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딩드레스 44 

 

 


당신은 파롤(Parole)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파롤은 랑그(Langue)의 상보호완적인 의미로, 랑그는 한 언어가 갖는 추상적인 체계로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사회적 구성원 모두가 공유하는 약속이다. 그래서 랑그는 유한하다. 그리고 우리가 실제로 입밖으로 내뱉는 개인적 발화를 '파롤'이라 한다. 그래서 파롤은 랑그의 실제적 실현이라 할 수 있고, 개개인의 발화이므로 무한하다. 즉 요약하자면 랑그는 개념, 파롤은 표현이다. 그런데, 파롤은 파롤에 의한 프레임이 있다.

 

 

 

예를 들어, 'BMW 7시리즈'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BMW 7시리즈'라는 랑그를 나는 '대형세단'이라는 파롤로 표현한다.
내가 가진 '대형세단'이라는 이미지는 무언가 고급스럽고, 부의 상징이다.

그런데 '자가용' 구입을 싫어하는 존 리 선생님은 '자가용'은 사치이며, 이미 대중교통으로 충분히 대체 가능한 불필요한 물건일 뿐이다. 만약 존 리 선생님이라면 'BMW 7시리즈'를 나와 같은 '대형세단'이라는 프레임으로 바라볼까? 그렇지 않다. 아마도 그저 사치품에 불과한 '자가용'의 프레임으로 바라 볼 것이다. 이처럼 나와 존 리 선생님이 'BMW 7시리즈'를 다르게 바라보는 이유는 같은 랑그를 다른 파롤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면, '대부분 일치하는 파롤의 프레임'에 갖힌 사례가 무궁무진하다. 예를 들어, 웨딩드레스가 그 파롤이라 할 수 있겠다. 웨딩드레스는 무엇이 연상되는가? 왠지 화려해야하고, 결혼, 축복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대부분 공감할거라고 생각한다. 웨딩드레스에 대해 부정적인 프레임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웨딩드레스는 대부분의 사람이 프레임에 갖혀있는 파롤이다. 웨딩드레스 44는 이러한 파롤의 프레임을 깨뜨리는, 할인을 크게 받아 들여져온, 어느 웨딩드레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웨딩드레스를 대여한 44명의 이야기는 다양하다. 물론 결혼에 대한 이야기, 결혼 생활에 대한 삶을 담고 있다. 좋은 이야기도 있고, 나쁜 이야기도 있다. 그냥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일상 이야기도 있다. 정세랑 작가님에서 의도한 것인진 몰라도. 44개의 이야기 중 좋은 이야기는 짧고, 나쁜 이야기는 길다. 한번 다시 읽어보자.

 

 

 

[3번째 손님]

여자에겐 다른 계획이 많았다.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았고, 해외 연수도 계획되어 있었다.
"네가 원하는 대로 살게 해줄게. 그러기 위해 끝까지 노력할 거야."
그 말을 믿을 수 밖에 없었다.

 

 

 

[6번째 손님] 

"내 몸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부분이야. 지금은 너보다 마음에 들거든?"..............
역시나 멋진 타투였고 드레스와도 잘 어울렸다. 내 몸은 내 거야.

 

 

 

[9번째 손님]

아홉번째 커플은 원래 혼인신고만 하고 살려고 했다. 둘다 식에 대한 환상이 전혀 없었고 .......
그러나 그렇게 2년을 사는 동안 양가에서 폭격이 끊이지 않았다. 어떻게든 식은 꼭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자의 어머니가 울고 남자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렀다. 두 사람은 지고 말았다..............
여자는 고전문학 전공자였는데, 고전문학 속 영웅들이 대다수 고아인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았다.
고아들만이 진정으로 용감해질 수 있다고 말이다.

 

 

 

[15번째 손님]

"하지만 형부가 잘해주잖아요? 좋아 보였는데."
"남편이 문제가 아니야. 내가 제도에 숙이고 들어간 거야. 그리고 그걸 귀신같이 깨달은 한국사회는 나에게 당위로 말하기 시작했지"................
"예를들면요?"
"남편과 나는 같은 시험에 붙었잖아. 그런데 가족들이 내게만 '살살 다닐 직장을 들어가야 한다'고 말해. 왜 나는 살살 살아야 하지? 왜 그게 당연하지? 왜 나한테 그렇게 말해도 된다고 생각하지? 굴욕적이야."
거기까지 말하고 열다섯번째 여자는 입 밖으로 말해서 더 분명해지는 것들을 잠시 가만히 헤아렸다.

 

 

 

[25번째 손님]

"요리부터 배워."
한번은 그냥 넘어았다.
"쉽게 하는 이탈리아 요리, 이거 배울까?"
"좀! 한식부터 배워 좀! 밑반찬부터."
두번은 넘어갈 수 없었다....... 차분하게 반박해야 했지만 여자도 쌓였던게 많았다.
"다시 말해봐, 씨발새끼야."

 

 

 

[36번째 손님]

"그래도 당신은 나랑 결혼해서 다행이지? 나는 전혀 가부장이 아니잖아."
"글쎄."
...................
"내 말은 그런 시간들이 계속, 평생에 걸쳐 쌓인다는 거야. 쌓이다보면 큰 차이가 나는 거고. 생각해보면 이상하지 않아? 당신 할아버지 제사잖아? 난 만난 적도 없는 분이야. 왜 효도를 하청 주는데?" 
"어쨌든 그게 가부장제야. 당신 눈에는 안 보여도 내 눈에는 보여. 내 눈에만 보이는게 아주 많아"

 

 

 

여자의 계획과 남자의 약속이 엇갈리며 나타나는 갈등은, 결혼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얼마나 개인의 욕망과 꿈이 묻히기 쉬운지를 잘 보여준다. 남자가 아무리 여자의 자유를 보장하겠다고 말해도, 그 말은 결국 전통적 결혼 제도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 약속이었다. 이는 결혼이라는 제도 속에서 개인의 자아와 계획이 어떻게 조율되지 못하고 침식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여자의 타투와 그 타투에 대한 자기 확신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내 몸은 내 거야"라는 말은 결혼 안에서조차 여성의 몸과 삶에 대한 자기 결정권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억압될 수 있는지에 대한 저항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이는 결혼 제도 내에서 여성의 주체성을 잃지 않고 자신을 지켜나가려는 강한 의지를 상징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중간에 결혼식에 대한 환상이 없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결국 사회적 압력에 굴복하고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이는 상호 가족간의 전통적인 결혼관념이 여전히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두 사람의 개인적 선택이 사회적 기대에 의해 쉽게 무너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여자가 고전문학 속 영웅들은 고아라는 특성을 떠올리며 진정한 용기와 자유를 사회적 고립 속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점을 떠올린 것은 결혼 제도가 어떻게 개인을 구속하는지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자 풍자라 할 수 있다.

 

 

 

그와 비슷한 맥락에서 15번째 손님의 "왜 나는 살살 살아야 하지?"라는 질문은 결혼 후 여성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기대와 제약을 직설적으로 드러낸다. 같은 시험에 붙었음에도 여성이 더 적은 야망을 품고 "살살" 살아가야 한다는 압박은 결혼이 여성에게 요구하는 불합리한 역할을 폭로하고 있다.
마지막 인용에서 "나는 전혀 가부장이 아니잖아"라는 말은 남성이 가부장제의 일부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성은 결혼 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사회적 불평등을 경험하고 그 차이가 쌓여 커다란 격차로 이어진다. 이는 남성과 여성이 결혼을 통해 경험하는 사회적 현실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25번째 손님의 이야기는 누군가는 사이다라고 생각했을 수 있겠다. 결혼 생활 속에서 발생하는 권력 관계와 역할 강요에 대한 갈등을 보여준다. 남편이 아내에게 요리를 배우라고 요구하는 것은 가정 내에서 전통적으로 여성이 해야 한다고 여겨지는 역할을 강요하는 대표적인 예시다. '한식부터 배워라', '밑반찬부터 하라'는 식의 지시는 여성에게 특정한 집안일을 맡기고 그것이 마치 당연한 것처럼 요구하는 가부장적 관습을 드러낸다. 마지막에 여자가 "다시 말해봐, 씨발새끼야"라고 말하며 폭발한 장면은 단순한 폭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결혼 생활에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무언의 압박에 대한 강한 저항을 표현한 것이다. 이는 단순히 남편의 말에 대한 분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으며 가부장적인 결혼 제도와 그 안에서 여성이 느끼는 억압에 대한 상징적인 반발로 읽을 수 있다.

 

 

 

사실 내 생각에 이 소설은 결혼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작은 갈등들이 사실은 더 큰 사회적 불평등과 맞닿아 있음을 보여준다. 여성이 결혼 안에서 자신의 주체성을 지키기 위해 투쟁해야만 하는 상황을 비판적으로 묘사하며 이러한 권력 구조 속에서 개인의 감정이 어떻게 파괴되고 소모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아마도 가벼운 내용의 긍정적인 내용들이 없었다면 너무도 편파적이게 느껴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간에 반짝 나타나는 타코야끼 댄스 커플은 아주 귀여웠다. 그래서 나도 은근하게 한번 춰보기도했다.)
결론적으로 이 소설은 화려함과 축복을 상징하는 결혼, 웨딩드레스에 대한 파롤의 프레임과 그 속에 숨겨진 사회적 불평등을 파헤치며 우리가 결혼을 단순히 개인의 선택으로만 바라볼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나에게 있어서는 결혼 제도가 얼마나 깊이 사회적 구조에 얽혀 있는지를 생각해보게 했고 그 안에서 개인의 자아가 어떻게 억압되거나 구속될 수 있는지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시각을 주는 내용들이었다.
당신도 이 글을 읽었다면 여전히 웨딩드레스에 대한 파롤 프레임이 유효한가?

 

 

 

 

 

보늬

 

 

 

당신은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여 본 적이 있는가?

당장 나에게 닥칠 어떤 구체적인 불행이나, 심지어는 내가 제 명까지 못살고 죽는다던가 말이다.
실제로 뉴스를 보면 우리는 그런 일들을 많이 간접경험하고 있다. 우리는 죽음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것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다가올지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이 죽음을 더욱 두려운 존재로 만든다.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방영했던 부산 돌려차기 사건은 묻지마 폭행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공포와 경각심을 일깨웠다.

 

 



 

 

 

우리가 이런 일을 당하지 않을거라고 보장할 수 있는가? 그 중에서도 돌연사라는 것은 예기치 못한 순간에 찾아오며 남겨진 이들에게 깊은 충격과 상실감을 안겨준다. 그와 동시에 그 사건을 겪게 될 본인에게도 죽음을 미처 준비하기도 전에 삶을 마감해야 한다는 일은 안타까운 일이다. 나는 이미 이전에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간다" 책을 통해 나는 어떠한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 나의 죽음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한 경험이 있다. 가족들에게 미리 자신의 장례가 어떻게 이루어졌으면 좋겠는지, 재산이나 금전적인 것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그 외에 정리해야 할 인간관계에서 아무말도 하지 못한채 세상속에서 잊히고 사라져가야하는 것은 마땅하지 못하다. 그런 비극 앞에서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어느새 차츰차츰 잦아드는 슬픔을 받아들이고 묵묵히 삶을 살아갈지 모른다. 또 누군가는 그 충격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 한다. 돌연사.net은 바로 그런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에서 출발했다.

 

 

 

우선, 이 소설의 내용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사이트가 돌연사한 사람들을 수집하고 그들의 삶을 선으로 연결하려는 시도는 개인의 죽음이 고립된 사건이 아닌, 사회적, 관계적 맥락에서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각자의 삶이 그물처럼 엮여 있는 세상 속에서 그들은 죽음을 통해 살아있는 사람들 사이의 보이지 않는 연결 고리를 확인하려 하지만 내가보기엔 사실 이 부분은 큰 의미가 없어보였다. 그들이 정말로 찾고 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잠시 고민에 잠시 잠겼고 책을 다 읽고도 그 부분을 되짚어 다시 읽어보았다. 내가 생각한 이 주인공들의 사이트 구축은 궁극적으로 죽음의 이유를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 비극 속에서 남겨진 유족으로서의 의미 그리고 그들에게 남겨진 삶의 무게를 마주하는 것이 아닐까? 어떤 의미를 찾으려 시도했던 것은 그저 표면적인, 어쩌면 형식적인 이유를 갖다댄 것일 뿐...
자, 다시 생각해보자. 규진은 왜 돌연사.net을 만들어서 보윤과 매지에게 선보였을까? 내 생각에 규진은 돌연사라는 그 불안과 공포를 어떤 식으로든 통제하려는 시도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돌연사라는 비극적인 사건을 단순한 하나의 데이터로 취급하며 이를 사람들과 연결된 지점으로 분석하려 하고, 사용자로부터 업로드된 데이터에 대해 검열한다. 이는 감정적으로는 냉정해 보일 수 있지만(그들은 실제로 엄격하게 운영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데이터를 삭제할지 애매한 사례에서는 보류라는 선택을 한다.) 한편으로는 죽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노력처럼 보이기도 한다.

 

 

 

중간에서 사이트가 확장되며 '돌연사의 경계'에 대한 논의가 등장하는 부분은 서두에서도 말했지만 예전에 읽었던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간다'를 떠올리게 한다. 과연 무엇이 돌연사이고, 무엇이 아닌가에 대한 기준을 명확히 정하는 일이 어렵다는 사실은 우리가 사회 속에서 얼마나 많은 '보이지 않는 죽음'을 간과하고 있는지를 상기시킨다. 예를 들어, 과로로 인한 죽음은 갑작스러운 사고가 아닌 서서히 다가온 비극이지만 그 결과는 마찬가지로 예측할 수 없는 종말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렇다면 과로사 역시 돌연사의 범주에 포함되어야 할까? 이 소설을 읽었다면.. 아마도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이 질문은 우리 사회가 과연 죽음을 어떻게 정의하고 어떤 죽음을 더욱 심각하게 받아들이는지에 대한 성찰을 요구한다.
아무쪼록 냉정하게 운영하려 했으나, 보윤과 규진, 매지는 원래의 의도와는 달리 유족들이 사이트에서 위로를 얻어간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돌연사로 인해 가족을 잃은 유족들에게는 상실의 고통 속에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겪은 슬픔을 나누며 위로받는 과정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 사이트는 단순한 정보 제공의 역할을 넘어 상실을 공유하고 함께 견디는 공간으로 변모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고통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위로를 받고 죽음의 무게를 혼자 감당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안도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이 소설에서 직면하는 사회적 문제는 단지 돌연사 그 자체가 아니다. 돌연사라는 비극은 우리의 사회가 법의 사각지대에 위치한 돌연사, 보호받지 못한 돌연사, 각종 산업재해와 어쩌면 막을 수도 있었던 수 많은 사고들을 얼마나 외면해왔는지를 상기시킨다. 과로사, 극단적인 선택, 과도한 사회적 압박 속에서 서서히 무너져가는 이들은 결국 돌연사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고 이 소설에서는 이야기하고 있었다.
결국... 그렇다면 돌연사는 단지 예측할 수 없는 죽음이 아니라, 사회적 문제로부터 비롯된 죽음이라는 더 넓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나는 마지막 부분의 "하다가 죽지 않는 것을 하고 싶다." 이 말은 단순히 '살아남는 것'을 넘어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하며 삶을 이어가고 싶다는 욕망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우리는 그 속에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이루고자 한다.
보윤과 규진, 매지는 어쩌면 죽음을 기록하고 추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제는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삶의 가치를 되돌아보게 하고 그들이 서로의 고통을 공유하며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하다가 죽지 않는거, 하고 싶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모두 그 두 일에 대해, 혹은 둘의 교집합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게 분명했다.

 

 

 

 

해피 쿠키 이어

 

 

 

내 생각에 정세랑 작가의 이상형이 있다면 해피 쿠키 이어의 남자주인공 이스마일이 아닐까? 그래서 자신이 바라는 바람직한 남성상을 옥상에서 만나요에 수록된 소설 중 해피 쿠키 이어의 유일한 1인칭 남자주인공으로 만들었을지 모른다. 판타지적(?) 요소로 특이점이 있다면 바로 과자귀다. 나는 사고로 잘려나간 이스마일의 귀에 자라나는 과자는 단순한 판타지적 설정을 넘어 사랑을 나누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 이스마일은 자신의 옆집 여자친구와 사랑을 나누며 그 과자 귀마저 아낌없이 내어준다. 과자 귀를 뜯어먹어도 그는 불평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이 야윈 그녀를 조금이라도 살찌게 하고 건강하게 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내어줄 준비가 되어있다. 놀랍게도 이 과자 귀는 매번 다른 종류로 자라난다. 과자귀가 매번 다른 과자로 달라지듯 이스마일의 사랑 또한 단조롭지 않다. 마치 해리포터의 강낭콩 젤리처럼 그때그때 다르게 나타나는 귀는 여자친구에게 작은 설렘을 준다. 이스마일은 그런 존재처럼 느껴졌다.

 

 

 

마지막 장면에서 이스마일의 과자 귀는 결국 더이상 자라지 않는다. 여자친구와 된장찌개를 함께 먹고 이별하는 순간... 그의 임무가 끝났기 때문이다. 이스마일은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그녀를 사랑했고 더이상 귀가 자라지 않는 것은 그가 그녀를 위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주었다는 걸 표현한다. 이스마일은 그저 그녀가 아프지 않기를 바랐고 그녀의 곁에서 조용히 사랑을 나눴다. 그가 한국에서 살아가는 아랍인이라는 설정은 한국 사회에서 소외된 계층을 은유하는 듯 보이지만, 이스마일의 진정성 있는 사랑에는 그러한 사회적 위치나 배경이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이스마일은 이 소설집에 등장하는 여느 남성 인물들과는 유난히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는 전혀 폭력적이지 않으며 오일 프린스, 명예살인, 향후 10년 중동 정세, 민주국가, 빨갱이, 독도 등등에 대한 가치, 혹자는 어떠한 프레임에 대해서도 편향이 없다.

 

 

 

이 부분에 대해 구체적으로 내 해설을 정리해보자면 이스마일은 세상의 복잡한 문제나 논쟁에 휘말리기보다는 눈앞에 있는 사람을 이해하고 그들의 필요에 응답하는 데 집중한다. 그의 관심사는 정치적이거나 이념적인 것이 아니라 여자친구가 아프지 않도록 혹은 그녀가 편안하고 행복하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그가 가진 사랑은 순수하고 무언가를 기대하지 않으며 오직 상대방의 행복을 위한 행동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이스마일의 태도는 사회에서 흔히들 주변에서도 볼 수 있는 강한 의견 표출이나 권력 투쟁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갈등을 피하고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방법을 선택한다. 그의 비폭력적인 태도는 그의 서툰 한국어 실력, 혹자는 외국인 여부를 떠나 얼마나 성숙하고 온화한 사람인지를 보여준다. 또한 그는 정치적, 사회적 이슈들에 대해서도 편견 없이 받아들이며 특정 프레임이나 이념에 구애받지 않고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이런 그에 대해... 나는 단순히 소설 속 남성 주인공이 아니라, 정세랑 작가가 이상적으로 그린 '이해하고 배려하는 인간'의 모습임을 드러낸다고 느꼈다.

 

 

 

그는 "콩 알레르기"가 있는 옆집 여자를 위해 요리를 한다. 그는 그것이 오바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나는 정작 그것이 오바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 소설에서 여자가 콩 알레르기가 있다는 설정은 단순한 신체적 제약을 넘어 이스마일과 그녀 사이의 관계를 심화시키는 중요한 촉매로 작용한다. 콩 알레르기는 그녀가 겪고 있는 내적인 고통을 상징한다. 즉 이스마일이 그녀의 삶에 얼마나 깊이 들어가 그녀를 배려하고 이해하려 하는지를 보여주려는 장치이다. 이스마일은 그녀의 알레르기를 단순히 불편함으로 치부하지 않고 그것을 극복하는 데 힘쓰며 그녀를 위해 요리까지 하며 신경을 쓴다.

 

 

 

특히 옆집 여자(여자친구가 되기 전)가 아파하는 것을 걱정하며, 포스트잇으로 안전하게 밥을 먹자고 제안하는 장면은 이스마일의 세심한 배려와 따뜻함을 잘 보여준다. (아마도 옆집 여자가 기침한다는 이유로 초인종 누르며 밥같이 먹자고 하면 옆집 여자가 아니라 경찰이 긴급출동을 했을 수도 있다.) 이 장면은 단순한 식사 제안이 아니라 여자의 고통을 완벽히 이해하고 그녀의 안전과 편안함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그의 마음이 담겨있다. (포스트잇은 꽤 괜찮은 수단인 것 같다...) 그는 콩 알레르기를 가진 여자에게 조금도 무리한 기대를 하지 않고 오히려 그녀가 안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며 자신을 나누려 한다. 그의 포스트잇 제안은 단순하지만 그 속에 담긴 진심은 매우 깊다. 이 행동이야말로 이스마일의 무해함과 배려가 가장 잘 드러나는 순간이다. 결국 이러한 순수한 마음과 무해함이 여자를 감동시키고 그들을 이어주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스마일은 여자에게 어떤 강요나 압박을 하지 않으며 그저 그녀가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조용히 옆에 있어준다. 이 점이 바로 여자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며 사랑이라는 관계는 누가 더 많은 것을 요구하거나 주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진심으로 상대방을 배려하고 이해하는가에 달려 있음을 이스마일의 행동을 통해 깨달을 수 있다. 이 소설에서 여자가 이스마일의 사랑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그의 순수한 마음과 무해함 덕분이었다. 그는 무리하게 그녀를 쟁취하려고 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의 마음을 조심스럽게 표현하면서 그녀가 안심하고 다가올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는 단순한 로맨스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이스마일이 보여준 사랑은 상대방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함께 걸어가는 과정이었고 그런 태도야말로 현대인으로서의 진정하고 올바른 형태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그녀가 회사의 비리를 고발하여 사회생활에서 고통을 겪을 때였다. 그는 단순히 그녀를 위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녀의 선택을 존중하며 옆에서 묵묵히 함께한다. 그녀가 고발로 인해 받는 사회적 압박과 불이익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지만 이스마일은 이를 개인적인 문제로만 보지 않고 그녀가 옳다고 믿는 선택을 지지하며 그녀의 신념과 가치를 받아들인다. 그는 자신의 의견을 강요하거나 그녀를 대신해 나서지 않는다. 대신 그녀가 올바르다고 믿는 길을 가는 동안 변함없는 응원을 보내며 그녀가 힘들어할 때 그녀의 편이 되어 준다. 이는 이스마일의 사랑이 단순히 '곁에 있음'의 의미를 넘어, 어려운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는 지지를 의미한다. 그가 그녀의 선택을 지지하며 곁에서 묵묵히 응원하는 모습은 이스마일이 깊은 배려와 이해심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아마 이때 이스마일이 여자친구에게 "아니 잘 다니다가 왜그랬어? 얼른 잘못했다고 사과하자 자기야~", "안그래도 월세 내야하는데... 그건 어떡하려고?"라는 식의 전개가 펼쳐졌다면 마지막 된장찌개와 한식같았던 키스는 없었을 것이다. 이스마일은 그녀에게 무언가를 강요하거나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가 독립적으로 자신의 신념을 실현할 수 있도록 옆에서 따뜻하게 바라봐주며 그녀의 아픔과 어려움을 공유하려 한다. 이는 이스마일의 사랑이 타인의 행복과 자율성을 존중하는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의 이런 지지는 단순히 연인의 역할을 넘어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두 사람이 어떻게 서로를 이해하고 도울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스마일은 여자친구가 겪는 사회적 문제와 불의를 외면하지 않고 그 속에서 그녀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그저 조용히 응원할 뿐이다.

 

 

 

일이 잘되려면 모든 게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잘되듯이, 일이 잘못되려 해도 마찬가지로 맞물려 잘못된다. 세단계에 걸쳐 사고가 일어났다. 사악한 손이 설계한 도미노 같았다.

 

 

 

덩어리가 되고 싶지 않았다. 실제로는 덩어리래도. 나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독후감을 마치며

이 소설은 사실 현실적인 결혼이야기가 중심인 책이다. 나는 그 속에서 겪는 여성들의 고충을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볼 수 있었다. 물론, 그런 무거운 주제의 이야기도 중요하지만, 솔직히 말해 나에게 더 마음에 와닿았던 건 이 책에서만 느껴질 수 있는 따뜻한 분위기, 인물들의 소소한 대화에서 느껴지는 심리적 감정선들... 그리고 장마다 나오는 귀여운 표지 삽화들이었다. 읽는 내내 내 주변의 소중한 친구들, 그리고 내 마음속의 그 어떤 누군가가 떠올랐고 덕분에 미소 지으며 기분 좋게 책장을 넘겼다.

 

 

 

그렇다면 우리는 결혼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봐야 할까? 꼭 거창한 답을 찾기보다는 소소한 일상 속에서 서로를 아끼고 배려하는 마음 그리고 그 속에서 찾아오는 소소한 행복이 더 소중한 게 아닐까 싶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문득 내가 예전에 보았던 떠오른 짧은 영상하나가 떠올랐다. 아마 정세랑 작가님도 공감을 많이 하실 것 같은 영상이다. 어쩌면 "그래, 옥상에서 만나요로 이 말을 하고 싶었어!" 라고 하실지도 모른다.
결혼에 대해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할지..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도 이 영상을 보며 정말 중요한건 무엇일까에 대해 다시금 되새겨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그럼 긴 독후감을 따뜻한 마음으로 마무리 지어본다. :)

 

 

 

 

 

 

우린 어째서 이렇게 슬프도록 스트레이트일까. 이렇지 않았다면 남자친구들, 하고 복수로 말해야하는 극적이고 피곤한 인생을 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아무도 너만큼 파츠가 맞지 않아, 내가 말했을 때 너는 다시 확인했어. 피 에이 알 티 에스, 그 파츠? 하고 물었지. 자주 쓰는 표현인데 그렇게 되물으니 작고 견고한 부속품이 된 것 같았어.
조금 모양이 다른, 하지만 나란히 들어가는 파츠.

 

 

 

소환되어 온 오바가 나 대신 싸웠어. 건성으로 싸웠는데도 아빠를 설득해냈어.
오빠의 결정적인 한마디는 '남들이 흉본다'였지. 어릴 때 내내 때리고 괴롭혔던 걸 그 설득으로 갚았다고 생각해.

 

 

 

그 사람에겐 그렇지 않았나봐. 그 점잖던 사람이 웬 인터넷 싸이트에 내 이름과 얼굴을 다 공개하며 자기 집이 가난하다고 홀어머니를 대놓고 무시하면서 도망간 여자라고 글을 올리기 시작했거든. 가난하기로 치면 나도 가난하고 사실 내가 도망친 건 가난보다 좀더 어둡게 끈적이는 어떤 것으로부터였는데 나느 무슨 녀라고 유행하는 비속어들로 요약되어 버렸어. 그 사람은 새벽에 전화해 돌아와달라고 울면서도 매일매일 글을 올리더라. 욕설이 섞인 게시물과 간절한 전화 사이의 간극이 더 소름 끼쳤어.

 

 

 

-효진 중-

 

 

 

"솔직히 역사는 그 순간을 살았던 그 사람들만의 것이라고 생각해. 그러니 전근대사는 무기로 쓰면 안되고, 근현대사에 있어선 더 철저하게 책임을 져야겠지. 민족주의자 말고 각자 나라에서 좋은 시민들이 되면 지금과는 다를거야. 어디 가서 이렇게 솔직히 말하기는 사실 어렵지만, 요즘 애들은 스스로 무장해제 하느냐고 한마디 들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네 말은 그거잖아. 우리가 언젠가 뿔뿔이 돌아가고 '알다시피'에 다른 멤버들이 들어온다 해도 지금 이 순간은 우리들 것이라서 아무도 가져가지 못한다는 거. 다른 사람에겐 지분이 없다는 거. 효짱 얘기가 그 얘기 아니야?"

 

 

 

-알다시피, 은열 중-

 

 

 

"결혼해서 막 좋은 건 아닌데... 어쨌든 집에서 훌라후프는 돌아가."
"훌라후프요?"
"결혼 전에 어릴 때 생각나서 훌라후프를 샀다가, 나 막 울었잖아. 원룸에서 아무리 자리를 옮겨봐도 훌라후프가 안 돌아가는 거야. 싸구려 옷걸이니 부직포 서랍이니 온통 걸려서.... 이러니저러니 해도 둘이 합쳐 살면 집에서 훌라후프 정도는 돌아가니까, 숨이 쉬어지더라고."

 

 

 

너라면 이해할 수 있을 거야. 모든 사랑 이야기는 사실 정망에 관한 이야기라는 걸. 그러니 부디 발견해줘. 나와 내 언니들의 이야기를. 너의 문명적 사랑을. 그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줄 기이한 수단을.

 

 

 

- 옥상에서 만나요 중 -

 

 

 

지원이 말했을 때 친구들은 뜨악해하는 눈치였다. 여섯명 중에 아이가 있는 사람은 지원과 경윤뿐이었는데, 경윤의 딸은 지원이 보기에 다섯명이라도 키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비교하지 않으려 해도 비교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의 삶은 근사하고 자신만 지옥에 버려진 듯한 날들이 이어졌고, 짓무른 마음을 들키지 애썼지만 종종 들켰다. 그럴 때 친구들이 잠깐 짓는 아연한 표정에 지원은 더욱 비참해지고 말았다.

 

 

 

"아들 둘이라 그런 것 같아. 손자들의 랭크가 달이나 며느리 랭크보다 높은 거야, 어른들 마음엔."

 

 

 

- 이혼 세일 중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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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동료가 읽고 추천해준 책이었다. 책 뒷면 설명란에 애정 없는 결혼 속에서 '낡은 폐선'처럼 살아가는 이선 프롬이라는 문구를 읽고 호기심에 읽게 되었다. 그동안 읽기 편안한 책만 읽어서 그런지 책 초반에는 특유의 번역체로 읽기가 다소 불편했으나 곧 이야기 속 인물들의 감정선에 빠져들게 되었다.

 

책 소개 및 요약

나의 해설에 앞서 작가와 이 책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자면, 이 책의 작가 에디스 워튼(Edith Wharton)은 최초의 여성 퓰리처상 수상 작가이기도 하다.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생각하면 여성 작가가 귀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영어로 작가를 뜻하는 writter라는 단어를 보면 남성형만 있고 여성형이 없다. 그 당시 시대적 배경에 따르면 글쓰기는 으레 남성의 일이지 여성이 하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 문화권에서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기에 글 쓰는 직업을 가진 여성을 가리킬 때는 굳이 '여류'라는 표를 달아 남성 작가와 구분 짓는다. 언어학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유표화라고 한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불과 몇십 년 전만 하더라도 전문직에 속하는 직업치고 여성이나 여류라고 유표화하지 않는 직업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이런 의미에서 워튼 작가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의 미국 여성 작가들 중 순수 문학의 길을 걸은 최초의 작가라 할 수 있다.

 

 

이선 프롬은 미국 작가 에디스 워튼(Edith Wharton)이 1911년에 발표한 소설로 사랑과 비극 그리고 인간의 내면적 갈등을 서정적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주요 등장인물로는 이선, 그의 아내 지나, 그리고 이 집에서 가정부로 일을 하는 지나의 사촌 매티이다. 워튼은 이 소설을 통해 한계 상황에 처한 인간의 감정과 그로 인해 파생되는 복잡한 심리적 변화를 섬세하게 그려냈다. 이선 프롬은 작고 황량한 마을에서 살아가는 농부로 자신의 꿈과 열망을 억누르며 살아가는 인물이다. 워튼은 이선을 통해 당시 사회의 제약과 운명에 갇힌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며 그가 처한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갈등을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선의 이야기는 사랑에 대한 열망과 이를 이루지 못하는 좌절이 뒤섞인 비극적 운명으로 그의 내면은 마치 얼어붙은 뉴잉글랜드의 겨울처럼 차갑고 고립되어 있다. 소설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워튼의 묘사 기법이다. 그녀는 뉴잉글랜드의 혹독한 겨울 풍경을 이선의 내적 갈등과 고립감을 반영하는 상징으로 사용한다. 눈 덮인 들판, 얼어붙은 나무, 차가운 바람은 이선이 느끼는 정서적 추위를 극적으로 부각시키며 독자는 그를 둘러싼 환경이 그의 운명을 더욱 굳어지게 만드는 요소임을 느끼게 된다. 워튼은 이러한 자연 묘사를 통해 감정을 형상화하며 이선이 처한 비극을 더욱 강렬하게 전달한다.

 

 

이선과 매티의 관계는 소설 속에서의 애틋함과 사랑에 대한 간절함이 독자들의 마음에까지 스며들도록 한다. 매티는 이선이 꿈꾸던 자유와 사랑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녀와 함께 있을 때 이선은 마치 얼어붙었던 마음이 녹아내리는 듯한 순간을 경험한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는 금지된 사랑이다. 이는 그들의 운명을 더욱 비극적으로 만들며, 독자로 하여금 그들의 사랑을 안타까워하면서도, 필연적인 결말에 대해 예감하게 만든다. 결국, 이선 프롬은 인간의 욕망과 도덕적 책임, 그리고 운명 사이의 충돌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워튼은 사랑과 희생, 그리고 그로 인한 고통을 담담하면서도 서정적인 문체로 그려내며, 독자들에게 감정의 울림을 전달한다. 이선이 겪는 고통은 개인의 불행을 넘어, 모든 인간이 한 번쯤 경험하는 삶의 비극적 측면을 상기시킨다. 그가 처한 상황은 나로 하여금 삶의 무거운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갈등하는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이렇듯, 이선 프롬은 단순한 비극을 넘어선 인간의 내면 탐구를 서정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한계 상황에 처한 인간이 어떻게 그 안에서 살아가고 또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고찰하게 한다.

 

 

데니스 이디에게 질투를 느끼는 이선

교회 청년부 축제에서 춤을 추는 매티와 데니스 이디. 이들의 관계는 소설 이선 프롬에서 중요한 갈등 요소로 작용한다. 데니스 이디는 마을의 부유한 청년으로, 이선의 아내 지나의 사촌인 매티 실버에게 관심을 보인다. 데니스는 젊고 활기차며, 외향적인 성격으로 매티에게 매료되어 그녀에게 적극적으로 호의를 베푼다. 그의 부유함과 매티를 향한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구애는 이선에게 깊은 불안과 질투를 유발한다. 소설 속에서 나타나는 이선의 감성선을 나까지 긴장하게 만들었다.

 

 

이선은 매티에게 연정을 품고 있지만, 지나와의 결혼 생활로 인해 그녀에게 다가갈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매티는 이선에게 있어서 현실의 고통 속에서 유일하게 따뜻함을 느끼게 해주는 존재다. 이때 이선이 느끼는 감정은 사랑이라기보다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강렬한 갈망으로 표현될 수 있다. 그런 매티에게 데니스가 다가가는 모습을 보면서 이선은 불안과 질투로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선이 데니스와 매티 사이에서 느끼는 질투는 이선의 내면 갈등을 더욱 부각시킨다. 데니스는 이선이 감히 표현하지 못하는 자유롭고 대담한 젊음을 상징한다. 매티와 데니스가 함께 있는 장면을 목격할 때마다 이선은 자신이 이룰 수 없는 꿈과 현실의 차이를 더 뼈저리게 느낀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그가 매티에 대한 감정이 더욱 불타오르도록 하는 촉매 역할을 하게 되고 이선이 매티에게 더욱 적극적으로 이성호감을 표현하도록 만든다.

 

 

이선의 감정 변화

이선 프롬에서 이선이 매티에 대한 감정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미묘하게 변화한다. 처음에 이선은 매티를 단순히 지나의 병간호를 돕는 존재로 여겼으나 점차 그녀에 대한 연정을 품게 된다. 매티는 이선의 무미건조한 삶 속에서 활력을 불어넣는 존재로 자리 잡는다. 그러나 이 감정은 애초에 금지된 사랑이라는 한계 속에서 피어나는 만큼 이선은 매티를 향한 마음을 억누르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감정은 점점 더 깊어지고 복잡해진다. 이선의 감정선은 매티와 함께하는 작은 순간들 속에서 서서히 절정에 이른다. 두 사람이 함께 눈 속을 걸으며 따뜻한 대화를 나누거나 매티가 그의 집에서 가사일을 도울 때마다 이선의 마음은 점점 더 그녀에게 끌린다. 끝내는 지나가 병원에 가기 위해 하루가 없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게 될 정도였으니까.(지나가 없으면 매티와 단 둘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므로) 매티의 호감까지 확인한 이선은 더욱 불타오르게 되고 지나를 버리고 서부로 매티와 도망치는 극단적인 계획까지 구상하게 된다.(결말을 본다면, 차라리 그 계획을 실행하는게 나았을 것이다.) 매티의 사소한 행동이나 말투 하나하나가 이선에게는 무미건조한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작은 빛이 되었으며 그녀와의 일상적인 교감이 그에게는 큰 의미를 가지게 된다. 소설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는 이선과 매티가 함께 썰매를 타며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순간이다. 이들은 썰매를 타고 눈 덮인 언덕을 내려가며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지만, 그들의 마지막 썰매 타기는 비극적인 결말을 향해 나아가고 만다. 이 장면에서 두 사람의 대화는 소박하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깊고 애절하다.

 

 

에필로그를 읽고

에필로그에서 화자가 이선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는 나이 들어버린 매티와 지나의 모습을 발견하고 충격을 받는다. 젊고 생기발랄했던 매티는 이제 지나의 옛 모습처럼 병들고 쓸쓸한 상태로, 지나의 병간호를 받고 있다. 이 순간 화자는 그들의 젊음과 삶의 가능성이 모두 사라지고 서로에게 얽매여버린 삶을 목격하게 된다. 이선의 집 안에는 고립감과 좌절 그리고 시간의 무게가 짓누르고 있으며, 화자는 이들이 처한 상황을 보며 무거운 감정을 느낀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이선과 매티가 함께 목숨을 끊으려는 시도는 실패했고, 원래 아팠던 지나가 불구가 되어버린 메티를 돌보고있고 이선 또한 다리에 큰 부상을 입은 이유를 깨닫고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작가 에디스 워튼이 이 장면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인간이 자신의 욕망과 꿈을 억누르고 살아갈 때 시간이 흘러 어떤 비극적 결과에 직면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선과 매티는 결국 자신들의 사랑을 이루지 못한 채, 남은 인생을 고립과 후회의 공간 속에서 보내게 된다. 워튼은 이 비극적 결말을 통해 억눌린 욕망과 선택하지 못한 삶이 얼마나 무겁고 파괴적인지 경고하고 있다. 화자는 이 집 안에서 이들의 희망이 산산조각 난 모습을 마주하고, 이선의 선택과 그로 인해 잃어버린 가능성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가 떠나는 순간, 독자들은 이들의 삶이 이제 회복 불가능한 상태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며, 이는 소설이 끝나도 오래도록 여운을 남긴다.

 

 

이 결말은 단순히 이선, 매티, 지나의 비극을 넘어, 우리의 삶에서 선택의 중요성과 그 결과에 대한 경고를 담고 있다. 워튼은 우리에게 한 번의 선택이 얼마나 오랫동안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그리고 억눌린 감정과 욕망이 어떻게 인간을 갉아먹는지 보여주고 있다. 결국, 이선의 비극은 단순히 한 남자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억압된 욕망이 삶을 파괴할 수 있다는 인간의 삶에 대한 보편적인 진실을 이야기한다.

 

 

도덕에 따른 욕망의 구속

옮긴이 김옥동 작가님은 이 책이 출간된 지 백 년이 훌쩍 넘었음을 언급하며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이 작품이 어떤 의미를 줄 수 있을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인간의 욕망과, 도덕, 젠더와 결혼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을 윤리나 도덕의 이름으로 억압해야 할까? 아니면 욕망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충족시키는 것이 건강한 삶일까? 옮긴이 김옥동 작가가 던진 질문처럼 이선 프롬에서 다루어진 인간의 욕망, 도덕, 젠더, 결혼은 여전히 현대 사회에서도 유효한 주제들이다. 그러나 현대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과거와 달리 이러한 주제에 대한 접근 방식이 상당히 진보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과거의 이선과 매티가 도덕적 제약과 사회적 구조 속에서 그들의 사랑을 억누를 수밖에 없었던 반면, 오늘날의 사회는 보다 개인의 욕망과 자율성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변화했다. 이러한 변화는 이선과 매티의 이야기를 다른 방식으로 상상하게 만든다.

 

 

현대 사회에서는 개인의 행복과 자율이 중요한 가치로 여겨지며, 결혼 역시 선택 가능한 관계 중 하나일 뿐 절대적인 구속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선이 만약 현대에 살았다면, 그는 매티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좀 더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매티 또한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있는 더 많은 자유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이들의 관계는 비극적이기보다는 오히려 두 사람 모두에게 성장과 자유를 가져다주는 긍정적인 경험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도망칠 자금 50달러가 없어서 좌절한다던가, 그로인해 썰매를 나무에 들이받고 서로의 삶을 끝내기를 바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새로운 결말을 상상해보자면 이선은 매티와 함께 자신들의 욕망을 억누르지 않고 과감히 새로운 삶을 선택했을 것이다. 매티와 이선은 서로를 통해 억압된 삶에서 벗어나 새로운 미래를 꿈꾸며 서부로 마을을 떠난다. 매티는 그녀의 자유로움을 이선에게 전파하며 그를 고립된 농장에서 벗어나게 했을 것이다. 그들이 떠나는 길은 이제 더 이상 눈 덮인 황량한 스탁필드의 들판이 아닌 새로운 가능성과 기회로 가득 찬 길로 묘사될 수 있다. 이선의 마음 속 얼어붙었던 감정들은 따뜻한 봄날처럼 녹아내리고 그들의 썰매는 비극의 눈길을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향한 환희의 질주가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현대인이 과거에 비해 도덕이라는 애매모호할 수 있고 주관적인 영역에 대해 얼마나 진보했는지를 깨닫게 된다. 오늘날 우리는 사랑에 있어서 도덕적, 사회적 억압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개인의 자율성과 행복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다. 과거의 이선과 매티가 불가능했던 선택을 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며 이들이 그토록 갈망했던 자유와 사랑은 오늘날 더 쉽게 허락된 가치로 인정받고 있다. 이들의 이야기는 이제 더 이상 비극으로 끝나지 않으며 새로운 시작으로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이선과 매티의 사랑이 현대 사회에서 이루어졌다면 그들은 도덕적 압박과 사회적 구조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충실히 따르며 행복을 추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인간의 욕망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건강하게 드러내고 충족시키는 것이 오늘날의 삶에서는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았다는 점에서 현대인은 확실히 과거보다 더 큰 자유를 누리며, 더 나은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삼각관계

지나는 질병으로 인해 매티에게 의지하면서도 그녀를 잠재적 경쟁자로 경계하는 이중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사회적 관습과 도덕적 규범에 따라 지나는 이선과 매티의 관계를 명확하게 의심했으나 그것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거나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제한적이었다. 소설 속 지나는 자신의 불안감과 의심을 통해 이선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하고 궁극적으로 매티를 내쫓으려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이 사건이 현대에 이르렀다면 지나는 전통적인 결혼의 틀에서 벗어나 더 복잡하고 다양한 감정과 선택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을 것이다. 현대의 지나는 이선과 매티의 관계를 좀 더 명확하게 직면할 수 있는 도구와 사회적 환경을 갖추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현대의 지나가 이선과 매티의 관계를 알게 되었을 때, 단순히 경쟁자로서 매티를 몰아내려는 감정보다 자신이 결혼 생활에서 원하는 것 그리고 상대방의 욕망에 대해 더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될 가능성이 크다.

 

 

현대의 지나라면 아마도 결혼의 의미와 자신의 행복을 더 깊이 고민하고, 때로는 결혼이 필연적인 구속이 아니라 선택 가능한 관계임을 인지했을 것이다. 만약 그녀가 이선과의 관계가 회복 불가능하다고 느꼈다면, 그 관계를 유지하는 대신, 자신의 삶을 재정비하고 이선과 갈라서거나, 서로에게 더 나은 방향을 모색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런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지나 또한 자신의 욕망과 정체성을 재발견하고 더 건강한 선택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소설 속 지나는 자신의 불안과 의심을 무력하게 억누르고 이선을 질타하거나 매티를 내보내는 선택을 함으로써 권위를 행사하지만, 그 이면에는 무력감이 자리 잡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상황을 개선할 방법이 많지 않았고 사회적 관습에 얽매여 있었다. 반면, 현대의 지나는 자신의 욕망을 더 당당히 표현하고 관계에 대해 보다 실용적이고 독립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자율성을 가졌을 것이다. 그녀는 이선에게 정직하게 감정을 드러내고 관계에서 자신이 바라는 바를 명확히 제시하거나, 이선을 떠나는 선택으로 스스로의 삶을 다시 주도했을 것이다.

 

 

이러한 상상을 통해 우리는 어떤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까? 결국, 이선, 매티, 지나 모두 억압된 감정과 갈등 속에서 스스로를 갉아먹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상대방의 욕망에 대해 더 정직해질 수 있는 환경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인간의 욕망과 도덕적 책임이 충돌할 때, 이를 숨기고 억누르기보다, 솔직하게 직면하고, 모든 당사자가 자신을 위한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을 추구해야 한다.

 

 

---

 

 

"맷, 난 손발이 꽁꽁 묵였어.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그가 다시 말을 꺼냈다.
"이선 아저씨, 가끔 제게 편지해 주세요."
"아, 편지가 무슨 소용이 있겠어? 난 손을 뻗어 너를 만지고 싶어. 너를 위해 모든 것을 하고, 또 너를 보살피고 싶단 말이야. 네가 아플 때, 네가 외로울 때 같이 있고 싶어."
"아저씨는 제가 잘 지낼 거라는 생각 말고 다른 생각은 절대 하지 마세요."
"그럼 내가 필요 없다는 말이야? 결혼할 생각인 거지!"
"참, 이선 아저씨도!" 그녀가 소리쳤다.
"맷 어째서 네게 그런 느낌을 받는지 난 잘 모르겠다. 그보다는 네가 차라리 죽는 게 나아!" (p 143)

 

 

"일어나! 어서 일어나라니깐!" 그가 매티를 재촉했다. 하지만 매티는 계쏙해서 "왜 앞에 앉으려는 거예요?" 하고 되풀이 해 말했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네가 나를 안고 있는 걸 느끼고 싶으니까." 그는 더듬거리며 매티를 끌어 일으켰다.
매티는 그의 대답이 만족스러웠거나, 아니면 단호한 그의 목소리에 굴복한 듯 했다. 이선은 몸을 숙이고 손을 더듬어 어둠 속에서 자신보다 앞에 탔던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유리처럼 반들거리는 길을 찾아 그 가장자리 사이에 조심스럽게 썰매를 놓았다. 매티는 이선이 썰매 앞쪽에 다리를 꼬고 자리를 잡는 동안 기다렸다. 그런 다음 재빨리 그의 등뒤에 웅크려 앉아 두 팔로 그를 꼭 잡았다. 목에 닿은 그녀의 숨결에 그는 다시 한번 몸을 떨고 뛰어오르다시피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다른 선택지가 뇌리를 스쳤다. 그려의 말이 옳았다. 이 길이 서로 헤어지는 것보다 나았다. 그는 몸을 뒤로 젖히고 그녀의 입술을 자기 입술로 끌어 당겼다........
  막 두 사람이 출발하는 순간 밤색 말의 울음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귀에 익은 간절한 부름, 그리고 이 소리가 불러오는 혼란스러운 이미지들이 그를 따라 첫번째 코스까지 내려왔다. 반쯤 내려가자 가파른 내리막길이었다가 오르막이었고, 그 다음에는 또다시 현기증 나는 긴 내리막이었다. 이 길을 날개 돋은 듯 달릴 때 스탁필드가 공간의 한 점처럼 한없이 아래로 떨어지며 그들을 멀리 구름 낀 밤하늘 속으로 날아오르는 듯했따. 이때 그 큰 느릅나무가 눈앞에 불쑥 나타나 굽은 길에서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되뇌었다. "우린 할 수 있어. 난 알아, 우리가 할 수 있다는 걸..." (p. 15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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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외계인이 오직 너를 위해 2만 광년을 날아왔다면 그 외계인과 데이트를 할 수 있을까? 머릿속이 어지러워질 거야. 그런데 만약 그 외계인이 전 애인과 똑같이 생겼다고 한다면? 그리고 전 애인의 모든 단점이 싹 사라지고, 그 대신 X보다 훨씬 좋은 성격을 가졌다면 어떨까?
이쯤 되면 마음이 살짝 흔들리지 않을까? 고작 전 애인보다 더 나은, 아니, 아주 완벽한 성격을 가진 존재라니. 게다가 그 존재가 네 곁에 있기 위해 우주 끝에서부터 날아왔다는 걸 생각하면 말이야. 이 소설은 로맨틱한 판타지와 기묘한 과학 소설의 경계선에서 펼쳐지는 이상한 사랑 이야기야. 읽다보면 어느새 현실 감각은 저 멀리 떠나고 너도 모르게 그 외계인에게 마음이 끌려버릴지도 몰라.

 

 

 

세상에 좋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습관처럼 계속 만날 필요는 없어, 멈춰도 돼. 이 사람이 아니다 생각이 들면 언제든 멈추는 거야.

 

 

  한아는 친구 유리가 이렇게 말했을 때 공감했어. 그에 대한 불만이 있을 때마다 이 말을 떠올렸지. 경민에 대한 불만이 마음 한구석에 차곡차곡 쌓여온거야.. 사실 우리는 현실에서도 이런 상황 꽤 흔하지 않아? 친구와 애인이 있는데 나에겐 둘 다 좋은 사람인데도 그 둘이 뭔가 좀 안 맞는 느낌이 들 때 말이야. 친구는 친구대로 애인에 대한 불만이 많고 그런데 네 입장에선 둘 다 나쁜 사람은 아니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애매해지는 그런 상황 말이야.
한아는 가끔 혼자서 이런 상상을 하곤 했을거야. '경민이 조금만 덜 무심했으면...' 혹자는 '가끔이라도 내 말을 좀 더 들어줬으면 좋겠는데...'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에 떠오르면 그때마다 "야 그만 만나, 멈춰도 돼"라는 유리의 말이 속삭이듯 떠올랐을 거야.
아니면 유리의 입장이 되어 본적이 있어? 친구의 애인이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그냥 뭔가 그 커플을 바라보면 많이 어긋나있는 느낌이 드는 거지. 네가 만약 그 상황에 있다면 어떻게 할 거 같아? 나라면... 아마도 유리처럼 솔직하게 말할 거야. "야, 세상에 좋은 사람 정말 많아. 그냥 잠깐 멈추고 다시 생각해보는 건 어때?" 하고 말이지. 물론, 그 말이 상대방에게 쉽게 다가가지는 않겠지. 그래도 누군가는 말해줘야 하지 않을까?
한아도 그런 상황에서 고심했을 거야. 경민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해야 할지 아니면 멈추고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할지 말이야. 우리도 때론 그런 갈림길에 서서 고민하게 되잖아. 그럴 때면 결국 내 마음이 진짜 원하는 게 뭔지를 잘 들여다 볼 필요가 있어.
한아가 유리의 조언을 귀담아듣던 자신의 모습이 자꾸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걸 보면 어쩌면 그녀도 이미 답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멈추고 다시 시작하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니까.

 

 

 

하지만 실루엣만으로도 오래된 남자친구를 알아볼 수 있었고, 달려가서 안길 정도의 애정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경민을 사랑하는 것을 어쩔 수 없는 문제라고, 한아는 그 순간에도 체념하듯 생각했다. 체념이라고 부르는 애정도 있는 것이다.

 

 


하 정말... 한아는 어쩌면 헤어졌을 때 실컷 같이 욕해줬는데 나중가서 다시 사귄다고하는 스타일인 것 같아... (농담이고) 한아는 경민에 대해 불만이 많았지만 오랜만에 만난 경민의 실루엣을 보고 마음이 흔들리고 말았어. 경민이 거기 서 있는 모습만으로도 한아는 자신도 모르게 달려가 안기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되는데, 내생각엔 애정이라는 감정이 묘하게 복잡한 이유 중 하나가 이런 부분 때문인 것 같아. 분명히 경민의 단점은 그녀를 서운하게 하게 만들고 불만스럽게도 만들었지만... 모처럼 다시만난 그 순간만큼은 그런 것들이 다 사라져 버린 것 같았을거야.
그래서 한아는 스스로에게 체념할 수밖에 없었어. '아, 내가 아직도 이 사람을 사랑하고 있구나.' 하고 말이야. 하지만 그 사랑이 예전처럼 열정적이거나 행복한 느낌은 아니었어. 오히려 체념에 가까운 애정이었지. 내 생각에 한아가 말한 체념이란 결국 이 사람의 단점을 다 알면서도 그걸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거야. 그게 꼭 나쁜 건 아니지만 어쩐지 씁쓸한 기분도 들지 않아?
어쩌면 체념도 사랑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 작가는 그걸 말하고 싶었던 걸꺼야. 우리는 누군가를 오랫동안 사랑하다 보면 그 사람의 좋은 점만 보는 게 아니라 단점까지도 다 보게 되잖아? 그리고 그 단점을 받아들이기로 할 때 사랑은 새로운 차원으로 넘어가는 것 같아. 단순한 설렘이나 열정이 아니라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더 깊은 애정으로 말이야. 너무 당연한 소린가?
한아가 느낀 체념이란 그 깊은 애정의 또 다른 이름일지도 몰라. 어쩌면 경민을 향한 사랑이 한아를 힘들게 하면서도 동시에 포기할 수 없는 이유였을 거야. 이게 복잡하고 미묘한 사랑이 가진 특성의 일부 아닐까?

 

 

 

주영 - 세계를 만들 수 없는 사람도 있다.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탁월하고 독창적인 사람들이 만든 세계에 기생할 수밖에 없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똑같이 기여하는 것이 아니다. 거인이 취저어 만든 큰 흐름에 멍한 얼굴로 휩쓸리다가 길지 않은 수명을 다 보내는 게 대개의 인생이란 걸 주영은 어째선지 아주 어린 나이에 깨달았다.


경민 - 넌 같은 자리에 있는 걸 지키고 싶어하는 거잖아. 사람들이 너무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들을, 난 너처럼 저탄소 생활을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

 

 


  주영의 생각과 경민의 생각에 대해 이야기해볼게. 주영은 세상엔 '거인'들이 있고 그들이 만들어낸 큰 흐름에 많은 사람들이 그저 휩쓸려 살아간다고 생각해. 스티브잡스나 일론머스크, 소크라테스를 일컫는 이 거인들은 그들의 재능과 창의력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그 결과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만들어낸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거지. 어린 시절부터 이러한 사실을 깨달은 자신이 그 '거인'이 될 수 있을지 고민했을지도 몰라. 아마도 그 과정에서 많은 상상을 했겠지. 나도 이 거대한 흐름에 기여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저 따라가기만 하는 인생이 될까? 그러다가 결국 어쩌면 그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주는 아티스트에게 끌렸고 자신을 그 흐름에 자연스럽게 태워보고싶은 깊은 내면이 있었을지두 몰라.
주영의 생각이 너무 염세적이라고 생각돼? 근데 우리도 한 번쯤은 그런 생각을 해봤을 거야. 아니 생각보다 많이 할지도 모르지 아주 거대한 꿈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내 분야만큼은, 한국에서는 적어도...등등... 무언가 이루고 싶어하는 건 맞잖아? 우리가 하는 일에서 혹은 우리가 속한 분야에서 작은 물결이라도 만들어내고 싶다는 바람. 하지만 때로는 그 물결조차 일으키기 어려워 보이고 결국 큰 흐름에 휩쓸려 가는 듯한 느낌을 받지. 이러다 보면 나도 어느새 주영처럼 '내가 이 거대한 흐름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더라구.
이런 주영과는 반대로 경민은 한아에게 전혀 다른 메시지를 전해. 한아가 스스로를 진취적이지 않다고 생각할 때 경민은 그녀에게 이렇게 말하지. 세상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고 지나치는 것들 소중함을 잊어버린 것들을 한아가 지키고 있다는 거야. 이 말에 한아는 큰 감동을 받았을 것 같아. 우리가 흔히 무시하는 작은 것들이 사실은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걸 깨달았겠지.
경민의 이 말은 한아에게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가치를 느끼게 했을 거야. 음.. 사실 더 큰 가치라고 표현하기보단 정 반대의 가치라고 느껴서 놀랐을 것 같아. 그 '작은 자리'가 실은 얼마나 중요한지 그것이 세상에 얼마나 소중한 의미를 더하는지 말이야.
그게 뭐가 대단하냐구? 더 들어봐 내 생각에 한아는 이런 생각을 했을지도 몰라. '내가 거대한 흐름을 만드는 거인은 아닐지라도 그 흐름의 중요한 부분을 지키고 있는 거구나.' 한아가 지켜낸 작은 것들이 사실은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면서 그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에 기여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겠지. 좀 더 읽다보면 지렁이에 대해 이야기를 할 건데 그 부분을 읽어봐 그럼 더 이해가 잘 될거야~
주영의 깨달음과 경민의 말은 다른 방향에서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 같아. 우리가 세상에 어떤 식으로든 기여할 수 있는 존재일까? 그리고 그 기여는 거대한 흐름을 만드는 것만이 전부가 아닐 수도 있다는 걸 말이야. 이해해?

 

 

 

한아는 기가 막혔다. 이 정체불명의 외계인이 무슨 얘기를 하는 건가? 지금 이 순간 가장 증오스러운 얼굴을 빌려 쓰고서는? 한 번도 지구에 이런 걸 초청해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뻔뻔스러운 외계 생물 같으니.

 

 

 

  난 이 장면 진짜 웃겼어. ㅋㅋ 자, 한아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이건 정말 황당한 상황이지. 외계인이 갑자기 나타나서 그것도 자기 전 남자친구 경민의 얼굴을 쓰고선 "사랑해"라고 고백을 하는데 한아 입장에선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을 거야. 특히나 그 경민이 이미 한아에게는 이런저런 감정의 골칫덩어리였으니까 그 얼굴로 외계인이 사랑을 속삭이니 기가 막혔겠지. 외계인이 사랑을 고백하는 그 순간에도 한아는 경민의 그 익숙한 얼굴이 너무 싫었던 거야. 그래서 그 외계인 경민에게 내심 임시완이나 박보검의 얼굴로 바꾸는건 어떠냐고 제안한 건지도 몰라.
그런데 더 웃긴 건 한아가 이 외계인과 일단 만나보기로 했다는 거야. "만약 지구별을 폭파하면 파혼하겠다"는 말까지 하면서 말이지. 한아는 스스로 이 상황이 코메디 시트콤 같다고 느꼈을거야. 마치 거대한 우주 스케일의 연애 게임에 발을 들여놓은 것 같은 기분이었겠지. 거기에다가 "파혼"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도 참 재밌어. 이제 연애부터 시작인데... 사실 한아는 이 상황을 그냥 받아들이기로 한 거겠지 라고 생각했어.

 

 

 

"어찌되었건 내가 본 너는 엄청나게 일관된 사람으로, 혼자 엔트로피와 싸우고 있는 거 같았어. 파괴적인 종족으로 태어났지만 그 본능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지. 너는 비 오는 날 보도블럭에 올라온 지렁이를 조심히 화단으로 옮겨주고,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고래를 형제자매로 생각했어..."

 

 

 

외계인 경민이 한아를 관찰하면서 느낀 감정이 정말 재밌어. 누군가 보면 그냥 지나칠 이야기지만 나는 엔트로피라는 단어에 꽂혔어. 정세랑 작가는 엔트로피라는 말을 좋아하는 것 같아. 가끔씩 보았거든. 엔트로피라는 말, 뭔가 복잡하고 어려운 것 같지만 사실 알고 보면 그냥 '혼돈'이란 뜻이잖아? 외계인 경민이 보기에 한아는 이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혼자 고군분투하는 존재였던 거야. 즉 경민의 망원경에는 우주라는 거대한 무대에서 혼자서 엔트로피와 싸우고 있는 인간, 바로 한아가 보였던거지!
생각해봐, 지렁이를 조심스럽게 화단으로 옮기는 사람이라니! 이건 정말 일종의 히어로라고도 할 수 있어. 지렁이 한 마리를 구하면서 세상을 조금이나마 질서 있게(?) 만드는 사람이니까. 한아는 거대한 우주의 시선에서 보면 정말 작은 존재지만 그 작은 손길로 세상 속에서 질서를 만들어가고 있는 거야. 비 오는 날 보도블록에서 미끄러진 지렁이를 구하는 게 뭐 대단한 일이겠냐고 할 수도 있지만 외계인 경민의 눈에는 그게 엄청나게 특별한 일로 보였던 거지.
그리고 고래를 형제자매로 여기는 한아의 마음씨! 아마 경민은 그 부분에서 정말 감동받았을 거야. 인간은 파괴적인 종족인데 한아는 그런 본능과는 동 떨어져 있어. 마치 우주에서 엔트로피에 맞서는 작은 성냥 불꽃 같은 느낌이랄까? 경민이 한아를 보면서 느낀 감정은 아마 그런 것일 거야. 이 지구라는 혼돈의 행성에서 어찌 이런 따끈한 마음을 가진 존재가 살아갈 수 있는지 경민은 존경스러운 마음이 들었을 거야.
이렇게 보면 경민이 느낀 감정은 단순한 사랑이 아니라 일종의 경외심 같은 거였을지도 모르겠네. 엔트로피가 우주에 널리 퍼져 있는 혼돈이라면, 한아는 그 혼돈 속에서 작은 질서를 만들어가는 존재. 그런 한아를 보며 경민은 그냥 사랑에 빠진 게 아니라 우주를 뛰어넘는 감동을 느낀 게 아닐까 싶어. 너무 오버인가? 그래도 한아가 지렁이를 구할 때마다 고래를 형제자매로 여길 때마다 경민의 감정은 더 커져갔을 거야.
그러니까 이건 단순히 외계인이 인간에게 반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주적인 거시적 관점에서 본 한 인간의 작은 행동들이 얼마나 특별하고 의미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야. 경민에게 한아는 그냥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우주의 혼돈 속에서 빛나는 작은 별 같은 존재였던 거지. (촉촉...)

 

 

 

"하지만 놀라게 하지 않고 만나고 싶었어. 너의 공간에서 함께 있고 싶었어. 자연스럽게라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만남이니까, 자연스러움을 가공하고 싶었어."

 

 

 

한아를 만나기 위해 외계인 경민이 했던 고민과 배려는 진짜로 복잡하면서도 재미있는 이야기야. 이 외계인 경민은 처음부터 한아를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어. "자연스럽게라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만남"이라는 말이 딱 경민의 심정을 표현하는 거지. 우주에서 지구까지 오는 것도 엄청난 일이지만 더 어려운 건 그녀를 당황시키지 않고 편하게 다가가는 거였을 거야... "어떻게 해야 그녀가 나를 경계하지 않을까? 어떻게 해야 내가 이상한 스토커나 범죄자처럼 보이지 않을까?" 이런 고민을 하면서 오랜시간 우주를 뚫고 온 거야.
그래서 경민이 선택한 방법은 뭘까? 바로 그녀의 원래 남자친구 경민의 모습을 빌리는 거였어. 이건 진짜 묘수지!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서 그 사람의 가장 가까운 사람의 모습을 빌린다는 건... 어찌 보면 아주 교묘하고도 슬기로운 선택이야. 나도 본 받아야겠어. 근데 이게 또 얼마나 골치 아픈 일이겠어? 대끔 그냥 "안녕? 나는 네 남자친구의 외계인 버전이야!"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경민의 모든 걸 다 똑같이 흉내 낼 수도 없고.
실제로 디테일한 흉터를 재현해내지 못해서 한아에게 실제로 들키기도 했지. 그래서 경민은 엄청난 신경을 썼을 거야. 그가 한아의 경민이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준비를 했을까? 아마 원래 경민이 좋아하는 음식, 말투, 행동 패턴까지 전부 철저히 분석했겠지. 하지만 외계인이니까, 인간의 미묘한 감정이나 표현을 완벽하게 따라하는 건 쉽지 않았을 거야. 나는 그래서 소설속에 나오진 않았지만 "아, 이건 좀 경민스럽지 않았어!"라면서 스스로 자책하는 장면도 상상해보았어.
그리고 결정적으로 경민은 한아와의 자연스러운 만남을 위해 처음엔 자신의 외계인임을 숨기려 했어. 외계인인 걸 들키지 않으면서도 그녀에게 사랑받고 싶어 하던 그 노력, 그 진심은 정말 귀엽지 않니? "자연스럽게라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만남"을 만들기 위해, 그가 얼마나 고민했을까? 아마도 그는 지구인들의 '데이트'가 뭔지, '사랑'이 뭔지, 그리고 그 모든 걸 자연스럽게 느끼게 하는 방법이 뭔지 그 우주적으로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머리를 싸맸겠지.(원래의 인간 경민이는 제대로 자신에 대해 인수인계도 안하고 가버린 모양이야)
공교롭게도 그걸 해결하기 위해 하필이면 경민을 탐탁치 않아하는 유리에게 달려가서 프로포즈를 위한 조언을 얻기 위해 애원까지 했지만(그러나 왠지 달라진 경민의 모습에 유리는 도움을 주기로 결심했지 ㅋㅋ)
결국 경민은 한아를 만나기 위해 많은 연구와 고민을 했어. 하필이면 장인어른, 장모님께 특별한 기술로 만든 다이아반지까지 선보이다니... 어쨌든 이러한 그녀와 가까워지기 위한 노력, 그 과정에서 '사랑'이라는 것이 정말 복잡하고도 대단한 것임을 느꼈을 거야. 그리고 그 사랑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지도 몸소 깨닫게 됐겠지.

 

 

 

"산속의 서늘한 공기가 눈물을 금세 마르게 했다. 하지만 한동안은 속으로, 속으로 눈물이 흐르겠지. 내 안쪽도 그런 빛나는 돌이라면, 눈물에 다 녹아버릴 거야. 한아는 식어버린 수프 컵을 내려놓았다."

 

 

 

원래 경민이 우주여행을 떠나면서 한아에게 남긴 것은 단순한 이별이 아니라 스스로를 새로운 방향으로 탐색해나가는 여정이었어. 그러나 한아는 자신 옆에 남겨진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경민 외계인 버전을 보며 큰 혼란스러움과 동시에 그동안 경민에 대해 얼마나 의지하고 있었나, 그동안 나는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와 어떤 시간을 보내온 것인가에 대해 생각했을거야...
산속의 차가운 공기처럼, 한아의 마음도 차갑고 냉정하게 변해버린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 흐르는 눈물은 여전히 감추어져 있던 진심을 말해주는 것 같았어. 한아는 겉으론 눈물조차 나오지 않지만, 그 속마음은 엉망진창이 되어버린거야.... 얼마나 힘들었을까...? 눈물은 흘릴대로 다 흘리고 감정소모는 할대로 다해서 더이상 흘릴 눈물도, 감정도 없이 그냥 내면만이 만신창이가 된 상태 말이야... 넌 그래본적 있니?

 

 

 

"백날을 생각해봤자 답은 똑같을걸요. 어떤 특별한 사람은 행성 하나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질 때가 있어요. 그걸 이해하는 사람이 있고 못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저한텐 엄청 분명한 문제예요. 난 따라갈 거야, 내 아티스트."

 

 

 

정말 멋진 말이라고 생각해. 비슷한 걸로 난 그 말을 좋아해. 평범한 며칠을 보내는 것보다, 어떤 순간은 몇 분의 순간이 매우 소중한 순간들이 있다고. 비슷하게 상대적인 느낌을 주는 표현이지? 아티스트를 따라 우주로 따라간 주영에 대해 혹시 철없다는 생각을 해보았어? 다소 비현실적인 팬일수도 있지. 소설이니까 :) 사실 주영은 이성적인 판단보다는 감정과 직관에 기반한 행동을 하는 등장인물이야. 
누군가를 지켜만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내가 행복해 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성비가 너무 좋은 것 같지 않아? 주영은 그런 인물이야. 상상해봐. 주영의 이런 팬심은 뭐랄까.. 어떤 아이가 좋아하는 슈퍼맨이 실제로 하늘을 날고 있다고 굳게 믿는 것과 같아. 그 팬심이 어쩌면 세상의 모든 논리나 진리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더 뜨겁고 더 특별할 수도 있잖아!

 

 

 

한아는 이제야 깨닫는 것이었는데, 한아만이 경민을 여기 붙잡아두던 유일한 닻이었는지 몰랐다. 닻이라고 하기에도 너무 유약하고 가벼운 닻, 가진게 없어 줄 것도 없었던 경민은 언제나 어디로든 떠날 준비가 되어있었고 종국에는 지구를 떠나버린 거다. 한아의 사랑, 한아에 대한 사랑만으로는 그 모든 관계와 한 사람을 세계에 얽어매는 다정한 사슬들을 대신할 수 없었다. 역부족이었다. 인정할 수밖에. 닻이 없는 경민은 얼마나 빠른 속도로 나아가고 있을까?
쉬운과정은 아니었으나 거기까지 이르자, 한아는 떠나버린 예전의 경민에 대한 원망을 어느 정도 버릴 수 있었다. 나 때문이 아니었어. 날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던 거야. 다만 오로지 그 사랑만으로는 안되는 일이었던 거지. 질량과 질감이 다른 다양한 관계들을 혼자 다 대신할 수는 없었어. 역부족도 그런 역부족이 없었던 거야.

 

 

 

한아의 내면에서 이루어진 커다란 변화를 잘 보여주는 중요한 순간이야. 너도 책을 읽어보았다면 잘 알겠지만 한아는 그동안 경민이 떠난 것에 대해 많은 원망과 슬픔을 가지고 있었잖아? 그랬던 그녀는 이 장면에서 이 원망의 감정을 마침내 내려놓게 돼.
한아가 깨닫게 된 건 스스로를 '닻'이라는 메타포로 칭하면서야. 그녀는 경민을 자신의 곁에 붙잡아두려 했지만 사실 그 닻은 너무도 유약하고 가벼운 존재였어. 경민은 언제나 떠날 준비가 되어 있던 자유로운 영혼이었던걸 애써 외면하고 있던거지.
경민(구)의 마음속에는 끊임없이 새로운 곳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고 그것은 한아의 사랑만으로는 채울 수 없던거야.. 한아는 결국 경민이 떠난 이유가 자신 때문이 아니었음을, 그리고 단순히 사랑의 부족이 아니었음을 이해하게 돼.
이 깨달음은 한아에게 큰 해방감을 주었을 거야. 그녀는 경민을 사랑했지만 그 사랑만으로는 경민을 붙잡아두기에 충분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 거지. 그동안의 원망은 단순히 사랑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이제 한아는 그 집착을 놓아줄 수 있게 된 거야.
경민은 그의 자유로움 속에서 어디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고 이제 한아도 그를 놓아줄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된 거지. 이 깨달음은 한아에게 있어 큰 성숙을 의미해. 사랑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한아는 그동안의 슬픔과 원망을 넘어서서 진정한 평화를 찾게 되는 거야.
한아는 이제 경민을 자유롭게 떠나보내며, 자신도 새로운 시작을 향해 나아갈 준비를 마쳤을 거야. (근데 솔직히 마지막에 죽을때 다 되어서 돌아온건 좀 아니었던 것 같아... 모야...얘? 저기요... 다시 가주세요)

 

 

 

중요한 결정을 언제나 한아에게 맡겨주는 게 좋았다. 불안한 부분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관계인 것도, 흔한 방식으로 불행한 결혼을 하게 될까봐 걱정했던 때도 있었던 것 같은데,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그 방향으로는 걷지 않게 될 걸 알았다.

 

 

 

가벼운 마음으로 재밌게 읽은 책이었어! 이런 책을 읽을 때마다 자연스레 상상을 하게 되더라고. 그래서 퇴근 후에 이 책을 읽는 동안엔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사실 거의 하루만에 다 읽은 것 같아) 마치 다른 세상에 발을 들여놓은 것 같은 느낌? 일종의 도피처 같았달까.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한아가 인간의 몸으로 죽어갈 때 경민이 한아에게 우주를 견딜 수 있는 몸으로 바꿀 것을 제안했잖아?(사실 이게 이미 몰래 처리된 계약이었단 점이 웃프기도 했어 한아가 경민(구)에게 계약서를 잘 읽었을 것을 탓할 때 그것이 복선일 줄이야..)
그 둘은 거의 반쯤은 영생의 몸이 되었을 것이고 그들이 유리 부부와 함께 우주 여행을 떠나는 상상을 하니까 나는 '은하철도 999'가 떠올랐어. '은하철도 999'에서 철이가 메텔과 함께 기계의 몸을 얻기 위해 열차에 올라타고 각기 다른 사연이 있는 행성들을 돌며 다양한 이야기들을 경험하잖아?(사실 철이의 여정에서 각 행성들에서 겪는 사람들의 사연에는 슬픔과 애틋함이 참 많아.. 그래서 사실 은하철도999가 어린아이들의 애니메이션이 아니라고 평가하는 이들도 많지)
경민과 한아도 똑같이 그런 독특한 행성들을 방문하게 되겠지. 지구를 모방하여 어설프게 만든 행성에 들러 그곳에서 날개가 돋아난 행성 운영자와 어떤 대화를 나눌지 상상해봐. 그리고 우주의 끝까지 가서 어떤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될까? 그리고 아티스트와 주연 일행과 다시 마주쳤을까? 어쩌면 둘은 결국 연인 사이로 발전해서, 평범하게 결혼해서 잘 살다 갔을지도 몰라. 재밌지?
그런데 여기서 궁금한 점이 하나 있어. 왜 작가는 하필 막바지에 '우주를 견딜 수 있는 몸(반쯤 영생?)'이라는 포인트를 넣었을까? 난 그게 단순히 인간이 영생을 꿈꾸고 갈망하기 때문에 넣은 요소는 아니라고 생각해. 경민은 외계인이어서 오랜 수명을 지녔고 반면 한아는 인간이니까 고작해야 100년 남짓 살 수 있잖아. 수명뿐만 아니라 신체적인 차이도 많을 거고. 하지만 우주를 견딜 수 있는 몸으로 바뀐다는 건 결국 경민과 한아가 동일한 존재로 서로 닮아간다는 해피엔딩을 예고한 게 아닐까 싶어. 이런 시각으로 보니 인상적이지? 그렇다고해. 결국 그들은 서로 다른 종족(?)이었지만, 이제는 점점 닮아가고 함께 우주를 탐험하며 진정한 동반자가 되는 거잖아. 난 이런 모든 상상이 한아와 경민의 여정을 더 풍성하게 만들어줘서 이 책을 읽는 시간이 정말 행복했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어린 왕자가 말을 이었다.
"만약 누군가 수백만 개, 수천만 개 별 중에 하나밖에 없는 꽃을 사랑하고 있다면, 바로 별들만 쳐다봐도 행복할 거야. 속으로 '저기 어딘가에도 내 꽃이 있겠지'하고 생각하고 있거든. 그렇지만 양이 그 꽃을 먹어 봐. 이건 그에게는, 별들이 모두 갑자기 빛을 잃을 거나 마찬가지야! 그래, 이게 중대한 일이 아니란 말이야?"
그는 말을 잇지 못하고 갑자기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해는 이미 진 뒤였다.
-어린왕자 中-

 

 

 

어린왕자에게 그 하나뿐인 꽃은 우주 어디에도 없는 소중한 존재였지.
외계인 경민이 고향에서 지구를 바라볼 때, 아마도 한아는 그에게 그런 존재였을 거야.
장미가 없다면 그 많은 별들이 어린왕자에겐 의미가 없던 것처럼 아마 그런 마음으로 한아를 생각했어. 수많은 별들 속에서 단 하나의 꽃이 가진 특별함처럼 경민에게 한아는 우주 어디에도 없는 소중한 존재였던거야

 

 

 

-끝-









비닐봉지들을 모아 꽃모양으로 접어 정리하다가, 문득 생각했다. 역시 보고 싶네, 보고 싶잖아.
그렇지만 뭔가 달랐다. 원래의 경민을 보냈을 때의 그런 몸이 간질간질하고 신경이 쏠리고 불안해지는 보고 싶음이 아니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심해를 헤매고 있어도 이어져 있는 보고 싶음이었다.
기다리는게 즐거울 수도 있구나. 이건 또 새로운데? 한아는 계단에 앉아 생각했다.

 

 

 

안락하고 평화롭지만, 고민 없이 출아법으로 끝없이 자기 분열하는 것에 이제 모두 질린거야. 이주율이 순식간에 늘 거야.

 

 

 

한아는 문득 기분이 묘해졌다. 경민의 고향 사람들이 사랑하는, 혹은 사랑하게 될 우주 곳곳의 존재들을 생각했다. 집단 무의식 때문에 경민은 그 사랑도 희미하게나마 감지하고 함께 느끼고 또 꿈꾸고 있을 텐데, 질투가 났다. 사랑을 독점하고 싶은 질투인지, 아니면 그런 수많은 사랑의 지류들을 함께 느끼고 싶은 질투인지 분명치 않았다.

 

 

 

아무것도 없으니까. 저 좌표에는 예전에 기회와 가능성, 평행 우주를 거래하는 별이 있었어. 하지만 내부로 폭발해서 사라지고 없지. 말이 좋아 가능성이지, 가능성이야말로 너무 압축된 개념이라 잘못 다루면 위험해

 

 

 

멋진 날개지? 근데 돋을 때는 엄청 아팠던 모양이야. 최근에 저 사람이 자서전을 냈는데, 거대한 어금니가 어깨에서 돋는 것 만큼 아팠대. 전혀 필요하지 않았던 고통을 겪고나서 더이상 자신을 만든 지구 애호가에게 복종하길 거부하고 체제 전복을 일으켰어. 지금은 저 행성의 운영자야.

 

 

 

커다란 오렌지 사탕 같은 태양이 지는 시간에 입안에 남은 소금기에 끌려 데킬라를 희석시킨 칵테일을 마시러 갔다. 밤늦게 돌아가며 키스하면, 연인의 입술 사이에 우주가 있었다.
돌아오고도 한참 동안, 매일매일의 일상 속에서 꺼내볼 수 있는 풍경이 있다는 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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