 '일의 기쁨과 슬픔'도 읽었다. 이 책은 군대에서 일과가 끝나고 먹는 라면, 회사에서 퇴근 후 허기진 상태에서 먹는 라면처럼 술술 입안으로 빨려들어가는 그 맛이다.

 

첫 번째 단편인 '잘살겠습니다'는 나이 많은 회사 동기 언니의 결혼과정을 다루는 이야기다. 빛나라는 인물은 매우 순진한 캐릭터이다.
그리고 정도의 차이일 뿐 우리 주변에 이런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이 존재한다.
빛나는 동기지만, 가까운 친구라기엔 애매한 어정쩡한 관계 속에서 그녀는 존재만으로도 화자를 지치게 만든다.
이러한 존재는 회사에서 특히 그 빛을 발하는데, 나같은 성격들의 사람들로 하여금 복장 터지는 답답함과 짜증스러움을 유발하곤 한다.
사람이 나쁜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해서든 나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고, 나의 일을 더 어렵게 만들어 놓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결과물을 만들어 내곤 한다.
중요한 점은 그러한 사실은 그들은 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의 존재조차 잊고 있던 화자는, 청첩장을 달라는 빛나의 말에 '동기 1호 결혼 커플을 축하하는 청첩장 모임'으로 퉁쳐 만나려고하지만,
빛나는 그녀를 내심 좀 더 가까운 존재로 여기었는 듯 1:1로 따로 만날 것을 제안한다. 
에비동을 특 에비동을 시켰기 때문에 새우가 더 많이 나온 것인데 새삼 놀라는 그녀였고
전세계약을 하며 확정일자 조차 모르고 결국 이중계약 사기를 당해버린 그녀였고
끝내 1:1로 밥을 얻어먹어놓고는 결혼식에 등장조차 안한 그녀였다. (그리고 축의금조차 내지 않는 넌센스 그 자체였다.)

 

 

 

"빛나 언니한테 가르쳐 주려고 그러는거야. 세상이 어떻게 어떤 원리로 돌아가는지. 오만원을 내야 오만원을 돌려받는 거고, 만이천원을 내면 만이천원짜리 축하는 받는 거라고. 아직도 모르나 본데, 여기는 원래 그런 곳이라고 말이야. 에비동에 새우가 빼곡하게 들어 있는 건 가게 주인이 착해서가 아니라 특 에비동을 주문했기 때문인 거고, 특 에비동은 일반 에비동보다 사천원이 더 비싸다는거. 월세가 싼 방에는 다 이유가 있고, 칠억짜리 아파트를 받았다면 칠억원어치의 김장, 설거지, 전 부치기, 그밖의 종종거림을 평생 갖다바쳐야 한다는 거. 디즈니 공주님 같은 찰랑찰랑 긴 머리로 대가없는 호의를 받으면 사람들은 그만큼 맡겨놓은 거라도 있는 빚쟁이들처럼 호시탐탐 노리다가 뭐라도 트집 잡아 깎아내린다는 거. 그걸 빛나 언니한테 알려주려고 이러는 거라고, 나는."

 

 

 

화자는 그녀에게 제대로 이 현실과 세상의 진리를 깨닫게 해주기 위해
철저히 빛나의 결혼식 선물을 준비한다. 그동안의 밥값, 커피값에 근거한 정확히 계산된 간단한 편지를 곁들인 올리브영에서 산 만이천원어치의 선물을 준비했다.
딱 그만큼의 선물로, 빛나에게 세상의 룰을 가르쳐 주겠다는 의도다.
그러나 빛나는 그 선물을 받고 감동을 받았는지 편지와 선물을 사진찍어 본인의 프로필 사진으로 올렸다.
어쩔 도리가 없다. 세상의 이치를 알려주려 했던 화자의 노력은 헛수고로 끝났고, 빛나의 순진함은 또 한 번 화자의 속을 긁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떡을 씹으며 빛나가 잘 살길 바란다. 바보 같고 어리숙하고 때론 짜증나지만, 그래도 그녀가 진심으로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은 남아 있다.
이 단편의 묘미는 여기 있다. 빛나를 향한 화자의 분노와 연민, 그리고 희망이 뒤섞인 감정은 마치 우리 모두의 관계 속 갈등을 상징하는 듯하다.
절대적인 악과 선은 없다. 웃프게도... 어쩌면 그녀는 화자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공감능력이나 지능이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화자는 답례로 받은 떡들을 먹으며 빛나가 부디 잘살기를 희망한다. 바보들이 참 밉다. 밉지만 그들의 순수하면서도 순진한 마음은 부정할 수 없고 그저 잘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잘 살겠습니다'는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한다. 어쩌면 빛나는 우리의 과거 모습일 수도 있고 혹은 우리가 미워할 수 없는 주변 사람일 수도 있다.
그녀는 답답하지만 밉지 않고 어리숙하지만 착한 마음만큼은 응원하게 된다.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우리는 항상 물질적인 것이든 마음인 것이든 공평을 추구한다. 잘 살겠습니다의 화자의 말대로 딱 그 값어치만큼으로 세상이 정말로 돌아간다면 얼마나 이상적일까?
그러나 세상은 사실 주는 만큼 받는 세상이 아니다. 어떨 때는 내가 더 주기도 하고, 내가 더 많이 누군가로부터 받기도 한다. 세상은 엔트로피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화자가 아무리 빛나를 가르치려 들어도 소용없다. 사람은 바꿀 수 없고, 빛나는 자신이 가진 정보와 역량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선한 마음을 다하고 있을 뿐이다..

 

 

 

혼자 끙끙앓으며 분노를 해보았자. 화자만 손해일 것이다. 나라면... 그게 그렇게 화나고 힘들다면 그냥 털어 놓는게 어떨지 싶다. 친한 동료면 좋고, 친구여도 좋다. 부정적인 감정은 빨리 소모해서 없애버리고 싶다. 그래.. 그냥 뇌의 화학적인 반응이야. 라고 생각하면서... 결국, '잘 살겠습니다'의 이야기는 단순한 불평이나 푸념이 아니라 세상과 인간관계의 복잡한 본질을 마주하는 과정에 대한 기록처럼 느껴진다. 빛나는 화자에게 끊임없이 분노를 안겨주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순진한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연민을 자아낸다. 그녀가 가진 부족함은 화자를 불편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그 부족함 안에 담긴 순수함은 쉽게 미워하기 어렵다.

 

 

작가는 아마도 세상에 완벽히 공평한 교환은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우리가 주고받는 모든 것들은 저울 위에 올라가는 즉시 균형을 잃고 그것이 삶의 자연스러운 질서가 된다.
빛나는 화자의 기대와는 달리 이 불균형 속에서도 나름대로 자신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화자는 빛나를 통해 우리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게 만든다.
나 역시 살면서 이런 빛나 같은 사람들을 만났고 때로는 그들과의 관계에서 속이 끓어올랐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순간에 느꼈던 감정들이 얼마나 하찮았는지를 깨닫게 된다.
어쩌면 내가 화가 난 이유는 상대가 아니라, 내 안의 기대와 욕심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잘 살겠습니다'의 마지막에서 화자가 빛나를 향해 잘 살기를 바라는 장면이 단순한 체념이 아니라 일종의 성장처럼 느껴졌다.
세상을 가르치려 애쓰는 대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흘려보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세상을 덜 힘들게 살아가는 방법이 아닐까?
빛나는 아마 끝까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만의 방식으로 누군가를 당황하게 하고 또 어딘가에서는 엉뚱한 감동을 주며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화자도 언젠가 자신의 노력과 분노가 그리 대단치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웃을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은 이 세상의 불균형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그 답은 각자의 몫이지만, 어쩌면 그 답은 생각보다 간단할지도 모른다. 그냥, 잘 살면 되는 것이다.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는 회사에서 좋아하는 여자 동료 지유가 남편과의 사별 후 후쿠오카에서 지낸다는 소식을 듣고 지훈이 단숨에 달려가 3년만의 재회를 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혼욕 온천탕이라는 장소가 주는 긴장감, 둘 사이의 기묘한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지훈은 결국 지유와의 하룻밤 계획이 실패했다. 나름의 계획을 완전히 지유에게 간파당했고,
지훈이 작전에 실패하고  홧김에 '이 씨발년이. 열었으면 닫아놔야 할 거 아냐.'라고 말하며 찌질하게 울며 잠드는 장면은 읽는 이들로 하여금 왠지모를 통쾌함과 우스꽝스러움에 웃음이 나게 한다.
둘 사이가 진전이 있으려면 지훈이 어떤 태도를 보였어야 했을까?
기본적으로 지훈은 나름대로 훈남 스타일로 묘사된다. 마음속의 독백 장면에서 나름 그는 그동안 여자들을 꼬시기 위한 작전들과 여자들이 본인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해 오만과 자만을 가지고 생각한다. 만약 지훈이 나였고, 정말 지유를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어떻게 할지 상상해 보았다.
우선 3년만에 만난 만큼 조심스럽게 다가가지 않았을까? 시간이 흐른만큼, 지유는 많이 달라져 있을지도 모르고 그동안의 공백이 있기에 더욱 신중히 만났을거라 생각한다.
애초에 그럴거라면, 나만의 시간을 보내는 비중을 더욱 높였을 것 같다. 잠깐 밥이나, 반주정도만 곁들이며 시간을 보내고
나름의 혼자 일본여행을 추구 했을 것 같다. 뭐... 가서 만나보니 지유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면, 다음에 다시올 2번째, 3번째 후쿠오카를 기약하지 않았을까?
설령 그런 긴장감이 연출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고 곧 이에 대한 결과로써 내가 실망하게 되는 상황을 마주한다 하더라도 지훈처럼 분통을 터뜨리진 않았을 것 같다.
마치 그게 마지막 기회였던 것 처럼 말이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 지훈은 공격력 스탯만 잔뜩 올렸고 방어력 스탯은 하나도 올리지 않은 게임 속 캐릭터 같다.
매우 공격적으로 대시를 하지만, 한수 위에 올라와있는 사람의 공격을 받고는 처참하게, 비참하게 무너져 내린다.
나는 어릴적에 아버지에게 항상 '겸손하라, 숙일줄 아는 사람이 되라'라는 말을 듣고 커왔다. 그리고 여전히 그 말을 100은 아니어도 90은 실천하기 위해 노력한다.
겸손과 숙이는 태도는 어릴 적엔 그저 당연한 미덕처럼 여겨졌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것이 인간관계의 핵심임을 깨닫게 된다. 지훈의 이야기를 보며 나는 그 교훈을 새삼 떠올렸다.
결국, 상대방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태도 없이 얻으려는 것은 모래 위에 쌓은 탑과도 같다는 것을 말이다.
지훈이 후쿠오카에서 얻은 경험은 어쩌면 실패일 수 있지만, 동시에 그에게 필요한 자각의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단순히 지유를 만나고 싶었던 게 아니라 자신에 대한 그녀의 감정을 확인받고 싶어 했다. 
그러나 관계란 혼자서 완성할 수 없는 퍼즐 같은 것이다. 나의 조각이 아무리 정교하고 화려하더라도 상대방의 조각과 맞물리지 않는다면 결국 그 그림은 완성되지 않는다.
지훈의 모습에서 나는 나 자신을, 그리고 우리가 관계에서 종종 저지르는 실수를 발견했다.
지훈에게는 상대방을 사로잡기 위한 전략이 아니라, 겸손히 상대를 바라보고,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는 그 첫 걸음이 필요했다. 그것이야말로 후쿠오카에서의 실패를 진정한 배움으로 전환할 수 있는 열쇠일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사람들과의 관계를 다시금 되돌아보게 되었다.
후쿠오카에서의 지훈처럼 우리도 때로는 삶의 작은 실패를 통해 더 나은 내가 되는 길을 배운다. 이번 단편이 지훈과 나에게 남긴 것은 바로 그런 성장의 기회였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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