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가끔 일상 속에서도 수학적 귀납법으로 생각해 보는 걸 좋아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수학적 귀납법은 어떤 사실이 계속해서 참일 거라고 증명하는 방법 중 하나다. 처음에 가장 작은 경우에서 그 사실이 성립함을 확인하고, 그다음에는 '만약 𝑛번째에서도 성립한다면, 𝑛+1번째에서도 성립할 것이다'라는 식으로 이어나간다.
마치 도미노를 차례로 넘어뜨리는 것과 비슷하다. 첫 번째 조각만 넘어지면, 그다음 것도 넘어지고, 또 그다음 것도 쓰러지는 식이다.
나는 이런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가 있다. 예를 들면, 아침에 출근할 때 늘 같은 시간에 같은 버스를 탄다고 해보자.
첫날, 둘째 날, 셋째 날 모두 맨 뒷자리의 같은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면, '내일도 아마 같은 자리에 앉을 수 있겠지'라고 기대하게 된다.
물론 예상이 빗나갈 수도 있지만, 어제와 오늘이 같았으니 내일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 다른 예로, 친구가 한 번, 두 번, 세 번 연속으로 약속 시간에 늦었다면 나는 자연스럽게 '다음번에도 늦을 가능성이 높겠다'라고 예상하게 된다.
한두 번은 우연일 수 있지만, 세 번이나 반복되었다면 그다음에도 같은 패턴이 이어질 거라고 판단하는 것이다.(영화 트루먼쇼에서 짐 캐리가 삶의 패턴을 발견하고 이곳이 가짜 지구임을 깨달았을때를 상상해보라) 이처럼 어떤 일이 반복되면 우리는 앞으로도 같은 일이 계속될 거라고 믿게 된다. 이것을 우리는 수학적 귀납법에 따른 추론이라 할 수 있다.
왜 갑자기 귀납법 같은 이야기를 하느냐?
책 속의 주인공 윤재는 사람의 예감에 대해 이렇게 표현한다. 사실 사람들이 흔히들 말하는 "내 예감이 그래..."라거나 "내 예감이 적중했어!"라는 말들도 결국 우리가 살아오면서 쌓아온 경험의 결과라고.
무의식적으로 축적된 기억이 패턴을 만들어 내고 그 패턴을 바탕으로 우리는 닥쳐올 미래를 짐작한다. 그러니까 우리의 예감 역시 일종의 학습의 산물인 셈이다.
그래서 나는 문득 수학적 귀납법을 떠올렸다. 윤재의 삶이나 우리나 별반 다르지 않다고... 당신은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어쩌면 T 성향이 강한 사람들은 많은 공감을 할 것 같다. 이 책은 궁극적인 T를 가진, 순도 100% T가 주인공인 이야기다. 어쨌든, 어떤 사실이 참임을 증명할 때 가장 작은 경우에서부터 출발해 그것이 한 단계씩 이어진다고 가정하며 논리를 확장해 나가는 과정...
윤재의 말과 수학적 귀납법은 닮아 있었다. 우리는 한 번의 경험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세 번이 되면서 결국 그것이 어떤 법칙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예감'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윤재에게는 그런 감각이 쉽게 와닿지 않았다. 편도체가 작아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하는 그는 기쁨도 슬픔도 두려움도 분노도 본능적으로 알아차릴 수 없었다.
세상사는 수학이 아니고 복잡하고 변수도 상상조차 못할만큼 다양하기에 그만큼 더 인과관계를 파악하기 어려웠다고나 할까...
그럼에도 세상은 그에게 마치 수학 공식처럼 이해해야 하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직감적으로 알고 있는 감정들을 윤재는 논리로 배워야 했다. 이러한 세상사에 대한 인풋과 아웃풋을 어머니는 일일히 할멈과 함께 윤재의 머릿속에 주입식으로 넣으려 부단히 노력한다.
그런 윤재는 삶의 방향을 정하는 방식 역시 남들과 달랐다. 감정이 없는 그가 경험을 통해 배우고 깨닫는 것들은 단순한 정서적 반응이 아니라 하나의 확실한 흐름이었다. 'A는 B다'와 같은.
그 수도 없이 많은 'A다 B다' 속에서 윤재는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세상과 관계를 맺어 갔다. 어머니의 가르침을 통해 폭력을 피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고 할멈을 통해 정이라는 감각을 간접적으로나마 익혔다.
곤이와의 만남을 통해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미묘한 줄타기를 경험했다. 그 미묘함은 늘 상대들의 몫이었지만 말이다.
그가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은 결국 그의 삶을 구성하는 '법칙'이 되었고, 그 법칙이 차곡차곡 쌓이며 윤재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해 나갔다.
나는 윤재의 이야기를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감정을 타고난 사람들에게도 사실 우리는 언제나 배워가며 살아가는 게 아닐까. 우리가 분노할 때, 슬퍼할 때, 혹은 사랑을 느낄 때, 그것이 정말로 본능적인 감정에서 비롯된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살아오면서 경험 속에서 배워온 결과일까? 흑백논리로 둘중하나라고 대답할순 없다. 분명 우리가 살아오며 쌓아온 경험치가 녹아져 있을 것이기에.
윤재가 감정을 배워가듯이 우리도 삶 속에서 조금씩 감정을 단련하며 살아간다. 처음에는 쉽게 화를 내던 사람이 점점 더 인내를 배우고 실수에 절망하던 사람이 실패를 딛고 일어나는 법을 배운다.
그것이 쌓이고 쌓여 어느 순간 우리는 더 성숙한 사람이 되어 간다. 수학적 귀납법처럼 하나의 작은 경험이 다음 단계로 이어지고 그다음이 또다시 반복되면서, 결국 우리는 스스로를 우리들이 원하는 모습대로 다듬어나간다.
나는 한편 윤재가 감정이 없으면서도 엄마와 할멈을 지키려는 소설 속 곳곳의 장면들을 읽으며 의아했다. 이것은 과연 학습된 결과물로써 보여지는 것일지, 아니면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행한 것인지. 고민했다.
이는 단순한 모순처럼 보이지만, 윤재의 행동을 깊이 들여다보면 감정이라는 것이 반드시 따뜻한 온기에서만 비롯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엄마와 할멈에게 의존하며 살아왔다. 그의 세계에서 유일하게 존재했던 두 사람, 자신을 이해하려 노력했던 이들이 사라진다면 그는 삶을 지속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을지도 모른다. 감정은 없지만 관계의 지속성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작동한 셈이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윤재는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사람들'에 대해 의문을 가진다. 그는 멀리 있는 불행을 외면하는 사람들을 보며, 자신이 공감할 수 없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그 틈에서 그는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만약 감정이 없는데도 누군가를 지키려는 마음이 생긴다면 그것은 '평범해지고 싶다'는 바람과 맞닿아 있지 않을까?
그는 감정을 갖지 못한 채 태어났지만, '정상적'인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도전한다.
우리는 작품속에서 그가 비록 감정은 없지만 선하다는 사실은 알 수 있다. 감정이 없어도 항상 '선'을 택하려 노력한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에 끝내 성장하고 만다. 코마상태에 있다가 결국 정신이 돌아온 엄마와 마주하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통해서...
윤재는 "비극과 희극을 영원히 나눌 수 없다"고 말한다. 그의 삶도 그렇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지만 누군가를 지키려 했다. 공감하지 못하지만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고민한다. 그리고 이 모든 고민 속에서 자신만의 답을 찾으려 한다.
그의 보호 본능은 결국 인간이기에 갖게 되는 어떤 '방향성'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감정을 기반으로 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모두 살아가면서 자신의 방식대로 누군가를 소중히 여기고, 어떤 의미를 만들어간다. 윤재 또한 그저 자신의 방식으로 사랑을 배워가는 과정 속에 있었고
결국 그 결실을 맺은 것이다. 빵집 아저씨 심박사의 말처럼... 노래를 참 못하지만 노력으로 좋아하는 노래 한소절은 잘 부를 수 있는 사람처럼...
그리고 곤이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몬드에서 가장 강렬한 캐릭터 중 하나는 단연 곤이일 것이다.(참 그런데 학창시절에 그런 친구들이 하나둘이 꼭 있었던 기억이 난다. 걔네들은 모두 이런 배경이 있었던 걸까...?) 그는 폭력적인 환경에서 자랐고 세상과의 소통 방식도 거칠었다.
윤재와 정반대의 위치에 있는 듯 보이지만 소외된 계층이라는 것은 공통적으로 분명했다. 어쩌면 그 누구보다도 윤재를 가장 깊이 이해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곤이는 윤재에게 단순한 친구나 적대자가 아니라 감정을 배우게 한 특별한 존재였다.
곤이가 나비를 찢는 장면은 그의 심리와 윤재에 대한 태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윤재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채 살아왔고 사람들의 공포나 슬픔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곤이는 이 세상의 잔혹함과 부조리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고자 했다. 그는 윤재가 단순한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마음의 고통을 느끼길 원했다.
곤이가 나비를 찢으며 윤재에게 보여주려 했던 것은 세상이 결코 아름답기만 한 곳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인간의 감정은 때때로 잔인함을 동반하며 그 잔인함을 외면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윤재는 처음엔 곤이의 행동을 단순한 폭력으로만 받아들였다. 또 이 와중에도 지극히 이성적인 판단으로만 나비의 안녕을 바랐다. 어떠한 감정도 모르지만, 그게 옳다고 배웠으므로...
곤이는 윤재가 무덤덤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더 거칠게 굴었고 결국 폭력을 통해서라도 윤재를 자극시키고 싶어 했다. 그러나 윤재는 곤이를 단순한 폭력적인 존재로만 인식하지 않았다.
그는 곤이의 행동 이면에 숨겨진 이유를 이해하려 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곤이의 내면에도 깊은 상처와 외로움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몸이 요즘 이곳저곳이 성치가 않다.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라더니 여기저기가 고장이 나고있다. 정신은 곧 육체와 직결된다. 어지럽혀진 머릿속을 비우며 쓰느라 글이 더욱 두서없게 느껴진다. 내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께 양해를 구해본다. 글을 좀 마무리 해보자면 윤재에게 곤이는 세상이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가르쳐 준 사람이었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자신과는 달리 곤이는 감정의 풍파를 온몸으로 맞으며 살아온 외로운 사람이었다.
윤재는 곤이를 통해 감정을 배우고 세상과 연결되는 법을 익히게 된다. 반대로 곤이도 윤재와의 관계를 통해 폭력이 아닌 방식으로 누군가와 관계를 맺을 수 있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곤이와 윤재는 서로를 변화시켰다. 곤이는 윤재에게 감정의 가능성을 열어 주었고, 윤재는 곤이에게 폭력이 아닌 이해로 다가갈 수 있는 길을 보여 주었다. 그들의 관계는 단순한 우정 이상의 의미를 가지며 서로 각자가 가진 어떠한 부재, 불완전함을 채우는 과정을 보여주었다고 생각이 든다.
나는 아몬드를 읽으며 우리가 어떤 감정을 타고나든 상관없이 결국 그것을 어떻게 다듬고 쌓아가느냐가 중요하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여기선 감정을 메인으로 다루었으나 감정뿐만이 아니다. 당신이 스스로에게 느끼고 있는 부재, 불완전함 모든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윤재는 나름대로 삶을 배우고 이해하고 사랑을 배워갔다. 그리고 나는 그런 윤재의 성장 속에서 우리 역시 끝없이 배우고 변화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다시금 떠올렸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때로 불안하고 두렵고 때로는 감정에 휩쓸리기도 하지만 결국 그 모든 경험이 우리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 된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각자 스스로에게 바라던 바에 완전할 순 없지만, 평생 아마도 불완전하겠지만, 완전에 근사하기 위해 차곡차곡 쌓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수학적 귀납법처럼.
엄마는 임신 중에 겪은 스트레스나 몰래 피웠던 한두 개비의 담배, 막달에 못 참고 몇 모금쯤 홀짝인 맥주 따위를 후회했지만, 사실 내 머리통이 왜 그 모양인지는 너무 뻔하다. 그저 운이 없었던 거다. 생각보다 운이라는 놈이 세상에 일으키는 무지막지한 조화들이 많으니까.
그러자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뭐든 여러 번 반복하면 의미가 없어지는 거야. 처음엔 발전하는 것처럼 보이고 조금 더 지난 뒤엔 변하거나 퇴색되는 것처럼 보이지. 그러다 결국 의미가 사라져 버린단다. 하얗게.
사랑. 사랑. 사랑. 사랑. 사랑. 사.랑. 사아아라아아앙. 사랑.사랑사. 랑사. 랑사.
영원. 영원. 영원. 영.원. 여어엉. 워어어언.
자, 이제 의미가 사라졌다. 처음부터 백지였던 내 머릿속처럼.
B 사감은 밤중에 학생들의 러브레터를 훔쳐 읽으면서, 남녀 목소리를 번갈아 내며 1인극을 펼친다. 그 장면을 몰래 지켜본 세 명의 여학생은 저마다 반응이 다르다. 하나는 B사감이 우습다며 비웃고 다른 하나는 B 사감이 무섭다며 몸을 떨고, 세 번째 여학생은 B 사감이 불쌍하다며 눈물을 흘린다.
늘 한 가지 정답을 제시하던 엄마의 가르침에는 좀 위배됐지만 난 그런 결말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마치 이 세상에 정해진 답은 없다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남들이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한다고 해서 꼭 정해진 대응을 할 필요도 없는 게 아닐까. 모두 다르니까, 나같이 '정상에서 벗어난 반응'도 누군가에겐 정답에 속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엄마는 늘 집단생활에는 희생양이 필요하다고 얘기했었다. 엄마가 내게 그 지난한 교육을 시킨 것도, 내가 그 희생양이 될 확률이 매우 높기 때문이었다. 엄마와 할멈이 사하진 지금 엄마의 예언은 현실이 되었다.
부모는 자식에게 많은 걸 바란단다. 그러다 안되면 평범함을 바라지. 그게 기본적인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말이다, 평범하다는 건 사실 가장 이루기 어려운 가치란다.
생각해 보면 할멈이 엄마에게 바란 것도 평범함이었을지 모르겠다. 엄마도 그러지 못했으니까. 박사의 말대로 평범하다는 건 까다로운 단어다. 모두들 '평범'이라는 말을 하찮게 여기고 쉽게 입에 올리지만 거기에 담긴 평탄함을 충족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내게는 더욱 어려운 일일 거다. 나는 평범한을 타고나지 않았으니까. 그렇다고 비범하지도 않으니까. 그 중간 어디쯤에서 방황하는 이상한 아이일 뿐이니까. 그래서 나는 한번 도전해 보기로 했다. 평범해지는 것에.
ㅡ 근데 잠은 잘 와? 학교는 어떻게 다녀? 망할, 가족이 네 앞에서 피 흘리면서 죽었는데.
ㅡ 그냥. 살게 돼. 나보다 오래 거릴지는 몰라도 다른 사람들도 얼마 안 돼 먹고 자고 다 할걸. 사람은 살게 돼 있는 존재니까.
ㅡ몰랐던 감정들을 이해하게 되는 게 꼭 좋기만 한 일은 아니란다. 감정이란 참 얄궂은 거거든. 세상이 네가 알던 것과 완전히 달라 보일 거다. 너를 둘러싼 아주 작은 것들까지도 모두 날카로운 무기로 느껴질 수도 있고, 별거 아닌 표정이나 말이 가시처럼 아프게 다가오지도 하지. 길가의 돌멩이를 보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대신 상처받을 일도 없잖니. 사람들이 자신을 차고 있다는 것도 모르니까. 하지만 자신이 하루에도 수십 번 차이고 밟히고 굴러다니고 깨진다는 걸 '알게 되면', 돌멩이의 '기분'은 어떨까.
나비의 날개를 찢던 날, 곤이가 내게 무언가를 가르치려다가 실패한 그날, 어스름이 내리던 무렵. 바닥에 짓이겨진 나비의 잔해를 닦아 내며 곤이는 몹시 울었다.
ㅡ두려움도 아픔도 죄책감도 다 못 느꼈으면 좋겠어....
내게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처음엔 할멈을 찌른 남자의 마음이 궁금했다. 하지만 그 질문은 점차 다른 쪽으로 옮겨 갔다. 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척하는 사람들. 그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나 같은 천치도 안다. 그 아이가 아파하고 있다는 걸. 끔찍하고 불행한 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걸.
하지만 묻지 않았다. 왜 웃고 있느냐고. 누군가는 저렇게 아파하고 있는데, 그 모습을 등지고 어떻게 당신은 웃을 수 있느냐고.
비슷한 모습을 누구에서나 볼 수 있었기 떄문이다. 채널을 무심히 돌리던 엄마나 할멈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멀리 있는 불행은 내 불행이 아니라고, 엄마는 그렇게 말했었다.
멀면 먼 대로 할 수 있는게 없다며 외면하고, 가까우면 가까운 대로 공포와 두려움이 너무 크다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껴도 행동하지 않았고 공감 한다면서 쉽게 잊었다.
내가 이해하는 한, 그건 진짜가 아니었다.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았다.
그 이야기가 어떤 이야기가 될지는 나도 모른다. 말했듯이, 사실 어떤 이야이가 비극인지 희극인지는 당신도 나도 누구도, 영원히 말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딱 나누는 것 따윈 애초에 불가능 한 건지도 모른다. 삶은 여러 맛을 지닌채 그저 흘러간다.
나는 부딪혀 보기로 했다. 언제나 그랬듯 삶이 내게 오는 만큼. 그리고 내가 느길 수 있는 딱 그만큼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