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딩드레스 44
당신은 파롤(Parole)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파롤은 랑그(Langue)의 상보호완적인 의미로, 랑그는 한 언어가 갖는 추상적인 체계로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사회적 구성원 모두가 공유하는 약속이다. 그래서 랑그는 유한하다. 그리고 우리가 실제로 입밖으로 내뱉는 개인적 발화를 '파롤'이라 한다. 그래서 파롤은 랑그의 실제적 실현이라 할 수 있고, 개개인의 발화이므로 무한하다. 즉 요약하자면 랑그는 개념, 파롤은 표현이다. 그런데, 파롤은 파롤에 의한 프레임이 있다.
예를 들어, 'BMW 7시리즈'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BMW 7시리즈'라는 랑그를 나는 '대형세단'이라는 파롤로 표현한다.
내가 가진 '대형세단'이라는 이미지는 무언가 고급스럽고, 부의 상징이다.
그런데 '자가용' 구입을 싫어하는 존 리 선생님은 '자가용'은 사치이며, 이미 대중교통으로 충분히 대체 가능한 불필요한 물건일 뿐이다. 만약 존 리 선생님이라면 'BMW 7시리즈'를 나와 같은 '대형세단'이라는 프레임으로 바라볼까? 그렇지 않다. 아마도 그저 사치품에 불과한 '자가용'의 프레임으로 바라 볼 것이다. 이처럼 나와 존 리 선생님이 'BMW 7시리즈'를 다르게 바라보는 이유는 같은 랑그를 다른 파롤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면, '대부분 일치하는 파롤의 프레임'에 갖힌 사례가 무궁무진하다. 예를 들어, 웨딩드레스가 그 파롤이라 할 수 있겠다. 웨딩드레스는 무엇이 연상되는가? 왠지 화려해야하고, 결혼, 축복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대부분 공감할거라고 생각한다. 웨딩드레스에 대해 부정적인 프레임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웨딩드레스는 대부분의 사람이 프레임에 갖혀있는 파롤이다. 웨딩드레스 44는 이러한 파롤의 프레임을 깨뜨리는, 할인을 크게 받아 들여져온, 어느 웨딩드레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웨딩드레스를 대여한 44명의 이야기는 다양하다. 물론 결혼에 대한 이야기, 결혼 생활에 대한 삶을 담고 있다. 좋은 이야기도 있고, 나쁜 이야기도 있다. 그냥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일상 이야기도 있다. 정세랑 작가님에서 의도한 것인진 몰라도. 44개의 이야기 중 좋은 이야기는 짧고, 나쁜 이야기는 길다. 한번 다시 읽어보자.
[3번째 손님]
여자에겐 다른 계획이 많았다.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았고, 해외 연수도 계획되어 있었다.
"네가 원하는 대로 살게 해줄게. 그러기 위해 끝까지 노력할 거야."
그 말을 믿을 수 밖에 없었다.
[6번째 손님]
"내 몸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부분이야. 지금은 너보다 마음에 들거든?"..............
역시나 멋진 타투였고 드레스와도 잘 어울렸다. 내 몸은 내 거야.
[9번째 손님]
아홉번째 커플은 원래 혼인신고만 하고 살려고 했다. 둘다 식에 대한 환상이 전혀 없었고 .......
그러나 그렇게 2년을 사는 동안 양가에서 폭격이 끊이지 않았다. 어떻게든 식은 꼭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자의 어머니가 울고 남자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렀다. 두 사람은 지고 말았다..............
여자는 고전문학 전공자였는데, 고전문학 속 영웅들이 대다수 고아인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았다.
고아들만이 진정으로 용감해질 수 있다고 말이다.
[15번째 손님]
"하지만 형부가 잘해주잖아요? 좋아 보였는데."
"남편이 문제가 아니야. 내가 제도에 숙이고 들어간 거야. 그리고 그걸 귀신같이 깨달은 한국사회는 나에게 당위로 말하기 시작했지"................
"예를들면요?"
"남편과 나는 같은 시험에 붙었잖아. 그런데 가족들이 내게만 '살살 다닐 직장을 들어가야 한다'고 말해. 왜 나는 살살 살아야 하지? 왜 그게 당연하지? 왜 나한테 그렇게 말해도 된다고 생각하지? 굴욕적이야."
거기까지 말하고 열다섯번째 여자는 입 밖으로 말해서 더 분명해지는 것들을 잠시 가만히 헤아렸다.
[25번째 손님]
"요리부터 배워."
한번은 그냥 넘어았다.
"쉽게 하는 이탈리아 요리, 이거 배울까?"
"좀! 한식부터 배워 좀! 밑반찬부터."
두번은 넘어갈 수 없었다....... 차분하게 반박해야 했지만 여자도 쌓였던게 많았다.
"다시 말해봐, 씨발새끼야."
[36번째 손님]
"그래도 당신은 나랑 결혼해서 다행이지? 나는 전혀 가부장이 아니잖아."
"글쎄."
...................
"내 말은 그런 시간들이 계속, 평생에 걸쳐 쌓인다는 거야. 쌓이다보면 큰 차이가 나는 거고. 생각해보면 이상하지 않아? 당신 할아버지 제사잖아? 난 만난 적도 없는 분이야. 왜 효도를 하청 주는데?"
"어쨌든 그게 가부장제야. 당신 눈에는 안 보여도 내 눈에는 보여. 내 눈에만 보이는게 아주 많아"
여자의 계획과 남자의 약속이 엇갈리며 나타나는 갈등은, 결혼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얼마나 개인의 욕망과 꿈이 묻히기 쉬운지를 잘 보여준다. 남자가 아무리 여자의 자유를 보장하겠다고 말해도, 그 말은 결국 전통적 결혼 제도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 약속이었다. 이는 결혼이라는 제도 속에서 개인의 자아와 계획이 어떻게 조율되지 못하고 침식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여자의 타투와 그 타투에 대한 자기 확신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내 몸은 내 거야"라는 말은 결혼 안에서조차 여성의 몸과 삶에 대한 자기 결정권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억압될 수 있는지에 대한 저항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이는 결혼 제도 내에서 여성의 주체성을 잃지 않고 자신을 지켜나가려는 강한 의지를 상징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중간에 결혼식에 대한 환상이 없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결국 사회적 압력에 굴복하고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이는 상호 가족간의 전통적인 결혼관념이 여전히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두 사람의 개인적 선택이 사회적 기대에 의해 쉽게 무너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여자가 고전문학 속 영웅들은 고아라는 특성을 떠올리며 진정한 용기와 자유를 사회적 고립 속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점을 떠올린 것은 결혼 제도가 어떻게 개인을 구속하는지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자 풍자라 할 수 있다.
그와 비슷한 맥락에서 15번째 손님의 "왜 나는 살살 살아야 하지?"라는 질문은 결혼 후 여성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기대와 제약을 직설적으로 드러낸다. 같은 시험에 붙었음에도 여성이 더 적은 야망을 품고 "살살" 살아가야 한다는 압박은 결혼이 여성에게 요구하는 불합리한 역할을 폭로하고 있다.
마지막 인용에서 "나는 전혀 가부장이 아니잖아"라는 말은 남성이 가부장제의 일부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성은 결혼 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사회적 불평등을 경험하고 그 차이가 쌓여 커다란 격차로 이어진다. 이는 남성과 여성이 결혼을 통해 경험하는 사회적 현실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25번째 손님의 이야기는 누군가는 사이다라고 생각했을 수 있겠다. 결혼 생활 속에서 발생하는 권력 관계와 역할 강요에 대한 갈등을 보여준다. 남편이 아내에게 요리를 배우라고 요구하는 것은 가정 내에서 전통적으로 여성이 해야 한다고 여겨지는 역할을 강요하는 대표적인 예시다. '한식부터 배워라', '밑반찬부터 하라'는 식의 지시는 여성에게 특정한 집안일을 맡기고 그것이 마치 당연한 것처럼 요구하는 가부장적 관습을 드러낸다. 마지막에 여자가 "다시 말해봐, 씨발새끼야"라고 말하며 폭발한 장면은 단순한 폭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결혼 생활에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무언의 압박에 대한 강한 저항을 표현한 것이다. 이는 단순히 남편의 말에 대한 분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으며 가부장적인 결혼 제도와 그 안에서 여성이 느끼는 억압에 대한 상징적인 반발로 읽을 수 있다.
사실 내 생각에 이 소설은 결혼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작은 갈등들이 사실은 더 큰 사회적 불평등과 맞닿아 있음을 보여준다. 여성이 결혼 안에서 자신의 주체성을 지키기 위해 투쟁해야만 하는 상황을 비판적으로 묘사하며 이러한 권력 구조 속에서 개인의 감정이 어떻게 파괴되고 소모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아마도 가벼운 내용의 긍정적인 내용들이 없었다면 너무도 편파적이게 느껴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간에 반짝 나타나는 타코야끼 댄스 커플은 아주 귀여웠다. 그래서 나도 은근하게 한번 춰보기도했다.)
결론적으로 이 소설은 화려함과 축복을 상징하는 결혼, 웨딩드레스에 대한 파롤의 프레임과 그 속에 숨겨진 사회적 불평등을 파헤치며 우리가 결혼을 단순히 개인의 선택으로만 바라볼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나에게 있어서는 결혼 제도가 얼마나 깊이 사회적 구조에 얽혀 있는지를 생각해보게 했고 그 안에서 개인의 자아가 어떻게 억압되거나 구속될 수 있는지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시각을 주는 내용들이었다.
당신도 이 글을 읽었다면 여전히 웨딩드레스에 대한 파롤 프레임이 유효한가?
보늬
당신은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여 본 적이 있는가?
당장 나에게 닥칠 어떤 구체적인 불행이나, 심지어는 내가 제 명까지 못살고 죽는다던가 말이다.
실제로 뉴스를 보면 우리는 그런 일들을 많이 간접경험하고 있다. 우리는 죽음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것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다가올지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이 죽음을 더욱 두려운 존재로 만든다.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방영했던 부산 돌려차기 사건은 묻지마 폭행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공포와 경각심을 일깨웠다.
우리가 이런 일을 당하지 않을거라고 보장할 수 있는가? 그 중에서도 돌연사라는 것은 예기치 못한 순간에 찾아오며 남겨진 이들에게 깊은 충격과 상실감을 안겨준다. 그와 동시에 그 사건을 겪게 될 본인에게도 죽음을 미처 준비하기도 전에 삶을 마감해야 한다는 일은 안타까운 일이다. 나는 이미 이전에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간다" 책을 통해 나는 어떠한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 나의 죽음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한 경험이 있다. 가족들에게 미리 자신의 장례가 어떻게 이루어졌으면 좋겠는지, 재산이나 금전적인 것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그 외에 정리해야 할 인간관계에서 아무말도 하지 못한채 세상속에서 잊히고 사라져가야하는 것은 마땅하지 못하다. 그런 비극 앞에서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어느새 차츰차츰 잦아드는 슬픔을 받아들이고 묵묵히 삶을 살아갈지 모른다. 또 누군가는 그 충격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 한다. 돌연사.net은 바로 그런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에서 출발했다.
우선, 이 소설의 내용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사이트가 돌연사한 사람들을 수집하고 그들의 삶을 선으로 연결하려는 시도는 개인의 죽음이 고립된 사건이 아닌, 사회적, 관계적 맥락에서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각자의 삶이 그물처럼 엮여 있는 세상 속에서 그들은 죽음을 통해 살아있는 사람들 사이의 보이지 않는 연결 고리를 확인하려 하지만 내가보기엔 사실 이 부분은 큰 의미가 없어보였다. 그들이 정말로 찾고 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잠시 고민에 잠시 잠겼고 책을 다 읽고도 그 부분을 되짚어 다시 읽어보았다. 내가 생각한 이 주인공들의 사이트 구축은 궁극적으로 죽음의 이유를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 비극 속에서 남겨진 유족으로서의 의미 그리고 그들에게 남겨진 삶의 무게를 마주하는 것이 아닐까? 어떤 의미를 찾으려 시도했던 것은 그저 표면적인, 어쩌면 형식적인 이유를 갖다댄 것일 뿐...
자, 다시 생각해보자. 규진은 왜 돌연사.net을 만들어서 보윤과 매지에게 선보였을까? 내 생각에 규진은 돌연사라는 그 불안과 공포를 어떤 식으로든 통제하려는 시도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돌연사라는 비극적인 사건을 단순한 하나의 데이터로 취급하며 이를 사람들과 연결된 지점으로 분석하려 하고, 사용자로부터 업로드된 데이터에 대해 검열한다. 이는 감정적으로는 냉정해 보일 수 있지만(그들은 실제로 엄격하게 운영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데이터를 삭제할지 애매한 사례에서는 보류라는 선택을 한다.) 한편으로는 죽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노력처럼 보이기도 한다.
중간에서 사이트가 확장되며 '돌연사의 경계'에 대한 논의가 등장하는 부분은 서두에서도 말했지만 예전에 읽었던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간다'를 떠올리게 한다. 과연 무엇이 돌연사이고, 무엇이 아닌가에 대한 기준을 명확히 정하는 일이 어렵다는 사실은 우리가 사회 속에서 얼마나 많은 '보이지 않는 죽음'을 간과하고 있는지를 상기시킨다. 예를 들어, 과로로 인한 죽음은 갑작스러운 사고가 아닌 서서히 다가온 비극이지만 그 결과는 마찬가지로 예측할 수 없는 종말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렇다면 과로사 역시 돌연사의 범주에 포함되어야 할까? 이 소설을 읽었다면.. 아마도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이 질문은 우리 사회가 과연 죽음을 어떻게 정의하고 어떤 죽음을 더욱 심각하게 받아들이는지에 대한 성찰을 요구한다.
아무쪼록 냉정하게 운영하려 했으나, 보윤과 규진, 매지는 원래의 의도와는 달리 유족들이 사이트에서 위로를 얻어간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돌연사로 인해 가족을 잃은 유족들에게는 상실의 고통 속에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겪은 슬픔을 나누며 위로받는 과정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 사이트는 단순한 정보 제공의 역할을 넘어 상실을 공유하고 함께 견디는 공간으로 변모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고통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위로를 받고 죽음의 무게를 혼자 감당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안도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이 소설에서 직면하는 사회적 문제는 단지 돌연사 그 자체가 아니다. 돌연사라는 비극은 우리의 사회가 법의 사각지대에 위치한 돌연사, 보호받지 못한 돌연사, 각종 산업재해와 어쩌면 막을 수도 있었던 수 많은 사고들을 얼마나 외면해왔는지를 상기시킨다. 과로사, 극단적인 선택, 과도한 사회적 압박 속에서 서서히 무너져가는 이들은 결국 돌연사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고 이 소설에서는 이야기하고 있었다.
결국... 그렇다면 돌연사는 단지 예측할 수 없는 죽음이 아니라, 사회적 문제로부터 비롯된 죽음이라는 더 넓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나는 마지막 부분의 "하다가 죽지 않는 것을 하고 싶다." 이 말은 단순히 '살아남는 것'을 넘어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하며 삶을 이어가고 싶다는 욕망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우리는 그 속에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이루고자 한다.
보윤과 규진, 매지는 어쩌면 죽음을 기록하고 추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제는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삶의 가치를 되돌아보게 하고 그들이 서로의 고통을 공유하며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하다가 죽지 않는거, 하고 싶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모두 그 두 일에 대해, 혹은 둘의 교집합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게 분명했다.
해피 쿠키 이어
내 생각에 정세랑 작가의 이상형이 있다면 해피 쿠키 이어의 남자주인공 이스마일이 아닐까? 그래서 자신이 바라는 바람직한 남성상을 옥상에서 만나요에 수록된 소설 중 해피 쿠키 이어의 유일한 1인칭 남자주인공으로 만들었을지 모른다. 판타지적(?) 요소로 특이점이 있다면 바로 과자귀다. 나는 사고로 잘려나간 이스마일의 귀에 자라나는 과자는 단순한 판타지적 설정을 넘어 사랑을 나누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 이스마일은 자신의 옆집 여자친구와 사랑을 나누며 그 과자 귀마저 아낌없이 내어준다. 과자 귀를 뜯어먹어도 그는 불평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이 야윈 그녀를 조금이라도 살찌게 하고 건강하게 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내어줄 준비가 되어있다. 놀랍게도 이 과자 귀는 매번 다른 종류로 자라난다. 과자귀가 매번 다른 과자로 달라지듯 이스마일의 사랑 또한 단조롭지 않다. 마치 해리포터의 강낭콩 젤리처럼 그때그때 다르게 나타나는 귀는 여자친구에게 작은 설렘을 준다. 이스마일은 그런 존재처럼 느껴졌다.
마지막 장면에서 이스마일의 과자 귀는 결국 더이상 자라지 않는다. 여자친구와 된장찌개를 함께 먹고 이별하는 순간... 그의 임무가 끝났기 때문이다. 이스마일은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그녀를 사랑했고 더이상 귀가 자라지 않는 것은 그가 그녀를 위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주었다는 걸 표현한다. 이스마일은 그저 그녀가 아프지 않기를 바랐고 그녀의 곁에서 조용히 사랑을 나눴다. 그가 한국에서 살아가는 아랍인이라는 설정은 한국 사회에서 소외된 계층을 은유하는 듯 보이지만, 이스마일의 진정성 있는 사랑에는 그러한 사회적 위치나 배경이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이스마일은 이 소설집에 등장하는 여느 남성 인물들과는 유난히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는 전혀 폭력적이지 않으며 오일 프린스, 명예살인, 향후 10년 중동 정세, 민주국가, 빨갱이, 독도 등등에 대한 가치, 혹자는 어떠한 프레임에 대해서도 편향이 없다.
이 부분에 대해 구체적으로 내 해설을 정리해보자면 이스마일은 세상의 복잡한 문제나 논쟁에 휘말리기보다는 눈앞에 있는 사람을 이해하고 그들의 필요에 응답하는 데 집중한다. 그의 관심사는 정치적이거나 이념적인 것이 아니라 여자친구가 아프지 않도록 혹은 그녀가 편안하고 행복하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그가 가진 사랑은 순수하고 무언가를 기대하지 않으며 오직 상대방의 행복을 위한 행동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이스마일의 태도는 사회에서 흔히들 주변에서도 볼 수 있는 강한 의견 표출이나 권력 투쟁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갈등을 피하고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방법을 선택한다. 그의 비폭력적인 태도는 그의 서툰 한국어 실력, 혹자는 외국인 여부를 떠나 얼마나 성숙하고 온화한 사람인지를 보여준다. 또한 그는 정치적, 사회적 이슈들에 대해서도 편견 없이 받아들이며 특정 프레임이나 이념에 구애받지 않고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이런 그에 대해... 나는 단순히 소설 속 남성 주인공이 아니라, 정세랑 작가가 이상적으로 그린 '이해하고 배려하는 인간'의 모습임을 드러낸다고 느꼈다.
그는 "콩 알레르기"가 있는 옆집 여자를 위해 요리를 한다. 그는 그것이 오바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나는 정작 그것이 오바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 소설에서 여자가 콩 알레르기가 있다는 설정은 단순한 신체적 제약을 넘어 이스마일과 그녀 사이의 관계를 심화시키는 중요한 촉매로 작용한다. 콩 알레르기는 그녀가 겪고 있는 내적인 고통을 상징한다. 즉 이스마일이 그녀의 삶에 얼마나 깊이 들어가 그녀를 배려하고 이해하려 하는지를 보여주려는 장치이다. 이스마일은 그녀의 알레르기를 단순히 불편함으로 치부하지 않고 그것을 극복하는 데 힘쓰며 그녀를 위해 요리까지 하며 신경을 쓴다.
특히 옆집 여자(여자친구가 되기 전)가 아파하는 것을 걱정하며, 포스트잇으로 안전하게 밥을 먹자고 제안하는 장면은 이스마일의 세심한 배려와 따뜻함을 잘 보여준다. (아마도 옆집 여자가 기침한다는 이유로 초인종 누르며 밥같이 먹자고 하면 옆집 여자가 아니라 경찰이 긴급출동을 했을 수도 있다.) 이 장면은 단순한 식사 제안이 아니라 여자의 고통을 완벽히 이해하고 그녀의 안전과 편안함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그의 마음이 담겨있다. (포스트잇은 꽤 괜찮은 수단인 것 같다...) 그는 콩 알레르기를 가진 여자에게 조금도 무리한 기대를 하지 않고 오히려 그녀가 안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며 자신을 나누려 한다. 그의 포스트잇 제안은 단순하지만 그 속에 담긴 진심은 매우 깊다. 이 행동이야말로 이스마일의 무해함과 배려가 가장 잘 드러나는 순간이다. 결국 이러한 순수한 마음과 무해함이 여자를 감동시키고 그들을 이어주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스마일은 여자에게 어떤 강요나 압박을 하지 않으며 그저 그녀가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조용히 옆에 있어준다. 이 점이 바로 여자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며 사랑이라는 관계는 누가 더 많은 것을 요구하거나 주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진심으로 상대방을 배려하고 이해하는가에 달려 있음을 이스마일의 행동을 통해 깨달을 수 있다. 이 소설에서 여자가 이스마일의 사랑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그의 순수한 마음과 무해함 덕분이었다. 그는 무리하게 그녀를 쟁취하려고 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의 마음을 조심스럽게 표현하면서 그녀가 안심하고 다가올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는 단순한 로맨스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이스마일이 보여준 사랑은 상대방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함께 걸어가는 과정이었고 그런 태도야말로 현대인으로서의 진정하고 올바른 형태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그녀가 회사의 비리를 고발하여 사회생활에서 고통을 겪을 때였다. 그는 단순히 그녀를 위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녀의 선택을 존중하며 옆에서 묵묵히 함께한다. 그녀가 고발로 인해 받는 사회적 압박과 불이익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지만 이스마일은 이를 개인적인 문제로만 보지 않고 그녀가 옳다고 믿는 선택을 지지하며 그녀의 신념과 가치를 받아들인다. 그는 자신의 의견을 강요하거나 그녀를 대신해 나서지 않는다. 대신 그녀가 올바르다고 믿는 길을 가는 동안 변함없는 응원을 보내며 그녀가 힘들어할 때 그녀의 편이 되어 준다. 이는 이스마일의 사랑이 단순히 '곁에 있음'의 의미를 넘어, 어려운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는 지지를 의미한다. 그가 그녀의 선택을 지지하며 곁에서 묵묵히 응원하는 모습은 이스마일이 깊은 배려와 이해심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아마 이때 이스마일이 여자친구에게 "아니 잘 다니다가 왜그랬어? 얼른 잘못했다고 사과하자 자기야~", "안그래도 월세 내야하는데... 그건 어떡하려고?"라는 식의 전개가 펼쳐졌다면 마지막 된장찌개와 한식같았던 키스는 없었을 것이다. 이스마일은 그녀에게 무언가를 강요하거나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가 독립적으로 자신의 신념을 실현할 수 있도록 옆에서 따뜻하게 바라봐주며 그녀의 아픔과 어려움을 공유하려 한다. 이는 이스마일의 사랑이 타인의 행복과 자율성을 존중하는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의 이런 지지는 단순히 연인의 역할을 넘어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두 사람이 어떻게 서로를 이해하고 도울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스마일은 여자친구가 겪는 사회적 문제와 불의를 외면하지 않고 그 속에서 그녀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그저 조용히 응원할 뿐이다.
일이 잘되려면 모든 게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잘되듯이, 일이 잘못되려 해도 마찬가지로 맞물려 잘못된다. 세단계에 걸쳐 사고가 일어났다. 사악한 손이 설계한 도미노 같았다.
덩어리가 되고 싶지 않았다. 실제로는 덩어리래도. 나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독후감을 마치며
이 소설은 사실 현실적인 결혼이야기가 중심인 책이다. 나는 그 속에서 겪는 여성들의 고충을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볼 수 있었다. 물론, 그런 무거운 주제의 이야기도 중요하지만, 솔직히 말해 나에게 더 마음에 와닿았던 건 이 책에서만 느껴질 수 있는 따뜻한 분위기, 인물들의 소소한 대화에서 느껴지는 심리적 감정선들... 그리고 장마다 나오는 귀여운 표지 삽화들이었다. 읽는 내내 내 주변의 소중한 친구들, 그리고 내 마음속의 그 어떤 누군가가 떠올랐고 덕분에 미소 지으며 기분 좋게 책장을 넘겼다.
그렇다면 우리는 결혼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봐야 할까? 꼭 거창한 답을 찾기보다는 소소한 일상 속에서 서로를 아끼고 배려하는 마음 그리고 그 속에서 찾아오는 소소한 행복이 더 소중한 게 아닐까 싶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문득 내가 예전에 보았던 떠오른 짧은 영상하나가 떠올랐다. 아마 정세랑 작가님도 공감을 많이 하실 것 같은 영상이다. 어쩌면 "그래, 옥상에서 만나요로 이 말을 하고 싶었어!" 라고 하실지도 모른다.
결혼에 대해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할지..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도 이 영상을 보며 정말 중요한건 무엇일까에 대해 다시금 되새겨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그럼 긴 독후감을 따뜻한 마음으로 마무리 지어본다. :)
우린 어째서 이렇게 슬프도록 스트레이트일까. 이렇지 않았다면 남자친구들, 하고 복수로 말해야하는 극적이고 피곤한 인생을 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아무도 너만큼 파츠가 맞지 않아, 내가 말했을 때 너는 다시 확인했어. 피 에이 알 티 에스, 그 파츠? 하고 물었지. 자주 쓰는 표현인데 그렇게 되물으니 작고 견고한 부속품이 된 것 같았어.
조금 모양이 다른, 하지만 나란히 들어가는 파츠.
소환되어 온 오바가 나 대신 싸웠어. 건성으로 싸웠는데도 아빠를 설득해냈어.
오빠의 결정적인 한마디는 '남들이 흉본다'였지. 어릴 때 내내 때리고 괴롭혔던 걸 그 설득으로 갚았다고 생각해.
그 사람에겐 그렇지 않았나봐. 그 점잖던 사람이 웬 인터넷 싸이트에 내 이름과 얼굴을 다 공개하며 자기 집이 가난하다고 홀어머니를 대놓고 무시하면서 도망간 여자라고 글을 올리기 시작했거든. 가난하기로 치면 나도 가난하고 사실 내가 도망친 건 가난보다 좀더 어둡게 끈적이는 어떤 것으로부터였는데 나느 무슨 녀라고 유행하는 비속어들로 요약되어 버렸어. 그 사람은 새벽에 전화해 돌아와달라고 울면서도 매일매일 글을 올리더라. 욕설이 섞인 게시물과 간절한 전화 사이의 간극이 더 소름 끼쳤어.
-효진 중-
"솔직히 역사는 그 순간을 살았던 그 사람들만의 것이라고 생각해. 그러니 전근대사는 무기로 쓰면 안되고, 근현대사에 있어선 더 철저하게 책임을 져야겠지. 민족주의자 말고 각자 나라에서 좋은 시민들이 되면 지금과는 다를거야. 어디 가서 이렇게 솔직히 말하기는 사실 어렵지만, 요즘 애들은 스스로 무장해제 하느냐고 한마디 들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네 말은 그거잖아. 우리가 언젠가 뿔뿔이 돌아가고 '알다시피'에 다른 멤버들이 들어온다 해도 지금 이 순간은 우리들 것이라서 아무도 가져가지 못한다는 거. 다른 사람에겐 지분이 없다는 거. 효짱 얘기가 그 얘기 아니야?"
-알다시피, 은열 중-
"결혼해서 막 좋은 건 아닌데... 어쨌든 집에서 훌라후프는 돌아가."
"훌라후프요?"
"결혼 전에 어릴 때 생각나서 훌라후프를 샀다가, 나 막 울었잖아. 원룸에서 아무리 자리를 옮겨봐도 훌라후프가 안 돌아가는 거야. 싸구려 옷걸이니 부직포 서랍이니 온통 걸려서.... 이러니저러니 해도 둘이 합쳐 살면 집에서 훌라후프 정도는 돌아가니까, 숨이 쉬어지더라고."
너라면 이해할 수 있을 거야. 모든 사랑 이야기는 사실 정망에 관한 이야기라는 걸. 그러니 부디 발견해줘. 나와 내 언니들의 이야기를. 너의 문명적 사랑을. 그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줄 기이한 수단을.
- 옥상에서 만나요 중 -
지원이 말했을 때 친구들은 뜨악해하는 눈치였다. 여섯명 중에 아이가 있는 사람은 지원과 경윤뿐이었는데, 경윤의 딸은 지원이 보기에 다섯명이라도 키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비교하지 않으려 해도 비교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의 삶은 근사하고 자신만 지옥에 버려진 듯한 날들이 이어졌고, 짓무른 마음을 들키지 애썼지만 종종 들켰다. 그럴 때 친구들이 잠깐 짓는 아연한 표정에 지원은 더욱 비참해지고 말았다.
"아들 둘이라 그런 것 같아. 손자들의 랭크가 달이나 며느리 랭크보다 높은 거야, 어른들 마음엔."
- 이혼 세일 중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