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이 널 버렸다 생각하지마라 세상은 널 가진 적이 없다
- 에르빈 롬멜 장군 -
이방인을 읽고, 강철의 연금술사 속 한 장면이 떠오른다. 작품속 호문쿨루스 킹 브래들리는 주인공 에드워드 엘릭에게 이렇게 말한다.

"길을 걷다가 발밑을 기어가는 벌레를 보고 가엾다고 생각한 적 있나?"
대부분 그렇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무나 그 벌레라는 존재가 미물이라는 생각에 아무런 감정이나 생각이 들지 않을 것이다. 그 가치를 너무나도 낮게 보는 것이다. 호문쿨루스 킹 브래들리는 자신이 인간을 보는 시선또한 그렇다고 말한다. 본인의 기준에서 인간이란 한낱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즉 인간을 향한 냉소다. 인간은 연약하고, 감정에 휘둘리며, 우주의 진리를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자신들만의 관념 속에서 떠돈다는 것이다. "호문클루스 ==> 인간"의 관점을 "인간 ==> 벌레" 로 비유한 킹 브래들리의 가치관 자체는 인간의 존엄을 무시한 발언이므로 잘못되었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언제까지나 인간들의 생각이다. 다시말해 인간들이 벌레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고, 하찮게 대하는 것은 인간의 관념일 뿐, 우주의 관념에서는 전혀 그렇지가 않다.
(잠시 비슷하지만 다른 이야기로, 강철의 연금술사에서 최초의 호문쿨루스 플라스크 속의 난쟁이는 진리 그 자체가 되기 위해 7대 죄악인 분노, 색욕, 식탐, 질투, 탐욕, 나태, 교만을 분리시킨다.
그러나 인간의 결점이라 생각한 이 7대 죄악을 분리시키면 좋은 결과가 있을거라 예측했던 플라스크 속의 난쟁이의 생각과는 달리... 결과는 처참할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쩌면 아라카와 히로무 작가가 알베르 카뮈의 부조리 개념과 그로 인해 우리가 가져야 할 올바른 삶의 태도를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닐지 상상했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인간 사회의 관념과 감정이라는 필터를 걷어내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사람이다.
그렇기에 그는 어머니의 죽음도, 여자친구의 청혼도, 이웃의 범죄 협조도 그저 무덤덤히 예스맨이 되어 수용한다. 이 무심함이 사실은 우주의 진리를 너무 빨리 알아버린 자의 냉철함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무심함이 지난번 읽었던 소설 아몬드의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장애를 가진 주인공을 떠오르게 한다. 그러나 이방인은 아몬드의 주인공처럼 무감정의 소설이 아니다. 이방인은 삶의 부조리함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인간의 태도에 관한 이야기다.
카뮈는 "우주는 인간에게 불친절하다"고 말한다.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도 불행한 사고를 당할 수 있고, 죄 없는 사람이 억울하게 죽을 수도 있다. 인간이 만들어낸 권선징악이라는 관념에 완전히 배반되는 이야기이다. 이 불합리함(부조리)을 인정하고도 계속 살아가려는 자세, 그것이 바로 알베르 카뮈 철학의 핵심이다.
우주에는 정답이 없고, 삶엔 어떤 해석도 부여되지 않을 수 있다. 신도, 진리도, 법도 인간이 만들어낸 관념일 뿐이다. 뫼르소는 이 진실을 깨달은 사람이었으며 그래서 그는 세상과 어긋나는 이방인이 되어버렸다.
킹 브래들리의 말처럼 우리는 벌레를 인간보다 가치 없는 존재, 미물로 여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연 우주적 관점에서도 그러할까?
만일 우리가 우주 전체를 관망할 수 있는 입장이라면 과연 인간이라는 존재가 그토록 위대한 존재일까? 수십억 광년을 넘어 존재하는 별들과 행성들 그리고 그 속에서 태어났다 사라지는 수많은 존재들 앞에서 인간이란 종은 고작 수십 년의 생을 살고 언젠가 먼지처럼 사라지는 유한한 존재일 뿐이다.
벌레가 우리보다 작고 약하다는 이유로 열등하다고 말할 수 없다면 인간이라고 해서 우주의 기준에서 특별한 존재라 말할 수 있을까? 인간은 자신들이 만든 가치 체계 안에서만 고귀하며 자신들이 세운 법과 윤리 안에서만 중심에 선다.
그러나 우주의 관점에서는 그런 기준 따위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 짓는 집, 법, 문화, 사랑, 그리고 신앙까지도 모두 우리끼리 정한 규칙과 믿음일 뿐 그것이 우주적 진리인 것은 아니다. 결국 인간도, 벌레도, 별도, 광물도 모두 우주 앞에서는 같은 무게의 '존재'일 뿐이다. 인간이 스스로를 더 위대하다고 여기는 것은 어쩌면 근거 없는 오만함일지 모른다.
"결혼하려면 사랑해야 한다."
"노인을 공경해야 한다."
"부동산을 사면 이 땅은 내 소유가 되는 것이야."
"촉법소년은 마땅히 살인을 저지르더라도 감안해주어야 해."
이러한 관념들, 종교, 그리고 법, 사주, 타로 등...
이 모든 건 인간이 만들어낸 기준과 인간들만의 정답이다. 만일 우주가 지성이 있는 존재라면, 인간들이 땅에 선을 긋고 네 것, 내 것하는 것을 보면 코웃음을 칠지도 모를 일이다.
우주가 별다른 이유없이 우리에게 불친절하다는것을 이해하기 위해 본인의 최대한의 재수없는 상황을 떠올려 보라.
가령 따돌림을 당한 경험, 취업에 실패했던 경험, 실연의 아픔, 큰 병에 걸렸던 경험 등...
그런데 우주는 당신의 고통을 겪고 있는데 당신에게 이렇게 DM을 보낸다.
"ㅋㅋ 걍 심심해서 해본건데... 많이 힘듦?? 근데 앞으로도 내 맘대로 할거고 딱히 이유 없어 알아서 해~ :D"
…이쯤 되면 인생에 대해 혈압이 오를 수밖에 없다.
'대체 원인이 뭘까 나의 삶에 대한 태도가 잘못된 걸까?'
'왜 아무 잘못도 없는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기는 거지?'
억울한가?
이방인의 뫼르소는 이러한 세상의 무응답에 대해 잘 이해하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과연 세상에 냉소적이고 무책임하고 수동적으로 임하는 뫼르소가 올바른 것일까? 카뮈는 우리더러 이렇게 살라고 말하는 것일까? 사실 그렇지는 않다.
알베르 카뮈는 리뷰에서 작품을 쓸 때 명확한 플랜을 가지고 있었다고 설명한다. 그 파트는 아래 세 파트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거부(이방인, 시지프 신화)
둘째, 긍정(페스트, 반항하는 인간)
셋째, 사랑
그러나 카뮈는 교통사고라는 인생 최대의 부조리를 맞이하게 되며 세번째 플랜을 실현하지 못한 채 삶을 마쳤다.
이방인은 카뮈 철학의 첫 단추인 셈이다.
이방인 속의 뫼르소는 태도의 방향성이지, 그가 성숙한 태도를 가졌고 온전한 의식을 가지는 현인이라 볼 수는 없다.
자, 아까 그 우주가 당신에게 보낸 DM으로 돌아가보자, 어쩌면 당신은 아직도 내가 상상해보라고 한 일 때문에
괜히 당신은 경험한 부조리에 대해 억울한 감정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바로 여기서 알베르 카뮈는 이 부조리한 진실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맞아. 말도 안 되지. 아무 이유도 없어. 근데 그게 현실이야. 그리고 너는 그 안에서 살아야 해."
카뮈는 이 불합리함에 화를 내거나 회피하지 않는다. 대신 차분히 말한다. 우주는 원래 그런 거라고.
세상이 너에게 아무 의미도 주지 않는다면 너 스스로 의미를 만들면 된다고.
카뮈는 말한다. 부조리는 없앨 수 없다. 하지만 그걸 견디는 방식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 세상의 무응답은 우리가 어찌 할 수 없는 일이란 걸 인정하는 것부터가 시작인 것이다.
그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도 우리는 햇볕을 느끼고 수영도 하고 좋아하는 사람과 산책하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사랑하고, 창조하고, 때로는 웃기도 하며 살아간다.
이게 바로 '시지프의 신화'에서 말한 반항의 정신이다. 절대 이길 수 없는 게임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돌덩이를 끝까지 밀고 올라가는 시지프처럼 말이다.
카뮈는 우리가 절망하지 않기를 바랐다. 우주가 아무 의미도 없이 우리를 흔든다고 해도 우리는 그 속에서 살아 숨 쉬며, 의미를 스스로 만들어가는 존재라고. 그게 인간이고 그게 진짜 삶이라고.

영화 트루먼 쇼에서 트루먼이 진실을 알게 된 뒤의 행동을 떠올려보라.
시나리오와 규범이 정해진 세트장에서 계속 살아갈 것인가? 그 세계가 편안하고 안전하다면 트루먼은 다시 돌아가기를 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트루먼은 불확실하고 위험하더라도 진짜 세상을 선택한다. 거짓된 의미가 아닌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삶의 의미를 선택한 것이다.
뫼르소도 이와 유사하다. 그는 세상이 만들어놓은 감정의 규범, 도덕적 잣대, 종교적 회개 모두를 거부한다. 대신 자신이 진짜로 느끼는 감각, 햇살과 바람, 바다의 냄새 같은 것들을 끝까지 지키고자 한다. 그는 마지막까지 죽음을 받아들이며 스스로의 삶을 책임지는 태도를 택한다. 그 삶이 부조리하더라도 말이다.
트루먼 쇼의 마지막 장면에서 트루먼은 문을 열고 세트장을 떠난다. 두 사람 모두 부조리를 외면하지 않고, 오히려 정면으로 마주한 사람들이다.
이방인은 확실히 쉽게 이해되는 책은 아니다. 어렵다. 그러나 공부할수록 그 깊이에 매료되었다. 이래서 사람은 인문학을 읽어야 하나보다.
세상의 규정된 정답보다, 도무지 뜻대로는 전혀 흘러가지 않으려는 엔트로피의 삶 속에서 더 넓고 깊은 시야를 갖게 해주는 것. 그런 의미에서 이방인은 나에게 다시 질문을 던지는 책이었다.
기회가 닿는다면 시지프 신화에 대해서도 읽어보고 이야기 해보고 싶다.
주말이 오면 나는 알람 소리나 외부의 간섭 없이 오롯이 내 몸이 충분히 쉰 만큼 자연스럽게 눈을 뜰 수 있어 참 좋다.
그렇게 팔팔한 컨디션으로 깨어나 수영장 물살을 시원하게 가르고 햄버거 하나 배불리 먹은 뒤에는 햇살 좋은 카페에 들러 책장을 넘긴다.
세상은 여전히 내게 무응답일지 모르지만 내가 선택하고 누릴 수 있는 작은 영역들 속에서 나는 분명히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토록 불친절한 우주 한가운데에서조차 이렇게 내 리듬을 지켜내며 살아가는 하루가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오늘은 조금은 따뜻했다.
저녁에 마리가 나를 보러 와서는 자기와 결혼할 마음이 있는지 물었다. 나는 그런다고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지만, 그녀가 원한다면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는 자기를 사랑하는지 알고 싶어 했다. 나는 이미 한 번 말했듯이, 그건 아무 의미도 없지만 그녀를 사랑하는 것 같지는 않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왜 나랑 결혼을 하죠?" 그녀가 말했다. 나는 그녀에게,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당신이 원한다면 우리가 결혼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제안한 사람은 그녀였고 나는 그러자고 말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던 거라고.
전에 나는 감옥 안에서는 결국 시간관념을 잃게 된다는 글을 분명히 읽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내게 별로 의미가 없던 말이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루하루가 얼마든지 길어질 수도 짧아질 수도 있다는 그 점이. 아마도 살아 내기에도 길지만, 너무나 늘어나서 종국에는 쌓이고 넘치게 되는 것이 하루였다. 그들은 이름을 잃었다. 단지 어제 또는 오늘이라는 단어만이 내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이 사람이 범죄자의 심정으로 어머니의 장례를 치렀기에 기소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