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널 버렸다 생각하지마라 세상은 널 가진 적이 없다

- 에르빈 롬멜 장군 -

 

서장훈씨는 예능프로에서 종종 이런말을 하곤한다. "그게 다 무슨 의미가 있니?" 하도 이 멘트를 많이해서 그를 대표하는 멘트로 자리매김하고 있을 정도이다.

나는 그의 현실적이고 냉철한 판단에 근거한 말에 공감을 할 때가 많았다. 나는 가끔 당장의 어려움이 없더라도 나는 종종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염세적일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마음이 어디서부터 비롯되는 것인지 스스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리곤, 비로소 이방인 책을 접하게 되며 비로소 이러한 마음이 드는 원천이 무엇때문인지 알베르 카뮈의 철학으로 오롯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신이 염세적인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가령 예를들면 우리는 살아가면서 겪는 어려움에 대해 탓을 하곤 한다. 그 탓의 대상이 스스로를 향한 탓, 즉 자조적일수도 있고, 혹은 남 탓이 될 수도 있다. 이 책을 이해한다면, 당신은 어쩌면 어떤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더이상 나의 탓을 돌리거나,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최소한 염세적인 사람으로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이 리뷰의 가장 위에 있는 롬멜 장군의 명언은 우연히 알게된 어느 독일 장군의 명언이다. 다소 냉소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말이지만, 나는 이 서장훈씨의 명대사와, 롬멜 장군의 명언이 알베르 카뮈의 철학을 담고 있는 피상적인 형태의 문장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이방인을 읽고, 강철의 연금술사 속 한 장면이 떠오른다. 작품속 호문쿨루스 킹 브래들리는 주인공 에드워드 엘릭에게 이렇게 말한다.

"길을 걷다가 발밑을 기어가는 벌레를 보고 가엾다고 생각한 적 있나?"

대부분 그렇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무나 그 벌레라는 존재가 미물이라는 생각에 아무런 감정이나 생각이 들지 않을 것이다. 그 가치를 너무나도 낮게 보는 것이다. 호문쿨루스 킹 브래들리는 자신이 인간을 보는 시선또한 그렇다고 말한다. 본인의 기준에서 인간이란 한낱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즉 인간을 향한 냉소다. 인간은 연약하고, 감정에 휘둘리며, 우주의 진리를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자신들만의 관념 속에서 떠돈다는 것이다. "호문클루스 ==> 인간"의 관점을 "인간 ==> 벌레" 로 비유한 킹 브래들리의 가치관 자체는 인간의 존엄을 무시한 발언이므로 잘못되었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언제까지나 인간들의 생각이다. 다시말해 인간들이 벌레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고, 하찮게 대하는 것은 인간의 관념일 뿐, 우주의 관념에서는 전혀 그렇지가 않다.
(잠시 비슷하지만 다른 이야기로, 강철의 연금술사에서 최초의 호문쿨루스 플라스크 속의 난쟁이는 진리 그 자체가 되기 위해 7대 죄악인 분노, 색욕, 식탐, 질투, 탐욕, 나태, 교만을 분리시킨다.
그러나 인간의 결점이라 생각한 이 7대 죄악을 분리시키면 좋은 결과가 있을거라 예측했던 플라스크 속의 난쟁이의 생각과는 달리... 결과는 처참할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쩌면  아라카와 히로무 작가가 알베르 카뮈의 부조리 개념과 그로 인해 우리가 가져야 할 올바른 삶의 태도를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닐지 상상했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인간 사회의 관념과 감정이라는 필터를 걷어내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사람이다.
그렇기에 그는 어머니의 죽음도, 여자친구의 청혼도, 이웃의 범죄 협조도 그저 무덤덤히 예스맨이 되어 수용한다. 이 무심함이 사실은 우주의 진리를 너무 빨리 알아버린 자의 냉철함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무심함이 지난번 읽었던 소설 아몬드의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장애를 가진 주인공을 떠오르게 한다. 그러나 이방인은 아몬드의 주인공처럼 무감정의 소설이 아니다. 이방인은 삶의 부조리함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인간의 태도에 관한 이야기다.

 

 

 

카뮈는 "우주는 인간에게 불친절하다"고 말한다.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도 불행한 사고를 당할 수 있고, 죄 없는 사람이 억울하게 죽을 수도 있다. 인간이 만들어낸 권선징악이라는 관념에 완전히 배반되는 이야기이다. 이 불합리함(부조리)을 인정하고도 계속 살아가려는 자세, 그것이 바로 알베르 카뮈 철학의 핵심이다.

우주에는 정답이 없고, 삶엔 어떤 해석도 부여되지 않을 수 있다. 신도, 진리도, 법도 인간이 만들어낸 관념일 뿐이다. 뫼르소는 이 진실을 깨달은 사람이었으며 그래서 그는 세상과 어긋나는 이방인이 되어버렸다.

킹 브래들리의 말처럼 우리는 벌레를 인간보다 가치 없는 존재, 미물로 여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연 우주적 관점에서도 그러할까?

만일 우리가 우주 전체를 관망할 수 있는 입장이라면 과연 인간이라는 존재가 그토록 위대한 존재일까? 수십억 광년을 넘어 존재하는 별들과 행성들 그리고 그 속에서 태어났다 사라지는 수많은 존재들 앞에서 인간이란 종은 고작 수십 년의 생을 살고 언젠가 먼지처럼 사라지는 유한한 존재일 뿐이다.

벌레가 우리보다 작고 약하다는 이유로 열등하다고 말할 수 없다면 인간이라고 해서 우주의 기준에서 특별한 존재라 말할 수 있을까? 인간은 자신들이 만든 가치 체계 안에서만 고귀하며 자신들이 세운 법과 윤리 안에서만 중심에 선다.

그러나 우주의 관점에서는 그런 기준 따위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 짓는 집, 법, 문화, 사랑, 그리고 신앙까지도 모두 우리끼리 정한 규칙과 믿음일 뿐 그것이 우주적 진리인 것은 아니다. 결국 인간도, 벌레도, 별도, 광물도 모두 우주 앞에서는 같은 무게의 '존재'일 뿐이다. 인간이 스스로를 더 위대하다고 여기는 것은 어쩌면 근거 없는 오만함일지 모른다.

 

 

 

"결혼하려면 사랑해야 한다."
"노인을 공경해야 한다."
"부동산을 사면 이 땅은 내 소유가 되는 것이야."
"촉법소년은 마땅히 살인을 저지르더라도 감안해주어야 해."

이러한 관념들, 종교, 그리고 법, 사주, 타로 등...
이 모든 건 인간이 만들어낸 기준과 인간들만의 정답이다. 만일 우주가 지성이 있는 존재라면, 인간들이 땅에 선을 긋고 네 것, 내 것하는 것을 보면 코웃음을 칠지도 모를 일이다.

우주가 별다른 이유없이 우리에게 불친절하다는것을 이해하기 위해 본인의 최대한의 재수없는 상황을 떠올려 보라.
가령 따돌림을 당한 경험, 취업에 실패했던 경험, 실연의 아픔, 큰 병에 걸렸던 경험 등...
그런데 우주는 당신의 고통을 겪고 있는데 당신에게 이렇게 DM을 보낸다.

"ㅋㅋ 걍 심심해서 해본건데... 많이 힘듦?? 근데 앞으로도 내 맘대로 할거고 딱히 이유 없어 알아서 해~ :D"

…이쯤 되면 인생에 대해 혈압이 오를 수밖에 없다.
'대체 원인이 뭘까 나의 삶에 대한 태도가 잘못된 걸까?'
'왜 아무 잘못도 없는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기는 거지?'
억울한가?

이방인의 뫼르소는 이러한 세상의 무응답에 대해 잘 이해하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과연 세상에 냉소적이고 무책임하고 수동적으로 임하는 뫼르소가 올바른 것일까? 카뮈는 우리더러 이렇게 살라고 말하는 것일까? 사실 그렇지는 않다.

알베르 카뮈는 리뷰에서 작품을 쓸 때 명확한 플랜을 가지고 있었다고 설명한다. 그 파트는 아래 세 파트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거부(이방인, 시지프 신화)
둘째, 긍정(페스트, 반항하는 인간)
셋째, 사랑

그러나 카뮈는 교통사고라는 인생 최대의 부조리를 맞이하게 되며 세번째 플랜을 실현하지 못한 채 삶을 마쳤다.
이방인은 카뮈 철학의 첫 단추인 셈이다.
이방인 속의 뫼르소는 태도의 방향성이지, 그가 성숙한 태도를 가졌고 온전한 의식을 가지는 현인이라 볼 수는 없다.

 

 

 

자, 아까 그 우주가 당신에게 보낸 DM으로 돌아가보자, 어쩌면 당신은 아직도 내가 상상해보라고 한 일 때문에
괜히 당신은 경험한 부조리에 대해 억울한 감정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바로 여기서 알베르 카뮈는 이 부조리한 진실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맞아. 말도 안 되지. 아무 이유도 없어. 근데 그게 현실이야. 그리고 너는 그 안에서 살아야 해."
카뮈는 이 불합리함에 화를 내거나 회피하지 않는다. 대신 차분히 말한다. 우주는 원래 그런 거라고.
세상이 너에게 아무 의미도 주지 않는다면 너 스스로 의미를 만들면 된다고.

카뮈는 말한다. 부조리는 없앨 수 없다. 하지만 그걸 견디는 방식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 세상의 무응답은 우리가 어찌 할 수 없는 일이란 걸 인정하는 것부터가 시작인 것이다.

그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도 우리는 햇볕을 느끼고 수영도 하고 좋아하는 사람과 산책하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사랑하고, 창조하고, 때로는 웃기도 하며 살아간다.

이게 바로 '시지프의 신화'에서 말한 반항의 정신이다. 절대 이길 수 없는 게임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돌덩이를 끝까지 밀고 올라가는 시지프처럼 말이다.

카뮈는 우리가 절망하지 않기를 바랐다. 우주가 아무 의미도 없이 우리를 흔든다고 해도 우리는 그 속에서 살아 숨 쉬며, 의미를 스스로 만들어가는 존재라고. 그게 인간이고 그게 진짜 삶이라고.

 

 

 

영화 트루먼 쇼에서 트루먼이 진실을 알게 된 뒤의 행동을 떠올려보라.

시나리오와 규범이 정해진 세트장에서 계속 살아갈 것인가? 그 세계가 편안하고 안전하다면 트루먼은 다시 돌아가기를 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트루먼은 불확실하고 위험하더라도 진짜 세상을 선택한다. 거짓된 의미가 아닌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삶의 의미를 선택한 것이다.

뫼르소도 이와 유사하다. 그는 세상이 만들어놓은 감정의 규범, 도덕적 잣대, 종교적 회개 모두를 거부한다. 대신 자신이 진짜로 느끼는 감각, 햇살과 바람, 바다의 냄새 같은 것들을 끝까지 지키고자 한다. 그는 마지막까지 죽음을 받아들이며 스스로의 삶을 책임지는 태도를 택한다. 그 삶이 부조리하더라도 말이다.

트루먼 쇼의 마지막 장면에서 트루먼은 문을 열고 세트장을 떠난다. 두 사람 모두 부조리를 외면하지 않고, 오히려 정면으로 마주한 사람들이다.

 

 

 

이방인은 확실히 쉽게 이해되는 책은 아니다. 어렵다. 그러나 공부할수록 그 깊이에 매료되었다. 이래서 사람은 인문학을 읽어야 하나보다.

세상의 규정된 정답보다, 도무지 뜻대로는 전혀 흘러가지 않으려는 엔트로피의 삶 속에서 더 넓고 깊은 시야를 갖게 해주는 것. 그런 의미에서 이방인은 나에게 다시 질문을 던지는 책이었다.
기회가 닿는다면 시지프 신화에 대해서도 읽어보고 이야기 해보고 싶다.

주말이 오면 나는 알람 소리나 외부의 간섭 없이 오롯이 내 몸이 충분히 쉰 만큼 자연스럽게 눈을 뜰 수 있어 참 좋다.
그렇게 팔팔한 컨디션으로 깨어나 수영장 물살을 시원하게 가르고 햄버거 하나 배불리 먹은 뒤에는 햇살 좋은 카페에 들러 책장을 넘긴다.

세상은 여전히 내게 무응답일지 모르지만 내가 선택하고 누릴 수 있는 작은 영역들 속에서 나는 분명히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토록 불친절한 우주 한가운데에서조차 이렇게 내 리듬을 지켜내며 살아가는 하루가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오늘은 조금은 따뜻했다.

 

 

 

저녁에 마리가 나를 보러 와서는 자기와 결혼할 마음이 있는지 물었다. 나는 그런다고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지만, 그녀가 원한다면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는 자기를 사랑하는지 알고 싶어 했다. 나는 이미 한 번 말했듯이, 그건 아무 의미도 없지만 그녀를 사랑하는 것 같지는 않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왜 나랑 결혼을 하죠?" 그녀가 말했다. 나는 그녀에게,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당신이 원한다면 우리가 결혼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제안한 사람은 그녀였고 나는 그러자고 말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던 거라고.

 

 

 

전에 나는 감옥 안에서는 결국 시간관념을 잃게 된다는 글을 분명히 읽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내게 별로 의미가 없던 말이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루하루가 얼마든지 길어질 수도 짧아질 수도 있다는 그 점이. 아마도 살아 내기에도 길지만, 너무나 늘어나서 종국에는 쌓이고 넘치게 되는 것이 하루였다. 그들은 이름을 잃었다. 단지 어제 또는 오늘이라는 단어만이 내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이 사람이 범죄자의 심정으로 어머니의 장례를 치렀기에 기소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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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끔 일상 속에서도 수학적 귀납법으로 생각해 보는 걸 좋아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수학적 귀납법은 어떤 사실이 계속해서 참일 거라고 증명하는 방법 중 하나다. 처음에 가장 작은 경우에서 그 사실이 성립함을 확인하고, 그다음에는 '만약 𝑛번째에서도 성립한다면, 𝑛+1번째에서도 성립할 것이다'라는 식으로 이어나간다.
마치 도미노를 차례로 넘어뜨리는 것과 비슷하다. 첫 번째 조각만 넘어지면, 그다음 것도 넘어지고, 또 그다음 것도 쓰러지는 식이다.
나는 이런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가 있다. 예를 들면, 아침에 출근할 때 늘 같은 시간에 같은 버스를 탄다고 해보자.
첫날, 둘째 날, 셋째 날 모두 맨 뒷자리의 같은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면, '내일도 아마 같은 자리에 앉을 수 있겠지'라고 기대하게 된다.
물론 예상이 빗나갈 수도 있지만, 어제와 오늘이 같았으니 내일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 다른 예로, 친구가 한 번, 두 번, 세 번 연속으로 약속 시간에 늦었다면 나는 자연스럽게 '다음번에도 늦을 가능성이 높겠다'라고 예상하게 된다.
한두 번은 우연일 수 있지만, 세 번이나 반복되었다면 그다음에도 같은 패턴이 이어질 거라고 판단하는 것이다.(영화 트루먼쇼에서 짐 캐리가 삶의 패턴을 발견하고 이곳이 가짜 지구임을 깨달았을때를 상상해보라) 이처럼 어떤 일이 반복되면 우리는 앞으로도 같은 일이 계속될 거라고 믿게 된다. 이것을 우리는 수학적 귀납법에 따른 추론이라 할 수 있다.

 

 

 

왜 갑자기 귀납법 같은 이야기를 하느냐?
책 속의 주인공 윤재는 사람의 예감에 대해 이렇게 표현한다. 사실 사람들이 흔히들 말하는 "내 예감이 그래..."라거나 "내 예감이 적중했어!"라는 말들도 결국 우리가 살아오면서 쌓아온 경험의 결과라고.
무의식적으로 축적된 기억이 패턴을 만들어 내고 그 패턴을 바탕으로 우리는 닥쳐올 미래를 짐작한다. 그러니까 우리의 예감 역시 일종의 학습의 산물인 셈이다.
그래서 나는 문득 수학적 귀납법을 떠올렸다. 윤재의 삶이나 우리나 별반 다르지 않다고... 당신은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어쩌면 T 성향이 강한 사람들은 많은 공감을 할 것 같다. 이 책은 궁극적인 T를 가진, 순도 100% T가 주인공인 이야기다. 어쨌든, 어떤 사실이 참임을 증명할 때 가장 작은 경우에서부터 출발해 그것이 한 단계씩 이어진다고 가정하며 논리를 확장해 나가는 과정...
윤재의 말과 수학적 귀납법은 닮아 있었다. 우리는 한 번의 경험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세 번이 되면서 결국 그것이 어떤 법칙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예감'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윤재에게는 그런 감각이 쉽게 와닿지 않았다. 편도체가 작아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하는 그는 기쁨도 슬픔도 두려움도 분노도 본능적으로 알아차릴 수 없었다.
세상사는 수학이 아니고 복잡하고 변수도 상상조차 못할만큼 다양하기에 그만큼 더 인과관계를 파악하기 어려웠다고나 할까...
그럼에도 세상은 그에게 마치 수학 공식처럼 이해해야 하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직감적으로 알고 있는 감정들을 윤재는 논리로 배워야 했다. 이러한 세상사에 대한 인풋과 아웃풋을 어머니는 일일히 할멈과 함께 윤재의 머릿속에 주입식으로 넣으려 부단히 노력한다.
그런 윤재는 삶의 방향을 정하는 방식 역시 남들과 달랐다. 감정이 없는 그가 경험을 통해 배우고 깨닫는 것들은 단순한 정서적 반응이 아니라 하나의 확실한 흐름이었다. 'A는 B다'와 같은.
그 수도 없이 많은 'A다 B다' 속에서 윤재는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세상과 관계를 맺어 갔다. 어머니의 가르침을 통해 폭력을 피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고 할멈을 통해 정이라는 감각을 간접적으로나마 익혔다.
곤이와의 만남을 통해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미묘한 줄타기를 경험했다. 그 미묘함은 늘 상대들의 몫이었지만 말이다.
그가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은 결국 그의 삶을 구성하는 '법칙'이 되었고, 그 법칙이 차곡차곡 쌓이며 윤재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해 나갔다.

 

 

 

나는 윤재의 이야기를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감정을 타고난 사람들에게도 사실 우리는 언제나 배워가며 살아가는 게 아닐까. 우리가 분노할 때, 슬퍼할 때, 혹은 사랑을 느낄 때, 그것이 정말로 본능적인 감정에서 비롯된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살아오면서 경험 속에서 배워온 결과일까? 흑백논리로 둘중하나라고 대답할순 없다. 분명 우리가 살아오며 쌓아온 경험치가 녹아져 있을 것이기에.
윤재가 감정을 배워가듯이 우리도 삶 속에서 조금씩 감정을 단련하며 살아간다. 처음에는 쉽게 화를 내던 사람이 점점 더 인내를 배우고 실수에 절망하던 사람이 실패를 딛고 일어나는 법을 배운다.
그것이 쌓이고 쌓여 어느 순간 우리는 더 성숙한 사람이 되어 간다. 수학적 귀납법처럼 하나의 작은 경험이 다음 단계로 이어지고 그다음이 또다시 반복되면서, 결국 우리는 스스로를 우리들이 원하는 모습대로 다듬어나간다.

 

 

 

나는 한편 윤재가 감정이 없으면서도 엄마와 할멈을 지키려는 소설 속 곳곳의 장면들을 읽으며 의아했다. 이것은 과연 학습된 결과물로써 보여지는 것일지, 아니면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행한 것인지. 고민했다.
이는 단순한 모순처럼 보이지만, 윤재의 행동을 깊이 들여다보면 감정이라는 것이 반드시 따뜻한 온기에서만 비롯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엄마와 할멈에게 의존하며 살아왔다. 그의 세계에서 유일하게 존재했던 두 사람, 자신을 이해하려 노력했던 이들이 사라진다면 그는 삶을 지속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을지도 모른다. 감정은 없지만 관계의 지속성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작동한 셈이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윤재는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사람들'에 대해 의문을 가진다. 그는 멀리 있는 불행을 외면하는 사람들을 보며, 자신이 공감할 수 없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그 틈에서 그는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만약 감정이 없는데도 누군가를 지키려는 마음이 생긴다면 그것은 '평범해지고 싶다'는 바람과 맞닿아 있지 않을까?
그는 감정을 갖지 못한 채 태어났지만, '정상적'인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도전한다.
우리는 작품속에서 그가 비록 감정은 없지만 하다는 사실은 알 수 있다. 감정이 없어도 항상 ''을 택하려 노력한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에 끝내 성장하고 만다. 코마상태에 있다가 결국 정신이 돌아온 엄마와 마주하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통해서...
윤재는 "비극과 희극을 영원히 나눌 수 없다"고 말한다. 그의 삶도 그렇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지만 누군가를 지키려 했다. 공감하지 못하지만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고민한다. 그리고 이 모든 고민 속에서 자신만의 답을 찾으려 한다.
그의 보호 본능은 결국 인간이기에 갖게 되는 어떤 '방향성'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감정을 기반으로 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모두 살아가면서 자신의 방식대로 누군가를 소중히 여기고, 어떤 의미를 만들어간다. 윤재 또한 그저 자신의 방식으로 사랑을 배워가는 과정 속에 있었고
결국 그 결실을 맺은 것이다. 빵집 아저씨 심박사의 말처럼... 노래를 참 못하지만 노력으로 좋아하는 노래 한소절은 잘 부를 수 있는 사람처럼...

 

 

 

그리고 곤이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몬드에서 가장 강렬한 캐릭터 중 하나는 단연 곤이일 것이다.(참 그런데 학창시절에 그런 친구들이 하나둘이 꼭 있었던 기억이 난다. 걔네들은 모두 이런 배경이 있었던 걸까...?) 그는 폭력적인 환경에서 자랐고 세상과의 소통 방식도 거칠었다.
윤재와 정반대의 위치에 있는 듯 보이지만 소외된 계층이라는 것은 공통적으로 분명했다. 어쩌면 그 누구보다도 윤재를 가장 깊이 이해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곤이는 윤재에게 단순한 친구나 적대자가 아니라 감정을 배우게 한 특별한 존재였다.
곤이가 나비를 찢는 장면은 그의 심리와 윤재에 대한 태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윤재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채 살아왔고 사람들의 공포나 슬픔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곤이는 이 세상의 잔혹함과 부조리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고자 했다. 그는 윤재가 단순한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마음의 고통을 느끼길 원했다.
곤이가 나비를 찢으며 윤재에게 보여주려 했던 것은 세상이 결코 아름답기만 한 곳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인간의 감정은 때때로 잔인함을 동반하며 그 잔인함을 외면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윤재는 처음엔 곤이의 행동을 단순한 폭력으로만 받아들였다. 또 이 와중에도 지극히 이성적인 판단으로만 나비의 안녕을 바랐다. 어떠한 감정도 모르지만, 그게 옳다고 배웠으므로...
곤이는 윤재가 무덤덤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더 거칠게 굴었고 결국 폭력을 통해서라도 윤재를 자극시키고 싶어 했다. 그러나 윤재는 곤이를 단순한 폭력적인 존재로만 인식하지 않았다.
그는 곤이의 행동 이면에 숨겨진 이유를 이해하려 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곤이의 내면에도 깊은 상처와 외로움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몸이 요즘 이곳저곳이 성치가 않다.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라더니 여기저기가 고장이 나고있다. 정신은 곧 육체와 직결된다. 어지럽혀진 머릿속을 비우며 쓰느라 글이 더욱 두서없게 느껴진다. 내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께 양해를 구해본다. 글을 좀 마무리 해보자면 윤재에게 곤이는 세상이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가르쳐 준 사람이었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자신과는 달리 곤이는 감정의 풍파를 온몸으로 맞으며 살아온 외로운 사람이었다.
윤재는 곤이를 통해 감정을 배우고 세상과 연결되는 법을 익히게 된다. 반대로 곤이도 윤재와의 관계를 통해 폭력이 아닌 방식으로 누군가와 관계를 맺을 수 있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곤이와 윤재는 서로를 변화시켰다. 곤이는 윤재에게 감정의 가능성을 열어 주었고, 윤재는 곤이에게 폭력이 아닌 이해로 다가갈 수 있는 길을 보여 주었다. 그들의 관계는 단순한 우정 이상의 의미를 가지며 서로 각자가 가진 어떠한 부재, 불완전함을 채우는 과정을 보여주었다고 생각이 든다.
나는 아몬드를 읽으며 우리가 어떤 감정을 타고나든 상관없이 결국 그것을 어떻게 다듬고 쌓아가느냐가 중요하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여기선 감정을 메인으로 다루었으나 감정뿐만이 아니다. 당신이 스스로에게 느끼고 있는 부재, 불완전함 모든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윤재는 나름대로 삶을 배우고 이해하고 사랑을 배워갔다. 그리고 나는 그런 윤재의 성장 속에서 우리 역시 끝없이 배우고 변화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다시금 떠올렸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때로 불안하고 두렵고 때로는 감정에 휩쓸리기도 하지만 결국 그 모든 경험이 우리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 된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각자 스스로에게 바라던 바에 완전할 순 없지만, 평생 아마도 불완전하겠지만, 완전에 근사하기 위해 차곡차곡 쌓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수학적 귀납법처럼.

 

 

 

엄마는 임신 중에 겪은 스트레스나 몰래 피웠던 한두 개비의 담배, 막달에 못 참고 몇 모금쯤 홀짝인 맥주 따위를 후회했지만, 사실 내 머리통이 왜 그 모양인지는 너무 뻔하다. 그저 운이 없었던 거다. 생각보다 운이라는 놈이 세상에 일으키는 무지막지한 조화들이 많으니까.

 

 

 

그러자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뭐든 여러 번 반복하면 의미가 없어지는 거야. 처음엔 발전하는 것처럼 보이고 조금 더 지난 뒤엔 변하거나 퇴색되는 것처럼 보이지. 그러다 결국 의미가 사라져 버린단다. 하얗게.
사랑. 사랑. 사랑. 사랑. 사랑. 사.랑. 사아아라아아앙. 사랑.사랑사. 랑사. 랑사.
영원. 영원. 영원. 영.원. 여어엉. 워어어언.
자, 이제 의미가 사라졌다. 처음부터 백지였던 내 머릿속처럼.

 

 

 

B 사감은 밤중에 학생들의 러브레터를 훔쳐 읽으면서, 남녀 목소리를 번갈아 내며 1인극을 펼친다. 그 장면을 몰래 지켜본 세 명의 여학생은 저마다 반응이 다르다. 하나는 B사감이 우습다며 비웃고 다른 하나는 B 사감이 무섭다며 몸을 떨고, 세 번째 여학생은 B 사감이 불쌍하다며 눈물을 흘린다.
늘 한 가지 정답을 제시하던 엄마의 가르침에는 좀 위배됐지만 난 그런 결말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마치 이 세상에 정해진 답은 없다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남들이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한다고 해서 꼭 정해진 대응을 할 필요도 없는 게 아닐까. 모두 다르니까, 나같이 '정상에서 벗어난 반응'도 누군가에겐 정답에 속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엄마는 늘 집단생활에는 희생양이 필요하다고 얘기했었다. 엄마가 내게 그 지난한 교육을 시킨 것도, 내가 그 희생양이 될 확률이 매우 높기 때문이었다. 엄마와 할멈이 사하진 지금 엄마의 예언은 현실이 되었다.

 

 

 

부모는 자식에게 많은 걸 바란단다. 그러다 안되면 평범함을 바라지. 그게 기본적인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말이다, 평범하다는 건 사실 가장 이루기 어려운 가치란다.
생각해 보면 할멈이 엄마에게 바란 것도 평범함이었을지 모르겠다. 엄마도 그러지 못했으니까. 박사의 말대로 평범하다는 건 까다로운 단어다. 모두들 '평범'이라는 말을 하찮게 여기고 쉽게 입에 올리지만 거기에 담긴 평탄함을 충족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내게는 더욱 어려운 일일 거다. 나는 평범한을 타고나지 않았으니까. 그렇다고 비범하지도 않으니까. 그 중간 어디쯤에서 방황하는 이상한 아이일 뿐이니까. 그래서 나는 한번 도전해 보기로 했다. 평범해지는 것에.

 

 

 

ㅡ 근데 잠은 잘 와? 학교는 어떻게 다녀? 망할, 가족이 네 앞에서 피 흘리면서 죽었는데.
ㅡ 그냥. 살게 돼. 나보다 오래 거릴지는 몰라도 다른 사람들도 얼마 안 돼 먹고 자고 다 할걸. 사람은 살게 돼 있는 존재니까.

 

 

 

ㅡ몰랐던 감정들을 이해하게 되는 게 꼭 좋기만 한 일은 아니란다. 감정이란 참 얄궂은 거거든. 세상이 네가 알던 것과 완전히 달라 보일 거다. 너를 둘러싼 아주 작은 것들까지도 모두 날카로운 무기로 느껴질 수도 있고, 별거 아닌 표정이나 말이 가시처럼 아프게 다가오지도 하지. 길가의 돌멩이를 보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대신 상처받을 일도 없잖니. 사람들이 자신을 차고 있다는 것도 모르니까. 하지만 자신이 하루에도 수십 번 차이고 밟히고 굴러다니고 깨진다는 걸 '알게 되면', 돌멩이의 '기분'은 어떨까.

 

 

 

나비의 날개를 찢던 날, 곤이가 내게 무언가를 가르치려다가 실패한 그날, 어스름이 내리던 무렵. 바닥에 짓이겨진 나비의 잔해를 닦아 내며 곤이는 몹시 울었다.
ㅡ두려움도 아픔도 죄책감도 다 못 느꼈으면 좋겠어....

 

 

 

내게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처음엔 할멈을 찌른 남자의 마음이 궁금했다. 하지만 그 질문은 점차 다른 쪽으로 옮겨 갔다. 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척하는 사람들. 그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나 같은 천치도 안다. 그 아이가 아파하고 있다는 걸. 끔찍하고 불행한 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걸.
하지만 묻지 않았다. 왜 웃고 있느냐고. 누군가는 저렇게 아파하고 있는데, 그 모습을 등지고 어떻게 당신은 웃을 수 있느냐고.
비슷한 모습을 누구에서나 볼 수 있었기 떄문이다. 채널을 무심히 돌리던 엄마나 할멈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멀리 있는 불행은 내 불행이 아니라고, 엄마는 그렇게 말했었다.

 

 

 

멀면 먼 대로 할 수 있는게 없다며 외면하고, 가까우면 가까운 대로 공포와 두려움이 너무 크다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껴도 행동하지 않았고 공감 한다면서 쉽게 잊었다.
내가 이해하는 한, 그건 진짜가 아니었다.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았다.

 

 

 

그 이야기가 어떤 이야기가 될지는 나도 모른다. 말했듯이, 사실 어떤 이야이가 비극인지 희극인지는 당신도 나도 누구도, 영원히 말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딱 나누는 것 따윈 애초에 불가능 한 건지도 모른다. 삶은 여러 맛을 지닌채 그저 흘러간다.
나는 부딪혀 보기로 했다. 언제나 그랬듯 삶이 내게 오는 만큼. 그리고 내가 느길 수 있는 딱 그만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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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pin Waltz in A minor B.150

 

 

거짓말

사람은 누구나 마음 한구석에 묻어둔 말들이 있다. 차마 꺼내놓지 못한 말들. 혹은 너무 늦어버린 말들.

하지만 어떤 말들은 끝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거짓말이 되어버린다. 해미의 거짓말 노트도 그랬다.

해미의 거짓말 노트는 단순한 거짓말을 복기하기 위한 노트가 아니었다. 엄마가 조금이라도 덜 아파하길 바라는 마음이었고, 언니를 잃고도 남아 있어야만 했던 자신의 존재 이유 같은 것이었다. 해미는 매일 노트에 적었다.

나는 어떤 친구와 친하게 지내고 있고, 그 친구와 어떤 일을 벌였는지 상상하며 말이다.

하지만 해미의 진짜 하루는 그 문장과 정반대였겠지. 점심시간에 혼자 구겨진 도시락을 열었다가 그대로 덮었을지도 모른다.

친구들의 웃음소리를 멀리서 듣기만 하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교실 구석에서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을지도.
그러나 그런 솔직한 이야기들은 노트에 적히지 않았다. 엄마가 해미의 거짓말을 듣고는 조금이라도 안심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으니까.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게 정말 좋은 것일까? 누군가를 위해 꾸며낸 말들이 결국 내게는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되돌아올 수도 있는 건 아닐까?

거짓말을 쌓아 올릴수록 해미는 점점 더 고립되었을지도 몰랐다. 아무에게도 진짜 마음을 들키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감춰야 했을 것이다.

엄마가 걱정하지 않도록. 엄마가 버텨낼 수 있도록. 하지만 엄마를 위해 쓴 그 거짓말들이 어쩌면 해미 자신을 더욱 외롭게 만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 속에서 해미의 감정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것도, 결국은 사랑일까?" 하지만 어떤 사랑은 끝끝내 오해로 남고 어떤 사랑은 끝내 닿지 못한 채 스러진다.

 

 

 

이별

어떤 기억들은 시간이 지나도 흐려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선명해지고, 깊어진다.

잊히지 않을 줄 알았던 감정들은 서서히 옅어지는 법이라지만 그럼에도 끝끝내 사라지지 않는 감정들이 있다. K.H와 선자 이모의 이별이 그랬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나눈 말들은 어떤 것이었을까. 따뜻한 인사였을까 아니면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눈빛만 주고받았을까.
어떤 작별은 너무 평범해서 그 순간에는 그것이 마지막인 줄조차 알지 못한다. 그래서 더 애달프다.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 믿고 돌아선 그 길이, 사실은 끝이었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닫게 되니까.

선자 이모는 평생 그 순간을 가슴에 품고 살았을 것이다. 어쩌면 한 번쯤은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우연히라도 마주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은 언제나 무심하고 내 마음이 어떤지는 전혀 관심이 없다. 기적 같은 일들은 좀처럼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흘려보낸 시간이 어느 순간 너무 늦어버렸다는 걸 깨닫게 만든다.

그들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봄볕이 나뭇가지를 스치면 꽃이 피어나듯이 그들의 마음도 피어나기는 했지만 끝내 열매를 맺지는 못했다.

바람이 불면 꽃잎은 쉽게 떨어지고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것처럼.
이모가 해니에게 남긴 말이 마음에 남는다. "소설이 잘 풀려서 꼭 해피엔딩이 되면 좋겠다."

어쩌면 그 말은 단순히 소설에 대한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사랑을 적어도 이야기 속에서는 이루어지게 하고 싶었던 것이겠지..

적어도 해미의 소설에서는, 두 사람이 다시 만나고 사랑을 이루고 오래도록 행복하기를 바랐던 건 아닐까.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소설과 다르다. 끝끝내 손에 쥘 수 없는 모래 같아서 아무리 움켜쥐려 해도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고 마는 것이다.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면서 고민에 빠졌다. 끝내 전하지 못한 말들 오해로 남겨진 감정들 차마 잡지 못한 손.. 그 모든 것들이 아득한 바람이 되어 가슴을 할퀴었다.

세상에 선의의 거짓말이 있다면 난 두 가지 거짓말이 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를 다치게 하지 않기 위해 하는 거짓말, 그리고 나 자신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 하는 거짓말.

해미의 거짓말이 첫 번째였다면, 선자 이모의 침묵은 두 번째였을 것이다. 어쩌면 나는 그 둘 다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랑은, 결국 거짓말 없이 마주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게 설령 상처를 남기더라도. 그게 설령 끝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예고 없이 내 인생에서 사라져버릴 것을 알았더라면. 그랬다면 나는 언니의 티셔츠를 훔쳐 입고 소풍을 가지도 않았을 것이고 언니가 싫어하는 걸 알면서 일부러 언니를 이름으로 부르지도 않았을 것이고, 엄마가 언니에게 시킨 심부름을 내게 떠넘겨도 짜증을 내지않고 다 해주었을 것이다. 나에게는 언니를 위해 무언가를 해줄 수 있는 기회가 더이상 없는데 한수에게는 남아 있다는 사실에 불쑥 화가 났다. 너무 불공평해. 불현듯 나는 줄곧 내가 그렇게 생각해왔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자 한없이 서글퍼졌다. 열네 살에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은 나처럼 고통스러웠으면 하고 바라는 그런 인간이 나라는 걸 아아버렸기 때문에. 그건 내가 처음으로 또렷하게 마주한 내 안의 악의였다.
"이모, 소용없는 줄 알면서도 뭔가를 하려는 바보 같은 마음은 대체 왜 생기는 걸까요?"
나는 내 하얀 운동화 위로 녹아서 떨어진 아이스크림을 시무룩이 바라보다가 이모에게 물었다. 이모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햇따.
"간절하니까 그런 게 아닐까?"

 

 

 

그리고 그 행간에 잔잔히 흐르던 격정과 애달픔을 느낀 사람이라면 누구든, 선자 이모가 첫사랑의 이름을 듣는다면 동요할 수밖에 없으리라 확신했을 것이다.
숨기려해도 감춰지지 않는 게 사랑일 테니까. 봄볕이 나뭇가지에 하는 일이 그러하듯 거부하려 해도 저절로 꽃망울을 터뜨리게 하는 것이 사랑일 테니까. 무엇이든 움켜쥐고 흔드는 바람처럼 우리의 존재를 송두리째 떨게 하는 것이 사랑일 테니까.

 

 

 

우재는 정말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말하며 자조적으로 웃곤 했지만 나는 사람이 겪는 무례함이나 부당함은 그것이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물에 녹듯 기억에서 사라지는 게 아니라 침전할 뿐이라는 걸 알았고, 침전물이 켜켜이 쌓여 있을 그 마음의 풍경을 상상하면 씁쓸해졌다.

 

 

 

울고 있는 아이의 모습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정원의 한 모퉁이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초가을의 따사로운 햇빛이 떨어져 있을 때. 대체로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게다가 가을비는 쓸쓸히 내리는데 사랑하는 이의 발길은 끊어져 거의 한 주일이나 혼자 있게 될 때.

 

 

 

사람들은 어떤 감정을 영원히 간직할 것처럼 착각하지만 대개 그것들은 서글플 만큼 빨리 옅어진다. 물론 나의 경우에는 그렇게 되기까지 우재의 존재가 도움이 되었을 테지만.  우재는 조심스럽지만 분명한 보폭으로 내 삶에 걸어들어오고 있었는데, 그 사실은 내 마음을 환하게 하면서 동시에 어둡게 했다.

 

 

 

이제 와서 보면 선자 이모가 돕고 싶었던 건 내 소설 속 두 주인공들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모가 돌아오고 족발을 같이 맛본 후 이모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현관에서 신발을 신다 말고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나만 들을 수 있게 귓속말로 "소설이 잘 풀려서 꼭 해피엔딩이 되면 좋겠다"라고 속삭였으니까.

 

 

 

"해미야,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처한 위치에서 상대를 바라보잖아? 그건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고. 하지만 가끔 그 사람이 나 때문에 느낀 모멸감을 되갚아주기 위해 인적이 드문 새벽 일부러 찾아와 똥을 누고 간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그래서 그 똥을 떠올리면 그런 생각이 들어. 아무리 인간에게 한꼐가 있다 해도,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그토록 모멸감을 느끼게 해서는 안 되었던 게 아닌가 하는."

 

 

 

네 입을 통해선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사랑의 말이 가득한 편지였어. 너의 말로, 보다 분명하고 선언적인 말로 듣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랐던 열렬한 고백들이 거기에 적혀 있었지. 우리는 단 한 번도 세상의 많은 이들처럼 뜨거운 고백을 주고받지 못했잖아. 네게 듣고 싶은 말이 있어도 묻질 못했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다른 말로 대신해야 했어. 널 향해 꺼지지 않는 숯처럼 타오르는 마음이 너를 상하게 할까봐, 너를 세계에서 고립시키고, 외롭게 만들고, 이해받지 못하는 사람으로 만들까봐. 너의 손에 깍지를 낀 채 걷고, 너의 긴 속눈썹에 입술을 갖다대보고, 네 향긋한 품에 내 얼굴을 묻고 잠드는 상상을 수도 없이 했으면서도, 나는 네 마음을 그저 짐작하고 내 마음을 조심스레 암시하면서 두려워만 하다가 너를 잃었다.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네가 결혼을 한다고 했을 때는 죽고 싶었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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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7에서 다루는 철학적인 문제는 이미 여러 SF소설이나 영화에서도 다루어진다.
그러나 미키7에서의 차별점이 있다면,
복제인간이 단 한명. 미키 뿐이라는 것이다.
작품속에서는 그 누구에게도 미키의 고통과 상처에 대해서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넌 죽어도 그냥 되살아나면 되잖아?"
이런 따위의 말로 표면적으로 보여지는 장점에 대해서만 이야기 한다.
그야 당연히 이런건 인간의 모순성이니까..
우리들은 남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자기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납득할 수 없어한다.

 

 

 

이건 참 지독한 일이다. 진짜로 지독해서 못견딘다...
어쨌던 이러한 태도는 절친과 심지어 여친마저도 미키의 진짜 내면의 모습에 공감해주지 않는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 미키의 죽음에 대해 거짓말을 일삼는 베르토...
죽음에 직면한 미키를 안타까워하지만 곧 다음 새로운 미키를 기다리는 여친...
미키는 그러나 그러려니한다. 미키는 그렇게 사실 잘난 존재도 아니다.
그리 똑똑하지도 않으며 피지컬적으로 엄청난 퍼포먼스를 자랑하는 것도 아니다.
묵묵히 자신에게 처해진 환경, 그리고 점진적으로 억울해지고 답답해지는 상황속에서
무언가 주인공답게 멋지게 상황을 해결한다던가 그런 것은 없다.
그는 바보같은 행동들을 얼렁뚱땅 하면서도 그저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무언가 어리숙하고 부족한 모습임에도, 주변에서 스스로의 존재를 부정당하면서도
조용히 자신의 일을 해결해나가는 모습이 나에겐 감동적으로 느껴졌다.
특히나... 미키2가 죽을 때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결국 헬맷을 벗어버리는 장면은 너무 슬펐다...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 미키3에게 다음을 맡기는 미키2.
어쩌면 미키2는 자신의 부활을 믿지 않았을 수 있다.
그저 이것으로 미키2의 유일한 존재이고, 미키3은 다른 개체임을 이미 자각하고
그의 삶을 울부짖으며 마무리 지었을 수도 있다.

 

 

 

한편 이 책을 읽으니 옛날에 내가 친구를 위해 써보았던 아짱여행기에 대한 이야기를 안할 수가 없다.
아짱여행기의 JS싸이언쓰 대표는 베타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아짱에게 분자단위로 재조립된 인간에 대해 언급하며
그래도 갈것이냐 겁을 준다. 이에 대해 아짱은 '지금의 나를 어떻게 살 것인가'가 중요하다며 맞받아쳤고, 이에 JS대표는 수긍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아짱은 베타로 되돌아가는 것을 택했을 것이지만 말이다.
사실 소설상의 설정상 단일하게 존재하는 의식(또는 영혼?) 완벽히 이동한다는 설정(영화 아바타를 상상해보라)이므로 J대표는 단지 아짱에게 복제본으로 태어나는 것처럼 겁을 준 것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아짱은 어느 세계선에 존재하든 오리지날 아짱이다.
아짱은 똑똑하니까. JS싸이언쓰 대표가 애초부터 궤변을 늘어 놓는 다는 것을 어쩌면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내 친구 아짱은 어디에서든 유일한 존재니까.

 

 

 

미키7과 아짱여행기의 차이를 생각해보면 미키는 계속해서 죽고 다시 태어나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품지만
아짱은 자신이 온전한 상태로 존재할 것임을 알고 베타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미키는 불완전한 존재로 남아 끊임없이 의심하고 괴로워하지만
아짱은 스스로의 존재를 믿고 흔들림 없이 자신의 길을 선택한다.
이러한 차이는 단순히 설정상의 차이가 아니라 작가가 인간의 자아에 대해 던지는 철학적 질문의 방식이 다르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결국, 미키7이 가장 강렬하게 전달하는 메시지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다.
우리의 존재는 단순히 물리적인 몸과 기억의 연속일까 아니면 고유한 자아가 있어야만 의미를 가질까?
미키는 계속해서 죽고 부활하지만 그 과정에서 본래의 자신이 사라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솔직히 나는... 미키7의 설정이라면 미키1~미키8들은 완전한 독립적인, 개개인의 개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미키7은 단순한 SF소설이 아니라, 우리에게 인간 존재와 정체성에 대한 깊은 고민을 던지는 작품이었다.

 

 

 

그리고 아짱… 나는 여전히 그녀를 떠올린다. 아짱이 택한 길은 내가 한때 꿈꾸던 것이었을까?
아니면, 차마 나아가지 못한 길이었을까? 그녀가 베타로 돌아왔던 순간
나는 그 결말을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물거품처럼 사라진 꿈과 이루어지지 않은 길, 하지만 아짱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끝까지 자신을 믿었고 나는 그런 아짱을 부러워했다.
미키처럼 환경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이 옳은 것인지 아니면 아짱처럼 확신을 가지고 자신의 길을 나아가는 것이 정답인 것인지.
하지만 어쩌면 중요한 것은 그 선택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달려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미키7은 그런 점에서 단순한 복제 인간의 이야기 그 이상을 담고 있었다.
나는 나도 어쩌면 미키2처럼 헬맷을 벗어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든다.. 아짱 베타와 함께 오랫동안 내 마음속에 남을 작품이 될 것 같다.

 

 

 

 

이쯤 되고 보니, 그다지 긍정적으로 그려지지 않은 베르토와 내가 애초에 어떻게 친해졌는지 궁금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간단히 말하면 내가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은 덕분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그렇듯 완벽한 친구란 있을 수 없고, 저마다 가지고 있는 다양한 단점들을 이유로 사람들을 내친다면 그들이 가져다줄 기쁨과 행복 역시 누릴 수 없게 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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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도 나랑 놀아주지 않았을 때 언니도 묘연했다


 우리는 같은 중학교 학생이었고 엄마 아빠는 중요하지 않
았다 중요한 건 급식을 누구와 먹는지 배드민턴을 누구와
치는지 같은 반 아이들이 어떤 아이돌 그룹을 좋아하는지
언니는 왜 나를 보러 오지 않는지


 언니는 나보다 한 살 위고
 이효리처럼 노래 잘 하고
 춤도 잘 췄다


 언니의 친구들은 나를 몰랐지만 나는 알았지; 마리 제니
소이  그런 이름을 가진 언니들
 나도 카스텔라처럼 부드러운 발음의 이름이고 싶었는데


 언니는 딱 한 번 나와 급식을 먹어주었다 내가 배식 당번
이 되었을 때 언니의 식판에는 요구르트 두 개가 놓였다 언
니와 같은 고등학교에 지원하고 싶지는 않았다


 사랑하면
 어디까지 해 줄 수 있어?


그런 질문은 하지 않았다


 너무 많은 나를 길러낸 다음에도
 울퉁불퉁한 사춘기가 잘 접히지 않아서
 바나나우유랑 초콜릿 사 먹었다 모모코*가
"달콤한 것들로만 배를 채우고 싶어"  말할 때는 솔직히 좀
감동이었다


 나는 바구니 달린 자전거를 고집했다 바구니는 잡동사니
로 꽉 채웠다 왠지 마음이 든든해지니까


 그리고 넘어지면 안 될 것 같은 기분
 조심한다고 했는데
 구슬을 너무 많이 꿴 팔찌가 툭 끊어지듯


 나를 쏟으면 개중에 몇몇은 분실했다


 나는 속이 상해
 언니 때문에 진짜
 속상해 죽겠다 언니만큼이나


 여름도 오지 않는데 나는 자꾸 우거져 거대해져 가려운
부위가 점점 번져 비가 내리면 진흙과 돌부리를 그냥 지나
치지 못한 자전거가 나둥그라지고 언니를 미워하는 마음
이 다치고


 이제 작은 상처는 돌보지 않게 돼


 바깥은 라일락이 폈다는 향기로운 소문으로 가득했다


  이때까지 나는 잘도 말라죽지 않았구나 무심코 거울을 봤
다 고양이를 무서워하고 꽃을 좋아하는
 언니가 서 있엇다 비가 그치고 묽어진 얼굴로


 흰 
 꽃잎
 한 장 나부끼지 않지만 언니


 우리는 끊임없이 흔들리며 서로의 가지가 되어 주었다




* 영화 <불량공주 모모코>의 주인공.








[샤워젤과 소다수], 문학동네,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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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제대로 @Valid를 적용하였고 그 대상의 Class의 유효성 검증을 하기위한 멤버변수에도 @Pattern을 적용해주었다. 그런데 디버깅을 해보니 그냥 무시해버리는 현상이 발생했다.

한참을 무엇이 문제인지 분석하다가 라이브러리 의존성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올바른 예시는 다음과 같다.

<!-- Maven 이라면 -->
<dependency>
    <groupId>org.springframework.boot</groupId>
    <artifactId>spring-boot-starter-validation</artifactId>
</dependency>


<!-- Gradle 이라면 -->
implementation 'org.springframework.boot:spring-boot-starter-validation'

 

AS-IS에서는 아래와 같이 쓰고 있었는데 잘못된 것인가보다.. 라이브러리는 이상없이 당겨왔고 빌드도, 기동도 이상이 없음에도 정상동작하지 않는다..

implementation group: 'javax.validation', name: 'validation-api', version: '2.0.1.Final'

 

상기 표기처럼 수정하고 빌드해주고 디버깅해보니 정상적으로 동작함을 확인했다.

 

 

인간성이란 단어를 떠올리면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대개는 인성이나 성품, 혹은 도덕성을 기준으로 삼아 그것을 평가하려는 경향이 있겠지요. 그러나 이 책이 말하는 인간성은 그런 고상한 가치와는 조금 다릅니다. 오히려 우리가 쉽게 외면하려 했던 인간 본연의 솔직한 모습들을 들춰내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과 불공평한 삶 속에서 느끼는 억울함과 슬픔, 때로는 숨기고 싶은 비열함까지. 이 책은 그러한 부정적인 감정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인간다움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행복과 불행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에서 벗어나, 삶을 더 넓게, 더 깊게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행복을 기준으로 삶을 평가하려 들지만, 이 책은 오히려 불행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진실, 그리고 그 진실이 가져다주는 위안을 이야기합니다. 한 장 한 장을 넘기며 만났던 명대사들은 제게도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습니다. '나는 지금의 내 불행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사람들이 흔히들 이야기하는 행복만을 맹목적으로 좇는 삶이 꼭 옳은 걸까?' 같은 생각들이 머릿속에 맴돌았죠...
이 책은 1998년에 처음 출간되었지만 오늘날까지도 스테디셀러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오래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결코 낡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시간의 흐름을 초월하는 깊이와 진솔함이 있습니다. 책을 읽다 보면 1990년대의 감성이 자연스레 떠오르기도 합니다. 등장인물들의 대사 하나하나가 흡사 SNL에서 들을 법한 서울 사투리처럼 친근하고 정겹게 다가옵니다. 그렇게 슬픔 속에서도 나에겐 위로를 자아내는 순간들.. 그 위태로운 균형이 어쩌면 이 작품이 지닌 매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책은 저에게 단순히 '좋은 책'이라는 평가를 넘어 '인간'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넓혀주는 귀한 경험을 선물했습니다. 읽는 내내 느껴지는 진솔한 감정들 그리고 그 감정들이 던지는 질문들은 제 삶의 방향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만들었습니다. 마치 오래된 나무의 나이테처럼 이 책도 시간이 지날수록 더 단단해지고 깊어지는 이야기를 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도 이 책을 통해 삶과 인간다움에 대해 조금 더 깊은 사색의 시간을 가져보시길 바랍니다.

 

 

 

안진진이 김장우와 나영규 사이에서 누구를 자신의 짝으로 받아들일지 고민하는 장면은 단순히 누군가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녀 자신의 삶의 방향과 결핍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에 대한 깊은 질문으로 다가옵니다. 두 남자는 서로 대조적이면서도 그녀의 내면에 자리한 두 가지 상반된 욕망을 상징하는 듯합니다.
김장우는 순수함과 자유로움을 대표합니다. 그의 어리숙한 모습은 때로 그녀에게 안쓰럽게 다가오지만 동시에 진진이 관계를 주도해야 하는 부담을 느끼게 합니다. 반대로 나영규는 경제적으로 안정적이고 모든 것이 철저히 계획된 인물입니다. 그의 삶은 안정적이지만 그 안정 속에서 안진진은 자신이 너무나도 수동적인 존재가 되어가는 불안감을 느낍니다. 자신의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했던 말처럼요.. 자신은 죄수고 당신은 간수같다고...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가 했던 이 대사를 김장우에게 했네요? 저는 이 부분도 이해가 안가는 모순중에 하나라고 생각해요. 누가봐도 나영규가 더 죄수과 간수를 보는 듯 하잖아요?)
어쨌거나 김장우냐, 나영규냐의 문제는 제 생각엔 곧 그녀가 어떤 결핍을 감수하며 살아갈 것인지 선택하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장우를 선택하면, 경제적 결핍이 따를 것이고 나영규를 선택하면, 자유의 결핍이 따르겠지요. (물론 이건 너무나 일차원적으로만 요약 한 것이고 이 안에는 매우 복잡한 심리선들이 담겨 있습니다.)
안진진이 결국 나영규를 선택한 이유는 그녀의 가족사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상상했습니다. 나영규를 선택한 것은 팩트지만, 왜 그러했는지에 대한 것은 사람마다 의견이 분분하겠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어머니와 쌍둥이 이모, 두 자매의 대비는 안진진의 선택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어머니는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하며 살아온 인물입니다. 그녀는 무질서하고 고된 삶 속에서도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쳤고 그 고통을 고스란히 안진진에게도 물려주었습니다. 반면 이모는 풍족하지만 이모부로부터 통제된 삶을 살아가며 어머니와는 정반대의 안정적이고 계획적인 이미지를 보여줍니다.
이런 두 여성의 삶을 가까이에서 보며 자라온 진진에게 경제적 결핍은 가장 견디기 힘든 두려움이었을 것입니다. 김장우와의 사랑이 자유롭고 행복해 보였지만 그녀는 어머니가 겪었던 고통을 다시 반복할 용기가 없었던 겁니다. 반면 나영규와의 관계는 자유로움을 제한당하는 느낌을 주었지만 어느순간에 그녀에게는 안정이라는 강력한 유혹으로 다가왔을 겁니다. 이 안정이 비록 숨이 막히는 삶을 암시할지라도 그녀는 그 선택이 가져다줄 안전함을 놓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안진진의 선택은 그녀가 사랑을 통해 무엇을 얻고 무엇을 포기할 것인지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그것은 단순히 남자 중 한 사람을 선택하는 일이 아니라 그녀 자신의 삶에 필요한 어떠한 결핍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대해 타협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이 결정을 통해 작가는 우리가 살아가며 맞닥뜨리는 모순을 극명하게 드러냅니다. 사랑이란 모든 것을 충족시키는 완벽한 해답이 아니라 어쩌면 결핍을 껴안는 과정이라는 사실을요... 과연 안진진은 나영규와의 앞으로의 삶속에서 행복할 수 있을까요? 사실... 저는 그녀의 미래가 잘 상상되진 않았습니다. 무언가를 얻는 다는 것은, 무언가를 포기한다는 것 이잖아요..
여러분은 인생에서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나요? 결핍은 피할 수 없는 삶의 일부이며 결국 그것을 어떻게 마주하느냐가 우리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본질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엔 아마도 안진진이 자신의 미래를 점쳐보기 위해 스스로를 대조(?)해 보았을, 이모에 대한 이야기를 해봅시다. 그런데 이모는 결국 극단적 선택을 하고 맙니다.
안진진의 이모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이유는 그녀의 삶이 철저히 통제되고 규격화된 환경 속에서 점차 자신의 존재감을 잃어갔기 때문이라고 느껴집니다. 그녀의 선택은 단순히 한순간의 절망이 아니라 오랜 시간 쌓여온 억압과 내면의 공허함이 드러난 결과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모는 안정적인 가정을 이루고 건축설계를 하는 이모부와 함께 경제적으로 풍족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풍족함은 동시에 그녀의 삶을 통제하고 모든 것을 예측 가능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녀의 삶은 외적으로는 완벽했지만, 내적으로는 자율성을 잃은 감옥 같았습니다. 모든 것이 계획되고 계산된 삶 속에서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를 잃고 자신의 욕망이나 감정을 표현할 여지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녀의 선택은 안진진의 어머니와 뚜렷한 대비를 이루며 두 사람의 삶이 어떻게 서로 다른 방식으로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어머니는 경제적인 결핍 속에서 고군분투하며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쳤다면 이모는 그 결핍이 채워진 환경 속에서 스스로를 잃어가는 고통을 겪었던 것입니다. 이 둘의 삶은 극단적으로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자신이 주체가 되지 못한 삶의 결과를 상징합니다.
또한 이모부와의 관계도 그녀의 선택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이모부는 계획적이고 규칙적인 삶을 지향했지만 그것이 그녀에게 안정이 아닌 억압으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그녀의 삶에서 '예측 가능성'은 더 이상 안정감을 주는 요소가 아니라 자신이 삶의 조연에 머물러 있음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족쇄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여지가 없는 삶을 살면서 점차 무기력함과 소외감을 느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모의 극단적인 선택은 단순히 그녀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인간이 가진 근본적 갈등과 욕구를 상징합니다. 그것은 자유와 안정 사이의 모순, 그리고 삶 속에서 진정한 주체로서 살아가기 위한 투쟁을 말해줍니다. 이모는 결국 자신이 잃어버린 자유를 찾기 위해 마지막 선택을 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녀의 선택은 삶의 풍족함과 안정감이 결코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책을 읽으며 작속 이모의 이야기를 마주하는 것은 다소 아리송 했습니다. 이 책을 읽어본 친구와 함께 이야기 하기를 "아주 배가 불렀다"며 농담을 했거든요. 사실 여전히 안진진의 어머니에 대한 기만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녀의 이야기는 우리가 삶 속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되새기게 합니다. 행복이란 단순히 결핍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는 순간에 찾아온다는 것을 말이죠.

 

 

 

이 책을 읽으면서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습니다. "누가 내 인생 하드모드로 현질도 안하고 키우냐"라는 우스갯소리요.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겪는 온갖 복잡한 감정과 고난들이 마치 게임의 하드모드처럼 느껴질 때가 있잖아요. 어쩌면 이 책 속 주인공들도 그런 하드모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하드모드에도 나름의 매력이 있다는 걸 이 책이 알려줬습니다. 단순히 게임을 클리어하는 것보다 그 과정에서 느끼는 긴장감과 성취감이 더 크듯이 우리 삶도 그렇지 않을까요? 아프고 고된 순간들이 쌓이면서 결국에는 나만의 이야기로 완성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제는 힘든 순간에도 묻고 싶습니다. "이건 또 무슨 퀘스트야?" 하고요. 슬픔이 와도, 아픔이 찾아와도, 그게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줄 경험치라고 믿기로 했습니다. 하드모드에서만 얻을 수 있는 레어템처럼 그런 순간들이 나중에는 나만의 특별한 보물이 되겠죠...
결국 인생은 하드모드로 설정된 채로도 계속 나아가야 하는 게임 같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이 모험이 끝나면, 지금의 모든 순간들이 나를 얼마나 성장시켰는지 깨닫게 될 거라고 믿습니다. 🌙

그리고 난... 모순 그 자체야...!

 

 

 

우리들은 남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자기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납득할 수 없어한다.

 

해질 녘에는 절대 낯선 길에서 헤매면 안 돼. 그러다 하늘 저켠에서부터 푸른색으로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가슴이 아프거든...

 

사람들은 작은 상처는 오래 간직하고 큰 은혜는 얼른 망각해버린다. 상처는 꼭 받아야 할 빚이라고 생각하고 은혜는 꼭 돌려주지 않아도 될 빚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장부책 계산을 그렇게 한다.

 

소소한 불행과 대항하여 싸우는 일보다는 거대한 불행 앞에서 차라리 무릎을 꿇어버리는 것이 훨씬 견디기 쉬운 법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솔직함만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솔직함은 때로 흉기로 변해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부메랑일 수도 있는 것이었다.

 

인생이란 때떄로 우리로 하여금 기꺼이 악을 선택하게 만들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모순과 손잡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주리는 정말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나의 불행에 위로가 되는 것은 타인의 불행뿐이다. 그것이 인간이다. 억울하다는 생각만 줄일 수 있다면 불행의 극복은 의외로 쉽다. 상처는 상처로밖에 위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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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영혜의 남편의 1인칭 시점으로 시작된다. 그는 영혜를 "그저 평범하고 수수한 여자"로 묘사하며 그녀를 선택한 이유를 설명한다.
그러나 이 '평범함'이란 단어는 오히려 그녀의 삶에 던져진 첫 번째 폭력을 암시한다. 남편에게 영혜는 독립적 존재가 아닌, 그의 안정된 삶을 보장해 줄 도구일 뿐이다.
영혜가 갑작스럽게 육식을 거부하고 채식을 선언한 것은 남편에게 충격으로 다가온다.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이라는 그녀의 새로운 정체성은 남편의 안정된 일상을 흔들며 갈등의 시작을 알린다.
특히 그녀의 결정은 남편의 개인적 불편함을 넘어, 가정 전체의 문제로 확대된다.
가족 식사 자리에서 아버지는 그녀의 채식행위에 대해 폭력을 휘두른다. 친정 아버지는 가부장제의 상징이자, 이 장면은 단순히 육식과 채식의 갈등을 넘어 전통적 가부장제와 개인적 자유의 충돌을 상징한다.
영혜가 손목을 그으며 저항하는 순간 그녀는 단순히 음식 취향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사회적 규율을 거부하는 존재로 변모한다.
이 장면은 그녀의 선택이 단순한 개인적 취향을 넘어서는 깊은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왜 우리는 누군가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하면 억압하려 드는가? 타인의 자유를 존중한다는 것이 사실... 그렇게나 많이 어려운 일인가? 조금만 생각해보자. 왜 그리 못견뎌하며 억압하려 드는걸까. 누가 칼이라도 들고 협박하던가?
영혜는 육식을 거부하며 육식문화와 가부장제라는 근대 문명의 억압을 거부한다.
그녀는 아버지의 폭력으로 상징되는 사회 규율에 저항하며 체제 밖으로 추방되는 인물이다.
그녀의 선택은 단순히 '채식주의'라는 단어로 설명될 수 없다. 나는 채식주의자라는 표현은 사실 매우 피상적인 형태를 꼬집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래에서 더 자세히 설명하겠다)
이는 근대 문명이 여성과 자연을 억압해온 방식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폭력이란? 상식, 육식문화와 가부장제로 대변되는 근대 문명, 인간의 생물적 조건으로서의 폭력 모두를 이야기한다.
인간은 다른 생명을 먹어야만 살아갈수있다. 즉, 생물학적 조건에서 야기되는 폭력은 가부장제가 사라져도 해소되지 않는 폭력이다.
인간은 결국 다른 유기물을 먹어야만 살 수 있는 잡식동물이라는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는 어떻게해도 폭력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엿볼수 있는 부분이 영혜에게 물어뜯긴 동박새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영혜는 자신의 둥근 젖가슴이 아무도 해치지 않아 좋다고하지만 몸이 야위자 뾰족해진 젖가슴에 대해 "뭘 찌르려고 이렇게 날카로워지는 거지?"하고 불안해 한다.
마지막 장면의 영혜의 노출된 상반신에서 드러나는 뾰족해진 젖가슴과 죽은 동박새를 통해 폭력성을 드러낸다.



2부는 형부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그는 예술가로서 영혜의 몸에서 발견한 몽고반점에 매혹된다.
이 반점은 단순히 신체적 특징이 아니다. 그것은 그녀의 타자성을 상징하며, 동시에 그의 금기된 욕망을 자극한다.
형부는 영혜를 "순수한 예술의 매개체"로 바라보며, 그녀의 몸을 꽃으로 치장해 자신의 예술로 재탄생시키려 한다.
우리는 형부가 그녀를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가 아닌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는 대상으로만 바라보고 있음을 알게 된다.
형부와 영혜의 관계는 애매하고 불편하다. 그들의 행위는 예술로 미화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윤리적 문제를 제기한다.
그녀의 동의와 자유 의지로 이루어진 듯 보이는 이 관계는 사실상 또 다른 억압의 형태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영혜는 점차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간다. 그녀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타자화되며,
더 이상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상태로 내몰린다. 결국 형부와의 관계는 그녀를 자유롭게 하기는커녕, 더 깊은 억압 속으로 밀어넣는 역설적 결과를 초래한다.
꽃이 되면 평화로워질줄 알았으나 결국 친언니 언니에게 캠코더 영상으로 큰 상처를 주고만다. 폭력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시도가 계속 또다른 폭력을 만들어낸다.
즉 폭력이 사회, 문화, 제도의 산물일 뿐만아니라 인간 삶의 근본적 조건이기도 하다. 채식주의자는 남성과 육식, 여성과 채식이라는 이분법적인 방법을 차용하는 듯 하면서 교묘하게 그것을 역설한다.
영혜와 형부가 육체적으로 결합하는 기괴한 장면에서 부분적으로 혼종성에 있다. 결합한건 인간의 몸이다. 그 결합은 성적 욕구에 의해 매개된다.
결합된 것은 동물적이다. 그러나 몸에 그려진건 꽃이다. 책에서도 "꽃과 짐승과 인간의 뒤섞인 한몸"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영혜가 몸에 꽃을 그린 J나 형부를 욕망하는 모습, 비쩍 마른 몸으로 정신병원에서 격렬히 몸부림 치는 모습도 이와 비슷한 효과를 자아낸다.



마지막 3부는 영혜의 언니인 인혜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인혜는 자신이 영혜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했음을 깨닫는다. 이 과정에서 영혜는 더 이상 인간 세계의 규율을 따르지 않으며, 음식을 완전히 거부한다.
그녀는 "식물이 되고 싶다"고 선언하며, 자연으로의 완전한 동화를 꿈꾼다. 그러나 이 꿈조차 이상적이지 않다. 영혜가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욕망은 인간과 자연의 경계에서 발생하는 또 다른 갈등을 보여준다.
그녀가 인간으로서의 삶을 거부하고자 하는 이유는 단순히 폭력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그 폭력을 완전히 소멸시킬 수 없다는 좌절감 때문이다.
영혜의 마지막 모습은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그녀는 활활 타오르는 나무를 응시하며 자신의 존재를 초월하고자 한다.
식물이 되길 원하지만 끝내는 동물일수밖에 없는 존재... 
한강 작가는 폭력이라는 개념이 완전히 사라진 세상을 망연히 꿈꾸기보다는 
인간 문명의 지반이 어떤 종류의 폭력들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직시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라고 말하고자 한 것같다.
위에서 말했듯 채식주의자라는 책의 제목은 피상적이다. 건강을 위해, 아토피, 알레르기 체질을 개선하기 위해, 환경을 보호하기위해 등등
여러가지 이유를 덧붙이지만 결국 채식주의자라는 단어는 영혜가 고기를 거부하는 이유를 속시원히 설명하지 못한다.
회사사람들과의 모임장소에서 영혜의 남편은 저런 피상적인 이유를 나열하며 영혜의 채식이유를 모임 사람들에게 설명한다.
그제야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있는 규범과 사상내에서 이해하고 영혜의 채식을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들인다.
인간은 자신이 알고 있는 개념 체계 내부에서만 타자를 이해할 수 있다. 언어로 대상을 파악하려는 시도는 그 대상의 실체를 언어 바깥으로 불가피하게 미끄러뜨린다.
나는 이 사실이 채식주의자 전체를 관통하는 문제의식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몽고반점에서 형부는 매우 이중적인 위치에 있다.
영혜의 식물성을 가장 먼저 알아보는 사람은 형부였다. 첫 만남 때부터 "야생의 나무 같은 힘"을 느끼고 영혜에게 몽고반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푸른 꽃이 열리는 장면을 떠올린다.
결과적으로 영혜가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게 만들어 준 것도 형부다. 형부는 "아무도 그녀를 도울 수 없었다.", "모든 사람이 철저한 타인 혹은 적이었을 것이다." 라는 표현을 하며 영혜의 처지를 이해하고 헤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부는 독자들에게는 왠지 불편하고 메스껍거나 역겨운 존재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형부가 철저히 자기의 시선에서 타자화된 영혜를 진단하고 욕망하기 때문이다. 형부는 영혜를 모든 욕망이 배제된 육체, 식물적 육체로 보지만 그건 영혜의 단편적인 부분일 뿐 그녀를 완벽히 이해한 것이 아니다.
완벽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부분은 아래 부분을 통해 알 수 있다.
영혜는 자신이 꿈을 꿔서 고기를 끊었다는 말이 타인들에게 이해받지 못할 것임을 잘 알고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혜는 형부에게 이에 대한 설명을 해주려하지만 형부는 "널 삼켜서, 널 녹여서 내 혈관 속에 흐르게 하고 싶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다 영혜의 말을 자장가삼아 잠이 드는 형부, 이는 결국 형부는 영혜에게 결국 '나'를 철저하게 타자화하는 타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인혜(영혜의 친언니)는 삶에 있어서는 안될 바람현장을 경험한(모르고 사는 것보단 어쩌면 들킨것이 다행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눈치채기 어렵지만 인혜는 영혜에게 치명적인 정신적 해를 입히는 인물이다.
캠코더를 발견하고 인혜가 남편에게 말하길 "아직 정신도 성치 않은 애를..."이라 말한다.
영혜를 비정상으로 판단하지만 사실 영혜는 회복중인 상태였다. 밥도 잘먹고 일자리도 구하기 직전이었고 형부를 통해 악몽도 점점 꾸지 않고 있었다.
"무섭지 않아요.. 무서워하지 않을거에요"
과정이 어찌되었든 결과적으로는 형부와의 만남을 통해 구원의 가능성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인혜는 그러한 가능성을 차단하게 되고, 그 이유는 단순 미움이나 괘씸보다는 반드시 치료가 필요하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알고있는 개념과 문화, 정서에서 이해하려는 태도는 결국 강제 입원이라는 폭력으로 이어지고 만다.
이 소설에서 영혜는 주요 서술자로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타인들에 의해 재현되는 영혜가 진짜 영혜인지를 의심하며 읽어야 한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영혜가 완전한 이상향을 좆고, 무해한 존재는 아니라는 것이다.
폭력의 질서에서 벗어나기 위해 식물되기를 꿈꾸지만 식물에게 일방적인 시선을 보내는 영혜의 모습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영혜는 세상의 나무들은 모두 형제 같다고 말한다. 이 말은 굉장히 생태주의적 표현이다.
식물들을 어떤 연대에 기반을 둔 평화로운 공동체로 보고 있다. 그러나 사실 이 소설에서 나무들은 굉장히 공격적이고 동물적이다.
소설 첫장면에 등장하는 나무들의 모습부터 그러한데, 영혜의 꿈속 나무들은
뾰족한 잎이 돋은 나무들을 헤치느라고 얼굴에, 팔에 상처가 났다라고 말한다. 가해의 굴레로부터 해방된 식물.. 물과 광합성만 필요한 식물.. 그런것은 사실 없다.
나무도 인간에게 상처를 준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대놓고 보여주면서 이 소설은 시작한다.
그렇다면 끝은 어떠한가?
"활활 타오르는 도로변의 나무들을, 무수한 짐승들처럼 몸을 일으켜 일렁이는 초록빛의 불꽃들을 쏘아본다:"
굉장히 역동적이며 위협적이다.
"짐승들처럼"이라는 표현을 대놓고 사용하며 동물 VS 식물에 대한 이분법에 균열을 낸다.
실제로 식물들의 세계를 보면 경쟁이 치열하고 살벌하다.
식물에게 평화나 연대같은 가치를 투영하는 것도 인간 중심적인 사유일 수 있다.
이러한 면에서 영혜의 나무가 되기가 실패한 이유는 어쩌면 자신이 동물이라는 현실을 외면해서뿐 아니라
나무들을 자신이 알 고 있는 나무라는 개념 체계 내에서만 바라보고 해석하는 폭력을 범했기 때문아닐까?
채식주의자는 폭력의 여러 형태를 다룬다. 그것은 물리적 폭력, 심리적 억압, 그리고 제도적 강요를 포함한다.



이 소설은 우리가 타인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때로는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특히 영혜라는 인물은 독자로 하여금 타자를 이해하는 데 있어 언제나 잠정적 한계가 있다는 점을 깨닫게 한다.
한강은 이 작품을 통해 독자들에게 묻는다. 우리는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아니면 우리의 틀 안에 맞추기 위해 그들을 재단하는가? 이 질문은 단순히 문학적 질문이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끊임없이 제기되는 도전이다.
우리가 불가피한 폭력의 요구를 기어이 감내하는 것과 타자를 함부로 의미화하지 않는 것은 양립가능하다.
이 소설은 영혜가 활활 타오르는 나무들을 대답을 기다리듯 쏘아보는 장면으로 끝난다.
이 장면은 나무 불꽃으로 표상되는 미지의 타자로부터 어떤 의미를 기대하면서도 언어의 한계를 의식하고 의미화를 유보하는 윤리를 보여준다,.
즉, 우리들의 의미화가 언제나 잠정적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면서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놓아야 한다.
둘째로 폭력이 삶의 근원적인 조건인 이상 우리에겐 폭력의 유무로 도덕적 선악을 단정하지 않는 새로운 의식이 필요하다.
여기서는 폭력의 발생자체가 아니라 누구의 누구를 향한 어떤 폭력인가가 주요한 문제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우리는 불가피한 폭력뿐 아니라 불가피한 돌봄의 연쇄에 의해서도 관계 맺고 있다.
폭력과 돌봄은 모두 삶의 근본적인 조건이지만 그 불가피성 내에서 우리는 누구와 어떤 관계에 연루될 것인지를 어느 정도 선택할 수 있다.
인혜는 이 기성적인 세계에 남아서 지우를 돌보기로 선택했다.
이 일은 가부장제가 부여한 노동이기도 하지만 인혜의 기쁨의 원천이자 삶을 어떻게든 붙잡아낼 책임을 스스로 부여한 결단의 결과이기도 하다.
우리의 살생을 완전히 속죄하기는 어렵겠지만 누구를 어떻게 돌볼 것인지를 선택하면서 폭력이라는 원죄가 유의미한 돌봄과 함께 순환하는 세계를 만들어야한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영혜는 더 이상 인간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 그녀의 존재는 인간과 자연, 폭력과 평화, 이해와 오해 사이에 놓여 있다.
독자들은 이 모호한 결말을 통해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한다. 채식주의자는 단순한 소설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와 그 복잡성을 탐구하는 하나의 거대한 질문이다.

 

 

 

이 책을 읽으며....
마치 영혜가 꿈속에서 고기를 거부하며 나무가 되고자 했던 그 갈망처럼,
나 또한 나를 옭아매는 것들을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을 느꼈다. 하지만 동시에, 영혜의 이야기는 내게 질문을 던졌다.
과연 벗어난다는 것이 가능할까? 그 과정은 정말로 평화로울까?

요즘의 일상 속에서 내가 선택한 것들조차 내가 아닌 누군가를 위한 것이 되어버리는 순간들.
마치 인혜가 가부장제의 틀 안에서 돌봄을 자신의 책임으로 받아들이듯, 나도 그저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은 나에게 선택의 무게를 다시금 돌아보게 했다. 영혜는 식물이 되길 원했지만, 결국 몸은 야위고 날카로워졌다.
그런 영혜를 바라보며 나는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지쳐가고 있는가?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영혜의 여정을 따라가며 나 또한 내 안의 폭력성을 마주했다.
폭력이라 하면 누군가를 해치는 직접적인 행위만 떠올렸던 내가, 사실은 나 자신에게 얼마나 잔인했는지를 깨달았다.
비교를 하며 무언가를 무가치하게 여기거나, 꿈을 스스로 묵살하며, 어떤때는 내 마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찔렀다.
그리고 나서야 깨달았다. 나를 돌보지 않는 것도 하나의 폭력이었다는 것을.

책의 마지막 장면, 활활 타오르는 나무들을 바라보던 영혜처럼 나도 불꽃들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싶었다.
그것은 단순히 절망의 상징이 아니라, 나를 묶었던 끈을 태워버릴 수 있다는 가능성이었다. 불꽃 속에는 미지의 타자, 새로운 해석, 다른 나의 모습이 있었다.
삶은 결국 폭력과 돌봄이 얽힌 복잡한 굴레다.
누구에게 돌볼 마음을 품고 누구를 해칠 위험을 안고 있는지를 고민하며 우리는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영혜의 이야기처럼 나도 내 삶 속에서 무엇을 돌보고 무엇을 놓아줄지 선택해야 한다.
지금은 조금 두렵고, 때론 불안하지만, 그 선택 안에 작은 희망이 있다는 것도 알 것 같다.

책을 덮으며 나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다짐했다. 언젠가 나도 활활 타오르는 불꽃처럼 나를 정의하려는 모든 의미를 태워버릴 수 있는 사람이 되리라고.
그리고 남겨진 재 속에서 나만의 의미를 새롭게 쌓아가리라고. 이 책은 내게 그런 희미한 빛을 남겨주었다.

 

 

 

 

그렇게 끝났다. 그날 이후 그들의 삶은 결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살아갔다. 등 뒤에 끈질긴 추문을 매단 채 가게를 꾸려나갔다. 시간은 가혹할 만큼 공정한 물결이어서, 안내로만 단단히 뭉쳐진 그녀의 삶도 함께 떠밀고 하류로 나아갔다.

 

 

 

그를 사랑한다는 확신이 그녀에게는 없었다.
그것을 부지중에 알면서 그녀는 그와 결혼했다.
혹 그녀에게는 자신을 좀더 위로 끌어올려줄 무엇인가가 필요했던 건 아닐까.

 

 

 

처음 얼마 동안은 여느 부부들처럼 그와 크고작은 언쟁을 하기도 했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체념할 수 있는 것들은 체념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그를 위한 것이었을까.
함께 살았던 팔년 동안, 그가 그녀를 좌절시킨 만큼 그녀 역시 그를 좌절시켰던 것은 아닐까.

 

 

 

문득 이 세상을 살아본 적 없다는 느낌이 드는 것에 그녀는 놀랐다. 사실이었다. 그녀는 살아본 적이 없었다. 기억할 수 있는 오래전의 어린시절부터, 다만 견뎌왔을 뿐이었다.

 

 

 

이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 더이상은 견딜 수 없다. 더 앞으로 갈 수 없다. 가고 싶지 않다.

 

 

 

그녀는 이미 깨달았다. 자신이 오래전부터 죽어 있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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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류진 작가의 '달까지 가자'에 이어 '일의 기쁨과 슬픔'도 읽었다. 이 책은 군대에서 일과가 끝나고 먹는 라면, 회사에서 퇴근 후 허기진 상태에서 먹는 라면처럼 술술 입안으로 빨려들어가는 그 맛이다.

 

첫 번째 단편인 '잘살겠습니다'는 나이 많은 회사 동기 언니의 결혼과정을 다루는 이야기다. 빛나라는 인물은 매우 순진한 캐릭터이다.
그리고 정도의 차이일 뿐 우리 주변에 이런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이 존재한다.
빛나는 동기지만, 가까운 친구라기엔 애매한 어정쩡한 관계 속에서 그녀는 존재만으로도 화자를 지치게 만든다.
이러한 존재는 회사에서 특히 그 빛을 발하는데, 나같은 성격들의 사람들로 하여금 복장 터지는 답답함과 짜증스러움을 유발하곤 한다.
사람이 나쁜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해서든 나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고, 나의 일을 더 어렵게 만들어 놓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결과물을 만들어 내곤 한다.
중요한 점은 그러한 사실은 그들은 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의 존재조차 잊고 있던 화자는, 청첩장을 달라는 빛나의 말에 '동기 1호 결혼 커플을 축하하는 청첩장 모임'으로 퉁쳐 만나려고하지만,
빛나는 그녀를 내심 좀 더 가까운 존재로 여기었는 듯 1:1로 따로 만날 것을 제안한다. 
에비동을 특 에비동을 시켰기 때문에 새우가 더 많이 나온 것인데 새삼 놀라는 그녀였고
전세계약을 하며 확정일자 조차 모르고 결국 이중계약 사기를 당해버린 그녀였고
끝내 1:1로 밥을 얻어먹어놓고는 결혼식에 등장조차 안한 그녀였다. (그리고 축의금조차 내지 않는 넌센스 그 자체였다.)

 

 

 

"빛나 언니한테 가르쳐 주려고 그러는거야. 세상이 어떻게 어떤 원리로 돌아가는지. 오만원을 내야 오만원을 돌려받는 거고, 만이천원을 내면 만이천원짜리 축하는 받는 거라고. 아직도 모르나 본데, 여기는 원래 그런 곳이라고 말이야. 에비동에 새우가 빼곡하게 들어 있는 건 가게 주인이 착해서가 아니라 특 에비동을 주문했기 때문인 거고, 특 에비동은 일반 에비동보다 사천원이 더 비싸다는거. 월세가 싼 방에는 다 이유가 있고, 칠억짜리 아파트를 받았다면 칠억원어치의 김장, 설거지, 전 부치기, 그밖의 종종거림을 평생 갖다바쳐야 한다는 거. 디즈니 공주님 같은 찰랑찰랑 긴 머리로 대가없는 호의를 받으면 사람들은 그만큼 맡겨놓은 거라도 있는 빚쟁이들처럼 호시탐탐 노리다가 뭐라도 트집 잡아 깎아내린다는 거. 그걸 빛나 언니한테 알려주려고 이러는 거라고, 나는."

 

 

 

화자는 그녀에게 제대로 이 현실과 세상의 진리를 깨닫게 해주기 위해
철저히 빛나의 결혼식 선물을 준비한다. 그동안의 밥값, 커피값에 근거한 정확히 계산된 간단한 편지를 곁들인 올리브영에서 산 만이천원어치의 선물을 준비했다.
딱 그만큼의 선물로, 빛나에게 세상의 룰을 가르쳐 주겠다는 의도다.
그러나 빛나는 그 선물을 받고 감동을 받았는지 편지와 선물을 사진찍어 본인의 프로필 사진으로 올렸다.
어쩔 도리가 없다. 세상의 이치를 알려주려 했던 화자의 노력은 헛수고로 끝났고, 빛나의 순진함은 또 한 번 화자의 속을 긁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떡을 씹으며 빛나가 잘 살길 바란다. 바보 같고 어리숙하고 때론 짜증나지만, 그래도 그녀가 진심으로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은 남아 있다.
이 단편의 묘미는 여기 있다. 빛나를 향한 화자의 분노와 연민, 그리고 희망이 뒤섞인 감정은 마치 우리 모두의 관계 속 갈등을 상징하는 듯하다.
절대적인 악과 선은 없다. 웃프게도... 어쩌면 그녀는 화자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공감능력이나 지능이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화자는 답례로 받은 떡들을 먹으며 빛나가 부디 잘살기를 희망한다. 바보들이 참 밉다. 밉지만 그들의 순수하면서도 순진한 마음은 부정할 수 없고 그저 잘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잘 살겠습니다'는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한다. 어쩌면 빛나는 우리의 과거 모습일 수도 있고 혹은 우리가 미워할 수 없는 주변 사람일 수도 있다.
그녀는 답답하지만 밉지 않고 어리숙하지만 착한 마음만큼은 응원하게 된다.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우리는 항상 물질적인 것이든 마음인 것이든 공평을 추구한다. 잘 살겠습니다의 화자의 말대로 딱 그 값어치만큼으로 세상이 정말로 돌아간다면 얼마나 이상적일까?
그러나 세상은 사실 주는 만큼 받는 세상이 아니다. 어떨 때는 내가 더 주기도 하고, 내가 더 많이 누군가로부터 받기도 한다. 세상은 엔트로피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화자가 아무리 빛나를 가르치려 들어도 소용없다. 사람은 바꿀 수 없고, 빛나는 자신이 가진 정보와 역량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선한 마음을 다하고 있을 뿐이다..

 

 

 

혼자 끙끙앓으며 분노를 해보았자. 화자만 손해일 것이다. 나라면... 그게 그렇게 화나고 힘들다면 그냥 털어 놓는게 어떨지 싶다. 친한 동료면 좋고, 친구여도 좋다. 부정적인 감정은 빨리 소모해서 없애버리고 싶다. 그래.. 그냥 뇌의 화학적인 반응이야. 라고 생각하면서... 결국, '잘 살겠습니다'의 이야기는 단순한 불평이나 푸념이 아니라 세상과 인간관계의 복잡한 본질을 마주하는 과정에 대한 기록처럼 느껴진다. 빛나는 화자에게 끊임없이 분노를 안겨주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순진한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연민을 자아낸다. 그녀가 가진 부족함은 화자를 불편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그 부족함 안에 담긴 순수함은 쉽게 미워하기 어렵다.

 

 

작가는 아마도 세상에 완벽히 공평한 교환은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우리가 주고받는 모든 것들은 저울 위에 올라가는 즉시 균형을 잃고 그것이 삶의 자연스러운 질서가 된다.
빛나는 화자의 기대와는 달리 이 불균형 속에서도 나름대로 자신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화자는 빛나를 통해 우리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게 만든다.
나 역시 살면서 이런 빛나 같은 사람들을 만났고 때로는 그들과의 관계에서 속이 끓어올랐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순간에 느꼈던 감정들이 얼마나 하찮았는지를 깨닫게 된다.
어쩌면 내가 화가 난 이유는 상대가 아니라, 내 안의 기대와 욕심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잘 살겠습니다'의 마지막에서 화자가 빛나를 향해 잘 살기를 바라는 장면이 단순한 체념이 아니라 일종의 성장처럼 느껴졌다.
세상을 가르치려 애쓰는 대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흘려보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세상을 덜 힘들게 살아가는 방법이 아닐까?
빛나는 아마 끝까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만의 방식으로 누군가를 당황하게 하고 또 어딘가에서는 엉뚱한 감동을 주며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화자도 언젠가 자신의 노력과 분노가 그리 대단치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웃을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은 이 세상의 불균형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그 답은 각자의 몫이지만, 어쩌면 그 답은 생각보다 간단할지도 모른다. 그냥, 잘 살면 되는 것이다.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는 회사에서 좋아하는 여자 동료 지유가 남편과의 사별 후 후쿠오카에서 지낸다는 소식을 듣고 지훈이 단숨에 달려가 3년만의 재회를 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혼욕 온천탕이라는 장소가 주는 긴장감, 둘 사이의 기묘한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지훈은 결국 지유와의 하룻밤 계획이 실패했다. 나름의 계획을 완전히 지유에게 간파당했고,
지훈이 작전에 실패하고  홧김에 '이 씨발년이. 열었으면 닫아놔야 할 거 아냐.'라고 말하며 찌질하게 울며 잠드는 장면은 읽는 이들로 하여금 왠지모를 통쾌함과 우스꽝스러움에 웃음이 나게 한다.
둘 사이가 진전이 있으려면 지훈이 어떤 태도를 보였어야 했을까?
기본적으로 지훈은 나름대로 훈남 스타일로 묘사된다. 마음속의 독백 장면에서 나름 그는 그동안 여자들을 꼬시기 위한 작전들과 여자들이 본인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해 오만과 자만을 가지고 생각한다. 만약 지훈이 나였고, 정말 지유를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어떻게 할지 상상해 보았다.
우선 3년만에 만난 만큼 조심스럽게 다가가지 않았을까? 시간이 흐른만큼, 지유는 많이 달라져 있을지도 모르고 그동안의 공백이 있기에 더욱 신중히 만났을거라 생각한다.
애초에 그럴거라면, 나만의 시간을 보내는 비중을 더욱 높였을 것 같다. 잠깐 밥이나, 반주정도만 곁들이며 시간을 보내고
나름의 혼자 일본여행을 추구 했을 것 같다. 뭐... 가서 만나보니 지유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면, 다음에 다시올 2번째, 3번째 후쿠오카를 기약하지 않았을까?
설령 그런 긴장감이 연출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고 곧 이에 대한 결과로써 내가 실망하게 되는 상황을 마주한다 하더라도 지훈처럼 분통을 터뜨리진 않았을 것 같다.
마치 그게 마지막 기회였던 것 처럼 말이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 지훈은 공격력 스탯만 잔뜩 올렸고 방어력 스탯은 하나도 올리지 않은 게임 속 캐릭터 같다.
매우 공격적으로 대시를 하지만, 한수 위에 올라와있는 사람의 공격을 받고는 처참하게, 비참하게 무너져 내린다.
나는 어릴적에 아버지에게 항상 '겸손하라, 숙일줄 아는 사람이 되라'라는 말을 듣고 커왔다. 그리고 여전히 그 말을 100은 아니어도 90은 실천하기 위해 노력한다.
겸손과 숙이는 태도는 어릴 적엔 그저 당연한 미덕처럼 여겨졌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것이 인간관계의 핵심임을 깨닫게 된다. 지훈의 이야기를 보며 나는 그 교훈을 새삼 떠올렸다.
결국, 상대방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태도 없이 얻으려는 것은 모래 위에 쌓은 탑과도 같다는 것을 말이다.
지훈이 후쿠오카에서 얻은 경험은 어쩌면 실패일 수 있지만, 동시에 그에게 필요한 자각의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단순히 지유를 만나고 싶었던 게 아니라 자신에 대한 그녀의 감정을 확인받고 싶어 했다. 
그러나 관계란 혼자서 완성할 수 없는 퍼즐 같은 것이다. 나의 조각이 아무리 정교하고 화려하더라도 상대방의 조각과 맞물리지 않는다면 결국 그 그림은 완성되지 않는다.
지훈의 모습에서 나는 나 자신을, 그리고 우리가 관계에서 종종 저지르는 실수를 발견했다.
지훈에게는 상대방을 사로잡기 위한 전략이 아니라, 겸손히 상대를 바라보고,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는 그 첫 걸음이 필요했다. 그것이야말로 후쿠오카에서의 실패를 진정한 배움으로 전환할 수 있는 열쇠일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사람들과의 관계를 다시금 되돌아보게 되었다.
후쿠오카에서의 지훈처럼 우리도 때로는 삶의 작은 실패를 통해 더 나은 내가 되는 길을 배운다. 이번 단편이 지훈과 나에게 남긴 것은 바로 그런 성장의 기회였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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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는 이 작품을 통해 '부조리' 개념을 이야기한다. (부조리에 대한 개념은 그의 책 이방인에서도 다루어진다고 하는데, 이 내용은 추후에 다시 다루어보도록 하겠다)
참 어려운 책이다. 번역이 어렵게 된 탓일까?

인간은 삶의 의미를 끊임없이 찾으려 하지만, 그 과정은 본질적으로 무의미한 세상과 충돌하며 부조리를 낳는다.
그러나 카뮈는 이러한 부조리 속에서 항복하거나 어떤 알 수 없는 위안을 찾는 대신
인간은 이 세상에 발을 디디고 아름다움을 발견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역설한다.
결혼과 여름이라는 제목은 단순히 계절이나 의식적 행위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카뮈가 찬미한 지중해적 삶의 태도, 즉 세상의 아름다움과 절망을 동시에 끌어안는 자세를 의미한다.
여름은 풍요와 열정을, 결혼은 자연과 인간, 삶과 죽음의 융합을 상징한다.
특히 그가 묘사하는 자연의 장면들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무게를 직시하게 만드는 거울이라 해야 할까....
결혼은 한 개인의 선택이나 관계를 넘어서 삶과 세상에 대한 궁극적인 수용을 상징하며 여름은 이러한 수용 속에서도 삶의 생생함과 온기를 발견하는 카뮈적 시선을 보여준 것 같다.

 

 

샐러드의 끝에서 만난 하늘빛 맥주 한캔 (부제 : 샐러드 5일 챌린지를 마치며..)


삶은 종종 내게 하나의 모순처럼 느껴진다. 한편으로는 뜨거운 감정에 사로잡혀 무엇인가를 붙잡고자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붙잡으려는 것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가고 있음을 안다.
우리는 선택의 연속인 인생을 살고 있다. 누군가의 선택이 옳든 그르든 그것은 결국 그들의 몫이겠지만 나는 내 안에 움트는 부조리를 부정할 수 없다.

사랑은 부조리 속에서도 우리를 일어서게 만든다. 그것은 여름과 같다.
뜨겁고 찬란하며 그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우리는 그 속에 뛰어든다.
선택의 무게는 시간 앞에서 드러날 것이다.
그 어떠한 이름도 남기지 못하더라도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오늘도 샐러드 한 접시를 앞에 두고 앉아 있었다. 삼킬때 목구멍이 꽉차는 자그마한 고구마와 얇게 썬 할라피뇨와 상추 잎, 드레싱이 거의 묻지 않은 닭가슴살 조각들이 담긴 접시를 보며 내 선택이 삶의 어느 부분을 대표하는지 생각했다. 절제와 균형, 더 나은 나를 위해 계산된 행위. 하지만 얼음컵과 옆에 놓인 하늘빛 캔맥주는 그와 반대로 무언가 더 원초적인 갈망을 상징했다.
절제와 해방의 춤은 끝없이 반복되며 그 가운데서 흔들리는 나를 발견한다.
캔을 열자 탄산의 미세한 울림이 퍼진다. 맥주는 그 자체로 자연이었다. 태양 아래 열린 들판의 향기 그리고 흐르는 강물의 청량함. 그러나 그 속에는 인간이 자연을 길들이고자 만든 흔적이 배어 있었다. 샐러드가 내게 건강과 미래를 약속하는 것이라면, 맥주는 순간의 해방,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짧은 위로라고 할 수 있다.
알베르 카뮈는 자연을 삶의 은유로 사용했다. 그는 바다를 통해 무한함을, 태양을 통해 인간의 고독과 열정을 그려냈다. 내 앞의 샐러드와 맥주도 어쩌면 그런 대립의 상징일지도 모른다. 하나는 자발적인 통제와 삶의 목표를 향한 행위이고 다른 하나는 부조리 속에서 놓아버리고 싶은 마음의 반영이다.
삶은 때로 맥주의 탄산처럼 빠르게 사라지는 기쁨으로 채워지기도 하고 샐러드의 각양각색의 이파리들처럼 질긴 균형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리고 나는 그 사이 어딘가에서 흔들리고 있다. 맥주의 쓴맛과 샐러드의 밋밋함 속에 어떤 날은 하나를 택하고, 어떤 날은 둘 다 내 몫으로 삼으며.


하늘빛 맥주캔을 기울이며 나는 어느새 태양 아래 생겨난 그림자를 떠올린다. 빛이 내리쬐는 만큼 그림자는 더욱 짙어진다.
그것은 서로를 비추면서도 결코 하나로 어우러질 수 없는 두 존재처럼 나와 어떤 다른 마음 사이에 놓인 부조리한 틈을 상징한다.
겨울 한낮의 햇빛 아래 산책길, 그 빛은 모든 것을 더 선명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발밑에 그림자를 길게 드리운다. 그 빛은 달콤하지만 눈부심이 동반된다. 그 빛 속에서 고스란히 드러나는 나의 솔직한 감정들,
그러나 그림자는 늘 따라붙었다. 그것은 결코 나에게 속하지 않는 무엇에 대한 불가항력적인 깨달음이었다.
샐러드와 맥주처럼 어쩌면 처음부터 다른 궤도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들은 진실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햇빛처럼 뜨겁고 현실적이었다. 나는 지금도 샐러드 한 조각을 씹으며 그 흔적이 남긴 씁쓸함과 맥주의 청량함을 동시에 맛본다.
사람은 빛과 그림자 속에서 길을 찾는다. 그것은 내게 빛이었다가, 다시 그림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결국 나라는 사람의 궤적을 완성시킨다.
빛은 사라질지라도 나는 산책을 멈추지 않는다.
샐러드의 푸른색이 고요한 결단이라면, 맥주의 쌉쌀한 거품은 그 결단의 흔들림이다. 그러나 부조리는 바로 거기에 있다. 결단과 흔들림 모두가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사실에.
모든 그림자는 언젠가 끝난다. 그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새벽의 빛일 수도, 완전한 어둠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길 위에서 끊임없이 걷고 있는 나 자신이다.
삶은 나와 부조리 사이의 대화다. 노랑빛 거품 속에서, 초록 잎사귀 사이에서 그 대화를 계속 이어간다. 결말은 정해져 있지 않다. 그러나 어떤 실패도 영원하지 않으며 모든 성공은 기다릴 줄 아는 사람에게 찾아온다.

산책길의 태양이 저물수록 그림자는 짙어진다. 누군가는 그것을 어둠으로 보겠지만 나는 그 속에서 희미한 가능성을 본다.
카뮈는 부조리를 말하며 삶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과 답의 부재를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가 강조했던 건, 부조리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선택해야 한다는 우리의 태도였다.
샐러드의 차분함과 맥주의 자유로운 거품 사이에서 나는 이 모순된 세계를 껴안는다.
부조리의 경계에서 가장 흔들리는 것은 마음이다. 어떤 이는 완벽한 정답을 찾으려 하지만 나는 정답보다 나은 질문을 찾으려 애쓴다. 그리고 그 질문 속에서 나를 찾는다.

알제리의 바다에 있는 나를 상상한다. 삶의 길은 때로 나를 고요한 해변으로, 때로는 거센 폭풍으로 몰아넣는다.
바닷물의 냄새를 맡으며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가 찾고 있는 것은 평온인가 아니면 폭풍 속에서의 자유인가?
카뮈는 해답 대신 이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라고 말했다. 사랑과 삶이 모두 부조리의 경계에 서 있음을 인정하며 나는 이 모순을 껴안고 앞으로 나아간다.
어느 날 나는 샐러드의 초록빛 고요함을 끝까지 느끼는 동시에 맥주의 쌉쌀함을 흠뻑 누릴 것이다. 그리고 그날 나는 내 앞에 펼쳐질 모든 가능성을 마주할 것이다.
부조리가 있어도 삶은 여전히 나에게 웃음을 안겨줄테니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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