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은 영혜의 남편의 1인칭 시점으로 시작된다. 그는 영혜를 "그저 평범하고 수수한 여자"로 묘사하며 그녀를 선택한 이유를 설명한다.
그러나 이 '평범함'이란 단어는 오히려 그녀의 삶에 던져진 첫 번째 폭력을 암시한다. 남편에게 영혜는 독립적 존재가 아닌, 그의 안정된 삶을 보장해 줄 도구일 뿐이다.
영혜가 갑작스럽게 육식을 거부하고 채식을 선언한 것은 남편에게 충격으로 다가온다.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이라는 그녀의 새로운 정체성은 남편의 안정된 일상을 흔들며 갈등의 시작을 알린다.
특히 그녀의 결정은 남편의 개인적 불편함을 넘어, 가정 전체의 문제로 확대된다.
가족 식사 자리에서 아버지는 그녀의 채식행위에 대해 폭력을 휘두른다. 친정 아버지는 가부장제의 상징이자, 이 장면은 단순히 육식과 채식의 갈등을 넘어 전통적 가부장제와 개인적 자유의 충돌을 상징한다.
영혜가 손목을 그으며 저항하는 순간 그녀는 단순히 음식 취향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사회적 규율을 거부하는 존재로 변모한다.
이 장면은 그녀의 선택이 단순한 개인적 취향을 넘어서는 깊은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왜 우리는 누군가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하면 억압하려 드는가? 타인의 자유를 존중한다는 것이 사실... 그렇게나 많이 어려운 일인가? 조금만 생각해보자. 왜 그리 못견뎌하며 억압하려 드는걸까. 누가 칼이라도 들고 협박하던가?
영혜는 육식을 거부하며 육식문화와 가부장제라는 근대 문명의 억압을 거부한다.
그녀는 아버지의 폭력으로 상징되는 사회 규율에 저항하며 체제 밖으로 추방되는 인물이다.
그녀의 선택은 단순히 '채식주의'라는 단어로 설명될 수 없다. 나는 채식주의자라는 표현은 사실 매우 피상적인 형태를 꼬집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래에서 더 자세히 설명하겠다)
이는 근대 문명이 여성과 자연을 억압해온 방식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폭력이란? 상식, 육식문화와 가부장제로 대변되는 근대 문명, 인간의 생물적 조건으로서의 폭력 모두를 이야기한다.
인간은 다른 생명을 먹어야만 살아갈수있다. 즉, 생물학적 조건에서 야기되는 폭력은 가부장제가 사라져도 해소되지 않는 폭력이다.
인간은 결국 다른 유기물을 먹어야만 살 수 있는 잡식동물이라는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는 어떻게해도 폭력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엿볼수 있는 부분이 영혜에게 물어뜯긴 동박새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영혜는 자신의 둥근 젖가슴이 아무도 해치지 않아 좋다고하지만 몸이 야위자 뾰족해진 젖가슴에 대해 "뭘 찌르려고 이렇게 날카로워지는 거지?"하고 불안해 한다.
마지막 장면의 영혜의 노출된 상반신에서 드러나는 뾰족해진 젖가슴과 죽은 동박새를 통해 폭력성을 드러낸다.



2부는 형부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그는 예술가로서 영혜의 몸에서 발견한 몽고반점에 매혹된다.
이 반점은 단순히 신체적 특징이 아니다. 그것은 그녀의 타자성을 상징하며, 동시에 그의 금기된 욕망을 자극한다.
형부는 영혜를 "순수한 예술의 매개체"로 바라보며, 그녀의 몸을 꽃으로 치장해 자신의 예술로 재탄생시키려 한다.
우리는 형부가 그녀를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가 아닌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는 대상으로만 바라보고 있음을 알게 된다.
형부와 영혜의 관계는 애매하고 불편하다. 그들의 행위는 예술로 미화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윤리적 문제를 제기한다.
그녀의 동의와 자유 의지로 이루어진 듯 보이는 이 관계는 사실상 또 다른 억압의 형태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영혜는 점차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간다. 그녀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타자화되며,
더 이상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상태로 내몰린다. 결국 형부와의 관계는 그녀를 자유롭게 하기는커녕, 더 깊은 억압 속으로 밀어넣는 역설적 결과를 초래한다.
꽃이 되면 평화로워질줄 알았으나 결국 친언니 언니에게 캠코더 영상으로 큰 상처를 주고만다. 폭력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시도가 계속 또다른 폭력을 만들어낸다.
즉 폭력이 사회, 문화, 제도의 산물일 뿐만아니라 인간 삶의 근본적 조건이기도 하다. 채식주의자는 남성과 육식, 여성과 채식이라는 이분법적인 방법을 차용하는 듯 하면서 교묘하게 그것을 역설한다.
영혜와 형부가 육체적으로 결합하는 기괴한 장면에서 부분적으로 혼종성에 있다. 결합한건 인간의 몸이다. 그 결합은 성적 욕구에 의해 매개된다.
결합된 것은 동물적이다. 그러나 몸에 그려진건 꽃이다. 책에서도 "꽃과 짐승과 인간의 뒤섞인 한몸"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영혜가 몸에 꽃을 그린 J나 형부를 욕망하는 모습, 비쩍 마른 몸으로 정신병원에서 격렬히 몸부림 치는 모습도 이와 비슷한 효과를 자아낸다.



마지막 3부는 영혜의 언니인 인혜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인혜는 자신이 영혜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했음을 깨닫는다. 이 과정에서 영혜는 더 이상 인간 세계의 규율을 따르지 않으며, 음식을 완전히 거부한다.
그녀는 "식물이 되고 싶다"고 선언하며, 자연으로의 완전한 동화를 꿈꾼다. 그러나 이 꿈조차 이상적이지 않다. 영혜가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욕망은 인간과 자연의 경계에서 발생하는 또 다른 갈등을 보여준다.
그녀가 인간으로서의 삶을 거부하고자 하는 이유는 단순히 폭력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그 폭력을 완전히 소멸시킬 수 없다는 좌절감 때문이다.
영혜의 마지막 모습은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그녀는 활활 타오르는 나무를 응시하며 자신의 존재를 초월하고자 한다.
식물이 되길 원하지만 끝내는 동물일수밖에 없는 존재... 
한강 작가는 폭력이라는 개념이 완전히 사라진 세상을 망연히 꿈꾸기보다는 
인간 문명의 지반이 어떤 종류의 폭력들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직시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라고 말하고자 한 것같다.
위에서 말했듯 채식주의자라는 책의 제목은 피상적이다. 건강을 위해, 아토피, 알레르기 체질을 개선하기 위해, 환경을 보호하기위해 등등
여러가지 이유를 덧붙이지만 결국 채식주의자라는 단어는 영혜가 고기를 거부하는 이유를 속시원히 설명하지 못한다.
회사사람들과의 모임장소에서 영혜의 남편은 저런 피상적인 이유를 나열하며 영혜의 채식이유를 모임 사람들에게 설명한다.
그제야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있는 규범과 사상내에서 이해하고 영혜의 채식을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들인다.
인간은 자신이 알고 있는 개념 체계 내부에서만 타자를 이해할 수 있다. 언어로 대상을 파악하려는 시도는 그 대상의 실체를 언어 바깥으로 불가피하게 미끄러뜨린다.
나는 이 사실이 채식주의자 전체를 관통하는 문제의식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몽고반점에서 형부는 매우 이중적인 위치에 있다.
영혜의 식물성을 가장 먼저 알아보는 사람은 형부였다. 첫 만남 때부터 "야생의 나무 같은 힘"을 느끼고 영혜에게 몽고반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푸른 꽃이 열리는 장면을 떠올린다.
결과적으로 영혜가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게 만들어 준 것도 형부다. 형부는 "아무도 그녀를 도울 수 없었다.", "모든 사람이 철저한 타인 혹은 적이었을 것이다." 라는 표현을 하며 영혜의 처지를 이해하고 헤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부는 독자들에게는 왠지 불편하고 메스껍거나 역겨운 존재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형부가 철저히 자기의 시선에서 타자화된 영혜를 진단하고 욕망하기 때문이다. 형부는 영혜를 모든 욕망이 배제된 육체, 식물적 육체로 보지만 그건 영혜의 단편적인 부분일 뿐 그녀를 완벽히 이해한 것이 아니다.
완벽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부분은 아래 부분을 통해 알 수 있다.
영혜는 자신이 꿈을 꿔서 고기를 끊었다는 말이 타인들에게 이해받지 못할 것임을 잘 알고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혜는 형부에게 이에 대한 설명을 해주려하지만 형부는 "널 삼켜서, 널 녹여서 내 혈관 속에 흐르게 하고 싶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다 영혜의 말을 자장가삼아 잠이 드는 형부, 이는 결국 형부는 영혜에게 결국 '나'를 철저하게 타자화하는 타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인혜(영혜의 친언니)는 삶에 있어서는 안될 바람현장을 경험한(모르고 사는 것보단 어쩌면 들킨것이 다행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눈치채기 어렵지만 인혜는 영혜에게 치명적인 정신적 해를 입히는 인물이다.
캠코더를 발견하고 인혜가 남편에게 말하길 "아직 정신도 성치 않은 애를..."이라 말한다.
영혜를 비정상으로 판단하지만 사실 영혜는 회복중인 상태였다. 밥도 잘먹고 일자리도 구하기 직전이었고 형부를 통해 악몽도 점점 꾸지 않고 있었다.
"무섭지 않아요.. 무서워하지 않을거에요"
과정이 어찌되었든 결과적으로는 형부와의 만남을 통해 구원의 가능성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인혜는 그러한 가능성을 차단하게 되고, 그 이유는 단순 미움이나 괘씸보다는 반드시 치료가 필요하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알고있는 개념과 문화, 정서에서 이해하려는 태도는 결국 강제 입원이라는 폭력으로 이어지고 만다.
이 소설에서 영혜는 주요 서술자로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타인들에 의해 재현되는 영혜가 진짜 영혜인지를 의심하며 읽어야 한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영혜가 완전한 이상향을 좆고, 무해한 존재는 아니라는 것이다.
폭력의 질서에서 벗어나기 위해 식물되기를 꿈꾸지만 식물에게 일방적인 시선을 보내는 영혜의 모습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영혜는 세상의 나무들은 모두 형제 같다고 말한다. 이 말은 굉장히 생태주의적 표현이다.
식물들을 어떤 연대에 기반을 둔 평화로운 공동체로 보고 있다. 그러나 사실 이 소설에서 나무들은 굉장히 공격적이고 동물적이다.
소설 첫장면에 등장하는 나무들의 모습부터 그러한데, 영혜의 꿈속 나무들은
뾰족한 잎이 돋은 나무들을 헤치느라고 얼굴에, 팔에 상처가 났다라고 말한다. 가해의 굴레로부터 해방된 식물.. 물과 광합성만 필요한 식물.. 그런것은 사실 없다.
나무도 인간에게 상처를 준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대놓고 보여주면서 이 소설은 시작한다.
그렇다면 끝은 어떠한가?
"활활 타오르는 도로변의 나무들을, 무수한 짐승들처럼 몸을 일으켜 일렁이는 초록빛의 불꽃들을 쏘아본다:"
굉장히 역동적이며 위협적이다.
"짐승들처럼"이라는 표현을 대놓고 사용하며 동물 VS 식물에 대한 이분법에 균열을 낸다.
실제로 식물들의 세계를 보면 경쟁이 치열하고 살벌하다.
식물에게 평화나 연대같은 가치를 투영하는 것도 인간 중심적인 사유일 수 있다.
이러한 면에서 영혜의 나무가 되기가 실패한 이유는 어쩌면 자신이 동물이라는 현실을 외면해서뿐 아니라
나무들을 자신이 알 고 있는 나무라는 개념 체계 내에서만 바라보고 해석하는 폭력을 범했기 때문아닐까?
채식주의자는 폭력의 여러 형태를 다룬다. 그것은 물리적 폭력, 심리적 억압, 그리고 제도적 강요를 포함한다.



이 소설은 우리가 타인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때로는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특히 영혜라는 인물은 독자로 하여금 타자를 이해하는 데 있어 언제나 잠정적 한계가 있다는 점을 깨닫게 한다.
한강은 이 작품을 통해 독자들에게 묻는다. 우리는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아니면 우리의 틀 안에 맞추기 위해 그들을 재단하는가? 이 질문은 단순히 문학적 질문이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끊임없이 제기되는 도전이다.
우리가 불가피한 폭력의 요구를 기어이 감내하는 것과 타자를 함부로 의미화하지 않는 것은 양립가능하다.
이 소설은 영혜가 활활 타오르는 나무들을 대답을 기다리듯 쏘아보는 장면으로 끝난다.
이 장면은 나무 불꽃으로 표상되는 미지의 타자로부터 어떤 의미를 기대하면서도 언어의 한계를 의식하고 의미화를 유보하는 윤리를 보여준다,.
즉, 우리들의 의미화가 언제나 잠정적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면서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놓아야 한다.
둘째로 폭력이 삶의 근원적인 조건인 이상 우리에겐 폭력의 유무로 도덕적 선악을 단정하지 않는 새로운 의식이 필요하다.
여기서는 폭력의 발생자체가 아니라 누구의 누구를 향한 어떤 폭력인가가 주요한 문제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우리는 불가피한 폭력뿐 아니라 불가피한 돌봄의 연쇄에 의해서도 관계 맺고 있다.
폭력과 돌봄은 모두 삶의 근본적인 조건이지만 그 불가피성 내에서 우리는 누구와 어떤 관계에 연루될 것인지를 어느 정도 선택할 수 있다.
인혜는 이 기성적인 세계에 남아서 지우를 돌보기로 선택했다.
이 일은 가부장제가 부여한 노동이기도 하지만 인혜의 기쁨의 원천이자 삶을 어떻게든 붙잡아낼 책임을 스스로 부여한 결단의 결과이기도 하다.
우리의 살생을 완전히 속죄하기는 어렵겠지만 누구를 어떻게 돌볼 것인지를 선택하면서 폭력이라는 원죄가 유의미한 돌봄과 함께 순환하는 세계를 만들어야한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영혜는 더 이상 인간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 그녀의 존재는 인간과 자연, 폭력과 평화, 이해와 오해 사이에 놓여 있다.
독자들은 이 모호한 결말을 통해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한다. 채식주의자는 단순한 소설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와 그 복잡성을 탐구하는 하나의 거대한 질문이다.

 

 

 

이 책을 읽으며....
마치 영혜가 꿈속에서 고기를 거부하며 나무가 되고자 했던 그 갈망처럼,
나 또한 나를 옭아매는 것들을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을 느꼈다. 하지만 동시에, 영혜의 이야기는 내게 질문을 던졌다.
과연 벗어난다는 것이 가능할까? 그 과정은 정말로 평화로울까?

요즘의 일상 속에서 내가 선택한 것들조차 내가 아닌 누군가를 위한 것이 되어버리는 순간들.
마치 인혜가 가부장제의 틀 안에서 돌봄을 자신의 책임으로 받아들이듯, 나도 그저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은 나에게 선택의 무게를 다시금 돌아보게 했다. 영혜는 식물이 되길 원했지만, 결국 몸은 야위고 날카로워졌다.
그런 영혜를 바라보며 나는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지쳐가고 있는가?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영혜의 여정을 따라가며 나 또한 내 안의 폭력성을 마주했다.
폭력이라 하면 누군가를 해치는 직접적인 행위만 떠올렸던 내가, 사실은 나 자신에게 얼마나 잔인했는지를 깨달았다.
비교를 하며 무언가를 무가치하게 여기거나, 꿈을 스스로 묵살하며, 어떤때는 내 마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찔렀다.
그리고 나서야 깨달았다. 나를 돌보지 않는 것도 하나의 폭력이었다는 것을.

책의 마지막 장면, 활활 타오르는 나무들을 바라보던 영혜처럼 나도 불꽃들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싶었다.
그것은 단순히 절망의 상징이 아니라, 나를 묶었던 끈을 태워버릴 수 있다는 가능성이었다. 불꽃 속에는 미지의 타자, 새로운 해석, 다른 나의 모습이 있었다.
삶은 결국 폭력과 돌봄이 얽힌 복잡한 굴레다.
누구에게 돌볼 마음을 품고 누구를 해칠 위험을 안고 있는지를 고민하며 우리는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영혜의 이야기처럼 나도 내 삶 속에서 무엇을 돌보고 무엇을 놓아줄지 선택해야 한다.
지금은 조금 두렵고, 때론 불안하지만, 그 선택 안에 작은 희망이 있다는 것도 알 것 같다.

책을 덮으며 나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다짐했다. 언젠가 나도 활활 타오르는 불꽃처럼 나를 정의하려는 모든 의미를 태워버릴 수 있는 사람이 되리라고.
그리고 남겨진 재 속에서 나만의 의미를 새롭게 쌓아가리라고. 이 책은 내게 그런 희미한 빛을 남겨주었다.

 

 

 

 

그렇게 끝났다. 그날 이후 그들의 삶은 결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살아갔다. 등 뒤에 끈질긴 추문을 매단 채 가게를 꾸려나갔다. 시간은 가혹할 만큼 공정한 물결이어서, 안내로만 단단히 뭉쳐진 그녀의 삶도 함께 떠밀고 하류로 나아갔다.

 

 

 

그를 사랑한다는 확신이 그녀에게는 없었다.
그것을 부지중에 알면서 그녀는 그와 결혼했다.
혹 그녀에게는 자신을 좀더 위로 끌어올려줄 무엇인가가 필요했던 건 아닐까.

 

 

 

처음 얼마 동안은 여느 부부들처럼 그와 크고작은 언쟁을 하기도 했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체념할 수 있는 것들은 체념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그를 위한 것이었을까.
함께 살았던 팔년 동안, 그가 그녀를 좌절시킨 만큼 그녀 역시 그를 좌절시켰던 것은 아닐까.

 

 

 

문득 이 세상을 살아본 적 없다는 느낌이 드는 것에 그녀는 놀랐다. 사실이었다. 그녀는 살아본 적이 없었다. 기억할 수 있는 오래전의 어린시절부터, 다만 견뎌왔을 뿐이었다.

 

 

 

이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 더이상은 견딜 수 없다. 더 앞으로 갈 수 없다. 가고 싶지 않다.

 

 

 

그녀는 이미 깨달았다. 자신이 오래전부터 죽어 있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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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류진 작가의 '달까지 가자'에 이어 '일의 기쁨과 슬픔'도 읽었다. 이 책은 군대에서 일과가 끝나고 먹는 라면, 회사에서 퇴근 후 허기진 상태에서 먹는 라면처럼 술술 입안으로 빨려들어가는 그 맛이다.

 

첫 번째 단편인 '잘살겠습니다'는 나이 많은 회사 동기 언니의 결혼과정을 다루는 이야기다. 빛나라는 인물은 매우 순진한 캐릭터이다.
그리고 정도의 차이일 뿐 우리 주변에 이런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이 존재한다.
빛나는 동기지만, 가까운 친구라기엔 애매한 어정쩡한 관계 속에서 그녀는 존재만으로도 화자를 지치게 만든다.
이러한 존재는 회사에서 특히 그 빛을 발하는데, 나같은 성격들의 사람들로 하여금 복장 터지는 답답함과 짜증스러움을 유발하곤 한다.
사람이 나쁜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해서든 나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고, 나의 일을 더 어렵게 만들어 놓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결과물을 만들어 내곤 한다.
중요한 점은 그러한 사실은 그들은 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의 존재조차 잊고 있던 화자는, 청첩장을 달라는 빛나의 말에 '동기 1호 결혼 커플을 축하하는 청첩장 모임'으로 퉁쳐 만나려고하지만,
빛나는 그녀를 내심 좀 더 가까운 존재로 여기었는 듯 1:1로 따로 만날 것을 제안한다. 
에비동을 특 에비동을 시켰기 때문에 새우가 더 많이 나온 것인데 새삼 놀라는 그녀였고
전세계약을 하며 확정일자 조차 모르고 결국 이중계약 사기를 당해버린 그녀였고
끝내 1:1로 밥을 얻어먹어놓고는 결혼식에 등장조차 안한 그녀였다. (그리고 축의금조차 내지 않는 넌센스 그 자체였다.)

 

 

 

"빛나 언니한테 가르쳐 주려고 그러는거야. 세상이 어떻게 어떤 원리로 돌아가는지. 오만원을 내야 오만원을 돌려받는 거고, 만이천원을 내면 만이천원짜리 축하는 받는 거라고. 아직도 모르나 본데, 여기는 원래 그런 곳이라고 말이야. 에비동에 새우가 빼곡하게 들어 있는 건 가게 주인이 착해서가 아니라 특 에비동을 주문했기 때문인 거고, 특 에비동은 일반 에비동보다 사천원이 더 비싸다는거. 월세가 싼 방에는 다 이유가 있고, 칠억짜리 아파트를 받았다면 칠억원어치의 김장, 설거지, 전 부치기, 그밖의 종종거림을 평생 갖다바쳐야 한다는 거. 디즈니 공주님 같은 찰랑찰랑 긴 머리로 대가없는 호의를 받으면 사람들은 그만큼 맡겨놓은 거라도 있는 빚쟁이들처럼 호시탐탐 노리다가 뭐라도 트집 잡아 깎아내린다는 거. 그걸 빛나 언니한테 알려주려고 이러는 거라고, 나는."

 

 

 

화자는 그녀에게 제대로 이 현실과 세상의 진리를 깨닫게 해주기 위해
철저히 빛나의 결혼식 선물을 준비한다. 그동안의 밥값, 커피값에 근거한 정확히 계산된 간단한 편지를 곁들인 올리브영에서 산 만이천원어치의 선물을 준비했다.
딱 그만큼의 선물로, 빛나에게 세상의 룰을 가르쳐 주겠다는 의도다.
그러나 빛나는 그 선물을 받고 감동을 받았는지 편지와 선물을 사진찍어 본인의 프로필 사진으로 올렸다.
어쩔 도리가 없다. 세상의 이치를 알려주려 했던 화자의 노력은 헛수고로 끝났고, 빛나의 순진함은 또 한 번 화자의 속을 긁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떡을 씹으며 빛나가 잘 살길 바란다. 바보 같고 어리숙하고 때론 짜증나지만, 그래도 그녀가 진심으로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은 남아 있다.
이 단편의 묘미는 여기 있다. 빛나를 향한 화자의 분노와 연민, 그리고 희망이 뒤섞인 감정은 마치 우리 모두의 관계 속 갈등을 상징하는 듯하다.
절대적인 악과 선은 없다. 웃프게도... 어쩌면 그녀는 화자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공감능력이나 지능이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화자는 답례로 받은 떡들을 먹으며 빛나가 부디 잘살기를 희망한다. 바보들이 참 밉다. 밉지만 그들의 순수하면서도 순진한 마음은 부정할 수 없고 그저 잘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잘 살겠습니다'는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한다. 어쩌면 빛나는 우리의 과거 모습일 수도 있고 혹은 우리가 미워할 수 없는 주변 사람일 수도 있다.
그녀는 답답하지만 밉지 않고 어리숙하지만 착한 마음만큼은 응원하게 된다.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우리는 항상 물질적인 것이든 마음인 것이든 공평을 추구한다. 잘 살겠습니다의 화자의 말대로 딱 그 값어치만큼으로 세상이 정말로 돌아간다면 얼마나 이상적일까?
그러나 세상은 사실 주는 만큼 받는 세상이 아니다. 어떨 때는 내가 더 주기도 하고, 내가 더 많이 누군가로부터 받기도 한다. 세상은 엔트로피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화자가 아무리 빛나를 가르치려 들어도 소용없다. 사람은 바꿀 수 없고, 빛나는 자신이 가진 정보와 역량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선한 마음을 다하고 있을 뿐이다..

 

 

 

혼자 끙끙앓으며 분노를 해보았자. 화자만 손해일 것이다. 나라면... 그게 그렇게 화나고 힘들다면 그냥 털어 놓는게 어떨지 싶다. 친한 동료면 좋고, 친구여도 좋다. 부정적인 감정은 빨리 소모해서 없애버리고 싶다. 그래.. 그냥 뇌의 화학적인 반응이야. 라고 생각하면서... 결국, '잘 살겠습니다'의 이야기는 단순한 불평이나 푸념이 아니라 세상과 인간관계의 복잡한 본질을 마주하는 과정에 대한 기록처럼 느껴진다. 빛나는 화자에게 끊임없이 분노를 안겨주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순진한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연민을 자아낸다. 그녀가 가진 부족함은 화자를 불편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그 부족함 안에 담긴 순수함은 쉽게 미워하기 어렵다.

 

 

작가는 아마도 세상에 완벽히 공평한 교환은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우리가 주고받는 모든 것들은 저울 위에 올라가는 즉시 균형을 잃고 그것이 삶의 자연스러운 질서가 된다.
빛나는 화자의 기대와는 달리 이 불균형 속에서도 나름대로 자신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화자는 빛나를 통해 우리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게 만든다.
나 역시 살면서 이런 빛나 같은 사람들을 만났고 때로는 그들과의 관계에서 속이 끓어올랐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순간에 느꼈던 감정들이 얼마나 하찮았는지를 깨닫게 된다.
어쩌면 내가 화가 난 이유는 상대가 아니라, 내 안의 기대와 욕심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잘 살겠습니다'의 마지막에서 화자가 빛나를 향해 잘 살기를 바라는 장면이 단순한 체념이 아니라 일종의 성장처럼 느껴졌다.
세상을 가르치려 애쓰는 대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흘려보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세상을 덜 힘들게 살아가는 방법이 아닐까?
빛나는 아마 끝까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만의 방식으로 누군가를 당황하게 하고 또 어딘가에서는 엉뚱한 감동을 주며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화자도 언젠가 자신의 노력과 분노가 그리 대단치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웃을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은 이 세상의 불균형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그 답은 각자의 몫이지만, 어쩌면 그 답은 생각보다 간단할지도 모른다. 그냥, 잘 살면 되는 것이다.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는 회사에서 좋아하는 여자 동료 지유가 남편과의 사별 후 후쿠오카에서 지낸다는 소식을 듣고 지훈이 단숨에 달려가 3년만의 재회를 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혼욕 온천탕이라는 장소가 주는 긴장감, 둘 사이의 기묘한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지훈은 결국 지유와의 하룻밤 계획이 실패했다. 나름의 계획을 완전히 지유에게 간파당했고,
지훈이 작전에 실패하고  홧김에 '이 씨발년이. 열었으면 닫아놔야 할 거 아냐.'라고 말하며 찌질하게 울며 잠드는 장면은 읽는 이들로 하여금 왠지모를 통쾌함과 우스꽝스러움에 웃음이 나게 한다.
둘 사이가 진전이 있으려면 지훈이 어떤 태도를 보였어야 했을까?
기본적으로 지훈은 나름대로 훈남 스타일로 묘사된다. 마음속의 독백 장면에서 나름 그는 그동안 여자들을 꼬시기 위한 작전들과 여자들이 본인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해 오만과 자만을 가지고 생각한다. 만약 지훈이 나였고, 정말 지유를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어떻게 할지 상상해 보았다.
우선 3년만에 만난 만큼 조심스럽게 다가가지 않았을까? 시간이 흐른만큼, 지유는 많이 달라져 있을지도 모르고 그동안의 공백이 있기에 더욱 신중히 만났을거라 생각한다.
애초에 그럴거라면, 나만의 시간을 보내는 비중을 더욱 높였을 것 같다. 잠깐 밥이나, 반주정도만 곁들이며 시간을 보내고
나름의 혼자 일본여행을 추구 했을 것 같다. 뭐... 가서 만나보니 지유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면, 다음에 다시올 2번째, 3번째 후쿠오카를 기약하지 않았을까?
설령 그런 긴장감이 연출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고 곧 이에 대한 결과로써 내가 실망하게 되는 상황을 마주한다 하더라도 지훈처럼 분통을 터뜨리진 않았을 것 같다.
마치 그게 마지막 기회였던 것 처럼 말이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 지훈은 공격력 스탯만 잔뜩 올렸고 방어력 스탯은 하나도 올리지 않은 게임 속 캐릭터 같다.
매우 공격적으로 대시를 하지만, 한수 위에 올라와있는 사람의 공격을 받고는 처참하게, 비참하게 무너져 내린다.
나는 어릴적에 아버지에게 항상 '겸손하라, 숙일줄 아는 사람이 되라'라는 말을 듣고 커왔다. 그리고 여전히 그 말을 100은 아니어도 90은 실천하기 위해 노력한다.
겸손과 숙이는 태도는 어릴 적엔 그저 당연한 미덕처럼 여겨졌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것이 인간관계의 핵심임을 깨닫게 된다. 지훈의 이야기를 보며 나는 그 교훈을 새삼 떠올렸다.
결국, 상대방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태도 없이 얻으려는 것은 모래 위에 쌓은 탑과도 같다는 것을 말이다.
지훈이 후쿠오카에서 얻은 경험은 어쩌면 실패일 수 있지만, 동시에 그에게 필요한 자각의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단순히 지유를 만나고 싶었던 게 아니라 자신에 대한 그녀의 감정을 확인받고 싶어 했다. 
그러나 관계란 혼자서 완성할 수 없는 퍼즐 같은 것이다. 나의 조각이 아무리 정교하고 화려하더라도 상대방의 조각과 맞물리지 않는다면 결국 그 그림은 완성되지 않는다.
지훈의 모습에서 나는 나 자신을, 그리고 우리가 관계에서 종종 저지르는 실수를 발견했다.
지훈에게는 상대방을 사로잡기 위한 전략이 아니라, 겸손히 상대를 바라보고,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는 그 첫 걸음이 필요했다. 그것이야말로 후쿠오카에서의 실패를 진정한 배움으로 전환할 수 있는 열쇠일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사람들과의 관계를 다시금 되돌아보게 되었다.
후쿠오카에서의 지훈처럼 우리도 때로는 삶의 작은 실패를 통해 더 나은 내가 되는 길을 배운다. 이번 단편이 지훈과 나에게 남긴 것은 바로 그런 성장의 기회였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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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는 이 작품을 통해 '부조리' 개념을 이야기한다. (부조리에 대한 개념은 그의 책 이방인에서도 다루어진다고 하는데, 이 내용은 추후에 다시 다루어보도록 하겠다)
참 어려운 책이다. 번역이 어렵게 된 탓일까?

인간은 삶의 의미를 끊임없이 찾으려 하지만, 그 과정은 본질적으로 무의미한 세상과 충돌하며 부조리를 낳는다.
그러나 카뮈는 이러한 부조리 속에서 항복하거나 어떤 알 수 없는 위안을 찾는 대신
인간은 이 세상에 발을 디디고 아름다움을 발견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역설한다.
결혼과 여름이라는 제목은 단순히 계절이나 의식적 행위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카뮈가 찬미한 지중해적 삶의 태도, 즉 세상의 아름다움과 절망을 동시에 끌어안는 자세를 의미한다.
여름은 풍요와 열정을, 결혼은 자연과 인간, 삶과 죽음의 융합을 상징한다.
특히 그가 묘사하는 자연의 장면들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무게를 직시하게 만드는 거울이라 해야 할까....
결혼은 한 개인의 선택이나 관계를 넘어서 삶과 세상에 대한 궁극적인 수용을 상징하며 여름은 이러한 수용 속에서도 삶의 생생함과 온기를 발견하는 카뮈적 시선을 보여준 것 같다.

 

 

샐러드의 끝에서 만난 하늘빛 맥주 한캔 (부제 : 샐러드 5일 챌린지를 마치며..)


삶은 종종 내게 하나의 모순처럼 느껴진다. 한편으로는 뜨거운 감정에 사로잡혀 무엇인가를 붙잡고자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붙잡으려는 것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가고 있음을 안다.
우리는 선택의 연속인 인생을 살고 있다. 누군가의 선택이 옳든 그르든 그것은 결국 그들의 몫이겠지만 나는 내 안에 움트는 부조리를 부정할 수 없다.

사랑은 부조리 속에서도 우리를 일어서게 만든다. 그것은 여름과 같다.
뜨겁고 찬란하며 그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우리는 그 속에 뛰어든다.
선택의 무게는 시간 앞에서 드러날 것이다. 나는 이 여름을 품고 가시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 어떠한 이름도 남기지 못하더라도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오늘도 샐러드 한 접시를 앞에 두고 앉아 있었다. 삼킬때 목구멍이 꽉차는 자그마한 고구마와 얇게 썬 할라피뇨와 상추 잎, 드레싱이 거의 묻지 않은 닭가슴살 조각들이 담긴 접시를 보며 내 선택이 삶의 어느 부분을 대표하는지 생각했다. 절제와 균형, 더 나은 나를 위해 계산된 행위. 하지만 얼음컵과 옆에 놓인 하늘빛 캔맥주는 그와 반대로 무언가 더 원초적인 갈망을 상징했다.
절제와 해방의 춤은 끝없이 반복되며 그 가운데서 흔들리는 나를 발견한다.
캔을 열자 탄산의 미세한 울림이 퍼진다. 맥주는 그 자체로 자연이었다. 태양 아래 열린 들판의 향기 그리고 흐르는 강물의 청량함. 그러나 그 속에는 인간이 자연을 길들이고자 만든 흔적이 배어 있었다. 샐러드가 내게 건강과 미래를 약속하는 것이라면, 맥주는 순간의 해방,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짧은 위로라고 할 수 있다.
알베르 카뮈는 자연을 삶의 은유로 사용했다. 그는 바다를 통해 무한함을, 태양을 통해 인간의 고독과 열정을 그려냈다. 내 앞의 샐러드와 맥주도 어쩌면 그런 대립의 상징일지도 모른다. 하나는 자발적인 통제와 삶의 목표를 향한 행위이고 다른 하나는 부조리 속에서 놓아버리고 싶은 마음의 반영이다.
삶은 때로 맥주의 탄산처럼 빠르게 사라지는 기쁨으로 채워지기도 하고 샐러드의 각양각색의 이파리들처럼 질긴 균형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리고 나는 그 사이 어딘가에서 흔들리고 있다. 맥주의 쓴맛과 샐러드의 밋밋함 속에 어떤 날은 하나를 택하고, 어떤 날은 둘 다 내 몫으로 삼으며.


하늘빛 맥주캔을 기울이며 나는 어느새 태양 아래 생겨난 그림자를 떠올린다. 빛이 내리쬐는 만큼 그림자는 더욱 짙어진다.
그것은 서로를 비추면서도 결코 하나로 어우러질 수 없는 두 존재처럼 나와 어떤 다른 마음 사이에 놓인 부조리한 틈을 상징한다.
겨울 한낮의 햇빛 아래 산책길, 그 빛은 모든 것을 더 선명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발밑에 그림자를 길게 드리운다. 그 빛은 달콤하지만 눈부심이 동반된다. 그 빛 속에서 고스란히 드러나는 나의 솔직한 감정들,
그러나 그림자는 늘 따라붙었다. 그것은 결코 나에게 속하지 않는 무엇에 대한 불가항력적인 깨달음이었다.
샐러드와 맥주처럼 어쩌면 처음부터 다른 궤도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들은 진실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햇빛처럼 뜨겁고 현실적이었다. 나는 지금도 샐러드 한 조각을 씹으며 그 흔적이 남긴 씁쓸함과 맥주의 청량함을 동시에 맛본다.
사람은 빛과 그림자 속에서 길을 찾는다. 그것은 내게 빛이었다가, 다시 그림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결국 나라는 사람의 궤적을 완성시킨다.
빛은 사라질지라도 나는 산책을 멈추지 않는다.
샐러드의 푸른색이 고요한 결단이라면, 맥주의 쌉쌀한 거품은 그 결단의 흔들림이다. 그러나 부조리는 바로 거기에 있다. 결단과 흔들림 모두가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사실에.
모든 그림자는 언젠가 끝난다. 그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새벽의 빛일 수도, 완전한 어둠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길 위에서 끊임없이 걷고 있는 나 자신이다.
삶은 나와 부조리 사이의 대화다. 노랑빛 거품 속에서, 초록 잎사귀 사이에서 그 대화를 계속 이어간다. 결말은 정해져 있지 않다. 그러나 어떤 실패도 영원하지 않으며 모든 성공은 기다릴 줄 아는 사람에게 찾아온다.

산책길의 태양이 저물수록 그림자는 짙어진다. 누군가는 그것을 어둠으로 보겠지만 나는 그 속에서 희미한 가능성을 본다.
카뮈는 부조리를 말하며 삶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과 답의 부재를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가 강조했던 건, 부조리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선택해야 한다는 우리의 태도였다.
샐러드의 차분함과 맥주의 자유로운 거품 사이에서 나는 이 모순된 세계를 껴안는다.
부조리의 경계에서 가장 흔들리는 것은 마음이다. 어떤 이는 완벽한 정답을 찾으려 하지만 나는 정답보다 나은 질문을 찾으려 애쓴다. 그리고 그 질문 속에서 나를 찾는다.

알제리의 바다에 있는 나를 상상한다. 삶의 길은 때로 나를 고요한 해변으로, 때로는 거센 폭풍으로 몰아넣는다.
바닷물의 냄새를 맡으며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가 찾고 있는 것은 평온인가 아니면 폭풍 속에서의 자유인가?
카뮈는 해답 대신 이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라고 말했다. 사랑과 삶이 모두 부조리의 경계에 서 있음을 인정하며 나는 이 모순을 껴안고 앞으로 나아간다.
어느 날 나는 샐러드의 초록빛 고요함을 끝까지 느끼는 동시에 맥주의 쌉쌀함을 흠뻑 누릴 것이다. 그리고 그날 나는 내 앞에 펼쳐질 모든 가능성을 마주할 것이다.
부조리가 있어도 삶은 여전히 나에게 웃음을 안겨줄테니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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