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기 시작한 순간 나는 책에 잡아먹혀버렸다...(?)
세탁기에서 자신의 일이 끝났다는 멜로디가 울렸지만 나의 소중한 빨래들은 "그래... 언젠가는 널어주겠지..." 라는 희망 속에서 한참 동안 방치됐다.
결국 책을 덮고 양심의 가책(?)을 느껴 억지로 빨래를 널었지만 널은 후 다시 책을 들고 침대로 직행했다.(빨래를 널고 난 뒤 원래는 불을 끄고 내일 출근을 위해 잠드는 것이었다.) 달까지 가자는 그만큼 중독성이 강하다.

 

 

 

"누가 내 얘기를 책으로 쓴거지?"  직장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경험해보았을 사건들이 모두 이 책에 모여있다.
팀장님과 동료들의 에피소드는 현실을 너무도 절묘하게 반영해서 본인들의 사연들과 매칭되며 킹받는 경험을 하게된다. 진짜다.
이리 자조적으로 웃길수가 없고, 직장에서만 발생할 수 있는 사람들과의 긴밀한 눈치, 언행 등에 대해 킹받을 수밖에 없다.
직장인이라면 어쩔 수 없이 매일 겪는 그 애증의 현실을 이렇게 유쾌하게 풀어낼 수가 있다니. 나는 이 책을 누군가에게 추천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책은 세 주인공의 이더리움 투자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당시 누구나 한 번쯤은 투자에 손을 댔거나 아니면 최소한 코인 얘기를 귀가 닳도록 들었을 것이다.
작가는 단순히 투자 이야기에 머무르지 않고 이를 통해 직장 내에서 벌어지는 기묘한 이야기들, 인간관계의 미묘한 역학까지 흥미진진하게 엮어냈다.
달까지 간다라는 책을 비유하자면... 판교의 '밥볶다'라는 밥집이 떠오른다. 이곳은 대패삼겹살과 채소, 김가루, 그리고 밥이 환상적으로 어우러진 볶음밥 맛집인데, 이 소설도 딱 그렇다.
마음이 맞는 동료들과 은밀하게 모가는 단체 메신저 방의 이야기들, 그리고 비밀스런 그들의 회동, 킹받게 하는 팀장, 거기에 화룡정점으로 가상화폐의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웃음과 공감을 자아내는 하나의 완벽한 문학 볶음밥을 만들어냈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독자는 어느새 밥볶다의 식탁 앞에 앉아 있게 된다. 독자들이 갖고 있는 직장인의 현실적인 냉혹함이 차갑고 싸늘히 식어있는 불판이라면, 책을 읽는 순간 가스불은 켜진다. 갖가지 이 책에서 보여주는 다양한 재미요소로 달구어지고 한데 모인다. 이내 "치익" 소리를 내며 코끝을 자극하고 곧이어 동료들과의 즐거운 시간, 이더리움의 희망과 웃음이 김처럼 피어오른다. 이 책을 읽는 우리는 퇴근을 하고 침대 위에서 이 책을 펼쳐읽으며 대단한 식재료나 화려한 파인 다이닝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배고픈 점심시간, 볶음밥 한 그릇으로도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는 우리 직장인의 삶에 대한 은유를 보여준달까?

 

 

 

몇번이나 강조한다. 달까지 가자는 단순히 웃기고 즐거운 책 그 이상이다. 직장인의 삶 속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동시에 소소한 행복과 유대감을 깨닫게 한다. 등장인물 셋은 귀엽고 통통튀는 매력도 있어 읽는 동안 은은한 웃음도 떠나질 않는다. 직장 생활에 지쳐 있거나, 이더리움 투자 열풍 속에서 좌절이나 승리감을 맛본 경험이 있다면 이 책을 통해 그 기억을 유쾌하게 떠올리며 재충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 책은 분명 당신을 웃게 만들 것이다. 웃음이 필요한 순간 이 책을 펼쳐보자. 비록 우리가 매일 현실의 "바닥을 치는 개잡주" 같은 날을 보낼지라도 웃음만큼은 "Outstanding"할 수 있을 것이라 나는 확신한다. (아님말고.)

 

 

 

내가 느낀 킹받는 장면들을 모두 모아보았다. 일부는 너무 길기 때문에 줄글형태로 요약해 기록해둔다.

 

 

 

"팀장님, 15분 전이에요. 꼭 지금 드셔야겠어요?"
"응, 나는 마셔야겠어. 여태까지 줄 선 게 아깝잖아. 거의 다 왔잖아."

 

 


까페 밖으로 나왔다. 10시 54분. 팀장이 "뛰어!"라고 외쳤다.

 

 

 

"그럼 다행이지. 다해씨가 아침부터 뚱한 표정 하고 있어서 기분 안 좋을 뻔했는데, 그 커피 마시고 기분 좋아졌잖아."
역시 보통 놈이 아니다. 확실히 노멀은 아니야. 나는 눈을 흐리게 뜬 채 방긋이 웃어 보였다.
"다행이네요, 다행"
"그렇지? 아주 다행이야."

 

 

 

각 등급의 알파벳은 이런 뜻이었다.
Outstanding: 특출함
Incredible: 뛰어남
Meet requirement: 요구 충족
Below requirement: 요구 이하
Need supplement: 보충 필요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바꿔 불렀다. 아무래도 이쪽이 훨씬 직관적이었다.
O: 오짐
I: 인정
M: 무난
B: 별로
N: 나가

 

 

 

연구개발실의 조직도에 뜬금없이 '빅데이터TF'라는 가지가 하나 생겨났고 그 아래에는 함박사와 그의 비서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중략...
"대체 그 아저씨가 작년에 뭘 했는데? 초코밤이랑 츄잉껌 개수 센 것밖에 더 있어?"

 

 

 

* 식후 커피가 스타벅스면 순수한 동료, 커피빈이면 썸인 이유에 대해...

 

 

 

12시 3분이 되는 순간 나는 바퀴 달린 의자를 스윽 밀고 일어나면서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 오늘 약속 있어서 점심 따로 먹을게요. 맛있게 드세요."
동시에 공용 옷걸이에 걸어둔 코프를 팔에 걸고 후다닥 복도로 나갔다.

 

 

 

이쪽으로 또 저쪽으로 뒤뚱뒤뚱 걸으면서 귀신처럼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쓰레기들을 피하며 으악! 으악! 소리 지르다 이내 웃었다.
참 이상했다. 소리를 지르고 난 뒤에는 곧바로 웃음이 따라나왔다. 비록 그게 헛웃음일지라도 말이다. 비명과 웃음은 어쩌면 한 세트 일지도 몰랐다.

 

 

 

그에게는 내가 점심시간을 3분 더 썼다는 사실이 중요한게 아니었다. 아랫사람인 내가 고분고분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 것이, 자신의 나이와 경력과 그로 인한 권위를 세워주지 않는 것이 못마땅한 거였다.

 

 

 

컨트롤 키와 W키를 동시에 눌렀다. 팀장이 내 등 뒤쪽으로 통로 삼아 지나갔다. 나는 또다시 손가락을 재빨리 놀렸다. 컨트롤 + 쉬프트 + T. 저 멀리 창문 너머로 함박사가 이를 쑤시면서 어슬렁어슬렁 걸어들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중개인 아주머니가 거 보라는 듯 뿌듯한 표정으로, 그러나 너무 호들갑스럽지는 않게 말했다.
"요게 또 너무 괜찮지요?"
대답은 못하고 고개만 연신 끄덕였다.

 

 

 

...투자했던 회사에 관한 뉴스가 나오면 언니는 전에 없이 살스럽게 욕을 해댔다. '쥐벼룩을 놔도 뛸 장에 저 혼자 바닥을 쳐 뚫고 앉아 있는 개잡주'라면서.

 

 

 

불행히도 팀장의 '다 같이'는 그런 뜻이 아니었다. 한테이블에 모두가 모여 정말로 '다 같이' 점을 보자는 말이었다. 서로의 점괘를 함께 듣자는 말이었다.

 

 

 

나는 결코 알고 싶지 않았던 윤과장의 결혼 준비 과정과 파혼 위기, 두 집안의 갈등 같은 것들을 들으면서 정말이지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그리고 바로 지금 나만큼이나 울고 싶은 사람은 윤과장일 거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다 나와. 열심히는 안 한다고. 꾀 쟁이라고. ...중략... 근데 열심히 하면 더 할 수 있는 여력이 있다네. 그치? 맞아? 아니야?"
미치겠다. 점점 더 맞는 말만 해서 갈수록 섬뜩해졌다. 애써 팀장의 눈길을 피해보ㅓ려 했지만 눈이 관자놀이에 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날 선 시선이 다 느껴졌다.

 

 

 

나만 당할 순 없었다. 팀장의 점괘도 같이 들어야겠다고, 그래야 속이 시원해질 것 같다고, 억울해서 나도 다 듣고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윤과장도 나랑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팀장의 입을 주시하고 있었다. 팀장이 나와 윤과장을 둘러보며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기들은 이제 가. 나는 개인적으로 물어보고 싶은 게 좀 있어서."
기가 찼다. 야, 너만 개인이니? 나도 개인이야! 정말 보통 놈이 아니었다.

 

 

 

* 남은 얼마남지 않은 점심시간 콩나물국밥을 후루룩 먹고올지 고민 하던 중 결국 핫도그 세개를 설탕 뿌려 먹는 장면

 

 

 

'과자 무료 제공'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버튼을 눌렀더니 '장점은 최소 10자 이상 입력해주세요'라는 알림창이 떴다.

 

 

 

"알겠어. 내가 예약할게. 뚜껑 열리는 걸로!"
하지만 지송이야 예약해둔 뚜껑 열리는 렌터카에 정작 지송이는 못 타게 될 위기였고, 동시에 은상 언니의 뚜껑이 열리기 직전이었다.

 

 

 

지송이는 아주 커다란 챙이 달린 플로피 밀짚모자를 쓰고 있었다. 은상 언니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껌뻑이며 말했다.
"쟤 우리랑 허니문 가?"

 

 

 

* 지송이의 트렁크가 고장나는 장면, 그리고 다해가 '오리지널'과 '스타일'의 차이를 느끼는 장면

 

 

 

"OS 업데이트부터 할게요. 해도 되죠?"
"응, 가상화폐 할 수 있게만 해주면 돼."
.....
중략
....
"아무래도 이제 때가 된 것 같아"
"무슨 때?"
"엑싯을 해야 할 때."

 

 

 

나도 그 얘기 들었는데...... 솔직히 그게 부럽나? 그게 좋을 것 같아? 좋을 것 같지? 알고보면 절대로 좋은 게 아니야. 중국 송나라 시대 학자 중에 정이라는 사람이 한 말이 있어. 인생삼불행.......
노력을 안하는거야. 타고난 재능은 딱 거기까지일 뿐인거야. 결국 가진 재능을 갈고닦질 못해. .............. 그러면 사람이 말이야, 발전이 없는거야. 발전이 없으면 도채되는 거고. 그리고 마지막이 뭐냐, 소년등과일불행이야. 일불행이 무슨뜻이야. 제일로다가 불행하다는 거야, 소년등과하는 것이.

 

 

 

"아니, 말이 잘못 나왔네요. 저 CLS랑 E클래스부터 볼게요. S클래스도 보여주시고요."
...중략...
이런 고급 세단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저 어니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하는 수밖에 없었다. 언니가 "흐음"하고 하고 감탄사를 내뱉으면 우리도 "으음"을 했고, "와우" 하면 "오우" 했다.

 

 

아니 그런데... 노파심에 말하지만 실제로 이러한 투자는 매우 좋지 않은 투자방법이다. 불확실하고 변동성이 큰 가상화폐를 적립식으로 매수하는 것은 시기에 따라서는 매우 부적절할 수 있다.

이 책은 사실 최고의 시나리오를 가정하에 이더리움 투자 시기를 결정했다.
책 속에서 다해는 2017년 5월부터 2018년 1월까지 이더리움을 적립식으로 매수하여 총 3억 2000만 원의 이익을 얻게 된다.

이는 등장인물들에게 해피엔딩을 가져다주는 중요한 배경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러한 투자는 언제나 장밋빛 결과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소설 속 투자 시점이 몇 달 늦어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2018년 4월부터 12월까지 적립식으로 매수를 했다면, 결과는 처참했을 것이다.
이 시기는 이더리움 가격이 급락한 최악의 시나리오에 해당한다. 단순 계산으로, 다해가 동일한 원금(약 1억 원 정도로 가정한다)을 투자했을 경우,

당시 평균 매수가와 12월의 최저가(약 82달러)를 비교하면 3억 2000만 원의 이익은커녕 약 5000만 원에서 8000만 원 사이의 손실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크다.

만약 이런 일이 작속에서 벌어졌다면 소설은 전혀 다른 결말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다해는 자신의 소소한 꿈마저 저버려야 했을 것이고. 은상과 지송의 관계 또한 다시 치열한 갈등으로 변했을 가능성이 높다.

다시금 암호화폐에 대한 투자열풍이 뜨거워지고 있는 오늘날, 이 책의 이야기는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에서 매우 축복받은 케이스임을 명심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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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광주를 여행했을 때, 나는 이 책 소년이 온다를 미처 읽지 못했다. 아마 그때 이 책을 읽었더라면 나의 발걸음은 지금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향했을 것이다. 여행 중 들렀던 여러 장소들 속에서 그저 자동차로 근처를 지나갔었을지 모르는 가장 깊은 흔적을 남겼을 도청과 금남로를 떠올려본다. 그곳을 찾아갔다면 어떤 느낌이었을까? 도청 앞에 서서 차갑게 식은 돌바닥에 새겨진 역사의 고통을 떠올리고 그 고통 속에서 으스러져간 사람들의 숨결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금남로에서는 눈앞에 펼쳐진 현재의 번화와 과거의 끔찍했던 현실이 겹쳐 보이면서 그 간극 속에서 마음 한편이 무거워졌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 여행길에서 나는 광주의 복잡하고 환한 번화가를 거닐기도 하고 여유롭게 땡볕을 돌아다니며 배스가 전국에서 제일 많다는 영산강을 찾아, 줄기따라 하류에서 상류로 이동해가며 낚시와 미식, 음주가무 여행으로 하루를 보냈다. 세월이 그대로 남겨진 낡은 골목길을 걷기도하고 조용히 흐르는 영산강의 걸을 수 있는 곳들을 찾아다니며 한가로움을 즐겼던 그 날들. 나는 광주의 과거를 모르고도 그곳의 풍요로운 여행에 푹 빠져있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돌아보니, 그 여행의 즐거움이 한없이 가벼워 보인다. 내가 광주를 누볐던 그 땅이 사실은 얼마나 뜨겁고 처절했던 순간들을 품고 있는지, 그 속에서 피어난 자유와 연대의 정신이 오늘날의 광주를 만들었는지에 대해 아무런 인식 없이 떠돌았던 나 자신이 조금은 부끄럽기까지 했다. 역사의 무게를 알지 못한 채 그저 빛나는 오늘만 바라보며 지나친 여행이었지만 이 책은 나로 하여금 그 땅에 다시 가야 할 이유를 만들어주었다. 이번에는 도청에서, 금남로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느껴야 할 것이다.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배경으로 역사의 한 장면을 각기 다른 인물들의 시선으로 조명하며 그 깊은 상처를 들춰낸다. 내게 있어 이 소설은 단순히 당시의 참상을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 비극이 오늘날 우리의 삶과 인간 본질에 어떤 질문을 던지는지 성찰하게 만들었다. 다소 기분이 이상해지는 책이다. 그래서 읽기가 꽤나 힘들었고 시간도 들었지만 찬찬히 뜯어보고 의미를 고민해보았다. 이번 독후감에서는 동호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죽음과 생존 그리고 책에서 이야기하는 '혼'의 상징성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역사적 진실과 인간의 존엄에 대해 다시금 고민하게 하는 시간을 가져보고자 한다.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동호는 친구 정대의 죽음을 목격하고 그의 시신을 지키려 애쓰던 소년이다. 장례조차 치르지 못한 죽음이 남긴 상처는 단순히 개개인의 고통으로 그치지 않는다. 이 문장은 정대의 부재가 동호의 삶 전체를 삼켜버린 모습을 은유적으로 담아낸다. 장례식 없는 죽음은 완결되지 않은 비극이며 이는 이후의 장에서 남겨진 사람들의 몫에 대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당시 광주의 참상이 개인의 삶과 지역 사회를 어떻게 영원히 짓눌렀는지를 보여준다. 죽음의 처리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현실은 생존자들에게 끝없는 죄책감과 슬픔을 남겼고 동호의 내면을 끊임없이 파괴했다.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작품은 동호를 비롯한 광주의 피해자들이 겪은 도륙의 현장을 생생히 재현하며 인간 존재의 본질을 묻는다. 한순간에 짐승으로 취급되고 이름 없는 고깃덩어리로 던져지는 현실 속에서 인간의 존엄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역사의 비극은 인간이 얼마나 쉽게 타락할 수 있는지 증명하지만 동호와 같은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 존엄을 지키려는 필사적인 노력 또한 느낄 수 있다.

 

 

 

광주의 학살은 단순한 물리적 죽음이 아니라 인간의 기본 권리와 정체성을 짓밟는 일이었다. 동호가 본 군인들의 잔혹한 행위는 역사 속에서 반복된 비극이며 이를 외면하거나 부정하려는 정부의 모습은 구밀복검(口蜜腹劍)이었다. 겉으로는 국민을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면서도 뒤로는 잔혹하게 진실을 숨기고 무고한 생명을 파괴했던 것이다.

 

 

 

혼한테는 몸이 없는데, 어떻게 눈을 뜨고 우리를 지켜볼까.

 

 

 

소설에서 혼은 단순한 영혼이나 유령이 아니다. 그것은 잊히지 않는 기억과 진실을 증언하는 존재로서 상징성을 가진다. 이 질문은 죽음을 초월한 존재들이 여전히 살아남은 자들과 함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 혼은 피해자들이 남긴 고통과 정의에 대한 갈망이며 우리가 계속해서 직면해야 할 진실이다.
혼이 지켜본다는 것은 망각하려는 현대 사회의 태도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소설은 독자들에게 묻는다. 우리는 이들을 잊지 않고 그들이 남긴 역사의 흔적을 지킬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렇지 못했을 때 훗날 우리는 또 어떤 사건이 반복 될 것이며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인가?

 

 

 

당신을 잃은 뒤, 우리들의 시간은 저녁이 되었습니다.

 

 

 

광주 이후의 삶은 저녁으로 멈춰버린 것과 같다. 더 이상 밝아지지도 어두워지지도 않는 끝나지 않은 저녁. 이는 피해자와 생존자들이 겪는 정지된 삶을 상징한다. 참혹한 나날들이 지나고 빠르게 이후 일상의 복귀를 시도하지만 저녁의 어둠은 여전히 그들의 삶을 붙잡는다. 사건의 이후에도 그 당시의 현실을 알리고, 진상을 바로 잡기위해 끝없이 사람들이 희생되어야 했다. 저녁은 무력감과 고립감을 의미하기도 한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애국가와 태극기는 본래 국민의 존엄과 자유를 상징해야 한다. 하지만 광주에서 그것은 역설적으로 학살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이는 진실을 왜곡하고 침묵하려 했던 정부의 태도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런 비극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과거를 직시해야 한다는 점이다.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고통을 이해하며 여전히 진실을 외면하려는 힘에 맞서는 것이 우리의 과제다.

 

 

 

소년이 온다를 다 읽기도 전에 더 알아보고싶은 마음에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시청했을 때, 그 감정은 단순히 슬픔에 머물지 않았다. 분노와 죄책감, 그리고 두려움이 동시에 몰려왔다. (나라면 총을 들고 계엄군과 대치할 수 있을까? 진격하는 탱크 앞에 나가 설득, 회유할 수 있을까?) 이 책은 역사적 진실이 얼마나 철저히 은폐될 수 있는지 그 결과로 얼마나 많은 생명과 존엄이 부정될 수 있는지를 뼈아프게 일깨웠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러한 비극적인 진실이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제대로 교육되고 이해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5.18 민주화운동을 단순히 한 지역의 비극으로만 기억하거나 왜곡된 정보, 혹자는 정치적인 이슈에 가려진 채 진실을 접하지 못하고 있다. 비교적 가까운 현대사임에도 불구하고 교육과 공론화의 부재는 이러한 무지를 방치해왔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에 대해 스스로를 비판해야 한다.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살아가기 위한 나침반이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의 한국 사회는 이러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광주의 비극은 단순히 광주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억압과 폭력 속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이며 인간 존엄과 정의를 지키려는 노력의 상징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그들의 희생에 충분히 응답하지 못하고 있다. 이 사건을 단순히 시험 문제로만 기억하거나 일부의 문제로 치부하는 교육 체계와 사회적 무관심은 그들을 다시 한 번 죽이는 일이다.

 

 

 

다큐멘터리 속 장면들은 한강의 글과 맞닿아 있었다. 화면 속 시체로 가득 찬 체육관 울부짖는 가족들 그리고 손으로 눈을 가린 채 떠밀려가는 학생들. 총을 든 민간인 젊은이들. 책 속 동호의 눈앞에서 무너진 존엄성과 다큐멘터리가 보여준 현실은 하나의 큰 물음으로 이어졌다. 왜 우리는 이 이야기를 잊으려 하는가? 왜 우리는 이 역사를 마치 우리와 무관한 일처럼 외면하는가?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는 명확하다. 첫째, 우리는 5.18 민주화운동을 단순히 '민주주의의 교훈'이라는 낭만적인 구호로 소비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철저히 구조적이고 제도적인 문제를 성찰하며 앞으로도 되풀이되지 않도록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는 경고이다. 둘째, 우리는 진실을 직시하고 왜곡된 정보와 싸우며 이를 후대에 올바르게 전수해야 할 책임이 있다. 이는 단순히 교육자나 정치인의 일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기억하고 공유해야 할 공통의 의무이다.

 

 

 

지금의 한국 사회는 민주화된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그 날의 비극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교육 현장에서는 제대로 된 역사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고, 많은 사람들은 5.18의 참상을 뉴스나 유튜브의 일부 자료로만 접하며 단편적인 지식만을 얻는다. 이러한 현실은 진실을 왜곡하려는 세력에게 공간을 내어주는 셈이다.(음모론 같은 소릴하는게 아니다. 자신의 입장, 믿는 신념(?), 이득을 얻기 위해 실제로 왜곡하려는 자들, 가치를 훼손하는 자들이 있다는건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광주의 비극을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그들의 목소리를 더 많이 듣고 더 깊이 이해하며 이를 사회적으로 환기해야 한다.

 

 

 

이 책과 다큐멘터리가 남긴 감정은 단순히 눈물로 끝나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행동하라는 명령이다. 더 이상 '끝나지 않은 저녁' 속에 머무르지 않기 위해, 우리는 진실을 드러내고 공유하며, 교육과 제도적 변화를 요구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그들의 희생에 응답하는 유일한 방법이며 또한 미래를 위해 우리가 감당해야 할 의무다.
광주는 역사가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 있는 이야기다. 우리가 외면한다면 그날의 비극은 언제든 다시 찾아올 것이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무지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도륙된 고깃덩어리들이 아니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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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외

안녕하세요. 역사적 실제 사건을 다루는 책인만큼, 이 독후감 글을 읽으시는 분들도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해 되새길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제가 이 책을 읽으며 찾아본 몇가지 팩트 자료들을 읽기 쉽게 시간의 흐름순으로 간단히 준비해보았습니다. 제가 학습한 내용을 정리한 것으로 혹여 부족한 내용이 있다면 코멘트 달아주시면 보충토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제가 준비한 자료를 읽기전 다음 사항은 숙지해주세요

5.18 민주화운동은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으로 그 진실과 맥락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오늘날의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성찰을 위해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하의 내용은 정치적 이념이나 어떠한 특정 단체의 관점을 대변하지 않으며 오직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작성되었습니다. 이 글은 사건의 진상과 주요 내용을 객관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최대한 엄정한 자세를 유지하고자 하며 이에 대한 비판이나 의견이 있는 경우에도 반드시 구체적인 근거와 자료를 바탕으로 논의가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또한 역사는 사실에 기반한 기록과 공정한 해석에 의해 계승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편향된 관점이나 감정적인 반응은 배제되어야 하며 모든 논의는 사실 관계를 철저히 검증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5.18 민주화운동에 관한 논의는 이러한 원칙 하에서 진행되어야 하며 이를 벗어난 왜곡이나 선동은 민주주의 사회의 기본 원칙과 양립할 수 없습니다.

 

1. 5·18 민주화운동은 처음에 평화적인 시위로 시작되었다
1980년 5월 18일, 전남대학교 학생들이 집회와 시위를 통해 전두환 군부 세력의 비상계엄 확대와 민주화 억압에 항의하며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시위대는 주먹밥을 나누며 평화적으로 집회를 이어갔고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생필품을 지원하며 함께했습니다.
그러나 계엄군이 학생들과 시민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하면서 상황은 급격히 악화되었습니다.

2. 광주는 민주화 운동의 중심지였다
당시 전국적으로 계엄령이 내려진 가운데 가장 조직적이고 강력한 저항을 한 지역은 광주였습니다.
이는 단지 지역적 특성 때문이 아니라 시민들이 집단적으로 민주주의와 자유를 향한 열망을 행동으로 옮긴 결과였습니다.
전남도청에서 벌어진 최후의 저항은 한국 민주화 운동의 상징으로 남아 있습니다.

3. 계엄군은 과도한 폭력을 행사했다
계엄군은 민간인을 향해 무차별 발포를 가했고 진압 과정에서 시민들을 잔인하게 폭행하거나 고문했습니다.
당시 사망자는 최소 165명으로 공식 집계되지만(사망자 165명, 행방불명자 65명, 상이 후 사망자 376명 등 606명), 실종자와 확인되지 않은 희생자(암매장, 미신고 등)를 포함하면 실제 사망자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전투 병력으로 투입된 공수부대는 학생뿐 아니라 노인, 어린아이까지 폭력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4. 정부는 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하려 했다
당시 신군부는 5·18을 '폭동'으로 규정하며 시민군을 폭도로 몰아갔습니다.
사건 후 오랜 기간 동안 군사독재 정권은 언론 통제를 통해 진실을 감추고 왜곡했습니다.
군부와 정부는 광주 시민들이 북한의 사주를 받았다는 허위 사실을 퍼뜨렸습니다. 

5. 시민 정신
광주 시민들은 계엄군의 폭력 속에서도 서로 돕고 지켰습니다.
시민군은 계엄군의 무차별적인 폭력에 대응하여 무장을 시작했지만, 민간인을 보호하기 위해 철저히 규율을 유지했습니다. 

6. 국민적 저항의 시작
광주의 항쟁은 6월 민주항쟁 등 이후의 민주화 운동에 중요한 동력을 제공했습니다.
비록 광주의 진실이 오랫동안 가려졌지만 민주화 운동의 기억은 전국적으로 퍼졌고, 이는 결국 전두환 정권의 퇴진과 민주화 선언으로 이어졌습니다.

7. 밝혀진 진실
5·18 민주화운동의 진실은 1987년 이후 민주화 운동과 함께 점차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1995년, 특별법이 제정되어 전두환과 노태우 등 책임자들이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2011년에는 유엔이 5.18 민주화운동을 세계 역사적 기록물로 등재하였으며 이는 사건의 중요성과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은 상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5.18 민주화운동은 한국 민주주의의 터닝 포인트였으며 이를 통해 광주는 "민주주의 성지"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광주 시민들의 희생과 연대는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민주화 운동의 모범 사례로 평가받습니다.

8. 출처
 - 국가기록원, 5.18기념재단 공식 자료
 - 광주민주화운동사, 5.18기념재단
 - 5.18특별법 관련 재판 기록, 증언 자료.
 - 1980년대 언론 검열 기록, 헌정사 관련 자료.
 - 5.18기념재단 증언집.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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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슐리는 섬에서 자신의 소소한 삶을 묵묵히 이어가면서도 본토를 향한 미묘한 열망과 두 사람, 셰인과 아투의 시선을 끌고 싶은 마음을 늘 가슴에 품고 있었던 것 같아.

그래도 그녀의 이 열등감은 결코 강렬한 어떤 부정적인 느낌이 아니었어, 음.. 마치 바다의 잔잔한 파도 같았지..

그러나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않으려는 그녀의 마음은 결국 자기를 희생하고 양보하는 모습으로 이어졌어.

 

 

 

그러고 보면, 애슐리가 진정으로 바랐던 건 단순히 인정받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어.

이 사람이든 저 사람이든, 애슐리는 늘 그들의 기대에 맞추려 노력했어.

목숨을 위협받으면서까지 이러한 모습들이 등장하는데, 난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그 모습들이 전혀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았어. 그 이유는 애슐리가 끝까지 순수하고 소박한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어쩌면 애슐리는 '착한 사람 증후군'일지도 몰라...)

어떤 부분들에서 내가 그렇게 느꼈는지에 대해 몇가지 애슐리에 대한 썰을 풀어볼게.

내 생각에 동의하는지 한번 읽어줘~

 

 

 

첫번째 썰

새엄마랑 아빠, 그리고 셰인이 본토로 떠날 때 애슐리는 따라가지 않았어.

"그래, 다들 행복하겠지~" 하면서도 마음 한켠에서는 자기가 그들 사이에서 외톨이일 뿐이라고 느꼈거든.

그러니 괜히 짐처럼 끼어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거지. 그래서 자기 식대로 섬에서 남아있기로 했어.

애슐리답게 그 결정을 하면서도 큰 소리 없이 조용하게 말이야.

사실, 조금만 자신을 위해 떼라도 써보면 좋았을 텐데... 너라면 뭐라구 할래?

참... 애슐리는 끝까지 자기 자신보다 남을 먼저 배려하는 소녀였어.

애슐리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한편으론 나도 저들과 함께 본토에서 새 출발해 볼까 싶은 마음이 살짝 들었겠지.

그래도 결국엔 "내가 가면 왠지 귀찮은 사람 되는 거 아닐까? 가면 내 섬에 남겨진 친구들은 어떡해?" 이런 생각에 멈췄을 거야.

솔직히 말해 너무 배려하다가 자기 자신을 또 놓아버린 셈이지... 사실, 마음 한편으로는 "나도 의지할 가족이 있었으면 좋겠어.." 싶지 않았겠어?

누가 봐도 너무 착한 우리 애슐리, 조금만 자기 자신을 위해 이기적으로 굴어봐도 아무도 뭐라 안 할 텐데 말이야.

 

 

 

두번째 썰

애슐리를 둘러싼 아이러니가 또 있지. 섬의 인기남이자 야망이 가득한 아투. 그는 공교롭게도 사진으로 인해 세계적으로 알려진 그녀가 인플루언서가 되었을 때 구애를 시작했어.. 그전엔 쌩까다가 말이야.... 참 웃프지?

아투가 사랑에 있어서도 진심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는 오로지 정치적인 야망으로만 가득 차 있었거든. 심지어 신도시 건설이 실패하자 자신을 위해서인지 애슐리를 위해서인지 모를 마지막 극적인(?) 결말을 계획해.

불타는 배에 그녀를 묶어 희생시키려 하는 장면이 바로 그거야. 그런데 애슐리, 그 와중에도 반항 한 번 없이 담담히 받아들였지. 얼마나 대단한 인내심이냐고!!

자 조금 앞으로 돌아가서... 애슐리 입장에서 아투가 자기를 향해 느닷없이 대시를 대책없이 시작했을때, 솔직히 기분이 묘했을 거야.

그동안 한 번도 신경 안 쓰더니 막상 유명해지자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걸 보면서도 애슐리는 "그래도 이게 사랑인가?" 하며 잠깐 기대했을지도 몰라.

하지만 아투가 하는 행동들이 하나같이 자기 정치적인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을 이용하고 있는걸 눈치챌 때 쯤 살짝 깨달았을지도.....

"아... 이건 나를 위한 관심이 아니구나…" 하면서도 괜히 또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래도 아투가 나를 필요로 하는 거잖아?" 이렇게 스스로를 위로했을지도 모르지. 참 애슐리답지?

만약 나였다면... 나는 바로 명치 개쎄게 때리고 반대로 걔를 묶어놓고 내가 수영해서 헤엄쳐 나올거야. 넌 어떻게 할래? 대답해봐.

 

 

 

세번째 썰

아투는 대놓고 악역이었지만, 셰인도 만만치않게 사람을 빡치게 만드는 구석이 있어.

애슐리의 이복 여동생인 셰인은 본토에서 얻은 나름의 교양(?)을 섬에서 뽐내며 언니를 깔보더라? "내가 본토에서 배웠는데~ 그거 그렇게 하는거 아닌데?" 이런 태도로! 아니, 거의 뭐 언니가 화장할 때 그 블러셔 치는 법까지 딴지 걸 태세더라니까?

심지어 이 동생은 결국 본토에서 사고가 나자 섬으로 돌아와 애슐리에게 온갖 요구를 해. 감놔라, 배놔라, 나랑 같이 사진 찍어라, 인터뷰 따오라, 이런 식으로 말이야.

왜 그랬겠냐고 아투놈처럼 얘도 자신의 이득을 위해 언니를 이용했을 뿐이었던거야. 개무시하다가 인플루언서돼니까 자기 스펙에 써먹을라고 그런거라고 아니 이거 ㄹ쓰다보니까 다시 개열받네

하지만 그런 요구조차도 애슐리에게는 여동생이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의미로 느껴졌던 거지. 작은 인정 한 마디가 그녀에겐 너무나 큰 의미였을 테니까.

실제로 작은 셰인의 한마디에...(셰인은 그냥 생각없이 말한 것 같은데..;;) 애슐리는 기분이 좋아지고말아....하...

어쨌든~ 딱 애슐리 스타일이잖아? 여동생이 내 말을 듣고 요구까지 해주니 그것만으로도 이미 자기를 인정해 주는 거라 생각했을지도.

아니, 마음이 너무 따뜻한 거 아니냐고!!!! 내가 애슐리였으면 사진 같이 찍는 척하다가 이상한 얼굴 나오게 일부러 엽사로 찍었을 거야.

결론적으로 ... 셰인은 자기 욕심만 챙기는 데 급급했지만 애슐리는 그 속에서도 누군가에게 사랑받는다는 의미를 찾아내려 한 거였어..

 

 

 

내가 정리한 세가지 썰 잘 보았니? 읽는 너도 인정하는 부분이지? 깊디 깊은 애슐리의 마음을 보며 우리도 무의식 속에 얼마나 고구마 같은 선택을 하고 있는지 되돌이켜보자.

애슐리가 소설속에선 표현하지 않았지만(겉으론 순하고 조용했지만) 그 내면에서는 끝없는 갈등과 자기희생을 해왔을지도 몰라.

그 섬의 명물 '앞서나가는 거북이'를 생각해보자. 사람들은 이 거북이들을 보면서 리더십이니, 노블레스 오블리주니 하며 존경을 보냈어.

하지만 애슐리 눈엔 달랐지. 뒤에서 앞거북이 꼬리를 물고, 끝없이 끌려가면서 그 '리더'를 따르는 꼴이 꼭 무슨 형벌 같다고 느낀 거야. 아닌가? 꼬리에 다른 거북이를 달고다니는 걸 형벌로 느낀건가? 애슐리가 둘 중 뭘 형벌로 느꼈는지 둘중엔 중요하지않아.

어쨌든 자기 발로 앞으로 나가는 게 아니라 어딘지도 모르게 이끌려가는 그 모습이 마치 자신을 닮았다고 여긴 걸지도 몰라.

사랑과 인정받기를 바라는 한 사람의 순수한 갈망 그리고 그 이면에 자리한 비극적이고도 아픈 희생이었어.

나에겐 세상 속에서 진심으로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지만 늘 외면당하거나 이용당하는 애슐리의 마음이 가슴 아프게 다가왔어.

그녀는 늘 누군가의 사랑과 인정을 받으려고 했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그걸 이용하더라.. 참 나쁘지?

애슐리는 그런 순간마다 어떤 마음이었을까? 자신이 누군가에게 방해가 될까봐 물러섰을 때 혹은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때..

그건 단순히 양보라기보다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자리를 찾고 싶었던 건 아닐까 싶어.

그리고 아투가 자신의 야망을 위해 그녀를 희생하려 할 때 비록 두려웠겠지만 애슐리는 이를 자신의 마지막 헌신으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

"결국 난 이렇게 끝나는구나.. 괜찮았어 이정도 삶이면.."하고 말이야. 셰인의 차가운 말 속에서도 애슐리는 여동생의 인정 한마디에 위안을 삼으며 그 관계에 작은 희망을 품었을 거고.

결국 애슐리는 우리의 또 다른 거울이야. 무언가를 쫓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거, 그리고 인정받기 위해 무리한 길을 따라가기보다는 자신의 길을 찾는 게 중요하다는 걸 보여주는 존재거든.

그러니까 애슐리와는 다르게 행동해보자, 어쩔 때는 딱 한 번이라도 "아니요!" 하고 거북이 줄에서 떨어져 나와 보는 용기를 가져보자.

애슐리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묻고 있어. "너도 혹시 저 거북이 줄을 물고 따라가고 있는 건 아닌지?"

 

 

 

애슐리의 마음이 가닿는 시...

즐거운 편지 - 황동규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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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딩드레스 44 

 

 


당신은 파롤(Parole)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파롤은 랑그(Langue)의 상보호완적인 의미로, 랑그는 한 언어가 갖는 추상적인 체계로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사회적 구성원 모두가 공유하는 약속이다. 그래서 랑그는 유한하다. 그리고 우리가 실제로 입밖으로 내뱉는 개인적 발화를 '파롤'이라 한다. 그래서 파롤은 랑그의 실제적 실현이라 할 수 있고, 개개인의 발화이므로 무한하다. 즉 요약하자면 랑그는 개념, 파롤은 표현이다. 그런데, 파롤은 파롤에 의한 프레임이 있다.

 

 

 

예를 들어, 'BMW 7시리즈'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BMW 7시리즈'라는 랑그를 나는 '대형세단'이라는 파롤로 표현한다.
내가 가진 '대형세단'이라는 이미지는 무언가 고급스럽고, 부의 상징이다.

그런데 '자가용' 구입을 싫어하는 존 리 선생님은 '자가용'은 사치이며, 이미 대중교통으로 충분히 대체 가능한 불필요한 물건일 뿐이다. 만약 존 리 선생님이라면 'BMW 7시리즈'를 나와 같은 '대형세단'이라는 프레임으로 바라볼까? 그렇지 않다. 아마도 그저 사치품에 불과한 '자가용'의 프레임으로 바라 볼 것이다. 이처럼 나와 존 리 선생님이 'BMW 7시리즈'를 다르게 바라보는 이유는 같은 랑그를 다른 파롤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면, '대부분 일치하는 파롤의 프레임'에 갖힌 사례가 무궁무진하다. 예를 들어, 웨딩드레스가 그 파롤이라 할 수 있겠다. 웨딩드레스는 무엇이 연상되는가? 왠지 화려해야하고, 결혼, 축복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대부분 공감할거라고 생각한다. 웨딩드레스에 대해 부정적인 프레임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웨딩드레스는 대부분의 사람이 프레임에 갖혀있는 파롤이다. 웨딩드레스 44는 이러한 파롤의 프레임을 깨뜨리는, 할인을 크게 받아 들여져온, 어느 웨딩드레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웨딩드레스를 대여한 44명의 이야기는 다양하다. 물론 결혼에 대한 이야기, 결혼 생활에 대한 삶을 담고 있다. 좋은 이야기도 있고, 나쁜 이야기도 있다. 그냥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일상 이야기도 있다. 정세랑 작가님에서 의도한 것인진 몰라도. 44개의 이야기 중 좋은 이야기는 짧고, 나쁜 이야기는 길다. 한번 다시 읽어보자.

 

 

 

[3번째 손님]

여자에겐 다른 계획이 많았다.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았고, 해외 연수도 계획되어 있었다.
"네가 원하는 대로 살게 해줄게. 그러기 위해 끝까지 노력할 거야."
그 말을 믿을 수 밖에 없었다.

 

 

 

[6번째 손님] 

"내 몸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부분이야. 지금은 너보다 마음에 들거든?"..............
역시나 멋진 타투였고 드레스와도 잘 어울렸다. 내 몸은 내 거야.

 

 

 

[9번째 손님]

아홉번째 커플은 원래 혼인신고만 하고 살려고 했다. 둘다 식에 대한 환상이 전혀 없었고 .......
그러나 그렇게 2년을 사는 동안 양가에서 폭격이 끊이지 않았다. 어떻게든 식은 꼭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자의 어머니가 울고 남자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렀다. 두 사람은 지고 말았다..............
여자는 고전문학 전공자였는데, 고전문학 속 영웅들이 대다수 고아인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았다.
고아들만이 진정으로 용감해질 수 있다고 말이다.

 

 

 

[15번째 손님]

"하지만 형부가 잘해주잖아요? 좋아 보였는데."
"남편이 문제가 아니야. 내가 제도에 숙이고 들어간 거야. 그리고 그걸 귀신같이 깨달은 한국사회는 나에게 당위로 말하기 시작했지"................
"예를들면요?"
"남편과 나는 같은 시험에 붙었잖아. 그런데 가족들이 내게만 '살살 다닐 직장을 들어가야 한다'고 말해. 왜 나는 살살 살아야 하지? 왜 그게 당연하지? 왜 나한테 그렇게 말해도 된다고 생각하지? 굴욕적이야."
거기까지 말하고 열다섯번째 여자는 입 밖으로 말해서 더 분명해지는 것들을 잠시 가만히 헤아렸다.

 

 

 

[25번째 손님]

"요리부터 배워."
한번은 그냥 넘어았다.
"쉽게 하는 이탈리아 요리, 이거 배울까?"
"좀! 한식부터 배워 좀! 밑반찬부터."
두번은 넘어갈 수 없었다....... 차분하게 반박해야 했지만 여자도 쌓였던게 많았다.
"다시 말해봐, 씨발새끼야."

 

 

 

[36번째 손님]

"그래도 당신은 나랑 결혼해서 다행이지? 나는 전혀 가부장이 아니잖아."
"글쎄."
...................
"내 말은 그런 시간들이 계속, 평생에 걸쳐 쌓인다는 거야. 쌓이다보면 큰 차이가 나는 거고. 생각해보면 이상하지 않아? 당신 할아버지 제사잖아? 난 만난 적도 없는 분이야. 왜 효도를 하청 주는데?" 
"어쨌든 그게 가부장제야. 당신 눈에는 안 보여도 내 눈에는 보여. 내 눈에만 보이는게 아주 많아"

 

 

 

여자의 계획과 남자의 약속이 엇갈리며 나타나는 갈등은, 결혼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얼마나 개인의 욕망과 꿈이 묻히기 쉬운지를 잘 보여준다. 남자가 아무리 여자의 자유를 보장하겠다고 말해도, 그 말은 결국 전통적 결혼 제도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 약속이었다. 이는 결혼이라는 제도 속에서 개인의 자아와 계획이 어떻게 조율되지 못하고 침식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여자의 타투와 그 타투에 대한 자기 확신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내 몸은 내 거야"라는 말은 결혼 안에서조차 여성의 몸과 삶에 대한 자기 결정권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억압될 수 있는지에 대한 저항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이는 결혼 제도 내에서 여성의 주체성을 잃지 않고 자신을 지켜나가려는 강한 의지를 상징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중간에 결혼식에 대한 환상이 없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결국 사회적 압력에 굴복하고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이는 상호 가족간의 전통적인 결혼관념이 여전히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두 사람의 개인적 선택이 사회적 기대에 의해 쉽게 무너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여자가 고전문학 속 영웅들은 고아라는 특성을 떠올리며 진정한 용기와 자유를 사회적 고립 속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점을 떠올린 것은 결혼 제도가 어떻게 개인을 구속하는지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자 풍자라 할 수 있다.

 

 

 

그와 비슷한 맥락에서 15번째 손님의 "왜 나는 살살 살아야 하지?"라는 질문은 결혼 후 여성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기대와 제약을 직설적으로 드러낸다. 같은 시험에 붙었음에도 여성이 더 적은 야망을 품고 "살살" 살아가야 한다는 압박은 결혼이 여성에게 요구하는 불합리한 역할을 폭로하고 있다.
마지막 인용에서 "나는 전혀 가부장이 아니잖아"라는 말은 남성이 가부장제의 일부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성은 결혼 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사회적 불평등을 경험하고 그 차이가 쌓여 커다란 격차로 이어진다. 이는 남성과 여성이 결혼을 통해 경험하는 사회적 현실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25번째 손님의 이야기는 누군가는 사이다라고 생각했을 수 있겠다. 결혼 생활 속에서 발생하는 권력 관계와 역할 강요에 대한 갈등을 보여준다. 남편이 아내에게 요리를 배우라고 요구하는 것은 가정 내에서 전통적으로 여성이 해야 한다고 여겨지는 역할을 강요하는 대표적인 예시다. '한식부터 배워라', '밑반찬부터 하라'는 식의 지시는 여성에게 특정한 집안일을 맡기고 그것이 마치 당연한 것처럼 요구하는 가부장적 관습을 드러낸다. 마지막에 여자가 "다시 말해봐, 씨발새끼야"라고 말하며 폭발한 장면은 단순한 폭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결혼 생활에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무언의 압박에 대한 강한 저항을 표현한 것이다. 이는 단순히 남편의 말에 대한 분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으며 가부장적인 결혼 제도와 그 안에서 여성이 느끼는 억압에 대한 상징적인 반발로 읽을 수 있다.

 

 

 

사실 내 생각에 이 소설은 결혼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작은 갈등들이 사실은 더 큰 사회적 불평등과 맞닿아 있음을 보여준다. 여성이 결혼 안에서 자신의 주체성을 지키기 위해 투쟁해야만 하는 상황을 비판적으로 묘사하며 이러한 권력 구조 속에서 개인의 감정이 어떻게 파괴되고 소모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아마도 가벼운 내용의 긍정적인 내용들이 없었다면 너무도 편파적이게 느껴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간에 반짝 나타나는 타코야끼 댄스 커플은 아주 귀여웠다. 그래서 나도 은근하게 한번 춰보기도했다.)
결론적으로 이 소설은 화려함과 축복을 상징하는 결혼, 웨딩드레스에 대한 파롤의 프레임과 그 속에 숨겨진 사회적 불평등을 파헤치며 우리가 결혼을 단순히 개인의 선택으로만 바라볼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나에게 있어서는 결혼 제도가 얼마나 깊이 사회적 구조에 얽혀 있는지를 생각해보게 했고 그 안에서 개인의 자아가 어떻게 억압되거나 구속될 수 있는지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시각을 주는 내용들이었다.
당신도 이 글을 읽었다면 여전히 웨딩드레스에 대한 파롤 프레임이 유효한가?

 

 

 

 

 

보늬

 

 

 

당신은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여 본 적이 있는가?

당장 나에게 닥칠 어떤 구체적인 불행이나, 심지어는 내가 제 명까지 못살고 죽는다던가 말이다.
실제로 뉴스를 보면 우리는 그런 일들을 많이 간접경험하고 있다. 우리는 죽음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것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다가올지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이 죽음을 더욱 두려운 존재로 만든다.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방영했던 부산 돌려차기 사건은 묻지마 폭행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공포와 경각심을 일깨웠다.

 

 



 

 

 

우리가 이런 일을 당하지 않을거라고 보장할 수 있는가? 그 중에서도 돌연사라는 것은 예기치 못한 순간에 찾아오며 남겨진 이들에게 깊은 충격과 상실감을 안겨준다. 그와 동시에 그 사건을 겪게 될 본인에게도 죽음을 미처 준비하기도 전에 삶을 마감해야 한다는 일은 안타까운 일이다. 나는 이미 이전에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간다" 책을 통해 나는 어떠한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 나의 죽음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한 경험이 있다. 가족들에게 미리 자신의 장례가 어떻게 이루어졌으면 좋겠는지, 재산이나 금전적인 것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그 외에 정리해야 할 인간관계에서 아무말도 하지 못한채 세상속에서 잊히고 사라져가야하는 것은 마땅하지 못하다. 그런 비극 앞에서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어느새 차츰차츰 잦아드는 슬픔을 받아들이고 묵묵히 삶을 살아갈지 모른다. 또 누군가는 그 충격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 한다. 돌연사.net은 바로 그런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에서 출발했다.

 

 

 

우선, 이 소설의 내용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사이트가 돌연사한 사람들을 수집하고 그들의 삶을 선으로 연결하려는 시도는 개인의 죽음이 고립된 사건이 아닌, 사회적, 관계적 맥락에서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각자의 삶이 그물처럼 엮여 있는 세상 속에서 그들은 죽음을 통해 살아있는 사람들 사이의 보이지 않는 연결 고리를 확인하려 하지만 내가보기엔 사실 이 부분은 큰 의미가 없어보였다. 그들이 정말로 찾고 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잠시 고민에 잠시 잠겼고 책을 다 읽고도 그 부분을 되짚어 다시 읽어보았다. 내가 생각한 이 주인공들의 사이트 구축은 궁극적으로 죽음의 이유를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 비극 속에서 남겨진 유족으로서의 의미 그리고 그들에게 남겨진 삶의 무게를 마주하는 것이 아닐까? 어떤 의미를 찾으려 시도했던 것은 그저 표면적인, 어쩌면 형식적인 이유를 갖다댄 것일 뿐...
자, 다시 생각해보자. 규진은 왜 돌연사.net을 만들어서 보윤과 매지에게 선보였을까? 내 생각에 규진은 돌연사라는 그 불안과 공포를 어떤 식으로든 통제하려는 시도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돌연사라는 비극적인 사건을 단순한 하나의 데이터로 취급하며 이를 사람들과 연결된 지점으로 분석하려 하고, 사용자로부터 업로드된 데이터에 대해 검열한다. 이는 감정적으로는 냉정해 보일 수 있지만(그들은 실제로 엄격하게 운영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데이터를 삭제할지 애매한 사례에서는 보류라는 선택을 한다.) 한편으로는 죽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노력처럼 보이기도 한다.

 

 

 

중간에서 사이트가 확장되며 '돌연사의 경계'에 대한 논의가 등장하는 부분은 서두에서도 말했지만 예전에 읽었던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간다'를 떠올리게 한다. 과연 무엇이 돌연사이고, 무엇이 아닌가에 대한 기준을 명확히 정하는 일이 어렵다는 사실은 우리가 사회 속에서 얼마나 많은 '보이지 않는 죽음'을 간과하고 있는지를 상기시킨다. 예를 들어, 과로로 인한 죽음은 갑작스러운 사고가 아닌 서서히 다가온 비극이지만 그 결과는 마찬가지로 예측할 수 없는 종말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렇다면 과로사 역시 돌연사의 범주에 포함되어야 할까? 이 소설을 읽었다면.. 아마도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이 질문은 우리 사회가 과연 죽음을 어떻게 정의하고 어떤 죽음을 더욱 심각하게 받아들이는지에 대한 성찰을 요구한다.
아무쪼록 냉정하게 운영하려 했으나, 보윤과 규진, 매지는 원래의 의도와는 달리 유족들이 사이트에서 위로를 얻어간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돌연사로 인해 가족을 잃은 유족들에게는 상실의 고통 속에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겪은 슬픔을 나누며 위로받는 과정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 사이트는 단순한 정보 제공의 역할을 넘어 상실을 공유하고 함께 견디는 공간으로 변모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고통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위로를 받고 죽음의 무게를 혼자 감당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안도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이 소설에서 직면하는 사회적 문제는 단지 돌연사 그 자체가 아니다. 돌연사라는 비극은 우리의 사회가 법의 사각지대에 위치한 돌연사, 보호받지 못한 돌연사, 각종 산업재해와 어쩌면 막을 수도 있었던 수 많은 사고들을 얼마나 외면해왔는지를 상기시킨다. 과로사, 극단적인 선택, 과도한 사회적 압박 속에서 서서히 무너져가는 이들은 결국 돌연사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고 이 소설에서는 이야기하고 있었다.
결국... 그렇다면 돌연사는 단지 예측할 수 없는 죽음이 아니라, 사회적 문제로부터 비롯된 죽음이라는 더 넓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나는 마지막 부분의 "하다가 죽지 않는 것을 하고 싶다." 이 말은 단순히 '살아남는 것'을 넘어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하며 삶을 이어가고 싶다는 욕망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우리는 그 속에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이루고자 한다.
보윤과 규진, 매지는 어쩌면 죽음을 기록하고 추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제는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삶의 가치를 되돌아보게 하고 그들이 서로의 고통을 공유하며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하다가 죽지 않는거, 하고 싶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모두 그 두 일에 대해, 혹은 둘의 교집합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게 분명했다.

 

 

 

 

해피 쿠키 이어

 

 

 

내 생각에 정세랑 작가의 이상형이 있다면 해피 쿠키 이어의 남자주인공 이스마일이 아닐까? 그래서 자신이 바라는 바람직한 남성상을 옥상에서 만나요에 수록된 소설 중 해피 쿠키 이어의 유일한 1인칭 남자주인공으로 만들었을지 모른다. 판타지적(?) 요소로 특이점이 있다면 바로 과자귀다. 나는 사고로 잘려나간 이스마일의 귀에 자라나는 과자는 단순한 판타지적 설정을 넘어 사랑을 나누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 이스마일은 자신의 옆집 여자친구와 사랑을 나누며 그 과자 귀마저 아낌없이 내어준다. 과자 귀를 뜯어먹어도 그는 불평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이 야윈 그녀를 조금이라도 살찌게 하고 건강하게 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내어줄 준비가 되어있다. 놀랍게도 이 과자 귀는 매번 다른 종류로 자라난다. 과자귀가 매번 다른 과자로 달라지듯 이스마일의 사랑 또한 단조롭지 않다. 마치 해리포터의 강낭콩 젤리처럼 그때그때 다르게 나타나는 귀는 여자친구에게 작은 설렘을 준다. 이스마일은 그런 존재처럼 느껴졌다.

 

 

 

마지막 장면에서 이스마일의 과자 귀는 결국 더이상 자라지 않는다. 여자친구와 된장찌개를 함께 먹고 이별하는 순간... 그의 임무가 끝났기 때문이다. 이스마일은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그녀를 사랑했고 더이상 귀가 자라지 않는 것은 그가 그녀를 위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주었다는 걸 표현한다. 이스마일은 그저 그녀가 아프지 않기를 바랐고 그녀의 곁에서 조용히 사랑을 나눴다. 그가 한국에서 살아가는 아랍인이라는 설정은 한국 사회에서 소외된 계층을 은유하는 듯 보이지만, 이스마일의 진정성 있는 사랑에는 그러한 사회적 위치나 배경이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이스마일은 이 소설집에 등장하는 여느 남성 인물들과는 유난히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는 전혀 폭력적이지 않으며 오일 프린스, 명예살인, 향후 10년 중동 정세, 민주국가, 빨갱이, 독도 등등에 대한 가치, 혹자는 어떠한 프레임에 대해서도 편향이 없다.

 

 

 

이 부분에 대해 구체적으로 내 해설을 정리해보자면 이스마일은 세상의 복잡한 문제나 논쟁에 휘말리기보다는 눈앞에 있는 사람을 이해하고 그들의 필요에 응답하는 데 집중한다. 그의 관심사는 정치적이거나 이념적인 것이 아니라 여자친구가 아프지 않도록 혹은 그녀가 편안하고 행복하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그가 가진 사랑은 순수하고 무언가를 기대하지 않으며 오직 상대방의 행복을 위한 행동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이스마일의 태도는 사회에서 흔히들 주변에서도 볼 수 있는 강한 의견 표출이나 권력 투쟁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갈등을 피하고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방법을 선택한다. 그의 비폭력적인 태도는 그의 서툰 한국어 실력, 혹자는 외국인 여부를 떠나 얼마나 성숙하고 온화한 사람인지를 보여준다. 또한 그는 정치적, 사회적 이슈들에 대해서도 편견 없이 받아들이며 특정 프레임이나 이념에 구애받지 않고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이런 그에 대해... 나는 단순히 소설 속 남성 주인공이 아니라, 정세랑 작가가 이상적으로 그린 '이해하고 배려하는 인간'의 모습임을 드러낸다고 느꼈다.

 

 

 

그는 "콩 알레르기"가 있는 옆집 여자를 위해 요리를 한다. 그는 그것이 오바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나는 정작 그것이 오바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 소설에서 여자가 콩 알레르기가 있다는 설정은 단순한 신체적 제약을 넘어 이스마일과 그녀 사이의 관계를 심화시키는 중요한 촉매로 작용한다. 콩 알레르기는 그녀가 겪고 있는 내적인 고통을 상징한다. 즉 이스마일이 그녀의 삶에 얼마나 깊이 들어가 그녀를 배려하고 이해하려 하는지를 보여주려는 장치이다. 이스마일은 그녀의 알레르기를 단순히 불편함으로 치부하지 않고 그것을 극복하는 데 힘쓰며 그녀를 위해 요리까지 하며 신경을 쓴다.

 

 

 

특히 옆집 여자(여자친구가 되기 전)가 아파하는 것을 걱정하며, 포스트잇으로 안전하게 밥을 먹자고 제안하는 장면은 이스마일의 세심한 배려와 따뜻함을 잘 보여준다. (아마도 옆집 여자가 기침한다는 이유로 초인종 누르며 밥같이 먹자고 하면 옆집 여자가 아니라 경찰이 긴급출동을 했을 수도 있다.) 이 장면은 단순한 식사 제안이 아니라 여자의 고통을 완벽히 이해하고 그녀의 안전과 편안함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그의 마음이 담겨있다. (포스트잇은 꽤 괜찮은 수단인 것 같다...) 그는 콩 알레르기를 가진 여자에게 조금도 무리한 기대를 하지 않고 오히려 그녀가 안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며 자신을 나누려 한다. 그의 포스트잇 제안은 단순하지만 그 속에 담긴 진심은 매우 깊다. 이 행동이야말로 이스마일의 무해함과 배려가 가장 잘 드러나는 순간이다. 결국 이러한 순수한 마음과 무해함이 여자를 감동시키고 그들을 이어주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스마일은 여자에게 어떤 강요나 압박을 하지 않으며 그저 그녀가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조용히 옆에 있어준다. 이 점이 바로 여자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며 사랑이라는 관계는 누가 더 많은 것을 요구하거나 주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진심으로 상대방을 배려하고 이해하는가에 달려 있음을 이스마일의 행동을 통해 깨달을 수 있다. 이 소설에서 여자가 이스마일의 사랑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그의 순수한 마음과 무해함 덕분이었다. 그는 무리하게 그녀를 쟁취하려고 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의 마음을 조심스럽게 표현하면서 그녀가 안심하고 다가올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는 단순한 로맨스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이스마일이 보여준 사랑은 상대방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함께 걸어가는 과정이었고 그런 태도야말로 현대인으로서의 진정하고 올바른 형태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그녀가 회사의 비리를 고발하여 사회생활에서 고통을 겪을 때였다. 그는 단순히 그녀를 위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녀의 선택을 존중하며 옆에서 묵묵히 함께한다. 그녀가 고발로 인해 받는 사회적 압박과 불이익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지만 이스마일은 이를 개인적인 문제로만 보지 않고 그녀가 옳다고 믿는 선택을 지지하며 그녀의 신념과 가치를 받아들인다. 그는 자신의 의견을 강요하거나 그녀를 대신해 나서지 않는다. 대신 그녀가 올바르다고 믿는 길을 가는 동안 변함없는 응원을 보내며 그녀가 힘들어할 때 그녀의 편이 되어 준다. 이는 이스마일의 사랑이 단순히 '곁에 있음'의 의미를 넘어, 어려운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는 지지를 의미한다. 그가 그녀의 선택을 지지하며 곁에서 묵묵히 응원하는 모습은 이스마일이 깊은 배려와 이해심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아마 이때 이스마일이 여자친구에게 "아니 잘 다니다가 왜그랬어? 얼른 잘못했다고 사과하자 자기야~", "안그래도 월세 내야하는데... 그건 어떡하려고?"라는 식의 전개가 펼쳐졌다면 마지막 된장찌개와 한식같았던 키스는 없었을 것이다. 이스마일은 그녀에게 무언가를 강요하거나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가 독립적으로 자신의 신념을 실현할 수 있도록 옆에서 따뜻하게 바라봐주며 그녀의 아픔과 어려움을 공유하려 한다. 이는 이스마일의 사랑이 타인의 행복과 자율성을 존중하는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의 이런 지지는 단순히 연인의 역할을 넘어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두 사람이 어떻게 서로를 이해하고 도울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스마일은 여자친구가 겪는 사회적 문제와 불의를 외면하지 않고 그 속에서 그녀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그저 조용히 응원할 뿐이다.

 

 

 

일이 잘되려면 모든 게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잘되듯이, 일이 잘못되려 해도 마찬가지로 맞물려 잘못된다. 세단계에 걸쳐 사고가 일어났다. 사악한 손이 설계한 도미노 같았다.

 

 

 

덩어리가 되고 싶지 않았다. 실제로는 덩어리래도. 나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독후감을 마치며

이 소설은 사실 현실적인 결혼이야기가 중심인 책이다. 나는 그 속에서 겪는 여성들의 고충을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볼 수 있었다. 물론, 그런 무거운 주제의 이야기도 중요하지만, 솔직히 말해 나에게 더 마음에 와닿았던 건 이 책에서만 느껴질 수 있는 따뜻한 분위기, 인물들의 소소한 대화에서 느껴지는 심리적 감정선들... 그리고 장마다 나오는 귀여운 표지 삽화들이었다. 읽는 내내 내 주변의 소중한 친구들, 그리고 내 마음속의 그 어떤 누군가가 떠올랐고 덕분에 미소 지으며 기분 좋게 책장을 넘겼다.

 

 

 

그렇다면 우리는 결혼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봐야 할까? 꼭 거창한 답을 찾기보다는 소소한 일상 속에서 서로를 아끼고 배려하는 마음 그리고 그 속에서 찾아오는 소소한 행복이 더 소중한 게 아닐까 싶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문득 내가 예전에 보았던 떠오른 짧은 영상하나가 떠올랐다. 아마 정세랑 작가님도 공감을 많이 하실 것 같은 영상이다. 어쩌면 "그래, 옥상에서 만나요로 이 말을 하고 싶었어!" 라고 하실지도 모른다.
결혼에 대해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할지..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도 이 영상을 보며 정말 중요한건 무엇일까에 대해 다시금 되새겨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그럼 긴 독후감을 따뜻한 마음으로 마무리 지어본다. :)

 

 

 

 

 

 

우린 어째서 이렇게 슬프도록 스트레이트일까. 이렇지 않았다면 남자친구들, 하고 복수로 말해야하는 극적이고 피곤한 인생을 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아무도 너만큼 파츠가 맞지 않아, 내가 말했을 때 너는 다시 확인했어. 피 에이 알 티 에스, 그 파츠? 하고 물었지. 자주 쓰는 표현인데 그렇게 되물으니 작고 견고한 부속품이 된 것 같았어.
조금 모양이 다른, 하지만 나란히 들어가는 파츠.

 

 

 

소환되어 온 오바가 나 대신 싸웠어. 건성으로 싸웠는데도 아빠를 설득해냈어.
오빠의 결정적인 한마디는 '남들이 흉본다'였지. 어릴 때 내내 때리고 괴롭혔던 걸 그 설득으로 갚았다고 생각해.

 

 

 

그 사람에겐 그렇지 않았나봐. 그 점잖던 사람이 웬 인터넷 싸이트에 내 이름과 얼굴을 다 공개하며 자기 집이 가난하다고 홀어머니를 대놓고 무시하면서 도망간 여자라고 글을 올리기 시작했거든. 가난하기로 치면 나도 가난하고 사실 내가 도망친 건 가난보다 좀더 어둡게 끈적이는 어떤 것으로부터였는데 나느 무슨 녀라고 유행하는 비속어들로 요약되어 버렸어. 그 사람은 새벽에 전화해 돌아와달라고 울면서도 매일매일 글을 올리더라. 욕설이 섞인 게시물과 간절한 전화 사이의 간극이 더 소름 끼쳤어.

 

 

 

-효진 중-

 

 

 

"솔직히 역사는 그 순간을 살았던 그 사람들만의 것이라고 생각해. 그러니 전근대사는 무기로 쓰면 안되고, 근현대사에 있어선 더 철저하게 책임을 져야겠지. 민족주의자 말고 각자 나라에서 좋은 시민들이 되면 지금과는 다를거야. 어디 가서 이렇게 솔직히 말하기는 사실 어렵지만, 요즘 애들은 스스로 무장해제 하느냐고 한마디 들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네 말은 그거잖아. 우리가 언젠가 뿔뿔이 돌아가고 '알다시피'에 다른 멤버들이 들어온다 해도 지금 이 순간은 우리들 것이라서 아무도 가져가지 못한다는 거. 다른 사람에겐 지분이 없다는 거. 효짱 얘기가 그 얘기 아니야?"

 

 

 

-알다시피, 은열 중-

 

 

 

"결혼해서 막 좋은 건 아닌데... 어쨌든 집에서 훌라후프는 돌아가."
"훌라후프요?"
"결혼 전에 어릴 때 생각나서 훌라후프를 샀다가, 나 막 울었잖아. 원룸에서 아무리 자리를 옮겨봐도 훌라후프가 안 돌아가는 거야. 싸구려 옷걸이니 부직포 서랍이니 온통 걸려서.... 이러니저러니 해도 둘이 합쳐 살면 집에서 훌라후프 정도는 돌아가니까, 숨이 쉬어지더라고."

 

 

 

너라면 이해할 수 있을 거야. 모든 사랑 이야기는 사실 정망에 관한 이야기라는 걸. 그러니 부디 발견해줘. 나와 내 언니들의 이야기를. 너의 문명적 사랑을. 그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줄 기이한 수단을.

 

 

 

- 옥상에서 만나요 중 -

 

 

 

지원이 말했을 때 친구들은 뜨악해하는 눈치였다. 여섯명 중에 아이가 있는 사람은 지원과 경윤뿐이었는데, 경윤의 딸은 지원이 보기에 다섯명이라도 키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비교하지 않으려 해도 비교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의 삶은 근사하고 자신만 지옥에 버려진 듯한 날들이 이어졌고, 짓무른 마음을 들키지 애썼지만 종종 들켰다. 그럴 때 친구들이 잠깐 짓는 아연한 표정에 지원은 더욱 비참해지고 말았다.

 

 

 

"아들 둘이라 그런 것 같아. 손자들의 랭크가 달이나 며느리 랭크보다 높은 거야, 어른들 마음엔."

 

 

 

- 이혼 세일 중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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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동료가 읽고 추천해준 책이었다. 책 뒷면 설명란에 애정 없는 결혼 속에서 '낡은 폐선'처럼 살아가는 이선 프롬이라는 문구를 읽고 호기심에 읽게 되었다. 그동안 읽기 편안한 책만 읽어서 그런지 책 초반에는 특유의 번역체로 읽기가 다소 불편했으나 곧 이야기 속 인물들의 감정선에 빠져들게 되었다.

 

책 소개 및 요약

나의 해설에 앞서 작가와 이 책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자면, 이 책의 작가 에디스 워튼(Edith Wharton)은 최초의 여성 퓰리처상 수상 작가이기도 하다.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생각하면 여성 작가가 귀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영어로 작가를 뜻하는 writter라는 단어를 보면 남성형만 있고 여성형이 없다. 그 당시 시대적 배경에 따르면 글쓰기는 으레 남성의 일이지 여성이 하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 문화권에서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기에 글 쓰는 직업을 가진 여성을 가리킬 때는 굳이 '여류'라는 표를 달아 남성 작가와 구분 짓는다. 언어학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유표화라고 한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불과 몇십 년 전만 하더라도 전문직에 속하는 직업치고 여성이나 여류라고 유표화하지 않는 직업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이런 의미에서 워튼 작가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의 미국 여성 작가들 중 순수 문학의 길을 걸은 최초의 작가라 할 수 있다.

 

 

이선 프롬은 미국 작가 에디스 워튼(Edith Wharton)이 1911년에 발표한 소설로 사랑과 비극 그리고 인간의 내면적 갈등을 서정적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주요 등장인물로는 이선, 그의 아내 지나, 그리고 이 집에서 가정부로 일을 하는 지나의 사촌 매티이다. 워튼은 이 소설을 통해 한계 상황에 처한 인간의 감정과 그로 인해 파생되는 복잡한 심리적 변화를 섬세하게 그려냈다. 이선 프롬은 작고 황량한 마을에서 살아가는 농부로 자신의 꿈과 열망을 억누르며 살아가는 인물이다. 워튼은 이선을 통해 당시 사회의 제약과 운명에 갇힌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며 그가 처한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갈등을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선의 이야기는 사랑에 대한 열망과 이를 이루지 못하는 좌절이 뒤섞인 비극적 운명으로 그의 내면은 마치 얼어붙은 뉴잉글랜드의 겨울처럼 차갑고 고립되어 있다. 소설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워튼의 묘사 기법이다. 그녀는 뉴잉글랜드의 혹독한 겨울 풍경을 이선의 내적 갈등과 고립감을 반영하는 상징으로 사용한다. 눈 덮인 들판, 얼어붙은 나무, 차가운 바람은 이선이 느끼는 정서적 추위를 극적으로 부각시키며 독자는 그를 둘러싼 환경이 그의 운명을 더욱 굳어지게 만드는 요소임을 느끼게 된다. 워튼은 이러한 자연 묘사를 통해 감정을 형상화하며 이선이 처한 비극을 더욱 강렬하게 전달한다.

 

 

이선과 매티의 관계는 소설 속에서의 애틋함과 사랑에 대한 간절함이 독자들의 마음에까지 스며들도록 한다. 매티는 이선이 꿈꾸던 자유와 사랑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녀와 함께 있을 때 이선은 마치 얼어붙었던 마음이 녹아내리는 듯한 순간을 경험한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는 금지된 사랑이다. 이는 그들의 운명을 더욱 비극적으로 만들며, 독자로 하여금 그들의 사랑을 안타까워하면서도, 필연적인 결말에 대해 예감하게 만든다. 결국, 이선 프롬은 인간의 욕망과 도덕적 책임, 그리고 운명 사이의 충돌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워튼은 사랑과 희생, 그리고 그로 인한 고통을 담담하면서도 서정적인 문체로 그려내며, 독자들에게 감정의 울림을 전달한다. 이선이 겪는 고통은 개인의 불행을 넘어, 모든 인간이 한 번쯤 경험하는 삶의 비극적 측면을 상기시킨다. 그가 처한 상황은 나로 하여금 삶의 무거운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갈등하는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이렇듯, 이선 프롬은 단순한 비극을 넘어선 인간의 내면 탐구를 서정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한계 상황에 처한 인간이 어떻게 그 안에서 살아가고 또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고찰하게 한다.

 

 

데니스 이디에게 질투를 느끼는 이선

교회 청년부 축제에서 춤을 추는 매티와 데니스 이디. 이들의 관계는 소설 이선 프롬에서 중요한 갈등 요소로 작용한다. 데니스 이디는 마을의 부유한 청년으로, 이선의 아내 지나의 사촌인 매티 실버에게 관심을 보인다. 데니스는 젊고 활기차며, 외향적인 성격으로 매티에게 매료되어 그녀에게 적극적으로 호의를 베푼다. 그의 부유함과 매티를 향한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구애는 이선에게 깊은 불안과 질투를 유발한다. 소설 속에서 나타나는 이선의 감성선을 나까지 긴장하게 만들었다.

 

 

이선은 매티에게 연정을 품고 있지만, 지나와의 결혼 생활로 인해 그녀에게 다가갈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매티는 이선에게 있어서 현실의 고통 속에서 유일하게 따뜻함을 느끼게 해주는 존재다. 이때 이선이 느끼는 감정은 사랑이라기보다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강렬한 갈망으로 표현될 수 있다. 그런 매티에게 데니스가 다가가는 모습을 보면서 이선은 불안과 질투로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선이 데니스와 매티 사이에서 느끼는 질투는 이선의 내면 갈등을 더욱 부각시킨다. 데니스는 이선이 감히 표현하지 못하는 자유롭고 대담한 젊음을 상징한다. 매티와 데니스가 함께 있는 장면을 목격할 때마다 이선은 자신이 이룰 수 없는 꿈과 현실의 차이를 더 뼈저리게 느낀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그가 매티에 대한 감정이 더욱 불타오르도록 하는 촉매 역할을 하게 되고 이선이 매티에게 더욱 적극적으로 이성호감을 표현하도록 만든다.

 

 

이선의 감정 변화

이선 프롬에서 이선이 매티에 대한 감정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미묘하게 변화한다. 처음에 이선은 매티를 단순히 지나의 병간호를 돕는 존재로 여겼으나 점차 그녀에 대한 연정을 품게 된다. 매티는 이선의 무미건조한 삶 속에서 활력을 불어넣는 존재로 자리 잡는다. 그러나 이 감정은 애초에 금지된 사랑이라는 한계 속에서 피어나는 만큼 이선은 매티를 향한 마음을 억누르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감정은 점점 더 깊어지고 복잡해진다. 이선의 감정선은 매티와 함께하는 작은 순간들 속에서 서서히 절정에 이른다. 두 사람이 함께 눈 속을 걸으며 따뜻한 대화를 나누거나 매티가 그의 집에서 가사일을 도울 때마다 이선의 마음은 점점 더 그녀에게 끌린다. 끝내는 지나가 병원에 가기 위해 하루가 없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게 될 정도였으니까.(지나가 없으면 매티와 단 둘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므로) 매티의 호감까지 확인한 이선은 더욱 불타오르게 되고 지나를 버리고 서부로 매티와 도망치는 극단적인 계획까지 구상하게 된다.(결말을 본다면, 차라리 그 계획을 실행하는게 나았을 것이다.) 매티의 사소한 행동이나 말투 하나하나가 이선에게는 무미건조한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작은 빛이 되었으며 그녀와의 일상적인 교감이 그에게는 큰 의미를 가지게 된다. 소설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는 이선과 매티가 함께 썰매를 타며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순간이다. 이들은 썰매를 타고 눈 덮인 언덕을 내려가며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지만, 그들의 마지막 썰매 타기는 비극적인 결말을 향해 나아가고 만다. 이 장면에서 두 사람의 대화는 소박하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깊고 애절하다.

 

 

에필로그를 읽고

에필로그에서 화자가 이선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는 나이 들어버린 매티와 지나의 모습을 발견하고 충격을 받는다. 젊고 생기발랄했던 매티는 이제 지나의 옛 모습처럼 병들고 쓸쓸한 상태로, 지나의 병간호를 받고 있다. 이 순간 화자는 그들의 젊음과 삶의 가능성이 모두 사라지고 서로에게 얽매여버린 삶을 목격하게 된다. 이선의 집 안에는 고립감과 좌절 그리고 시간의 무게가 짓누르고 있으며, 화자는 이들이 처한 상황을 보며 무거운 감정을 느낀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이선과 매티가 함께 목숨을 끊으려는 시도는 실패했고, 원래 아팠던 지나가 불구가 되어버린 메티를 돌보고있고 이선 또한 다리에 큰 부상을 입은 이유를 깨닫고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작가 에디스 워튼이 이 장면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인간이 자신의 욕망과 꿈을 억누르고 살아갈 때 시간이 흘러 어떤 비극적 결과에 직면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선과 매티는 결국 자신들의 사랑을 이루지 못한 채, 남은 인생을 고립과 후회의 공간 속에서 보내게 된다. 워튼은 이 비극적 결말을 통해 억눌린 욕망과 선택하지 못한 삶이 얼마나 무겁고 파괴적인지 경고하고 있다. 화자는 이 집 안에서 이들의 희망이 산산조각 난 모습을 마주하고, 이선의 선택과 그로 인해 잃어버린 가능성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가 떠나는 순간, 독자들은 이들의 삶이 이제 회복 불가능한 상태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며, 이는 소설이 끝나도 오래도록 여운을 남긴다.

 

 

이 결말은 단순히 이선, 매티, 지나의 비극을 넘어, 우리의 삶에서 선택의 중요성과 그 결과에 대한 경고를 담고 있다. 워튼은 우리에게 한 번의 선택이 얼마나 오랫동안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그리고 억눌린 감정과 욕망이 어떻게 인간을 갉아먹는지 보여주고 있다. 결국, 이선의 비극은 단순히 한 남자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억압된 욕망이 삶을 파괴할 수 있다는 인간의 삶에 대한 보편적인 진실을 이야기한다.

 

 

도덕에 따른 욕망의 구속

옮긴이 김옥동 작가님은 이 책이 출간된 지 백 년이 훌쩍 넘었음을 언급하며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이 작품이 어떤 의미를 줄 수 있을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인간의 욕망과, 도덕, 젠더와 결혼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을 윤리나 도덕의 이름으로 억압해야 할까? 아니면 욕망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충족시키는 것이 건강한 삶일까? 옮긴이 김옥동 작가가 던진 질문처럼 이선 프롬에서 다루어진 인간의 욕망, 도덕, 젠더, 결혼은 여전히 현대 사회에서도 유효한 주제들이다. 그러나 현대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과거와 달리 이러한 주제에 대한 접근 방식이 상당히 진보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과거의 이선과 매티가 도덕적 제약과 사회적 구조 속에서 그들의 사랑을 억누를 수밖에 없었던 반면, 오늘날의 사회는 보다 개인의 욕망과 자율성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변화했다. 이러한 변화는 이선과 매티의 이야기를 다른 방식으로 상상하게 만든다.

 

 

현대 사회에서는 개인의 행복과 자율이 중요한 가치로 여겨지며, 결혼 역시 선택 가능한 관계 중 하나일 뿐 절대적인 구속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선이 만약 현대에 살았다면, 그는 매티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좀 더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매티 또한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있는 더 많은 자유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이들의 관계는 비극적이기보다는 오히려 두 사람 모두에게 성장과 자유를 가져다주는 긍정적인 경험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도망칠 자금 50달러가 없어서 좌절한다던가, 그로인해 썰매를 나무에 들이받고 서로의 삶을 끝내기를 바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새로운 결말을 상상해보자면 이선은 매티와 함께 자신들의 욕망을 억누르지 않고 과감히 새로운 삶을 선택했을 것이다. 매티와 이선은 서로를 통해 억압된 삶에서 벗어나 새로운 미래를 꿈꾸며 서부로 마을을 떠난다. 매티는 그녀의 자유로움을 이선에게 전파하며 그를 고립된 농장에서 벗어나게 했을 것이다. 그들이 떠나는 길은 이제 더 이상 눈 덮인 황량한 스탁필드의 들판이 아닌 새로운 가능성과 기회로 가득 찬 길로 묘사될 수 있다. 이선의 마음 속 얼어붙었던 감정들은 따뜻한 봄날처럼 녹아내리고 그들의 썰매는 비극의 눈길을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향한 환희의 질주가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현대인이 과거에 비해 도덕이라는 애매모호할 수 있고 주관적인 영역에 대해 얼마나 진보했는지를 깨닫게 된다. 오늘날 우리는 사랑에 있어서 도덕적, 사회적 억압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개인의 자율성과 행복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다. 과거의 이선과 매티가 불가능했던 선택을 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며 이들이 그토록 갈망했던 자유와 사랑은 오늘날 더 쉽게 허락된 가치로 인정받고 있다. 이들의 이야기는 이제 더 이상 비극으로 끝나지 않으며 새로운 시작으로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이선과 매티의 사랑이 현대 사회에서 이루어졌다면 그들은 도덕적 압박과 사회적 구조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충실히 따르며 행복을 추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인간의 욕망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건강하게 드러내고 충족시키는 것이 오늘날의 삶에서는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았다는 점에서 현대인은 확실히 과거보다 더 큰 자유를 누리며, 더 나은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삼각관계

지나는 질병으로 인해 매티에게 의지하면서도 그녀를 잠재적 경쟁자로 경계하는 이중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사회적 관습과 도덕적 규범에 따라 지나는 이선과 매티의 관계를 명확하게 의심했으나 그것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거나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제한적이었다. 소설 속 지나는 자신의 불안감과 의심을 통해 이선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하고 궁극적으로 매티를 내쫓으려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이 사건이 현대에 이르렀다면 지나는 전통적인 결혼의 틀에서 벗어나 더 복잡하고 다양한 감정과 선택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을 것이다. 현대의 지나는 이선과 매티의 관계를 좀 더 명확하게 직면할 수 있는 도구와 사회적 환경을 갖추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현대의 지나가 이선과 매티의 관계를 알게 되었을 때, 단순히 경쟁자로서 매티를 몰아내려는 감정보다 자신이 결혼 생활에서 원하는 것 그리고 상대방의 욕망에 대해 더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될 가능성이 크다.

 

 

현대의 지나라면 아마도 결혼의 의미와 자신의 행복을 더 깊이 고민하고, 때로는 결혼이 필연적인 구속이 아니라 선택 가능한 관계임을 인지했을 것이다. 만약 그녀가 이선과의 관계가 회복 불가능하다고 느꼈다면, 그 관계를 유지하는 대신, 자신의 삶을 재정비하고 이선과 갈라서거나, 서로에게 더 나은 방향을 모색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런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지나 또한 자신의 욕망과 정체성을 재발견하고 더 건강한 선택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소설 속 지나는 자신의 불안과 의심을 무력하게 억누르고 이선을 질타하거나 매티를 내보내는 선택을 함으로써 권위를 행사하지만, 그 이면에는 무력감이 자리 잡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상황을 개선할 방법이 많지 않았고 사회적 관습에 얽매여 있었다. 반면, 현대의 지나는 자신의 욕망을 더 당당히 표현하고 관계에 대해 보다 실용적이고 독립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자율성을 가졌을 것이다. 그녀는 이선에게 정직하게 감정을 드러내고 관계에서 자신이 바라는 바를 명확히 제시하거나, 이선을 떠나는 선택으로 스스로의 삶을 다시 주도했을 것이다.

 

 

이러한 상상을 통해 우리는 어떤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까? 결국, 이선, 매티, 지나 모두 억압된 감정과 갈등 속에서 스스로를 갉아먹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상대방의 욕망에 대해 더 정직해질 수 있는 환경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인간의 욕망과 도덕적 책임이 충돌할 때, 이를 숨기고 억누르기보다, 솔직하게 직면하고, 모든 당사자가 자신을 위한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을 추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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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맷, 난 손발이 꽁꽁 묵였어.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그가 다시 말을 꺼냈다.
"이선 아저씨, 가끔 제게 편지해 주세요."
"아, 편지가 무슨 소용이 있겠어? 난 손을 뻗어 너를 만지고 싶어. 너를 위해 모든 것을 하고, 또 너를 보살피고 싶단 말이야. 네가 아플 때, 네가 외로울 때 같이 있고 싶어."
"아저씨는 제가 잘 지낼 거라는 생각 말고 다른 생각은 절대 하지 마세요."
"그럼 내가 필요 없다는 말이야? 결혼할 생각인 거지!"
"참, 이선 아저씨도!" 그녀가 소리쳤다.
"맷 어째서 네게 그런 느낌을 받는지 난 잘 모르겠다. 그보다는 네가 차라리 죽는 게 나아!" (p 143)

 

 

"일어나! 어서 일어나라니깐!" 그가 매티를 재촉했다. 하지만 매티는 계쏙해서 "왜 앞에 앉으려는 거예요?" 하고 되풀이 해 말했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네가 나를 안고 있는 걸 느끼고 싶으니까." 그는 더듬거리며 매티를 끌어 일으켰다.
매티는 그의 대답이 만족스러웠거나, 아니면 단호한 그의 목소리에 굴복한 듯 했다. 이선은 몸을 숙이고 손을 더듬어 어둠 속에서 자신보다 앞에 탔던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유리처럼 반들거리는 길을 찾아 그 가장자리 사이에 조심스럽게 썰매를 놓았다. 매티는 이선이 썰매 앞쪽에 다리를 꼬고 자리를 잡는 동안 기다렸다. 그런 다음 재빨리 그의 등뒤에 웅크려 앉아 두 팔로 그를 꼭 잡았다. 목에 닿은 그녀의 숨결에 그는 다시 한번 몸을 떨고 뛰어오르다시피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다른 선택지가 뇌리를 스쳤다. 그려의 말이 옳았다. 이 길이 서로 헤어지는 것보다 나았다. 그는 몸을 뒤로 젖히고 그녀의 입술을 자기 입술로 끌어 당겼다........
  막 두 사람이 출발하는 순간 밤색 말의 울음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귀에 익은 간절한 부름, 그리고 이 소리가 불러오는 혼란스러운 이미지들이 그를 따라 첫번째 코스까지 내려왔다. 반쯤 내려가자 가파른 내리막길이었다가 오르막이었고, 그 다음에는 또다시 현기증 나는 긴 내리막이었다. 이 길을 날개 돋은 듯 달릴 때 스탁필드가 공간의 한 점처럼 한없이 아래로 떨어지며 그들을 멀리 구름 낀 밤하늘 속으로 날아오르는 듯했따. 이때 그 큰 느릅나무가 눈앞에 불쑥 나타나 굽은 길에서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되뇌었다. "우린 할 수 있어. 난 알아, 우리가 할 수 있다는 걸..." (p. 15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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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외계인이 오직 너를 위해 2만 광년을 날아왔다면 그 외계인과 데이트를 할 수 있을까? 머릿속이 어지러워질 거야. 그런데 만약 그 외계인이 전 애인과 똑같이 생겼다고 한다면? 그리고 전 애인의 모든 단점이 싹 사라지고, 그 대신 X보다 훨씬 좋은 성격을 가졌다면 어떨까?
이쯤 되면 마음이 살짝 흔들리지 않을까? 고작 전 애인보다 더 나은, 아니, 아주 완벽한 성격을 가진 존재라니. 게다가 그 존재가 네 곁에 있기 위해 우주 끝에서부터 날아왔다는 걸 생각하면 말이야. 이 소설은 로맨틱한 판타지와 기묘한 과학 소설의 경계선에서 펼쳐지는 이상한 사랑 이야기야. 읽다보면 어느새 현실 감각은 저 멀리 떠나고 너도 모르게 그 외계인에게 마음이 끌려버릴지도 몰라.

 

 

 

세상에 좋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습관처럼 계속 만날 필요는 없어, 멈춰도 돼. 이 사람이 아니다 생각이 들면 언제든 멈추는 거야.

 

 

  한아는 친구 유리가 이렇게 말했을 때 공감했어. 그에 대한 불만이 있을 때마다 이 말을 떠올렸지. 경민에 대한 불만이 마음 한구석에 차곡차곡 쌓여온거야.. 사실 우리는 현실에서도 이런 상황 꽤 흔하지 않아? 친구와 애인이 있는데 나에겐 둘 다 좋은 사람인데도 그 둘이 뭔가 좀 안 맞는 느낌이 들 때 말이야. 친구는 친구대로 애인에 대한 불만이 많고 그런데 네 입장에선 둘 다 나쁜 사람은 아니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애매해지는 그런 상황 말이야.
한아는 가끔 혼자서 이런 상상을 하곤 했을거야. '경민이 조금만 덜 무심했으면...' 혹자는 '가끔이라도 내 말을 좀 더 들어줬으면 좋겠는데...'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에 떠오르면 그때마다 "야 그만 만나, 멈춰도 돼"라는 유리의 말이 속삭이듯 떠올랐을 거야.
아니면 유리의 입장이 되어 본적이 있어? 친구의 애인이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그냥 뭔가 그 커플을 바라보면 많이 어긋나있는 느낌이 드는 거지. 네가 만약 그 상황에 있다면 어떻게 할 거 같아? 나라면... 아마도 유리처럼 솔직하게 말할 거야. "야, 세상에 좋은 사람 정말 많아. 그냥 잠깐 멈추고 다시 생각해보는 건 어때?" 하고 말이지. 물론, 그 말이 상대방에게 쉽게 다가가지는 않겠지. 그래도 누군가는 말해줘야 하지 않을까?
한아도 그런 상황에서 고심했을 거야. 경민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해야 할지 아니면 멈추고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할지 말이야. 우리도 때론 그런 갈림길에 서서 고민하게 되잖아. 그럴 때면 결국 내 마음이 진짜 원하는 게 뭔지를 잘 들여다 볼 필요가 있어.
한아가 유리의 조언을 귀담아듣던 자신의 모습이 자꾸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걸 보면 어쩌면 그녀도 이미 답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멈추고 다시 시작하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니까.

 

 

 

하지만 실루엣만으로도 오래된 남자친구를 알아볼 수 있었고, 달려가서 안길 정도의 애정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경민을 사랑하는 것을 어쩔 수 없는 문제라고, 한아는 그 순간에도 체념하듯 생각했다. 체념이라고 부르는 애정도 있는 것이다.

 

 


하 정말... 한아는 어쩌면 헤어졌을 때 실컷 같이 욕해줬는데 나중가서 다시 사귄다고하는 스타일인 것 같아... (농담이고) 한아는 경민에 대해 불만이 많았지만 오랜만에 만난 경민의 실루엣을 보고 마음이 흔들리고 말았어. 경민이 거기 서 있는 모습만으로도 한아는 자신도 모르게 달려가 안기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되는데, 내생각엔 애정이라는 감정이 묘하게 복잡한 이유 중 하나가 이런 부분 때문인 것 같아. 분명히 경민의 단점은 그녀를 서운하게 하게 만들고 불만스럽게도 만들었지만... 모처럼 다시만난 그 순간만큼은 그런 것들이 다 사라져 버린 것 같았을거야.
그래서 한아는 스스로에게 체념할 수밖에 없었어. '아, 내가 아직도 이 사람을 사랑하고 있구나.' 하고 말이야. 하지만 그 사랑이 예전처럼 열정적이거나 행복한 느낌은 아니었어. 오히려 체념에 가까운 애정이었지. 내 생각에 한아가 말한 체념이란 결국 이 사람의 단점을 다 알면서도 그걸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거야. 그게 꼭 나쁜 건 아니지만 어쩐지 씁쓸한 기분도 들지 않아?
어쩌면 체념도 사랑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 작가는 그걸 말하고 싶었던 걸꺼야. 우리는 누군가를 오랫동안 사랑하다 보면 그 사람의 좋은 점만 보는 게 아니라 단점까지도 다 보게 되잖아? 그리고 그 단점을 받아들이기로 할 때 사랑은 새로운 차원으로 넘어가는 것 같아. 단순한 설렘이나 열정이 아니라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더 깊은 애정으로 말이야. 너무 당연한 소린가?
한아가 느낀 체념이란 그 깊은 애정의 또 다른 이름일지도 몰라. 어쩌면 경민을 향한 사랑이 한아를 힘들게 하면서도 동시에 포기할 수 없는 이유였을 거야. 이게 복잡하고 미묘한 사랑이 가진 특성의 일부 아닐까?

 

 

 

주영 - 세계를 만들 수 없는 사람도 있다.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탁월하고 독창적인 사람들이 만든 세계에 기생할 수밖에 없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똑같이 기여하는 것이 아니다. 거인이 취저어 만든 큰 흐름에 멍한 얼굴로 휩쓸리다가 길지 않은 수명을 다 보내는 게 대개의 인생이란 걸 주영은 어째선지 아주 어린 나이에 깨달았다.


경민 - 넌 같은 자리에 있는 걸 지키고 싶어하는 거잖아. 사람들이 너무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들을, 난 너처럼 저탄소 생활을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

 

 


  주영의 생각과 경민의 생각에 대해 이야기해볼게. 주영은 세상엔 '거인'들이 있고 그들이 만들어낸 큰 흐름에 많은 사람들이 그저 휩쓸려 살아간다고 생각해. 스티브잡스나 일론머스크, 소크라테스를 일컫는 이 거인들은 그들의 재능과 창의력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그 결과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만들어낸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거지. 어린 시절부터 이러한 사실을 깨달은 자신이 그 '거인'이 될 수 있을지 고민했을지도 몰라. 아마도 그 과정에서 많은 상상을 했겠지. 나도 이 거대한 흐름에 기여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저 따라가기만 하는 인생이 될까? 그러다가 결국 어쩌면 그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주는 아티스트에게 끌렸고 자신을 그 흐름에 자연스럽게 태워보고싶은 깊은 내면이 있었을지두 몰라.
주영의 생각이 너무 염세적이라고 생각돼? 근데 우리도 한 번쯤은 그런 생각을 해봤을 거야. 아니 생각보다 많이 할지도 모르지 아주 거대한 꿈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내 분야만큼은, 한국에서는 적어도...등등... 무언가 이루고 싶어하는 건 맞잖아? 우리가 하는 일에서 혹은 우리가 속한 분야에서 작은 물결이라도 만들어내고 싶다는 바람. 하지만 때로는 그 물결조차 일으키기 어려워 보이고 결국 큰 흐름에 휩쓸려 가는 듯한 느낌을 받지. 이러다 보면 나도 어느새 주영처럼 '내가 이 거대한 흐름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더라구.
이런 주영과는 반대로 경민은 한아에게 전혀 다른 메시지를 전해. 한아가 스스로를 진취적이지 않다고 생각할 때 경민은 그녀에게 이렇게 말하지. 세상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고 지나치는 것들 소중함을 잊어버린 것들을 한아가 지키고 있다는 거야. 이 말에 한아는 큰 감동을 받았을 것 같아. 우리가 흔히 무시하는 작은 것들이 사실은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걸 깨달았겠지.
경민의 이 말은 한아에게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가치를 느끼게 했을 거야. 음.. 사실 더 큰 가치라고 표현하기보단 정 반대의 가치라고 느껴서 놀랐을 것 같아. 그 '작은 자리'가 실은 얼마나 중요한지 그것이 세상에 얼마나 소중한 의미를 더하는지 말이야.
그게 뭐가 대단하냐구? 더 들어봐 내 생각에 한아는 이런 생각을 했을지도 몰라. '내가 거대한 흐름을 만드는 거인은 아닐지라도 그 흐름의 중요한 부분을 지키고 있는 거구나.' 한아가 지켜낸 작은 것들이 사실은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면서 그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에 기여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겠지. 좀 더 읽다보면 지렁이에 대해 이야기를 할 건데 그 부분을 읽어봐 그럼 더 이해가 잘 될거야~
주영의 깨달음과 경민의 말은 다른 방향에서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 같아. 우리가 세상에 어떤 식으로든 기여할 수 있는 존재일까? 그리고 그 기여는 거대한 흐름을 만드는 것만이 전부가 아닐 수도 있다는 걸 말이야. 이해해?

 

 

 

한아는 기가 막혔다. 이 정체불명의 외계인이 무슨 얘기를 하는 건가? 지금 이 순간 가장 증오스러운 얼굴을 빌려 쓰고서는? 한 번도 지구에 이런 걸 초청해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뻔뻔스러운 외계 생물 같으니.

 

 

 

  난 이 장면 진짜 웃겼어. ㅋㅋ 자, 한아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이건 정말 황당한 상황이지. 외계인이 갑자기 나타나서 그것도 자기 전 남자친구 경민의 얼굴을 쓰고선 "사랑해"라고 고백을 하는데 한아 입장에선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을 거야. 특히나 그 경민이 이미 한아에게는 이런저런 감정의 골칫덩어리였으니까 그 얼굴로 외계인이 사랑을 속삭이니 기가 막혔겠지. 외계인이 사랑을 고백하는 그 순간에도 한아는 경민의 그 익숙한 얼굴이 너무 싫었던 거야. 그래서 그 외계인 경민에게 내심 임시완이나 박보검의 얼굴로 바꾸는건 어떠냐고 제안한 건지도 몰라.
그런데 더 웃긴 건 한아가 이 외계인과 일단 만나보기로 했다는 거야. "만약 지구별을 폭파하면 파혼하겠다"는 말까지 하면서 말이지. 한아는 스스로 이 상황이 코메디 시트콤 같다고 느꼈을거야. 마치 거대한 우주 스케일의 연애 게임에 발을 들여놓은 것 같은 기분이었겠지. 거기에다가 "파혼"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도 참 재밌어. 이제 연애부터 시작인데... 사실 한아는 이 상황을 그냥 받아들이기로 한 거겠지 라고 생각했어.

 

 

 

"어찌되었건 내가 본 너는 엄청나게 일관된 사람으로, 혼자 엔트로피와 싸우고 있는 거 같았어. 파괴적인 종족으로 태어났지만 그 본능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지. 너는 비 오는 날 보도블럭에 올라온 지렁이를 조심히 화단으로 옮겨주고,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고래를 형제자매로 생각했어..."

 

 

 

외계인 경민이 한아를 관찰하면서 느낀 감정이 정말 재밌어. 누군가 보면 그냥 지나칠 이야기지만 나는 엔트로피라는 단어에 꽂혔어. 정세랑 작가는 엔트로피라는 말을 좋아하는 것 같아. 가끔씩 보았거든. 엔트로피라는 말, 뭔가 복잡하고 어려운 것 같지만 사실 알고 보면 그냥 '혼돈'이란 뜻이잖아? 외계인 경민이 보기에 한아는 이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혼자 고군분투하는 존재였던 거야. 즉 경민의 망원경에는 우주라는 거대한 무대에서 혼자서 엔트로피와 싸우고 있는 인간, 바로 한아가 보였던거지!
생각해봐, 지렁이를 조심스럽게 화단으로 옮기는 사람이라니! 이건 정말 일종의 히어로라고도 할 수 있어. 지렁이 한 마리를 구하면서 세상을 조금이나마 질서 있게(?) 만드는 사람이니까. 한아는 거대한 우주의 시선에서 보면 정말 작은 존재지만 그 작은 손길로 세상 속에서 질서를 만들어가고 있는 거야. 비 오는 날 보도블록에서 미끄러진 지렁이를 구하는 게 뭐 대단한 일이겠냐고 할 수도 있지만 외계인 경민의 눈에는 그게 엄청나게 특별한 일로 보였던 거지.
그리고 고래를 형제자매로 여기는 한아의 마음씨! 아마 경민은 그 부분에서 정말 감동받았을 거야. 인간은 파괴적인 종족인데 한아는 그런 본능과는 동 떨어져 있어. 마치 우주에서 엔트로피에 맞서는 작은 성냥 불꽃 같은 느낌이랄까? 경민이 한아를 보면서 느낀 감정은 아마 그런 것일 거야. 이 지구라는 혼돈의 행성에서 어찌 이런 따끈한 마음을 가진 존재가 살아갈 수 있는지 경민은 존경스러운 마음이 들었을 거야.
이렇게 보면 경민이 느낀 감정은 단순한 사랑이 아니라 일종의 경외심 같은 거였을지도 모르겠네. 엔트로피가 우주에 널리 퍼져 있는 혼돈이라면, 한아는 그 혼돈 속에서 작은 질서를 만들어가는 존재. 그런 한아를 보며 경민은 그냥 사랑에 빠진 게 아니라 우주를 뛰어넘는 감동을 느낀 게 아닐까 싶어. 너무 오버인가? 그래도 한아가 지렁이를 구할 때마다 고래를 형제자매로 여길 때마다 경민의 감정은 더 커져갔을 거야.
그러니까 이건 단순히 외계인이 인간에게 반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주적인 거시적 관점에서 본 한 인간의 작은 행동들이 얼마나 특별하고 의미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야. 경민에게 한아는 그냥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우주의 혼돈 속에서 빛나는 작은 별 같은 존재였던 거지. (촉촉...)

 

 

 

"하지만 놀라게 하지 않고 만나고 싶었어. 너의 공간에서 함께 있고 싶었어. 자연스럽게라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만남이니까, 자연스러움을 가공하고 싶었어."

 

 

 

한아를 만나기 위해 외계인 경민이 했던 고민과 배려는 진짜로 복잡하면서도 재미있는 이야기야. 이 외계인 경민은 처음부터 한아를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어. "자연스럽게라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만남"이라는 말이 딱 경민의 심정을 표현하는 거지. 우주에서 지구까지 오는 것도 엄청난 일이지만 더 어려운 건 그녀를 당황시키지 않고 편하게 다가가는 거였을 거야... "어떻게 해야 그녀가 나를 경계하지 않을까? 어떻게 해야 내가 이상한 스토커나 범죄자처럼 보이지 않을까?" 이런 고민을 하면서 오랜시간 우주를 뚫고 온 거야.
그래서 경민이 선택한 방법은 뭘까? 바로 그녀의 원래 남자친구 경민의 모습을 빌리는 거였어. 이건 진짜 묘수지!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서 그 사람의 가장 가까운 사람의 모습을 빌린다는 건... 어찌 보면 아주 교묘하고도 슬기로운 선택이야. 나도 본 받아야겠어. 근데 이게 또 얼마나 골치 아픈 일이겠어? 대끔 그냥 "안녕? 나는 네 남자친구의 외계인 버전이야!"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경민의 모든 걸 다 똑같이 흉내 낼 수도 없고.
실제로 디테일한 흉터를 재현해내지 못해서 한아에게 실제로 들키기도 했지. 그래서 경민은 엄청난 신경을 썼을 거야. 그가 한아의 경민이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준비를 했을까? 아마 원래 경민이 좋아하는 음식, 말투, 행동 패턴까지 전부 철저히 분석했겠지. 하지만 외계인이니까, 인간의 미묘한 감정이나 표현을 완벽하게 따라하는 건 쉽지 않았을 거야. 나는 그래서 소설속에 나오진 않았지만 "아, 이건 좀 경민스럽지 않았어!"라면서 스스로 자책하는 장면도 상상해보았어.
그리고 결정적으로 경민은 한아와의 자연스러운 만남을 위해 처음엔 자신의 외계인임을 숨기려 했어. 외계인인 걸 들키지 않으면서도 그녀에게 사랑받고 싶어 하던 그 노력, 그 진심은 정말 귀엽지 않니? "자연스럽게라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만남"을 만들기 위해, 그가 얼마나 고민했을까? 아마도 그는 지구인들의 '데이트'가 뭔지, '사랑'이 뭔지, 그리고 그 모든 걸 자연스럽게 느끼게 하는 방법이 뭔지 그 우주적으로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머리를 싸맸겠지.(원래의 인간 경민이는 제대로 자신에 대해 인수인계도 안하고 가버린 모양이야)
공교롭게도 그걸 해결하기 위해 하필이면 경민을 탐탁치 않아하는 유리에게 달려가서 프로포즈를 위한 조언을 얻기 위해 애원까지 했지만(그러나 왠지 달라진 경민의 모습에 유리는 도움을 주기로 결심했지 ㅋㅋ)
결국 경민은 한아를 만나기 위해 많은 연구와 고민을 했어. 하필이면 장인어른, 장모님께 특별한 기술로 만든 다이아반지까지 선보이다니... 어쨌든 이러한 그녀와 가까워지기 위한 노력, 그 과정에서 '사랑'이라는 것이 정말 복잡하고도 대단한 것임을 느꼈을 거야. 그리고 그 사랑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지도 몸소 깨닫게 됐겠지.

 

 

 

"산속의 서늘한 공기가 눈물을 금세 마르게 했다. 하지만 한동안은 속으로, 속으로 눈물이 흐르겠지. 내 안쪽도 그런 빛나는 돌이라면, 눈물에 다 녹아버릴 거야. 한아는 식어버린 수프 컵을 내려놓았다."

 

 

 

원래 경민이 우주여행을 떠나면서 한아에게 남긴 것은 단순한 이별이 아니라 스스로를 새로운 방향으로 탐색해나가는 여정이었어. 그러나 한아는 자신 옆에 남겨진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경민 외계인 버전을 보며 큰 혼란스러움과 동시에 그동안 경민에 대해 얼마나 의지하고 있었나, 그동안 나는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와 어떤 시간을 보내온 것인가에 대해 생각했을거야...
산속의 차가운 공기처럼, 한아의 마음도 차갑고 냉정하게 변해버린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 흐르는 눈물은 여전히 감추어져 있던 진심을 말해주는 것 같았어. 한아는 겉으론 눈물조차 나오지 않지만, 그 속마음은 엉망진창이 되어버린거야.... 얼마나 힘들었을까...? 눈물은 흘릴대로 다 흘리고 감정소모는 할대로 다해서 더이상 흘릴 눈물도, 감정도 없이 그냥 내면만이 만신창이가 된 상태 말이야... 넌 그래본적 있니?

 

 

 

"백날을 생각해봤자 답은 똑같을걸요. 어떤 특별한 사람은 행성 하나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질 때가 있어요. 그걸 이해하는 사람이 있고 못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저한텐 엄청 분명한 문제예요. 난 따라갈 거야, 내 아티스트."

 

 

 

정말 멋진 말이라고 생각해. 비슷한 걸로 난 그 말을 좋아해. 평범한 며칠을 보내는 것보다, 어떤 순간은 몇 분의 순간이 매우 소중한 순간들이 있다고. 비슷하게 상대적인 느낌을 주는 표현이지? 아티스트를 따라 우주로 따라간 주영에 대해 혹시 철없다는 생각을 해보았어? 다소 비현실적인 팬일수도 있지. 소설이니까 :) 사실 주영은 이성적인 판단보다는 감정과 직관에 기반한 행동을 하는 등장인물이야. 
누군가를 지켜만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내가 행복해 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성비가 너무 좋은 것 같지 않아? 주영은 그런 인물이야. 상상해봐. 주영의 이런 팬심은 뭐랄까.. 어떤 아이가 좋아하는 슈퍼맨이 실제로 하늘을 날고 있다고 굳게 믿는 것과 같아. 그 팬심이 어쩌면 세상의 모든 논리나 진리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더 뜨겁고 더 특별할 수도 있잖아!

 

 

 

한아는 이제야 깨닫는 것이었는데, 한아만이 경민을 여기 붙잡아두던 유일한 닻이었는지 몰랐다. 닻이라고 하기에도 너무 유약하고 가벼운 닻, 가진게 없어 줄 것도 없었던 경민은 언제나 어디로든 떠날 준비가 되어있었고 종국에는 지구를 떠나버린 거다. 한아의 사랑, 한아에 대한 사랑만으로는 그 모든 관계와 한 사람을 세계에 얽어매는 다정한 사슬들을 대신할 수 없었다. 역부족이었다. 인정할 수밖에. 닻이 없는 경민은 얼마나 빠른 속도로 나아가고 있을까?
쉬운과정은 아니었으나 거기까지 이르자, 한아는 떠나버린 예전의 경민에 대한 원망을 어느 정도 버릴 수 있었다. 나 때문이 아니었어. 날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던 거야. 다만 오로지 그 사랑만으로는 안되는 일이었던 거지. 질량과 질감이 다른 다양한 관계들을 혼자 다 대신할 수는 없었어. 역부족도 그런 역부족이 없었던 거야.

 

 

 

한아의 내면에서 이루어진 커다란 변화를 잘 보여주는 중요한 순간이야. 너도 책을 읽어보았다면 잘 알겠지만 한아는 그동안 경민이 떠난 것에 대해 많은 원망과 슬픔을 가지고 있었잖아? 그랬던 그녀는 이 장면에서 이 원망의 감정을 마침내 내려놓게 돼.
한아가 깨닫게 된 건 스스로를 '닻'이라는 메타포로 칭하면서야. 그녀는 경민을 자신의 곁에 붙잡아두려 했지만 사실 그 닻은 너무도 유약하고 가벼운 존재였어. 경민은 언제나 떠날 준비가 되어 있던 자유로운 영혼이었던걸 애써 외면하고 있던거지.
경민(구)의 마음속에는 끊임없이 새로운 곳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고 그것은 한아의 사랑만으로는 채울 수 없던거야.. 한아는 결국 경민이 떠난 이유가 자신 때문이 아니었음을, 그리고 단순히 사랑의 부족이 아니었음을 이해하게 돼.
이 깨달음은 한아에게 큰 해방감을 주었을 거야. 그녀는 경민을 사랑했지만 그 사랑만으로는 경민을 붙잡아두기에 충분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 거지. 그동안의 원망은 단순히 사랑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이제 한아는 그 집착을 놓아줄 수 있게 된 거야.
경민은 그의 자유로움 속에서 어디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고 이제 한아도 그를 놓아줄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된 거지. 이 깨달음은 한아에게 있어 큰 성숙을 의미해. 사랑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한아는 그동안의 슬픔과 원망을 넘어서서 진정한 평화를 찾게 되는 거야.
한아는 이제 경민을 자유롭게 떠나보내며, 자신도 새로운 시작을 향해 나아갈 준비를 마쳤을 거야. (근데 솔직히 마지막에 죽을때 다 되어서 돌아온건 좀 아니었던 것 같아... 모야...얘? 저기요... 다시 가주세요)

 

 

 

중요한 결정을 언제나 한아에게 맡겨주는 게 좋았다. 불안한 부분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관계인 것도, 흔한 방식으로 불행한 결혼을 하게 될까봐 걱정했던 때도 있었던 것 같은데,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그 방향으로는 걷지 않게 될 걸 알았다.

 

 

 

가벼운 마음으로 재밌게 읽은 책이었어! 이런 책을 읽을 때마다 자연스레 상상을 하게 되더라고. 그래서 퇴근 후에 이 책을 읽는 동안엔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사실 거의 하루만에 다 읽은 것 같아) 마치 다른 세상에 발을 들여놓은 것 같은 느낌? 일종의 도피처 같았달까.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한아가 인간의 몸으로 죽어갈 때 경민이 한아에게 우주를 견딜 수 있는 몸으로 바꿀 것을 제안했잖아?(사실 이게 이미 몰래 처리된 계약이었단 점이 웃프기도 했어 한아가 경민(구)에게 계약서를 잘 읽었을 것을 탓할 때 그것이 복선일 줄이야..)
그 둘은 거의 반쯤은 영생의 몸이 되었을 것이고 그들이 유리 부부와 함께 우주 여행을 떠나는 상상을 하니까 나는 '은하철도 999'가 떠올랐어. '은하철도 999'에서 철이가 메텔과 함께 기계의 몸을 얻기 위해 열차에 올라타고 각기 다른 사연이 있는 행성들을 돌며 다양한 이야기들을 경험하잖아?(사실 철이의 여정에서 각 행성들에서 겪는 사람들의 사연에는 슬픔과 애틋함이 참 많아.. 그래서 사실 은하철도999가 어린아이들의 애니메이션이 아니라고 평가하는 이들도 많지)
경민과 한아도 똑같이 그런 독특한 행성들을 방문하게 되겠지. 지구를 모방하여 어설프게 만든 행성에 들러 그곳에서 날개가 돋아난 행성 운영자와 어떤 대화를 나눌지 상상해봐. 그리고 우주의 끝까지 가서 어떤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될까? 그리고 아티스트와 주연 일행과 다시 마주쳤을까? 어쩌면 둘은 결국 연인 사이로 발전해서, 평범하게 결혼해서 잘 살다 갔을지도 몰라. 재밌지?
그런데 여기서 궁금한 점이 하나 있어. 왜 작가는 하필 막바지에 '우주를 견딜 수 있는 몸(반쯤 영생?)'이라는 포인트를 넣었을까? 난 그게 단순히 인간이 영생을 꿈꾸고 갈망하기 때문에 넣은 요소는 아니라고 생각해. 경민은 외계인이어서 오랜 수명을 지녔고 반면 한아는 인간이니까 고작해야 100년 남짓 살 수 있잖아. 수명뿐만 아니라 신체적인 차이도 많을 거고. 하지만 우주를 견딜 수 있는 몸으로 바뀐다는 건 결국 경민과 한아가 동일한 존재로 서로 닮아간다는 해피엔딩을 예고한 게 아닐까 싶어. 이런 시각으로 보니 인상적이지? 그렇다고해. 결국 그들은 서로 다른 종족(?)이었지만, 이제는 점점 닮아가고 함께 우주를 탐험하며 진정한 동반자가 되는 거잖아. 난 이런 모든 상상이 한아와 경민의 여정을 더 풍성하게 만들어줘서 이 책을 읽는 시간이 정말 행복했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어린 왕자가 말을 이었다.
"만약 누군가 수백만 개, 수천만 개 별 중에 하나밖에 없는 꽃을 사랑하고 있다면, 바로 별들만 쳐다봐도 행복할 거야. 속으로 '저기 어딘가에도 내 꽃이 있겠지'하고 생각하고 있거든. 그렇지만 양이 그 꽃을 먹어 봐. 이건 그에게는, 별들이 모두 갑자기 빛을 잃을 거나 마찬가지야! 그래, 이게 중대한 일이 아니란 말이야?"
그는 말을 잇지 못하고 갑자기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해는 이미 진 뒤였다.
-어린왕자 中-

 

 

 

어린왕자에게 그 하나뿐인 꽃은 우주 어디에도 없는 소중한 존재였지.
외계인 경민이 고향에서 지구를 바라볼 때, 아마도 한아는 그에게 그런 존재였을 거야.
장미가 없다면 그 많은 별들이 어린왕자에겐 의미가 없던 것처럼 아마 그런 마음으로 한아를 생각했어. 수많은 별들 속에서 단 하나의 꽃이 가진 특별함처럼 경민에게 한아는 우주 어디에도 없는 소중한 존재였던거야

 

 

 

-끝-









비닐봉지들을 모아 꽃모양으로 접어 정리하다가, 문득 생각했다. 역시 보고 싶네, 보고 싶잖아.
그렇지만 뭔가 달랐다. 원래의 경민을 보냈을 때의 그런 몸이 간질간질하고 신경이 쏠리고 불안해지는 보고 싶음이 아니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심해를 헤매고 있어도 이어져 있는 보고 싶음이었다.
기다리는게 즐거울 수도 있구나. 이건 또 새로운데? 한아는 계단에 앉아 생각했다.

 

 

 

안락하고 평화롭지만, 고민 없이 출아법으로 끝없이 자기 분열하는 것에 이제 모두 질린거야. 이주율이 순식간에 늘 거야.

 

 

 

한아는 문득 기분이 묘해졌다. 경민의 고향 사람들이 사랑하는, 혹은 사랑하게 될 우주 곳곳의 존재들을 생각했다. 집단 무의식 때문에 경민은 그 사랑도 희미하게나마 감지하고 함께 느끼고 또 꿈꾸고 있을 텐데, 질투가 났다. 사랑을 독점하고 싶은 질투인지, 아니면 그런 수많은 사랑의 지류들을 함께 느끼고 싶은 질투인지 분명치 않았다.

 

 

 

아무것도 없으니까. 저 좌표에는 예전에 기회와 가능성, 평행 우주를 거래하는 별이 있었어. 하지만 내부로 폭발해서 사라지고 없지. 말이 좋아 가능성이지, 가능성이야말로 너무 압축된 개념이라 잘못 다루면 위험해

 

 

 

멋진 날개지? 근데 돋을 때는 엄청 아팠던 모양이야. 최근에 저 사람이 자서전을 냈는데, 거대한 어금니가 어깨에서 돋는 것 만큼 아팠대. 전혀 필요하지 않았던 고통을 겪고나서 더이상 자신을 만든 지구 애호가에게 복종하길 거부하고 체제 전복을 일으켰어. 지금은 저 행성의 운영자야.

 

 

 

커다란 오렌지 사탕 같은 태양이 지는 시간에 입안에 남은 소금기에 끌려 데킬라를 희석시킨 칵테일을 마시러 갔다. 밤늦게 돌아가며 키스하면, 연인의 입술 사이에 우주가 있었다.
돌아오고도 한참 동안, 매일매일의 일상 속에서 꺼내볼 수 있는 풍경이 있다는 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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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생에게 이 책을 선물했다. 다 읽은 뒤에는 엄마에게도 읽어보라고 권할 생각이다.(물어보니 책을 선물한지는 꽤 되었는데 아직 반도 못읽었다고 한다.....) 밝은 밤은 어떤 호수공원에서 밀려오는 물안개같은 희끄무레하면서도 촉촉한 아픔이 서서히 내게도 다가오는 책이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여러 세대에 걸쳐져 내려오는 아픔이 마음 깊이 스며드는 이야기였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마치 세월의 흐름 속에서 잔잔히 그리고 서서히 자라나는 마리골드를 지켜보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세대의 굴레 속에서 상처받고 다시 일어서는 할머니와 엄마, 지연의 이야기는 내 마음에 정말정말 오래도록 머물렀고 긴 시간 끝에 고심하며 글을 써본다.

 

 

마음이라는 것이 꺼내 볼 수 있는 몸속 장기라면, 가끔 가슴에 손을 넣어 꺼내서 따듯한 물로 씻어주고 싶었다. 깨끗하게 씻어서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해가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널어놓고 싶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마음이 없는 사람으로 살고, 마음이 햇볕에 잘 마르면 부드럽고 좋은 향기가 나는 마음을 다시 감스에 넣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겠지. 가끔은 그런 상상을 하곤 했다.

 

 

  엄마는 평범하게 사는 것이 제일 좋은 삶이라고 말했었다. 아빠와의 결혼으로 자신도 평범한 가족을 꾸리게 되어서 좋았다고 이야기했었다. 그런 말을 습관적으로 하던 엄마를 예전에는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머릿속에 동그라미 하나를 그리고 그 안에 평범일하는 단어를 적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삶, 두드러지지 않은 삶, 눈에 띄지 않는 삶, 그래서 어떤 이야깃거리도 되지 않고, 평가나 단죄를 받지 않고 따돌림을 당하지 않아도 되는 삶, 그 동그라미가 아무리 좁고 괴롭더라도 그곳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 엄마의 믿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잠든 엄마의 숨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지연의 엄마 미선은 이혼 후 홀로서기를 결심한 딸을 보며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미선에게는 지연이 평범하고 안정된 삶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그 바람 뒤에는 늘 불안과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녀는 사회가 규정한 틀, 즉 '좋은 아내', '착한 딸', '헌신적인 어머니'라는 프레임 안에서 벗어나는 삶이 얼마나 험난할지 잘 알고 있었다. 그 틀을 벗어나면 맞닥뜨리게 될 세상의 차가운 시선과 냉대가 딸을 향해 얼마나 잔혹하게 다가올지를 미선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미선은 딸을 미워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나도 사랑했기에, 그 사랑이 두려움으로 바뀌어버린 것이었다. 자신의 삶 속에서 수없이 마주했던 벽과 장애물들, 그리고 그 모든 것들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선택했던 침묵과 포기. 그것이 때로는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다는 것을 몸으로 체득했기에, 미선은 딸이 자신과 같은 고통을 겪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딸이 그 틀 안에서 안전하게 머물러 주기를 바랐다. 그것이야말로 세상에서 상처받지 않는 길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믿음은 딸의 자유와 행복을 억압하는 족쇄가 되어버렸다. 미선은 딸이 자기 길을 가겠다고 선언할 때마다 마음속으로 혼란과 갈등을 겪었다. 왜냐하면 딸이 맞이할 세상은 그녀가 알고 있는 세상과는 너무도 달랐고, 그 다름이 미선을 더더욱 불안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딸을 위해서라면 차라리 자신의 방식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딸을 그 틀 안에 가둬두는 것이 오히려 그녀를 보호하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갈등 속에서 헤맸다.

결국, 미선은 자신이 딸을 보호하고 있다고 믿었지만, 그 보호가 오히려 딸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점점 더 깊은 괴리감 속으로 빠져들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딸을 감싸려 했던 그녀의 마음은, 아이러니하게도 딸을 이해하지 못하는 벽이 되어버렸다.

 

 

그때의 나는 사람이 싫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간절히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서울에서처럼 친구와 한참 이야기하고 싶기도 했고, 손을 뻗으면 닿을 곳에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이 하나만 있어도 좋겠다는 욕심이 들기도 했다. 나에게 결혼은 그런 것이었지만, 더이상 그런 관계가 가능하리라는 믿음이 들지 않았다.

 

 

영옥은 딸 미선과 오랫동안 소원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지 못한 채, 먼발치에서 서로를 지켜보며 살았다. 그들은 서로의 삶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래서 대화를 나누는 일조차 드물었다. 오랜 세월 동안 쌓인 오해와 침묵은 두 사람 사이에 깊은 골을 남겼다. 그 골이 너무 깊어서 이제는 그저 서로를 향한 단절된 시선만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손녀 지연과의 만남은 서로에게 뜻밖의 선물 같은 순간이었다. 희령에서 우연히 마주친 지연과의 관계는 그녀에게 새로운 희망이자 위로다. 지연은 영옥의 눈에 자신이 살아온 험난한 길을 다시금 떠오르게 하는 듯했다. 영옥이 그녀가 손녀임을 깨달았음에도 계속 존댓말을 사용한다. 나는 이러한 부분에서 영옥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영옥은 손녀를 판단하거나 가르치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조용히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지연이 원하는 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었다. 영옥은 자신이 딸 미선에게서 놓쳐버린 것들을 지연에게도 반복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영옥은 자신이 살아온 세월의 무게를 잘 알고 있었고 그 무게를 손녀에게 지우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지연이 자신을 통해 어떤 부담감이나 압박감을 느끼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영옥은 늘 손녀 지연에게 조심스러웠다. 아니 오히려 손녀와의 관계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지연이 자신의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저 자신의 삶을 이야기해주며, 그녀가 필요할 때 곁에 있어주겠다는 마음으로 다가갔다.

우리는 종종 `어르신으로 가르침을 얻는다, 지혜를 받는다`라는 표현을 듣곤 한다. 그러나 영옥은 지연에게 가르침보다는 공감을 주고자 했다. 지연이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과정을 존중하며, 그녀가 스스로 삶의 방향을 정할 수 있도록 그저 곁에서 묵묵히 지켜보았다. 그들은 서로에게 많은 말을 나누지는 않았지만, 그 침묵 속에는 깊은 이해와 따스함이 깃들어 있었다. 어쩌면 영옥에게 지연은 단순한 손녀 이상의 존재였고, 지연에게도 영옥은 잃어버린 한 조각을 찾아준 듯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서로를 통해 위로를 받았고, 세대와 경험을 넘어서는 애틋함을 이루어냈다.

 

 

그렇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사람이 사람을 기억하는 일, 이 세상에 머물다 사라진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기억되고 싶을까. 나 자신에게 물어보면 언제나 답은 기억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내가 기원하든 그러지 않든 그것이 인간의 최종 결말이기도 했다. 지구가 수명을 다하고, 그보다 더 긴 시간이 지나 엔트로피가 최대가 되는 순간이 오면 시간마저도 사라지게 된다. 그때 인간은 그들이 잠시 우주에 머물렀다는 사실조차 기억되지 못하는 종족이 된다. 우주는 그들을 기억할 수 있는 마음이 없는 곳이 된다. 그것이 우리의 최종 결말이다.

 

 

새비 아저씨와 새비 아주머니는 단순한 부부 이상의 관계였다. 그들은 서로를 진정한 친구이자 동반자로 여겼다. 새비 아저씨는 누구보다도 인간다운 사람이었다. 그는 남을 지배하려 하거나 권위를 내세우는 데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당시 사회는 남성들이 가정 내에서 주도권을 쥐고, 아내를 통제함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세우는 것이 당연시되던 시대였다. 하지만 새비 아저씨는 그러한 사회적 관습에 반기를 들었다. 그에게 있어서 진정한 위신이란 남을 억누르거나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평등한 관계 속에서 서로를 존중하는 데 있다고 믿었다. 그것이 그의 고집이자 삶의 원칙이었다.

나는 이런 새비 아저씨의 모습에서 깊은 존경심을 느꼈다. 그가 보여준 태도는 쉽지 않은 선택이었음을 안다. 시대의 흐름에 거슬러 오르는 일은 늘 외롭고도 고된 일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 시대였다면 미친놈 소리를 들었으리라..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걸어갈 때, 혼자만 다른 길을 걷겠다는 결심은 그 자체로 용기가 필요하다는 걸 나는 안다. 나는 새비 아저씨처럼 아닌 것을 보고도 모른척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분명하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고 그 마음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내 스스로가 옳다고 믿는 길을 묵묵히 걸어갈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새비 아저씨.. 그와는 달리 삼천의 남편은 그 시대의 평범한 남성으로 살아갔다. (그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끝까지 읽어보라) 그가 처음에는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을 품고 삼천에게 다가갔었던 사실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더 비극적인 인물로 만든다. 순수한 마음으로 시작된 그의 사랑은 결국 세상의 압박과 기대 속에서 변질되고 말았다. 그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과 사회적 요구를 이겨내지 못하고 그 무게에 짓눌려버렸다. 그렇게 그는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을 내뱉고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말았다.

삼천의 남편이 겪었던 사회로부터의 가스라이팅은 단지 개인의 나약함이 아니라 당시의 사회적 구조와 깊이 맞닿아 있다. 그 역시 시대의 희생자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사랑을 지키지 못하고 결국 상처를 주고야 말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그는 평범한 사람일지언정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결코 좋은 남편은 아니었다. 그저 시대의 흐름에 떠밀려 자신을 잃어버린 또 하나의 비극적 인물로 남았다. 그의 끝자락은 정말 우연한 사고였을까? 아니면 그가 선택한 일인 것일까... 나는 후자일 것이라고 믿는다. 역설적인 본인의 모습을 부정한...

 

 

그날 밤 꿈에 전남편이 나왔다. 꿈속에서 나는 그가 내게 준 상처도 잊고,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된 것에 그저 행복해했다. 그의 큰 손을 잡아보기도 하고 그를 안아보기도 했다. 편안하고 좋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잠에서 깨었을 때 어떻게 그런 꿈을 꿀 수 있었을까 생각했다. 아직도 내 마음의 일부는 그와 함께했던 시간을 그리워하고 있구나. 오로지 그만이 내게 줄 수 있었던 친밀함을 갈구하고 있구나. 당연한 일이라고 되뇌면서 나는 조금 울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새비 아주머니의 입장이었더라도, 나는 남편을 위해 그만큼 울었을 것이고 남편을 다시 만나서도 그만큼 행복했을 것이다. 전남편이 저버린 것은 그런 내 사랑이었다. 내가 잃은 것은 기만을 버리지 못한 인간이었지만, 그가 잃은 건 그런 사랑이었다. 누가 더 많은 것을 잃었는지 경쟁하고 싶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 경쟁에서 나는 패자가 아니었다.

 

 

책을 읽어본 독자라면,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한 부분이 있지 않은가? 삼천의 가족이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새비 아주머니가 일러준 대구의 주소로 향하던 그 순간, 소설 속에서 그녀의 마음이 표현되진 않았지만 아마도 한없이 무거웠을 것이 분명하다. 나는 왜 이 부분이 소설속에서 자세히 묘사가 안되었는지 잠시 고민했다. 어쩌면 독자들에게 그 역설적인 상황에 대해 이해하고, 자연스럽게 느끼도록 유도한 작가의 의도인 걸까? 나의 상상력을 동원해 삼천이 당시 어떤 마음을 느꼈을지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줄거리를 조금 설명해 보자면, 과거에 반대로 새비 아주머니의 가족이 사상 의심자로 몰려 위기에 처해 절박하게 도움을 청했을 때 삼천은 며칠만 묻게해달라는 새비 아주머니의 간곡한 요청을 거절했다. 당시의 삼천은 그 '사상'이라는 것이 무거운 짐, 화살이 자신과 가족에게 돌아올까 두려웠고, 그 두려움은 그녀를 냉정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제 전쟁의 포화 속에서 자신이 그토록 외면했던 사람에게 도움 청하기 위해 길을 떠나야 하는 상황에 놓이자 삼천의 마음속에는 죄책감과 후회가 뒤섞였을 것이다.

그 피난길을 걷는 동안 삼천은 자신이 했던 선택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했을 것이다. 과거에 느꼈던 두려움이 이제는 자신을 부끄럽게 만들었고, 그때의 거절이 얼마나 차갑고 잔인했는지 깨달았을 것이다. 삼천은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으로 행동했는지, 그리고 그 선택이 새비 아주머니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었을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피난길에서 느꼈을 후회와 불안은 아마도 마른 땅에 내렸던 재섞인 빗물처럼 그녀의 마음속 깊숙이 스며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 새비 아주머니의 대구로 향하는 발걸음에는 은근한 희망이 섞여 있었을지도 모른다.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 비록 늦었지만 진정으로 고마움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작은 희망 말이다. 그 희망은 아마도 삼천이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도록 힘을 주었을 것이다.

이 모든 감정들이 뒤섞인 채로 삼천은 피난길을 걸었다. 그 길은 단순히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자신의 과거와 대면하고 잘못된 선택을 바로잡으려는 마음의 여정이다. 삼천은 그때 아마도 인생이란 것이 얼마나 아이러니하고 예측 불가능한지 그리고 결국에는 우리가 서로에게 진 빚을 어떻게든 갚아야 하는 순간이 온다는 것을 절감했을 것이다. 그 여정은 삼천에게 상처이자 치유의 길이었으며 자신의 두려움과 마주하고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용기를 배우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사필귀정이라 했던가.. 새비아주머니와 재회한 뒤 모든 것은 옳게 되돌아갔다.

 

 

'넌 사랑받기 충분한 사람이야.' 어느 날 말을 이을 수 없어 눈물만 흘리던 내게 지우가 그렇게 말했다. '앞으로는 내가 널 더 많이 사랑할게. 이제 사랑받는 기분이 뭔지도 느끼며 살아.' 아무 이유 없이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듯이, 어떤 이유 없이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나는 지우를 보며 알았다.

 

 

증조모가 집을 비울 때면 봄이는 동구 밖까지 가서 기다리다가 돌아오는 증조모를 향해 달려갔다. '너는 내가 왜 좋아?' 의아한 표정으로 봄이의 등을 쓰다듬는 증조모의 얼굴에는 늘 작은 서글픔이 서렸다. 자기에게 달라붙는 봄이에게 그러지 말라고 투정하듯 말하는 증조모의 목소리는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누군가에게 그런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 증조모에게는 평범한 읾이 아니었을 것이다.

 

 

증조모 삼천에게 봄이는 단순한 반려동물 이상의 존재였다. 신분적 차별 속에서 오랫동안 상처받아온 증조모는 자신을 온전히 이해해주고, 아무런 조건 없이 따르는 강아지 봄이를 보며 작은 위로를 얻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감추어야 했던 연약함과 슬픔을 봄이 앞에서는 드러낼 수 있었다. 봄이가 삼천에게 달려와 안길 때마다 증조모의 마음속 깊이 숨겨둔 고독과 아픔은 조금씩 사라지는 듯했다. 그러나 그 순간들 속에서도 삼천은 늘 자신의 자존감이 낮아져 있는 것을 느꼈고, 자신을 아무런 이유 없이 좋아하는 봄이가 그저 고맙고도 안쓰러웠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상황이 급변하면서 삼천은 더 이상 봄이를 곁에 둘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마당 밖까지 쫓아오는 봄이를 보며 이제는 이 작은 생명이라도 자유롭게 놓아주어야 한다는 결심을 했다. 그 결심에는 이 전쟁 속에서 봄이가 무사히 살아남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봄이에게 "이제 자유롭게 살으라"고 말할 때 삼천의 목소리는 비록 단호했을지 모르지만 그 속에는 애틋함과 슬픔이 묻어났다. 봄이가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맞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마음 한편에는 이 작고 충성스러운 생명이 자신에게 남아주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바람이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그 바람을 억누르며 봄이를 놓아주려 했지만, 그 마음속에는 깊은 상실감과 외로움이 자리 잡았다.

봄이 역시 증조모의 말을 이해했을 것이다. 그동안 삼천이와 함께한 시간 동안, 그녀의 따뜻한 목소리와 부드러운 손길을 통해 느낀 사랑을 봄이는 잊지 않았다. 삼천이가 자신의 곁을 떠나려는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었터였다. 다만 봄이는 그녀의 마음속 깊은 슬픔을 어렴풋이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봄이는 눈치껏 돌아섰다. 자신이 더 이상 삼천이를 따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돌아서려는 그 순간에도 삼천이를 지켜주고 싶다는 충성심은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었다.

봄이는 거리에서 멀어지며 혼자서 자신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마음속 깊은 곳에는 여전히 삼천이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이 남아 있었다. 어쩌면 봄이는 자신이 떠나면 삼천이가 더 안전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삼천이를 위해 떠나는 선택을 했을 것이다. 돌아서며 느낀 그 상실감은 삼천이를 향한 마지막 충성이자,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더 행복한 시간을 선물하고 싶었던 봄이의 작은 희생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둥글고 푸른 배를 타고 컴컴한 바다를 떠돌다 대부분 백 년도 되지 않아 떠나야 한다. 그래서 어디로 가나. 나는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우주의 나이에 비한다면, 아니, 그보다 훨씬 짧은 지구의 나이에 비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삶은 너무도 찰나가 아닐까. 찰나에 불과한 삶이 왜 때로는 이렇게 길고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참나무로, 기러기로 태어날 수도 있었을 텐데, 어째서 인간이었던 걸까.

  원자폭탄으로 그 많은 사람을 찢어 죽이고자 한 마음과 그 마음을 실행으로 옮긴 힘은 모두 인간에게서 나왔다. 나는 그들과 같은 인간이다. 별의 먼지로 만들어진 인간이 밎어내는 고통에 대해, 별의 먼지가 어떻게 배열되었기에 인간 존재가 되었는지에 대해 가만히 생각했다. 언젠가 별이었을, 그리고 언젠가는 초신성의 파편이었을 나의 몸을 만져보면서, 모든 것이 새삼스러웠다.

 

 

고통 안에서 시간은 직선으로 흐르지 않았다. 나는 자꾸만 뒷걸음질쳤고 익숙한 구덩이로 굴러떨어졌다. 다시는 회복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조바심 서린 두려움이 나를 장악했다. 나는 왜 내가 원하는만큼 강해질 수가 없을까. 이렇게 노력하는데도 왜 나아지지 않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오래 울던 밤에 나는 나의 약함을, 나의 작음을 직시했다.

  인내심 강한 성격이 내 장점이라고 생각했었다. 인내심 덕분에 내 능력보다도 더 많이 성취할 수 있었으니까. 왜 내 한계를 넘어서면서까지 인내하려고 했을까. 나의 존재를 증명해야 한다고 새각해서 였을까. 언제부터였을까. 삶이 누려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 수행해야 할 일 더미처럼 느껴진 것은. 삶이 천장까지 쌓인 어렵고 재미없는 문제집을 하나하나 풀어나가고. 오답 노트를 만드록, 시험을 치고, 점수를 받고, 다음 단계로 가는 서바이벌 게임으로 느껴진 것은. 나는 내 존재를 증명하지 않고 사는 법을 몰랐다. 어떤 성취로 증명되지 않는 나는 무가치한 쓰레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 믿음은 나를 절망하게 했고 그래서 과도하게 노력하게 만들었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의미와 가치가 있는 사람들은 자기 존재를 증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애초에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안정을 추구했던 그 시간동안 나는 성장하지 못했다. 독에 갇힌 나무처럼 가지를 마음껏 뻗어나갈 수가 없었다. 고립되었다. .................(중략)................ 당신은 어째서 내 고통을 보지 않지? .................(중략)................ 체념했다. 그가 집에 없을 때 울다가도 그의 전화가 걸려오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목소리가 왜...?' 하고 그가 물으면 '응, 자다가 일어나서'라고 거짓말을 했다. 나는 누구에게 거짓말을 했나. 나에게, 내 인생에게.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알고 싶지 않아서, 느끼고 싶지 않아서. 어둠은 거기에 있었다.

 

 

나는 내게 어깨를 빌려준 이름 모를 여자들을 떠올렸다. 그녀들에게도 어깨를 빌려준 여자들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이렇게 정신을 놓고 자나, 조금이라도 편하게 자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마음. 별것 아닌 듯한 그 마음이 때로는 사람을 살게 한다는 생각을 했다. 어깨에 기대는 사람도, 어깨를 빌려주는 사람도. 구름 사이로 햇빛이 한 자락 내려오득이 내게도 그런 마음이 내려왔다는 생각을 했고 안도했다.

 

 

지연의 고뇌를 나는 여러차례 읽어보았다. 그녀가 생각한 인간의 삶이란 우주의 광활한 시간 속에서 정말로 찰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직시할 때 우리는 존재의 의미를 더 절실하게 찾고 싶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짧고도 고통스러운 순간을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일까? 왜 하필이면 이토록 복잡하고 모순된 인간으로 태어난 걸까? 이 질문들은 나 역시 종종 스스로에게 던졌었다.

그래서 나 또한 참나무나 기러기로 태어날 수도 있었던 가능성을 떠올리곤 했다. 나는 그녀가 느꼈을 깊은 회의와 아쉬움을 공감할 수 있었다. 만약 단순히 자연의 일부로서 살아가는 존재였다면 삶은 지금보다 더 평화롭고 덜 복잡했을지도 몰랐겠지. 그러나 다행인건지 불행인 것인지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났다. 인간은 스스로를 고통에 빠뜨리기도 하고, 그 고통을 다른 이들에게 가하기도 하는 존재다. 지연이 별의 먼지로 만들어진 자신의 몸을 만지며 느낀 감정은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에서 비롯된 것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렇기에 이 짧고도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 나만의 사랑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랑이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를 의미 있게 만드는 힘이라고 믿는다. 우주의 먼지가 어떤 배열을 통해 인간이라는 존재를 만들어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배열 속에서 사랑이란 아직 나로서는 다 이해하기 힘든 어떤 에너지가 내포되어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것이 사람이든 어떤 일이든 어떤 꿈이든 삶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사랑을 찾고 싶다. 지연이 느꼈던 고독과 회의 속에서도 사랑이야말로 그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다고 결론 지었다. 찰나 같은 인생 속에서 사랑은 아마도 가장 큰 의미를 가진 빛일 것이다. 그 빛이야말로 우리가 우주의 어둠 속에서 빛나는 이유이며 존재의 목적일지도 모른다. 지연은 어쩌면 그런 사람이 필요했으리라...고 나는 공감했다. 어쨌거나, 그런 짝을 찾는 일은 결국엔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요소가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찰나의 순간을 더 깊고 의미 있게 살아가고 싶다.

지연이 이혼 후에 느꼈던 감정과 생각들, 그것들은 아마 자신에 대한 깊은 회의와 절망에서 비롯된 것일 터다. 그녀가 느꼈던 고통은 단순히 관계의 끝에서 오는 아픔을 넘어 자신의 존재에 대한 근본적 의문으로 이어진다. 왜 나는 원하는 만큼 강해질 수 없는 걸까? 왜 이렇게 노력하는데도 나아지지 않는 걸까? 지연의 이 질문들은 내게도 낯설지 않다. 삶의 여정에서 우리는 모두 때때로 이러한 의문과 맞닥뜨리게 된다.

지연이 고통 속에서 시간을 직선적으로 느끼지 못하고 과거의 익숙한 구덩이로 계속해서 굴러떨어지는 느낌은 많은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경험이다. 그 구덩이는 아마도 실패와 좌절 그리고 자신에 대한 실망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것이다. 지연이 자신의 약함과 작음을 직시할 때 그녀는 아마도 그동안 억누르며 외면하려 했던 자신의 진짜 모습을 마주한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종종 자신이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인정하기 어려워하지만, 그 순간이야말로 진정한 자아와 마주하는 순간일 수 있다.

그녀가 자신의 장점으로 여겼던 인내심은 때로는 자신을 과도하게 몰아붙이게 만들었고 결국에는 지쳐버린 그녀를 만들어냈다. 삶이 즐기는 것이 아니라 마치 수행해야 할 끝없는 일들로 가득 찬 무거운 짐처럼 느껴졌을 때 지연은 자신을 더 이상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삶이 어떤 것일지에 대해 상상했을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있어서 존재의 증명은 항상 성취를 통해 이루어졌고 그 성취가 없을 때 자신의 가치는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지연의 이 생각을 읽으며 나는 그녀가 겪은 혼란과 절망을 전부는 아니더라도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는 모두 사회적 기준이나 성취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는 강박에 사로잡히곤 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우리는 종종 자신의 본질적인 가치를 잊어버린다. 성취 없이도 그저 존재 자체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존재임을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지연이 느꼈던 고통은 결국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 속에서 나는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게 된다. 나도 지연처럼 성취를 통해서만 나의 가치를 증명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내가 이룬 것들이 사라질 때 나는 여전히 가치 있는 존재로 남을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쉽지 않다. 그러나 지연의 이야기는 나에게 진정한 가치란 성취나 외부의 인정을 넘어서는 것임을 깨닫게 해주었다. 나의 존재가 성취로 증명되지 않아도 나 자신을 사랑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가지는 것이야말로 정 반대로 살아가는 지긋지긋하고 답답한 요즘 사회로부터의 완전 독립할 수 있는 행복을 가질 수 있는 삶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나는 이제 더 이상 나를 증명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대신 나만의 사랑을 찾고 나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삶을 살고 싶다. 그 길이 때로는 고통스럽고 험난할지라도, 그 속에서 진정한 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전남편에게는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는 시간은 흘러가는 강물이 아니라 얼어붙은 강물이라는 말을 즐겨 했다. 시간은 환상일 뿐이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인간의 자유의지나 선택이라는 것 또한 커다란 환상일지 모른다고 그는 말했다. 그런 식의 생각에는 분명 이점이 있었다. 그런 믿음은 무엇보다도 인간을 후회의 덫에서 구원해준다. 과거의 내가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현재의 고통이 없었으리라는 사고의 공회전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힘을 준다. 그는 오랜 시간 동안 나를 속이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을까. 이건 일어날 일이었으니 어쩔 수 없다고.

 

 

전남편이 믿었던 시간의 관점(시간은 흐르는 강물이 아니라 얼어붙은 강물 같고, 과거와 현재, 미래가 동시에 존재하며, 자유의지와 선택도 환상일 뿐이라는 생각)은 표면적으로는 매력적일 수 있지만 그의 외도에는 그 믿음이 얼마나 기만적일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일종의 마음의 안식처처럼 꾸며놓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믿음은 인간의 후회와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을 달래주며, '이미 정해진 일'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그 어두운 이면에는 나는 그의 외도가 어떻게 그 믿음을 기만적으로 활용했는지를 느꼈다. 과거와 현재, 미래가 동시에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나려 했던 것이 아닐까? '이미 일어난 일'이라는 말은 그저 그가 자신의 행동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회피하는 수단이었을지도...

어쨌든 이러한 시간관념은 사랑의 본질과 인간의 진정성을 간과하게 만든다. 외도는 단순히 시간의 얼어붙은 강물처럼 거짓된 위안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전남편은 자신의 불충실을 정당화하고 지연의 아픔을 마치 자연의 일부인 것처럼 치부했을지도 모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사랑과 신뢰는 단순히 시간이 만들어내는 허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시간의 얼어붙은 강물처럼 모든 것이 이미 정해져 있다고 믿는 것... 그 말을 한다고해서 실질적으로 인간의 감정적 고통을 없애주지 않는다. 오히려 깊은 상처와 갈등을 무시하는 행동 아닐까? 우리는 후회와 아픔 속에서도 스스로를 직시하고, 사랑과 신뢰를 통해 상처를 치유하며 성장해 나가야 한다. 내 생각에 어쨌거나 우리는 시간을 거스를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고 그 순리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타임머신이 나오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진정한 의미의 시간과 사랑의 상관관계를 굳이 말로써 표현해보자면.. 우리가 스스로의 선택과 책임을 통해 만들어가는 과정 속에서 발견될 수 있지 않을까? 말이 길어졌는데, 어쨌거나 그의 믿음은 그저 시간의 한 측면을 묘사할 뿐 지연의 진심과 상처를 담아내지 못한다. 못하는 것이 아니라 회피라 해야하는게 옳겠다. 그는 결국 그 믿음을 통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지연에게 남긴 상처를 덮으려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사실 전남편이 근거로 내세운 '이미 정해져 있다'라는 가설, 과거, 현재, 미래의 동시성에 대한 이야기는 '양자역학'과도 관련이 있다. 양자역학을 통해 우리는 어쩌면 실제 세상이 아닌 시뮬레이션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지에 대해 논하곤 한다. 개발자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 세상은 어쩌면 흘러가는 세상사와 개개인에 대한 사연들이 이미 프로그래밍 되어있고 짜여진 구성대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과 비슷하다. 이러한 부분에서 전남편은 양자역학을 믿고싶었고, 내가 어쩔 수 없는 영역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양자역학은 시간의 상대성을 부정하기 때문에 아인슈타인과 대립하였다. 그러나, 이중슬릿 관찰자 실험을 통해 입증된 양자역학에 대한 논쟁은 아직도 끊이지 않는 과학의 영역 한 부분이다. 나는 사실 이 양자역학 이야기를 꽤나 좋아한다. 그래서 전남편의 생각에 동의하느냐? 그것은 아니다. 전남편의 생각은 앞서 설명했듯 인간의 진정성과 사랑을 부정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벵하민 라바루트의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라는 책에서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입자는 여러 방식으로 공간을 통과할 수 있지만 그중에서 하나만 고를 수 있다. 어떻게? 순전히 우연으로, 하이젠베르크가 보기에 어떤 아원자 현상이든 절대적으로 확실하게 기술하는 것은 이제 불가능했다. 이전에는 모든 결과에 대해 원인이 있었지만 이젠 확률의 스펙트럼이 존재할 뿐이었다. 만물의 가장 깊은 바닥에서 물리학이 발견한 것은 슈뢰딩거와 아인슈타인이 꿈꾸었듯 세계의 끈을 당기는 합리적 신이 지배하는 단단하고 확고한 실재가 아니라 우연을 가지고 노는 천수여신의 변덕에서 탄생한 놀랍고도 희한한 세상이다.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 中..-

 

 

내가 양자역학을 좋아하는 이유는 '우연' 때문이다.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우연성은 자연의 불확실성을 드러내며 모든 사건이 반드시 원인과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 관점에서 '사랑'이라는 감정도 어떤 일정한 법칙에 따라 예측되기보다는 불확실하고 예측할 수 없는 요소들로 인해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사랑은 때로는 우연히 찾아오는 만남에서 시작되고, 복잡한 감정의 얽힘 속에서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양자역학이 강조하는 우연성은 사랑의 본질을 더 깊이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며 그 속에서 일어나는 인과관계의 복잡성과 아름다움을 재발견하게 해준다. 이러한 면에서 나는 작품 속 전남편과 다르게 양자역학을 반대로 해석하고 있다.

 

 

나는 가만히 앉아서 그날 아침 의사가 내게 귀리의 죽음을 알렸을 때 느낀 감정이 슬픔만은 아니었음을 기억했다. 나는 안도했다. 나의 일부는 안도했다. 귀리의 고통이 이제 사라졌다는 사실에, 고통을 받는 그애의 모습을 보고 겪어야 했을 나의 괴로움이 끝났다는 사실에. 그 이기적인 마음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가 버스에서 내리고나서도 나는 계속 말한다. 알아, 알아. 결국 다 떠난다는 걸...... 깨어나고 싶어. 나는 벨을 누르지만 버스는 정차하지 않는다. 소리질러 기사를 부르고, 주먹으로 아무리 출입문을 두드려도 버스는 서지 않는다. 아무도 나를 바라보지 않는다.
  등뒤에서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그것이 남편이 나를 떠남면서 문을 닫는 소리라는 것을 안다. 너만은..... 너만은 나를 떠나지 않을 줄 알았어. 나는 바닥에 앉아서 몸을 떨며 운다.
  지연아.
  그때 내게 앞니 두 개가 빠진  여덟 살의 언니가 다가와서 등을 두드린다.
  지연아, 지연아.
  언니가 나를 부를수록 세상이 환해진다.
  태양이 커지고 있었나봐.
  나는 좀전까지 울던 일을 잊고 언니에게 말한다.
  너무 밝아서 눈이 부셔, 어떻게 이렇게 밝을 수 있어?
  내말에 언니는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들은 것 처럼 환한 빛 속에서 소리 내며 웃는다.
  바보야.

  언니가 말한다.
  바보야, 난 널 떠난 적 없어.

 

 

나는 병실 창문으로 해가 뜨는 모습을 보면서 그날 내게 일어났던 일을 생각했다. 언니가 내게 해주었던 이야기를. 나는 그것이 환상이나 꿈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고 이 이야기를 평생 누굿에게도 털어놓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알았ㅅ다. 내가 오래도록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사실을, 그리고 다시는 그런 순간이 오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말이다. 충분했으므로, 더이상 바랄 수 없었으므로.

 

 

엄마 미선과 지연의 갈등이 심화돼는 과정에는 숨겨진 언니의 상실이 자리잡고 있었다. 미선과 지연은 서로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은 언니의 기억을 나누지 않으면서도 그 상실의 아픔과 그리움의 상처를 스스로 보듬으며 살아왔다. 미선의 침묵은 단순한 방어가 아니라 지연의 향한 깊은 사랑과 배려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단지 자신만의 가치관에 따른 것이기에 지연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을 뿐... 이 침묵 속에서 두 사람은 언니의 존재를 각자의 방식으로 간직하며, 그리움과 상처를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미선은 지연의 상처를 마음 깊이 이해하고 있다. 그녀는 언니를 잃은 슬픔이 지연에게 남긴 상처를 직시하며 그 아픔이 지연의 마음속에서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음을 알고 있다. 미선은 그 상처를 덜어주고자 애쓰며, 언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지연의 마음속에서는 언니의 기억이 마치 아주 멀리멀리 보이는 아련한 별빛처럼 희미하게 비추곤 했지만 더는 그 희미한 별빛이... 되돌아 올 수 없는 별빛이 지연에게 더 큰 고통을 주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리고 본인 또한 상처받기 싫었기에... 미선은 조용히 언니의 이름을 지울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연은 늘 언니가 떠났다고 믿어왔고, 엄마의 태도에 자신 스스로를 속이고 언니를 잊어왔을 것이다. 그러다 깨달았다. 언니는 항상 마음속에 있었다고... 이혼 한 뒤 나 홀로라고 생각했을 때에도 항상 언니는 그때 그 모습 그대로 곁에 머무르며 지연을 조용히 웃으며 응원해주고 있었다.

 

 

 한 사람의 삶을 한계 없이 담을 수 있는 레코드를 만들면 어떨까. 태어나는 순간부터 어릴 때의 옹알이 소리, 유치의 감촉, 처음 느낀 분노, 좋아하는 것들의 목록과 꿈과 악몽, 사랑, 나이듦과 죽기 직전의 모든 순간까지 모든 것을 담은 레코드가 있다면 어떨까. 처음부터 끝까지 한 사람의 삶의 모든 순간을 오감을 다 동원해 기록할 수 있고 무수한 생각과 감정을 모두 담을 수 있는 레코드가 있다면, 그건 그 사람의 삶의 크기와 같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비가시권의 우주가 얼마나 큰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한 사람의 삶 안에도 측량할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할 테니까. 나는 할머니는 만나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사실을 자연스레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소설은 증조모, 할머니, 엄마, 나(지연)의 이야기를 넘어서서 매우 복잡한 이해관계에 대한 이야기와 사회적 배경이 섞여있다. 얼핏 보기에 각기 다른 인생의 궤적처럼 보이지만 결국 최은영 작가는 그 중심에는 서로를 향한 깊은 이해와 공감, 그리고 사랑이 자리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이들은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삶의 무게를 짊어지며 때로는 홀로 울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를 위로하며 버텨낸다. 고통의 연대. 어머니의 어머니가, 그리고 그 어머니의 어머니가 겪어야 했던 고통과 슬픔이 후손들에게까지 이어지는 그 악순환의 고리는 비단 아픔만을 전달하지 않는다. 그 고통을 이겨내고 마침내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따스함은, 어제 마지막 휴가를 보내며 산책했던 내 머리 위 하늘에 떠있던 은은한 슈퍼문 달빛과도 같았다. 이들의 삶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로를 통해 위로받고, 자신의 길을 찾아 나갔다. 그 모습은 우리에게 진정으로 어떤 사회상을 만들어갈 것이고, 그 사회상이 개개인에게 어떤 보답으로 올것인지 고민하게 한다.

즉, 최은영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우리에게 묻는다. 과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 우리는 공감하고 사랑하고 있는지.. 밝은 밤이라는 제목은 이 소설은 어둠 속에서도 결코 꺼지지 않는 희망의 불씨를 담고 있는 것 같다. 그 불씨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하며, 우리에게 그 어느 때보다도 밝은 내일을 만들어 갈 수 있도록 그동안의 아픔을 위로해주었다.

밝은 밤을 덮으며 나는 어느새 눈시울이.................................................다. 그것은 단지 슬픔 때문이 아니었다. 지연에 대한 공감, 그리고 나의 상황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그리고 각 인물들에 대해 고민했고, 심지어 나는 봄이한테까지도 마음을 들어보았다. 이 책은 나에게 말한다. 어두운 밤이 지나면 반드시 밝은 아침이 찾아오듯 우리도, 나도 언젠가 빛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 빛을 향해, 함께 걸어가자고.

책을 다읽고 고민이 많았다. 독후감을 쓰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동생에게 책을 건네기전 한번 더 읽었다. 내가 이 책에 대한 독후감을 쓴다면 왠지 아주 긴 글이 될 것 같았고 실제로도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쓰게 되었다. 우연히 그리고 공교롭게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이 계시다면 깊은 감사의 마음을 표한다. 여러가지로 피곤하다, 얼른 이제 자자 :)

 

 

★ ★ ★ ★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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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개발 일을 하는 것이 좋다. 그래서 퇴근 후에 사이드 프로젝트도 자주 한다. 사이드 프로젝트에서는 내가 직접 방향을 정하고, 요구사항도 결정하며 마음껏 상상할 수 있어서 좋다. 이 과정에서 창의적인 문제 해결의 재미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때때로 요구사항이 불분명하거나 방향성을 잡기 힘든 업무를 맡게 되면, 그 재미는 급격히 줄어들고, 마치 주어진 임무를 기계적으로 수행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개발자가 아니더라도 기획자나 디자이너도 이와 같은 상황에서 비슷한 기분을 느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요구사항을 더 명확히 하고, 공학적으로 접근하여 더 나은 답을 도출하기 위해 노력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결국 사용자들의 니즈를 해결해야 하는 엔지니어들이기 때문이다.

 

 

작품 속 용기는 이런 점에서 나와 닮아있었다. 아니, 어쩌면 이따금씩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는 우리들보다 더 힘든 상황에 처해 있을지도 모른다. 용기는 매일 보안업체에서 출동 업무를 성실히 수행한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열정은 다른 곳에 있다. 그는 원래 럭비 선수가 되고 싶었지만, 부상으로 인해 그 꿈을 포기해야만 했다. 용기가 지금 하는 일과 럭비 선수의 직업이 유사한 점이라면, 둘 다 피지컬을 사용한다는 점뿐이다. 그가 보안업체에서 출동할 때면 대부분의 경우가 취객의 실수이거나 쥐나 고양이 같은 동물로 인한 헤프닝에 불과했다. 이처럼 유의미한 출동은 거의 없었지만, 용기는 현실적인 성격 덕분에 주어진 임무를 묵묵히 수행한다. 그러면서 앞으로 주어진 먹먹한 현실에 우울해하고 있다. 마냥 해맑기만하고 긍정적인 7살 어린 여자친구의 처지도 그다지 달라보이지않는데... 어찌 그렇게 명랑하기만 한 것인지... 그뿐만일까? 용기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못이룬 럭비 선수에 대한 아픈 미련이 영 떠나지 않는다. 꿈속에서 조차 럭비 경기를 뛰어야 했으니까 말이다... 

 

 

어찌되었든 이제 괜찮다고, 용기는 지친 자신을 다독였다. 여기가 내 자리야. 꿈꿨던 직업은 아니지만 변두리의 밤을 지키는 출동 요원이 되었다. 팀 사람들도 다 맘에 들고, 격의 없는 동네 누나와 가끔 놀고, 귀엽고 꼬인 데 없는 여자친구와 데굴거리고. 더 바랄게 없다. 돌아가고 싶은 때도 장소도 없다.
  인생이 테트리스라면, 더이상 긴 일자 막대는 내려오지 않는다. 갑자기 모든 게 좋아질 리가 없다. 이렇게 쌓여서, 해소되지 않는 모든 것들을 안고 버티는 거다.

 

 

용기가 새로 생긴 여자친구가 있었음에도 그의 X, 재화는 여전히 그에 대한 미련이 엄청 났었다 보다. 그녀는 세컨드 직업으로 작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녀의 소설속에서는 매번 용기가 등장하고, 그는 매번 죽었다. 누군가는 용기에 대한 악감정이 얼마나 심하면 이렇겠냐고 생각 할 수도 있겠다만, 나는 이것이 그를 잊지 못한 미련이라고 생각한다.

 

 

원전폐기물 보관함처럼, 위태롭지만 조용하게. 엉망인 내부를 숨기면서 사는 건 모두가 마찬가지 아닐까? 뭔가 중요한 부분이 고장나버렸다면 더욱 들켜서는 안 된다. 안쪽에 나쁜 냄새가 나는 죽은 것들이 가득하다는 걸 상대가 알아버리면 바로 도망치고 말 테다. 용기가 그랬던 것처럼.
  돌아누울 때마다 머릿속에서 부품들이 굴러다니는 소리가 들리지만, 아직은 버틸 수 있다. 괜찮다.

 

 

승주와 헤어져 밖으로 나서니, 초가을 거리에는 매미들이 죽어 떨어져 있었다. 여름 내내 강렬했던 구애의 끝이 가루로 부서지는 몸이라니 슬펐다. 그래서, 너희는 바라던 사랑을 얻고 죽었니? 재화는 죽은 매미들을 깨워 묻고 싶었다.

 

 

정세랑 작가의 책은 독자의 마음 깊숙이 스며들어 잊고 있던 기억을 살며시 불러낸다. 그녀의 이야기는 독특한 전개와 때로는 황당하게 느껴질 법한 상상 속에서도 한 편의 시처럼 마음을 적시며 독자를 이야기의 품으로 부드럽게 이끌어간다. 마치 오래된 꿈 속을 헤매는 듯, 그녀의 글은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내 안에 잔잔한 울림을 남긴다. 회사에서 점심을 먹고나면 30분 정도가 남는다. 누군가는 동료들과 커피한잔을 하러가거나, 동기와 수다를 떨러가거나, 운동을 하러가거나, 엎드려 잠을 자곤한다. 나는 이 책을 조금 이라도 더 읽고 싶은 마음에, 회사에서 남은 점심시간을 수시로 모니터의 오른쪽 아래 시계를 봐가며 책의 내용에 초집중을 했다. 덧니가 보고 싶어는 정세랑 작가의 책 중 유독 마음에 드는, 내 마음을 아프게도하고, 웃게도 만드는 글들이 많이 있었다. 나의 삶을 관철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노래들을 듣고 나서, 여왕이 싱어송라이터에게 말했다.
"얼음에 손도 대지 말아요. 얼음을 어쩌겠다는 생각도 하지 말아요."
싱어송라이터는 동의의 뜻을 밝혔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소리 나지 않는 기타를 들고 앉아 있다 갔을 뿐이었다.
이례적인 관계의 두 사람을 얼음을 사이에 두고 그대로 있는게 그저 좋았다. 영원히 그런 날들이 지속될 줄 알았다.
  두 사람이 동굴 안에서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것은, 지구온난화였다. 지구 온난화가 아주 심해졌고, 어어, 하는 사이에 어느 날 얼음 관이 모두 녹았다. 싱어송라이터는 무척이나 당황해서는 뒤로 멀찍이 물러나 기다렸다. 여왕은 미지근하게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기를 짜고는, 드디어 낯선 악기의 소리를 제대로 들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좋아한다. 현실적이지 않아서 좋다. 해피엔딩으로 끝났으니까.

 

 

 

 

영화 부탁 하나만 들어줘에서 숀은 에밀리를 만나기 위해 모든 걸 포기 했다고 스테파니에게 말한다. (사실 에밀리는 미친 여자였지만 말이다. 미친 여자인걸 낌새를 알았지만서도 당시 그는 그녀에게 푹 빠져있었다.) 나는 재화가 이 숀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용기에게 푹 빠져있는 그녀의 내면을 보면서.

 

 

선이의 특제 카레는 아니었지만, 짜장도 꽤 맛있었다. 때때로 인생이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절히 원하는 것은 가질 수 없고, 엉뚱한 것이 주어지는데 심지어 후자가 더 매력적일 때도 있다. 그렇게 난감한 행운의 패턴이 삶을 장식하는 것이다. 물론 매력적인 후자를 가지게 되었음에도 최초의 마음, 그 간절한 마음은 쉽게 지워지지 않아 사람을 괴롭히기도 하고.

 

 

정세랑 작가는 어쩌면 인생 2회차인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러한 경험을, 누구나가 경험 할 수 있는, 그러나 무의식적으로만 느낄 뿐 그 누구도 누군가에게 이야기하지 않고 지나쳐버릴 삶의 한 현상을 글로 이렇게 표현 할 수 있다니... 아무튼 이 부분에서 나는 재화의 용기를 향한 여전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내 생각엔 어쩌면 용기도 7살 연하 여자친구를 두고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리라. 그리고 나는 이따금 잘 만든 가정집 카레가 너무 먹고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 이 대목을 읽으며 그러한 생각이 더 강렬해졌고, 이 글을 쓰며 다시 되새김질 되어 정말 너무 카레가 먹고싶어졌다.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니다. 어쨌거나, 위 대목의 내용에 대해 나는 매우 진지하게 생각했다.

 

 

옛날 사람들처럼 편심, 촌심, 단심 같은 단어들을 쓸 때마다 지잉, 하고 뭔가 명치께에서 진동하고 만다. 수천 년 동안 쓰여온, 어쩌면 이미 바래버린 말들일지도 모르는데, 마음을 '조각' 혹은 '마디'로 표현하고 나면 어쩐지 초콜릿 바를 꺾어주듯이 마음도 뚝 꺾어줄 수 있을 듯해서. 그렇게 일생일대의 마음을 건네면서도 무심한 듯 건넬 수 있을 듯해서.
  언젠가 용기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던 날이 있었다. 용기는 그 말을 초콜릿 바를 받은 가벼이 받았었다. 재화의 마음, 꺾인 부분에서는 잔 가루들이 날렸는데.
  너는 모르지.

 

 

역시 재화는 용기를 애타게 기다렸다보다, 떠나간 이를 정리하지 못하고 그때의 그이에 대한 아쉬움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너는 모르지...' 우리는 이런 말을 마음속으로만 하곤한다. 상대방에게 들리지도 않을 이야기를. 그리고 어쩌면 우리도 누군가에게 이런 말들을 수도 없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정세랑 작가의 표현들을 읽다보면, 그런 생각이 난다. 결국 이러한 글귀들이 곧 정세랑 작가의 실제 경험과 그것에 따른 영감이 나온게 아닐 까하는.. 예를 들면, 지하철 플랫폼에서 어떤 여자가 강아지를 와앙하고 입을 크게 벌리고 먹어 깜짝놀랐으나 알고 보았더니 그것이 왕만두였다는 내용이 그러하다. 분명 정세랑 작가는 그 글을 쓰기 며칠 전 멀리서 왕만두를 보고 말티즈로 착각했으리라...(아님말고요ㅎ)

 

 

부모님 입장도 이해는 갔다. 미운 오리 새끼 같은 딸을 열심히 키우면 백조가 될줄 알았는데, 시조개나 가루다처럼 알 수 없는 괴생물로 자라버렸으니. 그러나 부모의 승인을 받는 트랙에서는 벗어난지 오래였고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오늘도 네 좌표를 알지 못해. 우리의 좌표가 어디서부터 어긋났는지 알지 못해. 그렇게 말할 필요가 있었다.
  재화는 정말로 우주선에 있을 법한 작고 딱딱한 침대에서 잠이 들었다. 발끝이 시렸다. 잠결에, 엔진처럼 무언가 허밍하는 소리를 들었던 것도 같았다.

 

 

  "너한테 설명할 말이 없어. 하지만 이건 내가 한 일이 아니고 재화가 한 일도 아닐 거야."
  용기는 자기가 얼마나 재수없는 얼굴을 하고 있을까 상상하며 말했다.
  "닥쳐."
  충분히 재수없는 모양이었다.

 

 

"초등학교 때 모둠 비빔밥을 해먹으면 꼭 돈가스를 해오는 애들이 있었어. 아마 엄마한테 알림장을 보여주지 않았던 거겠지. 그런데 비빕밥에 들어간 그 엉뚱한 돈가스가 의외로 또 맛있었다? 다 부서지고 눅눅해지고 그랬는데도 맛이 있었어. 그 돈가스처럼 오빠가 좋았어."

 

 

이 소설속에서 제일 딱한 존재는 용기의 7살 어린 여자친구다..... 용기는 그녀에게 어떠한 적절한 해명도 해줄 수 없었다. 그녀에게 용기는 아마 제일 재수없는 X에 미쳐버린 나사빠진 전남친 정도로 기억될 것이다. 그녀의 친구들도 함께 술자리에서 쌍욕을 해주며 잊으라고 할 것이다. 아마 용기는 이런 부분들도 담담히 받아들이고 오히려 다행이야... 라고 생각 할 것 같다. 똥차가고 벤츠가 온다 했던가, 분명 그녀라면 이제 나이 차이가 덜나는 근사한 남자친구가 생겼을 것이다.

 

 

그랬던 용기가 열여섯 시간씩 자게 되었다. 자고 있을 때에만 크고 작은 상처들이 아무는 걸 느꼈다. 안쪽이, 오래전에 잃었던 균형 잡인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 같았다. 그런 경험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동물들에게 미안해졌다. 코알라들의 대화를 이해할 수 없으니 잘은 모르겠지만, 어쩌면 코알라들도 여자친구에게 세게 차였는지도. 그저 아주 멋진 꿈을 꾸는 종일 수도 있지만.......
....
미안해, 코알라들.
미안해, 여자친구.
미안해, 재화.

 

 

피곤할때면 잠을 정말 열시간, 열 두시간 씩 자곤한다. 정말 피로에 지쳐 그런 걸까? 아니면 이 세상에서 잠시 벗어나 꿈속에서 나만의 안식처를 찾고 싶은 걸까... 아니면 둘다인걸까? 어찌돼었든, 코알라가 잠을 많이 자는 이유는 그들의 식단과 에너지 소비 방식과 관련이 있다. 코알라는 주로 유칼립투스 잎을 먹고 사는데, 이 잎들은 영양가가 낮고 소화하기 어렵다. 또 유칼립투스 잎에는 독소가 포함되어 있어서 이를 해독하는 데도 에너지가 필요하다. 코알라는 이와 같은 저영양 식단을 보충하기 위해 하루에 약 18~22시간을 잠으로 보낸다.

 

 

  "아니야, 언닌 정답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계속 정답으로 지켜나가는 사람이니까. 난 누군가의 유사답 정도는 되어본 적 있는 것 같은데, 한 번도 정답은 못 되어봤네."
  선이는 빨대 껍질을 잘게 찢으며 재화의 말을 곰곰 따져보는 듯했다.
  "그런거 될 필요 없는 것 같아. 누구의 무엇도."

 

 

작품 속 선이는 현명한 사람이다. 누군가의 언니, 누군가의 누나로서 좋은 메시지를 계속 전한다. 카레를 짜장으로 바꾸어 버리는 엉뚱하고 황당한 헤프닝을 만들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재화와 용기를 엮어주는 중요한 매개체이자, 그들의 잠재된 서로에 대한 마음을 행동으로 바꾸어주는 촉매의 역할을 단단히 해준다. 작품속의 그 누구보다도 단단한 마음과, 그 마음속에는 여유마저 갖추고 있는듯 보인다. 결국, 선이의 어시스트로 두 사람은 만나게 된다. 그것도 무시무시한 스릴러 내용 속에서 극적으로 말이다. 나는 스릴러를 꽤나 좋아하는 편인데 아주 자극적으로 표현한 정세랑 작가의 솜씨에 감탄하게 되었다. 이를 6개나 뽑아버린 상황을 가정하는데, 꽤나 끔찍하게 묘사되어 인상적이었다. 실제로 영화라도 보는 듯한 생생함을 느꼈다.

 

 

이러한 극적인 상태에서 결국 두 사람은 만나는 것으로 끝이 난다. 마지막을 읽고 나서야 깨닫게 되었다. 용기는 재화의 소설속에서만 컨테이너(container)였었다. 감금된 채 이가 뽑힌채로 죽을 마당에 생겼던 그녀를 구출하고자 했던 현실에서는 커리지(Courage)였던 것이다. 재화는 자신을 회피했고 떠나간 용기를 컨테이너라고 생각했었다. 그를 여전히 사랑하지만 도무지 자신을 구해러와주지 않는 용기를 자신의 이야기속에서 죽였었고 겁쟁이 취급을 했다. 어쩌면 재화는 앞으로 자신의 소설속에서 더이상 죽지 않는 용기, 커리지한 용기를 그려나갈 것이다. 나는 이 책이 좋다. 마음을 요동치게 하는 글들이 너무나 많고, 일일히 그것을 담아두고자 카메라앱을 열어서 캡쳐를 해놓는다. 언제든 그 글들을 읽어 볼 수 있도록. 이번 주말은 푹 쉬었다. 하고싶었던 개발 공부도하고, 아파서 저번에 쉬었던 수영도 열심히 했다. 여름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수영장에 많아졌고 수영장의 기본 예의를 모르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그래도 개의치 않고 내가 가고자했던 1km는 넘게 헤엄을 쳤다. 그리고 삼겹살을 주문해서 맥주와 함께, 영화 한편과 저녁을 보냈다. 그리고 일요일은 내리 잠만 잤다. 코알라처럼.

나는 이 이야기들을 좋아한다. 현실적이지 않아서 좋다. 해피엔딩으로 끝났으니까.

(그리고 사실 표지 속 그려진 용기가 나를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는 것 같아 책이 별나다는 생각과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또 하필 장면이... 에로에로젤리가 떠오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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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2차 인증(Two-Factor Authentication)을 위해 OTP에 대해 공부하던 중 알게된 사실들에 대해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OTP(One-Time Password, 일회용 비밀번호)의 동작 원리는 사용자가 인증을 시도할 때마다 한 번만 사용할 수 있는 비밀번호를 생성하고 검증하는 것을 의미 합니다. OTP는 보안성을 높이기 위해 고안된 방식으로, 주요하게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시간 기반 OTP(Time-based OTP, TOTP)와 카운터 기반 OTP(HMAC-based OTP, HOTP). 여기서 TOTP가 더 일반적으로 사용됩니다. 오늘 알아볼 내용도 TOTP에 대해 알아봅니다 :)

제가 알아본 방법은 commons-codec 방식과 warrenstrange/googleauth 라이브러리 방식이 있는데요. 이 둘중에 무엇을 활용할지는 프로젝트 요구사항과 선호하는 개발 스타일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두 가지 접근 방식의 장단점은 아래와 같습니다.

 

 

Commons-Codec 방식

장점:

  1. 경량성: commons-codec는 일반적인 인코딩/디코딩 작업을 위한 라이브러리로, OTP 생성에 필요한 HMAC-SHA 알고리즘을 구현하는 데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 라이브러리는 상대적으로 가볍습니다.
  2. 유연성: 라이브러리를 사용하여 직접 OTP 알고리즘을 구현하면, 특정 요구사항에 맞게 커스터마이징할 수 있습니다. HMAC-SHA1, SHA256, SHA512 등의 다양한 해시 알고리즘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3. 통제: OTP 생성 로직을 직접 구현하기 때문에 세부 사항을 커스텀 할 수 있습니다.

단점:

  1. 개발 복잡성: OTP 알고리즘을 직접 구현하려면 추가적인 코딩 작업이 필요하며, 표준 준수 및 보안성을 확보하기 위해 신중한 구현이 필요합니다.
  2. 버그 발생 가능성: 직접 구현할 경우 실수로 인한 버그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Warrenstrange/Googleauth

장점:

  1. 간편함: warrenstrange/googleauth는 구글 OTP 알고리즘(TOTP) 구현을 위한 라이브러리로, 설정과 사용이 간편합니다. 복잡한 구현 없이 쉽게 OTP 기능을 추가할 수 있습니다.
  2. 신뢰성: 이미 검증된 라이브러리를 사용함으로써 보안성과 신뢰성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널리 사용되는 라이브러리이기 때문에 커뮤니티와 문서를 쉽게 찾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요.
  3. 통합: 구글 OTP 표준을 준수하므로, 구글 인증 앱 등과 쉽게 통합할 수 있습니다.

단점:

  1. 제한된 유연성: 라이브러리의 기능과 설정에 제약이 따릅니다. 즉 특정 요구사항에 맞게 커스터마이징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2. 외부 의존성: 외부 라이브러리에 의존하게 되므로, 라이브러리 업데이트 및 유지보수에 대한 추가적인 고려가 필요합니다.

 

결론

  • 단순하고 빠른 구현이 필요한 경우: warrenstrange/googleauth 라이브러리
  • 커스터마이징과 세부 제어가 필요한 경우: commons-codec

 

TOTP (Time-based OTP)의 동작원리

TOTP는 시간에 기반하여 OTP를 생성합니다. 사용자는 일정한 시간 간격마다 변경되는 비밀번호를 사용하여 인증을 받아야 하는 방식이죠. 일반적으로 우리는 사용자 측면에서만 TOTP를 이용해왔습니다. 우선 1차 로그인을 하면, 구글 OTP와 같은 앱을 켜서 정해진 시간마다 변동돼는 6자리 숫자를 모바일로 확인해서 웹화면에 입력하죠. 그렇다면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전체적으로 어떤 과정이 일어나기에 가능한걸까요? 이번에는 TOTP의 그 동작 원리에 대해 확인해 봅시다.

  1. 공유 비밀 키(Secret Key): 서버와 클라이언트(사용자)는 미리 공유된 비밀 키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2. 시간 동기화: 서버와 클라이언트는 시간을 동기화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Unix 타임스탬프(1970년 1월 1일 00:00:00 UTC부터의 초)를 사용합니다.
  3. 시간 슬롯 계산: 현재 시간을 일정한 간격(예: 30초)으로 나누어 슬롯을 계산합니다. 이 간격을 시간 틱(Time Tick)이라고 합니다.
  4. HMAC 계산: 현재 시간 슬롯과 비밀 키를 사용하여 HMAC-SHA1 알고리즘을 적용합니다. 여기서 HMAC은 키를 사용한 해시 기반 메시지 인증 코드입니다.
  5. OTP 생성: HMAC의 결과로부터 특정 길이(예: 6자리)의 숫자를 추출하여 OTP를 생성합니다. 일반적으로 OTP는 HMAC 결과의 일부를 사용하여 6자리 또는 8자리 숫자로 변환됩니다.
  6. 검증: 사용자가 입력한 OTP를 서버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생성된 OTP와 비교하여 검증합니다. 시간 슬롯이 짧기 때문에 OTP는 매우 짧은 시간 동안만 유효합니다.

 

Warrenstrange/Googleauth를 이용한 키 제너레이트 및 검증

 

pom.xml

<dependency>
    <groupId>com.warrenstrange</groupId>
    <artifactId>googleauth</artifactId>
    <version>1.5.0</version>
</dependency>

 

import com.warrenstrange.googleauth.GoogleAuthenticator;
import com.warrenstrange.googleauth.GoogleAuthenticatorKey;
import com.warrenstrange.googleauth.GoogleAuthenticatorQRGenerator;

public class GoogleAuthExample {

    public static void main(String[] args) {
        // Create an instance of GoogleAuthenticator
        GoogleAuthenticator gAuth = new GoogleAuthenticator();

        // Generate a new key
        GoogleAuthenticatorKey key = gAuth.createCredentials();
        String secret = key.getKey();
        System.out.println("Secret key: " + secret);

        // Generate a QR code URL to be scanned by Google Authenticator app
        String userName = "user@example.com";
        String issuer = "ExampleIssuer";
        String qrCodeUrl = GoogleAuthenticatorQRGenerator.getOtpAuthURL(issuer, userName, key);
        System.out.println("QR Code URL: " + qrCodeUrl);

        // Simulate the OTP that the user would provide from their Google Authenticator app
        int otp = gAuth.getTotpPassword(secret);
        System.out.println("Generated OTP: " + otp);

        // Verify the provided OTP
        boolean isCodeValid = gAuth.authorize(secret, otp);
        System.out.println("Is the OTP valid? " + isCodeValid);
    }
}

getOtpAuthURL로부터 알아낸 URL을 실제로 접속하면 QR코드로서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api.qrserver.com에 귀속된 URL을 알려주게 되는데, api.qrserver.com은 구글 서버가 아닙니다. api.qrserver.com은 goqr.me라는 웹사이트에서 제공하는 QR 코드 생성 서비스의 API 라고하네요. goqr.me는 QR 코드를 생성하고 관리하는 데 특화된 서비스로, 다양한 형태의 QR 코드를 쉽게 만들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하지만, 이런 의존적인 방식이 마음에 안들경우 직접 QR을 생성할 필요성이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ZXing 라이브러리를 사용하여 자체적으로 QR을 생성하는 방식으로 해결하였습니다!

 

QR 코드 자체생성하기

<dependencies>
    <dependency>
        <groupId>org.springframework.boot</groupId>
        <artifactId>spring-boot-starter-web</artifactId>
    </dependency>
    <dependency>
        <groupId>com.google.zxing</groupId>
        <artifactId>core</artifactId>
        <version>3.4.1</version>
    </dependency>
    <dependency>
        <groupId>com.google.zxing</groupId>
        <artifactId>javase</artifactId>
        <version>3.4.1</version>
    </dependency>
</dependencies>

 

QR을 만들어내는 서비스 로직을 아래와 같이 만들어봅시다.

import com.google.zxing.BarcodeFormat;
import com.google.zxing.EncodeHintType;
import com.google.zxing.WriterException;
import com.google.zxing.client.j2se.MatrixToImageWriter;
import com.google.zxing.common.BitMatrix;
import com.google.zxing.qrcode.QRCodeWriter;
import org.springframework.stereotype.Service;

import java.io.ByteArrayOutputStream;
import java.io.IOException;
import java.util.HashMap;
import java.util.Map;

@Service
public class QRCodeService {

    public byte[] generateQRCode(String text, int width, int height) throws WriterException, IOException {
        QRCodeWriter qrCodeWriter = new QRCodeWriter();
        Map<EncodeHintType, Object> hints = new HashMap<>();
        hints.put(EncodeHintType.CHARACTER_SET, "UTF-8");

        BitMatrix bitMatrix = qrCodeWriter.encode(text, BarcodeFormat.QR_CODE, width, height, hints);
        ByteArrayOutputStream pngOutputStream = new ByteArrayOutputStream();
        MatrixToImageWriter.writeToStream(bitMatrix, "PNG", pngOutputStream);
        return pngOutputStream.toByteArray();
    }
}

 

이제, 컨트롤러 입니다.

import com.google.zxing.WriterException;
import org.springframework.beans.factory.annotation.Autowired;
import org.springframework.http.HttpHeaders;
import org.springframework.http.MediaType;
import org.springframework.http.ResponseEntity;
import org.springframework.web.bind.annotation.GetMapping;
import org.springframework.web.bind.annotation.RequestParam;
import org.springframework.web.bind.annotation.RestController;

import java.io.IOException;

@RestController
public class QRCodeController {

    @Autowired
    private QRCodeService qrCodeService;

    @GetMapping("/generateQRCode")
    public ResponseEntity<byte[]> generateQRCode(@RequestParam String text) {
        try {
            byte[] qrCodeImage = qrCodeService.generateQRCode(text, 350, 350);
            HttpHeaders headers = new HttpHeaders();
            headers.setContentType(MediaType.IMAGE_PNG);
            return ResponseEntity.ok().headers(headers).body(qrCodeImage);
        } catch (WriterException | IOException e) {
            return ResponseEntity.status(500).body(null);
        }
    }
}

 

이제 http://localhost:8080/generateQRCode?text={인코딩하고자 하는 데이터} 를 요청하면, 자체적으로 생성된 QR PNG를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

어때요? 근사하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얼마전 회사에서 후배 개발자의 이슈를 함께 고민하던 중 특이점을 발견했습니다.

몇년이 지난 과거 제가 진행했던 프로젝트에 대한 이슈였는데요

GET 방식의 API를 @RequestBody를 이용하여 요청을 받아내고 있었습니다.

애초 제가 해당 프로젝트를 할 때는 그 데이터를 받을 때는 QueryPram으로 받도록 설계했었습니다.

RequestBody로 변경된 이유를 묻자, 취약점 점검 시 해당 부분이 문제점으로 발견되어 고치게 되었다고 하네요...

이슈 처리 바빠서 그 후배에게는 아직 설명을 못해주었지만, GET API를 QueryPram을 RequestBody로 변경한 것은 적절치 못합니다. 오늘은 그 이야기에 대해 포스팅 해보려고 합니다.

 

과거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당시 개발자들과의 고민은 "어떻게 해야 MSA 서비스에서 RestFul한 API를 제공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였습니다. API의 기본 아키텍쳐에 대한 고민이었죠. 그 중 가장 컸던 부분은 필터 기능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간단한 예시를 들자면 게시판에서 여러가지 조건검색을 할 수 있는데 이 필터 조건들을 어떻게 API에게 전달할지에 대한 고민이었죠. 곧장 저희도 RequestBody를 떠올렸습니다. 예를 들면 이러한 JSON구조를 생각해 볼 수 있겠네요.

{
    "filterId": "subject", // 어떤 타입의 필터인지? 제목검색, 날짜검색 등등
    "filterTarget": "개발", // 어떤 대상으로 필터링할것인지? 내용, 날짜 등등
    "filterOrder": "like", // 대상에 대해 어떤 조건으로 필터링할것인지? 포함돼는 문자열, 특정 날짜 범위 등등
}

흠... 확인히 RequestBody로 하면 깔끔하게 보이긴하네요, 쓰고싶어지는 유혹(?)이 듭니다. 하지만 저희는 당시 RequestBody방식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건 RestFul하지 않기 때문이죠. 왜일까요?

기본적으로 RequestBody는 GET에서 사용하길 권장하지 않아요 아래와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 HTTP 표준 준수: HTTP/1.1 표준(RFC 7231)에 따르면, GET 요청은 요청 본문을 포함하지 않아야 합니다. GET 요청의 목적은 리소스를 조회하는 것이며, 본문을 포함하는 것은 표준을 벗어난 사용입니다.
  • 캐싱 문제: GET 요청은 캐시될 수 있어야 합니다. 캐시는 요청 URL을 기준으로 동작하므로, 본문을 포함한 GET 요청은 캐시 시스템에서 올바르게 처리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본문을 포함한 요청은 캐시 일관성을 유지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 안전성과 멱등성: GET 요청은 안전하고 멱등적이어야 합니다. 즉, GET 요청은 서버 상태를 변경하지 않아야 하고, 동일한 GET 요청을 여러 번 실행해도 결과가 동일해야 합니다. 본문을 포함하는 GET 요청은 이러한 특성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 클라이언트와 서버의 지원 부족: 많은 HTTP 클라이언트 라이브러리 및 서버 프레임워크는 GET 요청의 본문을 지원하지 않거나 무시합니다. 예를 들어, 일부 브라우저는 GET 요청 본문을 보내지 않으며, 일부 서버는 본문을 처리하지 않습니다.
  • 표준 툴 및 라이브러리 호환성: 많은 개발 도구와 라이브러리는 GET 요청에 본문이 없다는 가정을 하고 설계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GET 요청에 본문을 포함하면 이러한 도구들과의 호환성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또한 첨언을 더 해보자면, GET은 기본적으로 URL에 데이터가 포함되길 기대되며, URL에 요청 파라미터가 포함된 형태 + Body에도 포함된 형태는 일관적이지않으며 API의 복잡도를 오히려 더 늘어나게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예를들어 다음과 같은 API를 상상해보세요. 

URL
[GET] http://localhost:8080/api/board/100

Requst Body

{
    "filterId": "subject", // 어떤 타입의 필터인지? 제목검색, 날짜검색 등등
    "filterTarget": "개발", // 어떤 대상으로 필터링할것인지? 내용, 날짜 등등
    "filterOrder": "like", // 대상에 대해 어떤 조건으로 필터링할것인지? 포함돼는 문자열, 특정 날짜 범위 등등
}

 

100이라는 boardSeq 게시판에 대해 RequestBody로 검색하는 기능인데... pathParam도 있고, Body에도 조건이 포함되어 있어요. 이러한 구조는 API의 직관성을 해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저희는 어떻게 했을까요? 저희는 JSON데이터를 URL인코딩하여 QueryPram으로 처리하였습니다.

URL
[GET] http://localhost:8080/api/board/100?filter=%7B%22filterId%22%3A%22subject%22%2C%22filterTarget%22%3A%22%EA%B0%9C%EB%B0%9C%22%2C%22filterOrder%22%3A%22like%22%7D

Requst Body

없음

 

URL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특징은 사용자가 URL를 타인에게 공유하거나 응용하여 사용 할 때도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 훨씬 직관적이죠?

그렇다면 보안취약점에 해당 부분이 문제가 된다면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만약 저였다면 문제로 지적된 파라미터에 대해 암호화 처리 등을 통해 해결하였을 것 같아요. ㅎㅎ 아니면 문제가 될 부분이 아닌데 탐지 되었을 가능성도 있으니 그 부분도 고려를 해서 예외처리를 하던가 해야겠지요? 그 후배가 틀렸다는 이야기를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 개발에는 좋은 방향성은 존재하지만 정답이 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쨌거나 보안취약점은 해결이 되었으니까요 ㅎㅎ 과거의 깊은 고민과 철학들이 담당자가 달라지며 조금씩 조금씩 사라져가는 것은 아주 조금 슬프긴합니다. ㅋㅋ 사람이 변하고 시간이 흐르면 과거의 고민들도 함께 사라져가는 것 같아요.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떤가요?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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