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널 버렸다 생각하지마라 세상은 널 가진 적이 없다

- 에르빈 롬멜 장군 -

 

 

 

이방인을 읽고, 강철의 연금술사 속 한 장면이 떠오른다. 작품속 호문쿨루스 킹 브래들리는 주인공 에드워드 엘릭에게 이렇게 말한다.

"길을 걷다가 발밑을 기어가는 벌레를 보고 가엾다고 생각한 적 있나?"

대부분 그렇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무나 그 벌레라는 존재가 미물이라는 생각에 아무런 감정이나 생각이 들지 않을 것이다. 그 가치를 너무나도 낮게 보는 것이다. 호문쿨루스 킹 브래들리는 자신이 인간을 보는 시선또한 그렇다고 말한다. 본인의 기준에서 인간이란 한낱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즉 인간을 향한 냉소다. 인간은 연약하고, 감정에 휘둘리며, 우주의 진리를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자신들만의 관념 속에서 떠돈다는 것이다. "호문클루스 ==> 인간"의 관점을 "인간 ==> 벌레" 로 비유한 킹 브래들리의 가치관 자체는 인간의 존엄을 무시한 발언이므로 잘못되었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언제까지나 인간들의 생각이다. 다시말해 인간들이 벌레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고, 하찮게 대하는 것은 인간의 관념일 뿐, 우주의 관념에서는 전혀 그렇지가 않다.
(잠시 비슷하지만 다른 이야기로, 강철의 연금술사에서 최초의 호문쿨루스 플라스크 속의 난쟁이는 진리 그 자체가 되기 위해 7대 죄악인 분노, 색욕, 식탐, 질투, 탐욕, 나태, 교만을 분리시킨다.
그러나 인간의 결점이라 생각한 이 7대 죄악을 분리시키면 좋은 결과가 있을거라 예측했던 플라스크 속의 난쟁이의 생각과는 달리... 결과는 처참할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쩌면  아라카와 히로무 작가가 알베르 카뮈의 부조리 개념과 그로 인해 우리가 가져야 할 올바른 삶의 태도를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닐지 상상했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인간 사회의 관념과 감정이라는 필터를 걷어내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사람이다.
그렇기에 그는 어머니의 죽음도, 여자친구의 청혼도, 이웃의 범죄 협조도 그저 무덤덤히 예스맨이 되어 수용한다. 이 무심함이 사실은 우주의 진리를 너무 빨리 알아버린 자의 냉철함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무심함이 지난번 읽었던 소설 아몬드의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장애를 가진 주인공을 떠오르게 한다. 그러나 이방인은 아몬드의 주인공처럼 무감정의 소설이 아니다. 이방인은 삶의 부조리함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인간의 태도에 관한 이야기다.

 

 

 

카뮈는 "우주는 인간에게 불친절하다"고 말한다.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도 불행한 사고를 당할 수 있고, 죄 없는 사람이 억울하게 죽을 수도 있다. 인간이 만들어낸 권선징악이라는 관념에 완전히 배반되는 이야기이다. 이 불합리함(부조리)을 인정하고도 계속 살아가려는 자세, 그것이 바로 알베르 카뮈 철학의 핵심이다.

우주에는 정답이 없고, 삶엔 어떤 해석도 부여되지 않을 수 있다. 신도, 진리도, 법도 인간이 만들어낸 관념일 뿐이다. 뫼르소는 이 진실을 깨달은 사람이었으며 그래서 그는 세상과 어긋나는 이방인이 되어버렸다.

킹 브래들리의 말처럼 우리는 벌레를 인간보다 가치 없는 존재, 미물로 여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연 우주적 관점에서도 그러할까?

만일 우리가 우주 전체를 관망할 수 있는 입장이라면 과연 인간이라는 존재가 그토록 위대한 존재일까? 수십억 광년을 넘어 존재하는 별들과 행성들 그리고 그 속에서 태어났다 사라지는 수많은 존재들 앞에서 인간이란 종은 고작 수십 년의 생을 살고 언젠가 먼지처럼 사라지는 유한한 존재일 뿐이다.

벌레가 우리보다 작고 약하다는 이유로 열등하다고 말할 수 없다면 인간이라고 해서 우주의 기준에서 특별한 존재라 말할 수 있을까? 인간은 자신들이 만든 가치 체계 안에서만 고귀하며 자신들이 세운 법과 윤리 안에서만 중심에 선다.

그러나 우주의 관점에서는 그런 기준 따위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 짓는 집, 법, 문화, 사랑, 그리고 신앙까지도 모두 우리끼리 정한 규칙과 믿음일 뿐 그것이 우주적 진리인 것은 아니다. 결국 인간도, 벌레도, 별도, 광물도 모두 우주 앞에서는 같은 무게의 '존재'일 뿐이다. 인간이 스스로를 더 위대하다고 여기는 것은 어쩌면 근거 없는 오만함일지 모른다.

 

 

 

"결혼하려면 사랑해야 한다."
"노인을 공경해야 한다."
"부동산을 사면 이 땅은 내 소유가 되는 것이야."
"촉법소년은 마땅히 살인을 저지르더라도 감안해주어야 해."

이러한 관념들, 종교, 그리고 법, 사주, 타로 등...
이 모든 건 인간이 만들어낸 기준과 인간들만의 정답이다. 만일 우주가 지성이 있는 존재라면, 인간들이 땅에 선을 긋고 네 것, 내 것하는 것을 보면 코웃음을 칠지도 모를 일이다.

우주가 별다른 이유없이 우리에게 불친절하다는것을 이해하기 위해 본인의 최대한의 재수없는 상황을 떠올려 보라.
가령 따돌림을 당한 경험, 취업에 실패했던 경험, 실연의 아픔, 큰 병에 걸렸던 경험 등...
그런데 우주는 당신의 고통을 겪고 있는데 당신에게 이렇게 DM을 보낸다.

"ㅋㅋ 걍 심심해서 해본건데... 많이 힘듦?? 근데 앞으로도 내 맘대로 할거고 딱히 이유 없어 알아서 해~ :D"

…이쯤 되면 인생에 대해 혈압이 오를 수밖에 없다.
'대체 원인이 뭘까 나의 삶에 대한 태도가 잘못된 걸까?'
'왜 아무 잘못도 없는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기는 거지?'
억울한가?

이방인의 뫼르소는 이러한 세상의 무응답에 대해 잘 이해하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과연 세상에 냉소적이고 무책임하고 수동적으로 임하는 뫼르소가 올바른 것일까? 카뮈는 우리더러 이렇게 살라고 말하는 것일까? 사실 그렇지는 않다.

알베르 카뮈는 리뷰에서 작품을 쓸 때 명확한 플랜을 가지고 있었다고 설명한다. 그 파트는 아래 세 파트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거부(이방인, 시지프 신화)
둘째, 긍정(페스트, 반항하는 인간)
셋째, 사랑

그러나 카뮈는 교통사고라는 인생 최대의 부조리를 맞이하게 되며 세번째 플랜을 실현하지 못한 채 삶을 마쳤다.
이방인은 카뮈 철학의 첫 단추인 셈이다.
이방인 속의 뫼르소는 태도의 방향성이지, 그가 성숙한 태도를 가졌고 온전한 의식을 가지는 현인이라 볼 수는 없다.

 

 

 

자, 아까 그 우주가 당신에게 보낸 DM으로 돌아가보자, 어쩌면 당신은 아직도 내가 상상해보라고 한 일 때문에
괜히 당신은 경험한 부조리에 대해 억울한 감정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바로 여기서 알베르 카뮈는 이 부조리한 진실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맞아. 말도 안 되지. 아무 이유도 없어. 근데 그게 현실이야. 그리고 너는 그 안에서 살아야 해."
카뮈는 이 불합리함에 화를 내거나 회피하지 않는다. 대신 차분히 말한다. 우주는 원래 그런 거라고.
세상이 너에게 아무 의미도 주지 않는다면 너 스스로 의미를 만들면 된다고.

카뮈는 말한다. 부조리는 없앨 수 없다. 하지만 그걸 견디는 방식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 세상의 무응답은 우리가 어찌 할 수 없는 일이란 걸 인정하는 것부터가 시작인 것이다.

그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도 우리는 햇볕을 느끼고 수영도 하고 좋아하는 사람과 산책하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사랑하고, 창조하고, 때로는 웃기도 하며 살아간다.

이게 바로 '시지프의 신화'에서 말한 반항의 정신이다. 절대 이길 수 없는 게임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돌덩이를 끝까지 밀고 올라가는 시지프처럼 말이다.

카뮈는 우리가 절망하지 않기를 바랐다. 우주가 아무 의미도 없이 우리를 흔든다고 해도 우리는 그 속에서 살아 숨 쉬며, 의미를 스스로 만들어가는 존재라고. 그게 인간이고 그게 진짜 삶이라고.

 

 

 

영화 트루먼 쇼에서 트루먼이 진실을 알게 된 뒤의 행동을 떠올려보라.

시나리오와 규범이 정해진 세트장에서 계속 살아갈 것인가? 그 세계가 편안하고 안전하다면 트루먼은 다시 돌아가기를 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트루먼은 불확실하고 위험하더라도 진짜 세상을 선택한다. 거짓된 의미가 아닌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삶의 의미를 선택한 것이다.

뫼르소도 이와 유사하다. 그는 세상이 만들어놓은 감정의 규범, 도덕적 잣대, 종교적 회개 모두를 거부한다. 대신 자신이 진짜로 느끼는 감각, 햇살과 바람, 바다의 냄새 같은 것들을 끝까지 지키고자 한다. 그는 마지막까지 죽음을 받아들이며 스스로의 삶을 책임지는 태도를 택한다. 그 삶이 부조리하더라도 말이다.

트루먼 쇼의 마지막 장면에서 트루먼은 문을 열고 세트장을 떠난다. 두 사람 모두 부조리를 외면하지 않고, 오히려 정면으로 마주한 사람들이다.

 

 

 

이방인은 확실히 쉽게 이해되는 책은 아니다. 어렵다. 그러나 공부할수록 그 깊이에 매료되었다. 이래서 사람은 인문학을 읽어야 하나보다.

세상의 규정된 정답보다, 도무지 뜻대로는 전혀 흘러가지 않으려는 엔트로피의 삶 속에서 더 넓고 깊은 시야를 갖게 해주는 것. 그런 의미에서 이방인은 나에게 다시 질문을 던지는 책이었다.
기회가 닿는다면 시지프 신화에 대해서도 읽어보고 이야기 해보고 싶다.

주말이 오면 나는 알람 소리나 외부의 간섭 없이 오롯이 내 몸이 충분히 쉰 만큼 자연스럽게 눈을 뜰 수 있어 참 좋다.
그렇게 팔팔한 컨디션으로 깨어나 수영장 물살을 시원하게 가르고 햄버거 하나 배불리 먹은 뒤에는 햇살 좋은 카페에 들러 책장을 넘긴다.

세상은 여전히 내게 무응답일지 모르지만 내가 선택하고 누릴 수 있는 작은 영역들 속에서 나는 분명히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토록 불친절한 우주 한가운데에서조차 이렇게 내 리듬을 지켜내며 살아가는 하루가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오늘은 조금은 따뜻했다.

 

 

 

저녁에 마리가 나를 보러 와서는 자기와 결혼할 마음이 있는지 물었다. 나는 그런다고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지만, 그녀가 원한다면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는 자기를 사랑하는지 알고 싶어 했다. 나는 이미 한 번 말했듯이, 그건 아무 의미도 없지만 그녀를 사랑하는 것 같지는 않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왜 나랑 결혼을 하죠?" 그녀가 말했다. 나는 그녀에게,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당신이 원한다면 우리가 결혼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제안한 사람은 그녀였고 나는 그러자고 말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던 거라고.

 

 

 

전에 나는 감옥 안에서는 결국 시간관념을 잃게 된다는 글을 분명히 읽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내게 별로 의미가 없던 말이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루하루가 얼마든지 길어질 수도 짧아질 수도 있다는 그 점이. 아마도 살아 내기에도 길지만, 너무나 늘어나서 종국에는 쌓이고 넘치게 되는 것이 하루였다. 그들은 이름을 잃었다. 단지 어제 또는 오늘이라는 단어만이 내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이 사람이 범죄자의 심정으로 어머니의 장례를 치렀기에 기소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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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끔 일상 속에서도 수학적 귀납법으로 생각해 보는 걸 좋아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수학적 귀납법은 어떤 사실이 계속해서 참일 거라고 증명하는 방법 중 하나다. 처음에 가장 작은 경우에서 그 사실이 성립함을 확인하고, 그다음에는 '만약 𝑛번째에서도 성립한다면, 𝑛+1번째에서도 성립할 것이다'라는 식으로 이어나간다.
마치 도미노를 차례로 넘어뜨리는 것과 비슷하다. 첫 번째 조각만 넘어지면, 그다음 것도 넘어지고, 또 그다음 것도 쓰러지는 식이다.
나는 이런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가 있다. 예를 들면, 아침에 출근할 때 늘 같은 시간에 같은 버스를 탄다고 해보자.
첫날, 둘째 날, 셋째 날 모두 맨 뒷자리의 같은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면, '내일도 아마 같은 자리에 앉을 수 있겠지'라고 기대하게 된다.
물론 예상이 빗나갈 수도 있지만, 어제와 오늘이 같았으니 내일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 다른 예로, 친구가 한 번, 두 번, 세 번 연속으로 약속 시간에 늦었다면 나는 자연스럽게 '다음번에도 늦을 가능성이 높겠다'라고 예상하게 된다.
한두 번은 우연일 수 있지만, 세 번이나 반복되었다면 그다음에도 같은 패턴이 이어질 거라고 판단하는 것이다.(영화 트루먼쇼에서 짐 캐리가 삶의 패턴을 발견하고 이곳이 가짜 지구임을 깨달았을때를 상상해보라) 이처럼 어떤 일이 반복되면 우리는 앞으로도 같은 일이 계속될 거라고 믿게 된다. 이것을 우리는 수학적 귀납법에 따른 추론이라 할 수 있다.

 

 

 

왜 갑자기 귀납법 같은 이야기를 하느냐?
책 속의 주인공 윤재는 사람의 예감에 대해 이렇게 표현한다. 사실 사람들이 흔히들 말하는 "내 예감이 그래..."라거나 "내 예감이 적중했어!"라는 말들도 결국 우리가 살아오면서 쌓아온 경험의 결과라고.
무의식적으로 축적된 기억이 패턴을 만들어 내고 그 패턴을 바탕으로 우리는 닥쳐올 미래를 짐작한다. 그러니까 우리의 예감 역시 일종의 학습의 산물인 셈이다.
그래서 나는 문득 수학적 귀납법을 떠올렸다. 윤재의 삶이나 우리나 별반 다르지 않다고... 당신은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어쩌면 T 성향이 강한 사람들은 많은 공감을 할 것 같다. 이 책은 궁극적인 T를 가진, 순도 100% T가 주인공인 이야기다. 어쨌든, 어떤 사실이 참임을 증명할 때 가장 작은 경우에서부터 출발해 그것이 한 단계씩 이어진다고 가정하며 논리를 확장해 나가는 과정...
윤재의 말과 수학적 귀납법은 닮아 있었다. 우리는 한 번의 경험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세 번이 되면서 결국 그것이 어떤 법칙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예감'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윤재에게는 그런 감각이 쉽게 와닿지 않았다. 편도체가 작아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하는 그는 기쁨도 슬픔도 두려움도 분노도 본능적으로 알아차릴 수 없었다.
세상사는 수학이 아니고 복잡하고 변수도 상상조차 못할만큼 다양하기에 그만큼 더 인과관계를 파악하기 어려웠다고나 할까...
그럼에도 세상은 그에게 마치 수학 공식처럼 이해해야 하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직감적으로 알고 있는 감정들을 윤재는 논리로 배워야 했다. 이러한 세상사에 대한 인풋과 아웃풋을 어머니는 일일히 할멈과 함께 윤재의 머릿속에 주입식으로 넣으려 부단히 노력한다.
그런 윤재는 삶의 방향을 정하는 방식 역시 남들과 달랐다. 감정이 없는 그가 경험을 통해 배우고 깨닫는 것들은 단순한 정서적 반응이 아니라 하나의 확실한 흐름이었다. 'A는 B다'와 같은.
그 수도 없이 많은 'A다 B다' 속에서 윤재는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세상과 관계를 맺어 갔다. 어머니의 가르침을 통해 폭력을 피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고 할멈을 통해 정이라는 감각을 간접적으로나마 익혔다.
곤이와의 만남을 통해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미묘한 줄타기를 경험했다. 그 미묘함은 늘 상대들의 몫이었지만 말이다.
그가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은 결국 그의 삶을 구성하는 '법칙'이 되었고, 그 법칙이 차곡차곡 쌓이며 윤재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해 나갔다.

 

 

 

나는 윤재의 이야기를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감정을 타고난 사람들에게도 사실 우리는 언제나 배워가며 살아가는 게 아닐까. 우리가 분노할 때, 슬퍼할 때, 혹은 사랑을 느낄 때, 그것이 정말로 본능적인 감정에서 비롯된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살아오면서 경험 속에서 배워온 결과일까? 흑백논리로 둘중하나라고 대답할순 없다. 분명 우리가 살아오며 쌓아온 경험치가 녹아져 있을 것이기에.
윤재가 감정을 배워가듯이 우리도 삶 속에서 조금씩 감정을 단련하며 살아간다. 처음에는 쉽게 화를 내던 사람이 점점 더 인내를 배우고 실수에 절망하던 사람이 실패를 딛고 일어나는 법을 배운다.
그것이 쌓이고 쌓여 어느 순간 우리는 더 성숙한 사람이 되어 간다. 수학적 귀납법처럼 하나의 작은 경험이 다음 단계로 이어지고 그다음이 또다시 반복되면서, 결국 우리는 스스로를 우리들이 원하는 모습대로 다듬어나간다.

 

 

 

나는 한편 윤재가 감정이 없으면서도 엄마와 할멈을 지키려는 소설 속 곳곳의 장면들을 읽으며 의아했다. 이것은 과연 학습된 결과물로써 보여지는 것일지, 아니면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행한 것인지. 고민했다.
이는 단순한 모순처럼 보이지만, 윤재의 행동을 깊이 들여다보면 감정이라는 것이 반드시 따뜻한 온기에서만 비롯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엄마와 할멈에게 의존하며 살아왔다. 그의 세계에서 유일하게 존재했던 두 사람, 자신을 이해하려 노력했던 이들이 사라진다면 그는 삶을 지속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을지도 모른다. 감정은 없지만 관계의 지속성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작동한 셈이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윤재는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사람들'에 대해 의문을 가진다. 그는 멀리 있는 불행을 외면하는 사람들을 보며, 자신이 공감할 수 없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그 틈에서 그는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만약 감정이 없는데도 누군가를 지키려는 마음이 생긴다면 그것은 '평범해지고 싶다'는 바람과 맞닿아 있지 않을까?
그는 감정을 갖지 못한 채 태어났지만, '정상적'인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도전한다.
우리는 작품속에서 그가 비록 감정은 없지만 하다는 사실은 알 수 있다. 감정이 없어도 항상 ''을 택하려 노력한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에 끝내 성장하고 만다. 코마상태에 있다가 결국 정신이 돌아온 엄마와 마주하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통해서...
윤재는 "비극과 희극을 영원히 나눌 수 없다"고 말한다. 그의 삶도 그렇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지만 누군가를 지키려 했다. 공감하지 못하지만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고민한다. 그리고 이 모든 고민 속에서 자신만의 답을 찾으려 한다.
그의 보호 본능은 결국 인간이기에 갖게 되는 어떤 '방향성'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감정을 기반으로 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모두 살아가면서 자신의 방식대로 누군가를 소중히 여기고, 어떤 의미를 만들어간다. 윤재 또한 그저 자신의 방식으로 사랑을 배워가는 과정 속에 있었고
결국 그 결실을 맺은 것이다. 빵집 아저씨 심박사의 말처럼... 노래를 참 못하지만 노력으로 좋아하는 노래 한소절은 잘 부를 수 있는 사람처럼...

 

 

 

그리고 곤이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몬드에서 가장 강렬한 캐릭터 중 하나는 단연 곤이일 것이다.(참 그런데 학창시절에 그런 친구들이 하나둘이 꼭 있었던 기억이 난다. 걔네들은 모두 이런 배경이 있었던 걸까...?) 그는 폭력적인 환경에서 자랐고 세상과의 소통 방식도 거칠었다.
윤재와 정반대의 위치에 있는 듯 보이지만 소외된 계층이라는 것은 공통적으로 분명했다. 어쩌면 그 누구보다도 윤재를 가장 깊이 이해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곤이는 윤재에게 단순한 친구나 적대자가 아니라 감정을 배우게 한 특별한 존재였다.
곤이가 나비를 찢는 장면은 그의 심리와 윤재에 대한 태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윤재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채 살아왔고 사람들의 공포나 슬픔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곤이는 이 세상의 잔혹함과 부조리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고자 했다. 그는 윤재가 단순한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마음의 고통을 느끼길 원했다.
곤이가 나비를 찢으며 윤재에게 보여주려 했던 것은 세상이 결코 아름답기만 한 곳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인간의 감정은 때때로 잔인함을 동반하며 그 잔인함을 외면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윤재는 처음엔 곤이의 행동을 단순한 폭력으로만 받아들였다. 또 이 와중에도 지극히 이성적인 판단으로만 나비의 안녕을 바랐다. 어떠한 감정도 모르지만, 그게 옳다고 배웠으므로...
곤이는 윤재가 무덤덤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더 거칠게 굴었고 결국 폭력을 통해서라도 윤재를 자극시키고 싶어 했다. 그러나 윤재는 곤이를 단순한 폭력적인 존재로만 인식하지 않았다.
그는 곤이의 행동 이면에 숨겨진 이유를 이해하려 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곤이의 내면에도 깊은 상처와 외로움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몸이 요즘 이곳저곳이 성치가 않다.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라더니 여기저기가 고장이 나고있다. 정신은 곧 육체와 직결된다. 어지럽혀진 머릿속을 비우며 쓰느라 글이 더욱 두서없게 느껴진다. 내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께 양해를 구해본다. 글을 좀 마무리 해보자면 윤재에게 곤이는 세상이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가르쳐 준 사람이었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자신과는 달리 곤이는 감정의 풍파를 온몸으로 맞으며 살아온 외로운 사람이었다.
윤재는 곤이를 통해 감정을 배우고 세상과 연결되는 법을 익히게 된다. 반대로 곤이도 윤재와의 관계를 통해 폭력이 아닌 방식으로 누군가와 관계를 맺을 수 있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곤이와 윤재는 서로를 변화시켰다. 곤이는 윤재에게 감정의 가능성을 열어 주었고, 윤재는 곤이에게 폭력이 아닌 이해로 다가갈 수 있는 길을 보여 주었다. 그들의 관계는 단순한 우정 이상의 의미를 가지며 서로 각자가 가진 어떠한 부재, 불완전함을 채우는 과정을 보여주었다고 생각이 든다.
나는 아몬드를 읽으며 우리가 어떤 감정을 타고나든 상관없이 결국 그것을 어떻게 다듬고 쌓아가느냐가 중요하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여기선 감정을 메인으로 다루었으나 감정뿐만이 아니다. 당신이 스스로에게 느끼고 있는 부재, 불완전함 모든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윤재는 나름대로 삶을 배우고 이해하고 사랑을 배워갔다. 그리고 나는 그런 윤재의 성장 속에서 우리 역시 끝없이 배우고 변화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다시금 떠올렸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때로 불안하고 두렵고 때로는 감정에 휩쓸리기도 하지만 결국 그 모든 경험이 우리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 된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각자 스스로에게 바라던 바에 완전할 순 없지만, 평생 아마도 불완전하겠지만, 완전에 근사하기 위해 차곡차곡 쌓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수학적 귀납법처럼.

 

 

 

엄마는 임신 중에 겪은 스트레스나 몰래 피웠던 한두 개비의 담배, 막달에 못 참고 몇 모금쯤 홀짝인 맥주 따위를 후회했지만, 사실 내 머리통이 왜 그 모양인지는 너무 뻔하다. 그저 운이 없었던 거다. 생각보다 운이라는 놈이 세상에 일으키는 무지막지한 조화들이 많으니까.

 

 

 

그러자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뭐든 여러 번 반복하면 의미가 없어지는 거야. 처음엔 발전하는 것처럼 보이고 조금 더 지난 뒤엔 변하거나 퇴색되는 것처럼 보이지. 그러다 결국 의미가 사라져 버린단다. 하얗게.
사랑. 사랑. 사랑. 사랑. 사랑. 사.랑. 사아아라아아앙. 사랑.사랑사. 랑사. 랑사.
영원. 영원. 영원. 영.원. 여어엉. 워어어언.
자, 이제 의미가 사라졌다. 처음부터 백지였던 내 머릿속처럼.

 

 

 

B 사감은 밤중에 학생들의 러브레터를 훔쳐 읽으면서, 남녀 목소리를 번갈아 내며 1인극을 펼친다. 그 장면을 몰래 지켜본 세 명의 여학생은 저마다 반응이 다르다. 하나는 B사감이 우습다며 비웃고 다른 하나는 B 사감이 무섭다며 몸을 떨고, 세 번째 여학생은 B 사감이 불쌍하다며 눈물을 흘린다.
늘 한 가지 정답을 제시하던 엄마의 가르침에는 좀 위배됐지만 난 그런 결말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마치 이 세상에 정해진 답은 없다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남들이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한다고 해서 꼭 정해진 대응을 할 필요도 없는 게 아닐까. 모두 다르니까, 나같이 '정상에서 벗어난 반응'도 누군가에겐 정답에 속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엄마는 늘 집단생활에는 희생양이 필요하다고 얘기했었다. 엄마가 내게 그 지난한 교육을 시킨 것도, 내가 그 희생양이 될 확률이 매우 높기 때문이었다. 엄마와 할멈이 사하진 지금 엄마의 예언은 현실이 되었다.

 

 

 

부모는 자식에게 많은 걸 바란단다. 그러다 안되면 평범함을 바라지. 그게 기본적인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말이다, 평범하다는 건 사실 가장 이루기 어려운 가치란다.
생각해 보면 할멈이 엄마에게 바란 것도 평범함이었을지 모르겠다. 엄마도 그러지 못했으니까. 박사의 말대로 평범하다는 건 까다로운 단어다. 모두들 '평범'이라는 말을 하찮게 여기고 쉽게 입에 올리지만 거기에 담긴 평탄함을 충족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내게는 더욱 어려운 일일 거다. 나는 평범한을 타고나지 않았으니까. 그렇다고 비범하지도 않으니까. 그 중간 어디쯤에서 방황하는 이상한 아이일 뿐이니까. 그래서 나는 한번 도전해 보기로 했다. 평범해지는 것에.

 

 

 

ㅡ 근데 잠은 잘 와? 학교는 어떻게 다녀? 망할, 가족이 네 앞에서 피 흘리면서 죽었는데.
ㅡ 그냥. 살게 돼. 나보다 오래 거릴지는 몰라도 다른 사람들도 얼마 안 돼 먹고 자고 다 할걸. 사람은 살게 돼 있는 존재니까.

 

 

 

ㅡ몰랐던 감정들을 이해하게 되는 게 꼭 좋기만 한 일은 아니란다. 감정이란 참 얄궂은 거거든. 세상이 네가 알던 것과 완전히 달라 보일 거다. 너를 둘러싼 아주 작은 것들까지도 모두 날카로운 무기로 느껴질 수도 있고, 별거 아닌 표정이나 말이 가시처럼 아프게 다가오지도 하지. 길가의 돌멩이를 보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대신 상처받을 일도 없잖니. 사람들이 자신을 차고 있다는 것도 모르니까. 하지만 자신이 하루에도 수십 번 차이고 밟히고 굴러다니고 깨진다는 걸 '알게 되면', 돌멩이의 '기분'은 어떨까.

 

 

 

나비의 날개를 찢던 날, 곤이가 내게 무언가를 가르치려다가 실패한 그날, 어스름이 내리던 무렵. 바닥에 짓이겨진 나비의 잔해를 닦아 내며 곤이는 몹시 울었다.
ㅡ두려움도 아픔도 죄책감도 다 못 느꼈으면 좋겠어....

 

 

 

내게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처음엔 할멈을 찌른 남자의 마음이 궁금했다. 하지만 그 질문은 점차 다른 쪽으로 옮겨 갔다. 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척하는 사람들. 그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나 같은 천치도 안다. 그 아이가 아파하고 있다는 걸. 끔찍하고 불행한 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걸.
하지만 묻지 않았다. 왜 웃고 있느냐고. 누군가는 저렇게 아파하고 있는데, 그 모습을 등지고 어떻게 당신은 웃을 수 있느냐고.
비슷한 모습을 누구에서나 볼 수 있었기 떄문이다. 채널을 무심히 돌리던 엄마나 할멈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멀리 있는 불행은 내 불행이 아니라고, 엄마는 그렇게 말했었다.

 

 

 

멀면 먼 대로 할 수 있는게 없다며 외면하고, 가까우면 가까운 대로 공포와 두려움이 너무 크다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껴도 행동하지 않았고 공감 한다면서 쉽게 잊었다.
내가 이해하는 한, 그건 진짜가 아니었다.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았다.

 

 

 

그 이야기가 어떤 이야기가 될지는 나도 모른다. 말했듯이, 사실 어떤 이야이가 비극인지 희극인지는 당신도 나도 누구도, 영원히 말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딱 나누는 것 따윈 애초에 불가능 한 건지도 모른다. 삶은 여러 맛을 지닌채 그저 흘러간다.
나는 부딪혀 보기로 했다. 언제나 그랬듯 삶이 내게 오는 만큼. 그리고 내가 느길 수 있는 딱 그만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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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pin Waltz in A minor B.150

 

 

거짓말

사람은 누구나 마음 한구석에 묻어둔 말들이 있다. 차마 꺼내놓지 못한 말들. 혹은 너무 늦어버린 말들.

하지만 어떤 말들은 끝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거짓말이 되어버린다. 해미의 거짓말 노트도 그랬다.

해미의 거짓말 노트는 단순한 거짓말을 복기하기 위한 노트가 아니었다. 엄마가 조금이라도 덜 아파하길 바라는 마음이었고, 언니를 잃고도 남아 있어야만 했던 자신의 존재 이유 같은 것이었다. 해미는 매일 노트에 적었다.

나는 어떤 친구와 친하게 지내고 있고, 그 친구와 어떤 일을 벌였는지 상상하며 말이다.

하지만 해미의 진짜 하루는 그 문장과 정반대였겠지. 점심시간에 혼자 구겨진 도시락을 열었다가 그대로 덮었을지도 모른다.

친구들의 웃음소리를 멀리서 듣기만 하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교실 구석에서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을지도.
그러나 그런 솔직한 이야기들은 노트에 적히지 않았다. 엄마가 해미의 거짓말을 듣고는 조금이라도 안심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으니까.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게 정말 좋은 것일까? 누군가를 위해 꾸며낸 말들이 결국 내게는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되돌아올 수도 있는 건 아닐까?

거짓말을 쌓아 올릴수록 해미는 점점 더 고립되었을지도 몰랐다. 아무에게도 진짜 마음을 들키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감춰야 했을 것이다.

엄마가 걱정하지 않도록. 엄마가 버텨낼 수 있도록. 하지만 엄마를 위해 쓴 그 거짓말들이 어쩌면 해미 자신을 더욱 외롭게 만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 속에서 해미의 감정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것도, 결국은 사랑일까?" 하지만 어떤 사랑은 끝끝내 오해로 남고 어떤 사랑은 끝내 닿지 못한 채 스러진다.

 

 

 

이별

어떤 기억들은 시간이 지나도 흐려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선명해지고, 깊어진다.

잊히지 않을 줄 알았던 감정들은 서서히 옅어지는 법이라지만 그럼에도 끝끝내 사라지지 않는 감정들이 있다. K.H와 선자 이모의 이별이 그랬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나눈 말들은 어떤 것이었을까. 따뜻한 인사였을까 아니면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눈빛만 주고받았을까.
어떤 작별은 너무 평범해서 그 순간에는 그것이 마지막인 줄조차 알지 못한다. 그래서 더 애달프다.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 믿고 돌아선 그 길이, 사실은 끝이었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닫게 되니까.

선자 이모는 평생 그 순간을 가슴에 품고 살았을 것이다. 어쩌면 한 번쯤은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우연히라도 마주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은 언제나 무심하고 내 마음이 어떤지는 전혀 관심이 없다. 기적 같은 일들은 좀처럼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흘려보낸 시간이 어느 순간 너무 늦어버렸다는 걸 깨닫게 만든다.

그들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봄볕이 나뭇가지를 스치면 꽃이 피어나듯이 그들의 마음도 피어나기는 했지만 끝내 열매를 맺지는 못했다.

바람이 불면 꽃잎은 쉽게 떨어지고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것처럼.
이모가 해니에게 남긴 말이 마음에 남는다. "소설이 잘 풀려서 꼭 해피엔딩이 되면 좋겠다."

어쩌면 그 말은 단순히 소설에 대한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사랑을 적어도 이야기 속에서는 이루어지게 하고 싶었던 것이겠지..

적어도 해미의 소설에서는, 두 사람이 다시 만나고 사랑을 이루고 오래도록 행복하기를 바랐던 건 아닐까.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소설과 다르다. 끝끝내 손에 쥘 수 없는 모래 같아서 아무리 움켜쥐려 해도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고 마는 것이다.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면서 고민에 빠졌다. 끝내 전하지 못한 말들 오해로 남겨진 감정들 차마 잡지 못한 손.. 그 모든 것들이 아득한 바람이 되어 가슴을 할퀴었다.

세상에 선의의 거짓말이 있다면 난 두 가지 거짓말이 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를 다치게 하지 않기 위해 하는 거짓말, 그리고 나 자신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 하는 거짓말.

해미의 거짓말이 첫 번째였다면, 선자 이모의 침묵은 두 번째였을 것이다. 어쩌면 나는 그 둘 다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랑은, 결국 거짓말 없이 마주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게 설령 상처를 남기더라도. 그게 설령 끝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예고 없이 내 인생에서 사라져버릴 것을 알았더라면. 그랬다면 나는 언니의 티셔츠를 훔쳐 입고 소풍을 가지도 않았을 것이고 언니가 싫어하는 걸 알면서 일부러 언니를 이름으로 부르지도 않았을 것이고, 엄마가 언니에게 시킨 심부름을 내게 떠넘겨도 짜증을 내지않고 다 해주었을 것이다. 나에게는 언니를 위해 무언가를 해줄 수 있는 기회가 더이상 없는데 한수에게는 남아 있다는 사실에 불쑥 화가 났다. 너무 불공평해. 불현듯 나는 줄곧 내가 그렇게 생각해왔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자 한없이 서글퍼졌다. 열네 살에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은 나처럼 고통스러웠으면 하고 바라는 그런 인간이 나라는 걸 아아버렸기 때문에. 그건 내가 처음으로 또렷하게 마주한 내 안의 악의였다.
"이모, 소용없는 줄 알면서도 뭔가를 하려는 바보 같은 마음은 대체 왜 생기는 걸까요?"
나는 내 하얀 운동화 위로 녹아서 떨어진 아이스크림을 시무룩이 바라보다가 이모에게 물었다. 이모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햇따.
"간절하니까 그런 게 아닐까?"

 

 

 

그리고 그 행간에 잔잔히 흐르던 격정과 애달픔을 느낀 사람이라면 누구든, 선자 이모가 첫사랑의 이름을 듣는다면 동요할 수밖에 없으리라 확신했을 것이다.
숨기려해도 감춰지지 않는 게 사랑일 테니까. 봄볕이 나뭇가지에 하는 일이 그러하듯 거부하려 해도 저절로 꽃망울을 터뜨리게 하는 것이 사랑일 테니까. 무엇이든 움켜쥐고 흔드는 바람처럼 우리의 존재를 송두리째 떨게 하는 것이 사랑일 테니까.

 

 

 

우재는 정말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말하며 자조적으로 웃곤 했지만 나는 사람이 겪는 무례함이나 부당함은 그것이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물에 녹듯 기억에서 사라지는 게 아니라 침전할 뿐이라는 걸 알았고, 침전물이 켜켜이 쌓여 있을 그 마음의 풍경을 상상하면 씁쓸해졌다.

 

 

 

울고 있는 아이의 모습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정원의 한 모퉁이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초가을의 따사로운 햇빛이 떨어져 있을 때. 대체로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게다가 가을비는 쓸쓸히 내리는데 사랑하는 이의 발길은 끊어져 거의 한 주일이나 혼자 있게 될 때.

 

 

 

사람들은 어떤 감정을 영원히 간직할 것처럼 착각하지만 대개 그것들은 서글플 만큼 빨리 옅어진다. 물론 나의 경우에는 그렇게 되기까지 우재의 존재가 도움이 되었을 테지만.  우재는 조심스럽지만 분명한 보폭으로 내 삶에 걸어들어오고 있었는데, 그 사실은 내 마음을 환하게 하면서 동시에 어둡게 했다.

 

 

 

이제 와서 보면 선자 이모가 돕고 싶었던 건 내 소설 속 두 주인공들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모가 돌아오고 족발을 같이 맛본 후 이모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현관에서 신발을 신다 말고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나만 들을 수 있게 귓속말로 "소설이 잘 풀려서 꼭 해피엔딩이 되면 좋겠다"라고 속삭였으니까.

 

 

 

"해미야,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처한 위치에서 상대를 바라보잖아? 그건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고. 하지만 가끔 그 사람이 나 때문에 느낀 모멸감을 되갚아주기 위해 인적이 드문 새벽 일부러 찾아와 똥을 누고 간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그래서 그 똥을 떠올리면 그런 생각이 들어. 아무리 인간에게 한꼐가 있다 해도,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그토록 모멸감을 느끼게 해서는 안 되었던 게 아닌가 하는."

 

 

 

네 입을 통해선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사랑의 말이 가득한 편지였어. 너의 말로, 보다 분명하고 선언적인 말로 듣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랐던 열렬한 고백들이 거기에 적혀 있었지. 우리는 단 한 번도 세상의 많은 이들처럼 뜨거운 고백을 주고받지 못했잖아. 네게 듣고 싶은 말이 있어도 묻질 못했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다른 말로 대신해야 했어. 널 향해 꺼지지 않는 숯처럼 타오르는 마음이 너를 상하게 할까봐, 너를 세계에서 고립시키고, 외롭게 만들고, 이해받지 못하는 사람으로 만들까봐. 너의 손에 깍지를 낀 채 걷고, 너의 긴 속눈썹에 입술을 갖다대보고, 네 향긋한 품에 내 얼굴을 묻고 잠드는 상상을 수도 없이 했으면서도, 나는 네 마음을 그저 짐작하고 내 마음을 조심스레 암시하면서 두려워만 하다가 너를 잃었다.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네가 결혼을 한다고 했을 때는 죽고 싶었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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