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공녀가 떠오른다. 하루 한잔의 위스키와 담배, 남자친구만 있으면 더 바랄 것이 없는 미소는 그 뜻을 점철하여 담담하게 살아가지만 현실은 팍팍하며 주변의 시선 또한 곱지가 않다. 머무를 장소를 찾으며 옛 친구들을 찾아가나 저마다의 아픔과 고통 속에서 현실을 묵묵히 살아가고 있었다.

 

김애란 작가의 비행운은 이러한 우리 주변의 누군가는 마주할 수 있는 비극적인 이야기를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담담하기에 글은 더욱 공포스럽고 기괴하게 느껴진다. 영화 소공녀처럼, 이야기 속 인물들은 각자 나름의 사연을 가진 아픔을 지니고 있으며, 그들의 삶은 결코 평탄하지 않다. 이들이 겪는 고난과 역경은 마치 비행운처럼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에 깊은 상처나.. 알 수 없는 암담하고 모호한 결론을 맺고 끝이 난다.

 

인상적이었던 작품을 이야기하자면 "서른"이다. 같은 독서실에서 공부도하고 잠도 자던 친한 언니에게 그간의 자신의 일을 털어놓는 이야기이다. 작중 주인공은 이른바 다단계에 빠져들었고, 그 과정속의 암담한 묘사가 생생하다. 오랜만에 연락온 과거 자신의 학원 제자였던 학생의 오랜만의 연락, 그녀는 자신의 제자를 설득하여 다단계에 빠지게 만들었고, 그리고 제자는 좌절하고, 극단적인 선택까지 이어진다. 읽는 연속 충격의 연속이었다.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
비행운의 "서른" 中

 

제목 "서른"의 의미는 무엇일까? 보통 외형으로나 사회적 경험으로나 앳된 모습을 탈피난 어른의 모습이 떠오른다. 하지만 주인공은 어른이 되지 못하였다. 그녀가 언니와 함께 독서실 생활을 하던 시간들, 목표하던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노력하던 시간들, 학원에서 일을 하던 시간들이 지났다고하여 과거는 더 이상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는 걸까? 우리 대부분은 이러한 시간들을 추억이라고 표현하며 기억속에 켜켜이 묻어놓는다. 이런 추억들이 무수히 쌓이고 더이상 기억이 나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어른이 되고, 희노애락이 가득했던 과거와 달리 애애애애만 가득해지는 것 같다.

 

이러한 면에서 그녀는 어른이 되지 못하였다. 소공녀의 미소 또한 어른이 되지 못하였다.

 

어른들은 누구나 처음엔 어린이였다.
하지만 그것을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다.
어린왕자 中

 

미소는 고장난 비행기 조종사를 만나고, 주정뱅이를 만나고, 장미를 만나고, 여우를 만났다. 미소의 친구들은 그때의 미소를 기억한다. 미소는 변함이 없는데, 달라진 것은 현실의 어려움에 어찌저찌 짜맞추어나가며 전전긍긍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들한테는 미소적 사고(?)가 필요할 때가 아닐까? 나는 "서른"과 "소공녀"가 현대판 차가운 버전의 어린왕자라고 생각한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 해설자는 행복을 기다리느라 지겨운 청춘들에게 있어 이 소설이 위로가 되어줄 것이라 말한다. 아이러니한 말이다. 암담하고 기괴하고 한편으로는 거북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위로가 된다니.. 이 책에서 해피엔딩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 한편 읽을 때마다 나와 상황을 비슷하게 여기거나, 동질감이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 담백한 문체여서 더욱 그렇게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어쩐지 작가는 우리들에게 절망과 불행, 비참함에 빠지더라도 괜찮다며 여러 사람들의 사례를 이야기해주며 손을 건네는 느낌을 받았다. 정말 희망 따위라곤 없는 이야기지만.................................................................. 위로받을 수 있다.

 

 

아마 그래서였을 거다. 훗날 누군가 내게 사랑이 무어냐고 물어왔을 때, '나의 부재를 알아주는 사람'이라 답한 것은.

 

 

신기해요. 어떤 음악을 들으면, 그 곡을 제게 처음 알려준 사람이 생각나요. 그것도 번번이요. 처음 가본 길, 처음 읽은 책도 마찬가지고요. 세상에 그런 게 있다는 걸 알려준 사람이 떠올라요. '이름을 알려준 사람의 이름'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건 사물에 영원히 달라붙어버리는 것 같아요.

 

 

나는 푸른 불빛에 얼비친 그의 옆얼굴을 가만 바라봤다. 그리고 이제부터 이 사람을 본격적으로 좋아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세상에 내 사진을 보고 그렇게 얘기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선배밖에 없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다만 나는 그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그리고 좀 외로웠다. 아무도 내가 죽어가고 있다는 걸 모른다는 고립감. 그리고 그걸 누구에게도 전하지 못한다는 갑갑함이 밀려왔다.

 

 

어디. 언제나 '어디'가 중요하다. 그걸 알아야 머물 수도 떠날 수도 있다고. 그녀는 '짜이날'이라는 단어를 잊지 말라 했다. 그 말이 당신을 원하는 곳으로 데려가줄 거라고. 그다음, 그곳에 어떻게 갈지는 당신이 정하면 된다고. 뜻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길 잃은 나그네에게 친절하다고. 그러니 외지에 나가선 대답하는 것보다 질문할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순수를 모르는 순수. 청춘을 모르는 청춘.

 

"그런데 감동적인 음악을 들으면요, 참 좋다, 좋은데, 나는 영영 그게 무슨 노래인지 알 수 없을 거라는, 바로 그 사실이 좋을 때가 있어요." 그때는 그러려니 했는데. 이따금 그 아가씨 말이 떠올랐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이해할 수 있늘 것 같던 기분이. 어쩌면 명화, 그렇게 잠깐 살고만 북쪽 여자도 용대에겐 끝까지 제목을 알 수 없는 노래가 아니었을까. 다 듣고 내리지 못한 노래. 생각도 잘 안나면서 잊을 수 없는 음악 말이다. 명화는 많은 질문을 남기고 떠났다. 용대가 섭섭한 것은, 그녀가 역시 자기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한 채 가버렸다는 거다.

 

 

"너 나 만나서 불행했니?'
"아니."
"...."
"그런 거 아니었어."
"...."
"힘든 건 불행이 아니라...... 행복을 기다리는 게 지겨운 거였어."

 

 

세계는 원래 그렇게 '만날 일 없고' '만날 줄 몰랐던'것들이 '만나도록' 프로그래밍돼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앞에서 함께했던 것처럼 이 소설집에서 '비행운'은 셋이다. 그 하나는 비행운을 보며 새로운 삶을 꿈꾸는 동경의 형식이요, 둘째는 잠시의 형상일 뿐 이내 무화되는 비행운의 모습처럼 그 어떤 동경을 향한 실천적 움직임도 의미 있는 궤적을 산출하지 못한다는 비루한 존재론적 전락 혹은 비존재감의 형식이요, 그 셋째는 행복을 동경하는 주체들에게 끊임없이 가해지는 비행운의 연쇄가 암시하는 불우한 상처와 그 아픔을 함께 아파하기의 형식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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