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제대로 @Valid를 적용하였고 그 대상의 Class의 유효성 검증을 하기위한 멤버변수에도 @Pattern을 적용해주었다. 그런데 디버깅을 해보니 그냥 무시해버리는 현상이 발생했다.

한참을 무엇이 문제인지 분석하다가 라이브러리 의존성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올바른 예시는 다음과 같다.

<!-- Maven 이라면 -->
<dependency>
    <groupId>org.springframework.boot</groupId>
    <artifactId>spring-boot-starter-validation</artifactId>
</dependency>


<!-- Gradle 이라면 -->
implementation 'org.springframework.boot:spring-boot-starter-validation'

 

AS-IS에서는 아래와 같이 쓰고 있었는데 잘못된 것인가보다.. 라이브러리는 이상없이 당겨왔고 빌드도, 기동도 이상이 없음에도 정상동작하지 않는다..

implementation group: 'javax.validation', name: 'validation-api', version: '2.0.1.Final'

 

상기 표기처럼 수정하고 빌드해주고 디버깅해보니 정상적으로 동작함을 확인했다.

 

 

인간성이란 단어를 떠올리면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대개는 인성이나 성품, 혹은 도덕성을 기준으로 삼아 그것을 평가하려는 경향이 있겠지요. 그러나 이 책이 말하는 인간성은 그런 고상한 가치와는 조금 다릅니다. 오히려 우리가 쉽게 외면하려 했던 인간 본연의 솔직한 모습들을 들춰내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과 불공평한 삶 속에서 느끼는 억울함과 슬픔, 때로는 숨기고 싶은 비열함까지. 이 책은 그러한 부정적인 감정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인간다움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행복과 불행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에서 벗어나, 삶을 더 넓게, 더 깊게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행복을 기준으로 삶을 평가하려 들지만, 이 책은 오히려 불행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진실, 그리고 그 진실이 가져다주는 위안을 이야기합니다. 한 장 한 장을 넘기며 만났던 명대사들은 제게도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습니다. '나는 지금의 내 불행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사람들이 흔히들 이야기하는 행복만을 맹목적으로 좇는 삶이 꼭 옳은 걸까?' 같은 생각들이 머릿속에 맴돌았죠...
이 책은 1998년에 처음 출간되었지만 오늘날까지도 스테디셀러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오래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결코 낡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시간의 흐름을 초월하는 깊이와 진솔함이 있습니다. 책을 읽다 보면 1990년대의 감성이 자연스레 떠오르기도 합니다. 등장인물들의 대사 하나하나가 흡사 SNL에서 들을 법한 서울 사투리처럼 친근하고 정겹게 다가옵니다. 그렇게 슬픔 속에서도 나에겐 위로를 자아내는 순간들.. 그 위태로운 균형이 어쩌면 이 작품이 지닌 매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책은 저에게 단순히 '좋은 책'이라는 평가를 넘어 '인간'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넓혀주는 귀한 경험을 선물했습니다. 읽는 내내 느껴지는 진솔한 감정들 그리고 그 감정들이 던지는 질문들은 제 삶의 방향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만들었습니다. 마치 오래된 나무의 나이테처럼 이 책도 시간이 지날수록 더 단단해지고 깊어지는 이야기를 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도 이 책을 통해 삶과 인간다움에 대해 조금 더 깊은 사색의 시간을 가져보시길 바랍니다.

 

 

 

안진진이 김장우와 나영규 사이에서 누구를 자신의 짝으로 받아들일지 고민하는 장면은 단순히 누군가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녀 자신의 삶의 방향과 결핍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에 대한 깊은 질문으로 다가옵니다. 두 남자는 서로 대조적이면서도 그녀의 내면에 자리한 두 가지 상반된 욕망을 상징하는 듯합니다.
김장우는 순수함과 자유로움을 대표합니다. 그의 어리숙한 모습은 때로 그녀에게 안쓰럽게 다가오지만 동시에 진진이 관계를 주도해야 하는 부담을 느끼게 합니다. 반대로 나영규는 경제적으로 안정적이고 모든 것이 철저히 계획된 인물입니다. 그의 삶은 안정적이지만 그 안정 속에서 안진진은 자신이 너무나도 수동적인 존재가 되어가는 불안감을 느낍니다. 자신의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했던 말처럼요.. 자신은 죄수고 당신은 간수같다고...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가 했던 이 대사를 김장우에게 했네요? 저는 이 부분도 이해가 안가는 모순중에 하나라고 생각해요. 누가봐도 나영규가 더 죄수과 간수를 보는 듯 하잖아요?)
어쨌거나 김장우냐, 나영규냐의 문제는 제 생각엔 곧 그녀가 어떤 결핍을 감수하며 살아갈 것인지 선택하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장우를 선택하면, 경제적 결핍이 따를 것이고 나영규를 선택하면, 자유의 결핍이 따르겠지요. (물론 이건 너무나 일차원적으로만 요약 한 것이고 이 안에는 매우 복잡한 심리선들이 담겨 있습니다.)
안진진이 결국 나영규를 선택한 이유는 그녀의 가족사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상상했습니다. 나영규를 선택한 것은 팩트지만, 왜 그러했는지에 대한 것은 사람마다 의견이 분분하겠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어머니와 쌍둥이 이모, 두 자매의 대비는 안진진의 선택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어머니는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하며 살아온 인물입니다. 그녀는 무질서하고 고된 삶 속에서도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쳤고 그 고통을 고스란히 안진진에게도 물려주었습니다. 반면 이모는 풍족하지만 이모부로부터 통제된 삶을 살아가며 어머니와는 정반대의 안정적이고 계획적인 이미지를 보여줍니다.
이런 두 여성의 삶을 가까이에서 보며 자라온 진진에게 경제적 결핍은 가장 견디기 힘든 두려움이었을 것입니다. 김장우와의 사랑이 자유롭고 행복해 보였지만 그녀는 어머니가 겪었던 고통을 다시 반복할 용기가 없었던 겁니다. 반면 나영규와의 관계는 자유로움을 제한당하는 느낌을 주었지만 어느순간에 그녀에게는 안정이라는 강력한 유혹으로 다가왔을 겁니다. 이 안정이 비록 숨이 막히는 삶을 암시할지라도 그녀는 그 선택이 가져다줄 안전함을 놓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안진진의 선택은 그녀가 사랑을 통해 무엇을 얻고 무엇을 포기할 것인지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그것은 단순히 남자 중 한 사람을 선택하는 일이 아니라 그녀 자신의 삶에 필요한 어떠한 결핍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대해 타협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이 결정을 통해 작가는 우리가 살아가며 맞닥뜨리는 모순을 극명하게 드러냅니다. 사랑이란 모든 것을 충족시키는 완벽한 해답이 아니라 어쩌면 결핍을 껴안는 과정이라는 사실을요... 과연 안진진은 나영규와의 앞으로의 삶속에서 행복할 수 있을까요? 사실... 저는 그녀의 미래가 잘 상상되진 않았습니다. 무언가를 얻는 다는 것은, 무언가를 포기한다는 것 이잖아요..
여러분은 인생에서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나요? 결핍은 피할 수 없는 삶의 일부이며 결국 그것을 어떻게 마주하느냐가 우리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본질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엔 아마도 안진진이 자신의 미래를 점쳐보기 위해 스스로를 대조(?)해 보았을, 이모에 대한 이야기를 해봅시다. 그런데 이모는 결국 극단적 선택을 하고 맙니다.
안진진의 이모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이유는 그녀의 삶이 철저히 통제되고 규격화된 환경 속에서 점차 자신의 존재감을 잃어갔기 때문이라고 느껴집니다. 그녀의 선택은 단순히 한순간의 절망이 아니라 오랜 시간 쌓여온 억압과 내면의 공허함이 드러난 결과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모는 안정적인 가정을 이루고 건축설계를 하는 이모부와 함께 경제적으로 풍족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풍족함은 동시에 그녀의 삶을 통제하고 모든 것을 예측 가능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녀의 삶은 외적으로는 완벽했지만, 내적으로는 자율성을 잃은 감옥 같았습니다. 모든 것이 계획되고 계산된 삶 속에서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를 잃고 자신의 욕망이나 감정을 표현할 여지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녀의 선택은 안진진의 어머니와 뚜렷한 대비를 이루며 두 사람의 삶이 어떻게 서로 다른 방식으로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어머니는 경제적인 결핍 속에서 고군분투하며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쳤다면 이모는 그 결핍이 채워진 환경 속에서 스스로를 잃어가는 고통을 겪었던 것입니다. 이 둘의 삶은 극단적으로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자신이 주체가 되지 못한 삶의 결과를 상징합니다.
또한 이모부와의 관계도 그녀의 선택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이모부는 계획적이고 규칙적인 삶을 지향했지만 그것이 그녀에게 안정이 아닌 억압으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그녀의 삶에서 '예측 가능성'은 더 이상 안정감을 주는 요소가 아니라 자신이 삶의 조연에 머물러 있음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족쇄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여지가 없는 삶을 살면서 점차 무기력함과 소외감을 느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모의 극단적인 선택은 단순히 그녀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인간이 가진 근본적 갈등과 욕구를 상징합니다. 그것은 자유와 안정 사이의 모순, 그리고 삶 속에서 진정한 주체로서 살아가기 위한 투쟁을 말해줍니다. 이모는 결국 자신이 잃어버린 자유를 찾기 위해 마지막 선택을 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녀의 선택은 삶의 풍족함과 안정감이 결코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책을 읽으며 작속 이모의 이야기를 마주하는 것은 다소 아리송 했습니다. 이 책을 읽어본 친구와 함께 이야기 하기를 "아주 배가 불렀다"며 농담을 했거든요. 사실 여전히 안진진의 어머니에 대한 기만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녀의 이야기는 우리가 삶 속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되새기게 합니다. 행복이란 단순히 결핍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는 순간에 찾아온다는 것을 말이죠.

 

 

 

이 책을 읽으면서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습니다. "누가 내 인생 하드모드로 현질도 안하고 키우냐"라는 우스갯소리요.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겪는 온갖 복잡한 감정과 고난들이 마치 게임의 하드모드처럼 느껴질 때가 있잖아요. 어쩌면 이 책 속 주인공들도 그런 하드모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하드모드에도 나름의 매력이 있다는 걸 이 책이 알려줬습니다. 단순히 게임을 클리어하는 것보다 그 과정에서 느끼는 긴장감과 성취감이 더 크듯이 우리 삶도 그렇지 않을까요? 아프고 고된 순간들이 쌓이면서 결국에는 나만의 이야기로 완성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제는 힘든 순간에도 묻고 싶습니다. "이건 또 무슨 퀘스트야?" 하고요. 슬픔이 와도, 아픔이 찾아와도, 그게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줄 경험치라고 믿기로 했습니다. 하드모드에서만 얻을 수 있는 레어템처럼 그런 순간들이 나중에는 나만의 특별한 보물이 되겠죠...
결국 인생은 하드모드로 설정된 채로도 계속 나아가야 하는 게임 같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이 모험이 끝나면, 지금의 모든 순간들이 나를 얼마나 성장시켰는지 깨닫게 될 거라고 믿습니다. 🌙

그리고 난... 모순 그 자체야...!

 

 

 

우리들은 남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자기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납득할 수 없어한다.

 

해질 녘에는 절대 낯선 길에서 헤매면 안 돼. 그러다 하늘 저켠에서부터 푸른색으로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가슴이 아프거든...

 

사람들은 작은 상처는 오래 간직하고 큰 은혜는 얼른 망각해버린다. 상처는 꼭 받아야 할 빚이라고 생각하고 은혜는 꼭 돌려주지 않아도 될 빚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장부책 계산을 그렇게 한다.

 

소소한 불행과 대항하여 싸우는 일보다는 거대한 불행 앞에서 차라리 무릎을 꿇어버리는 것이 훨씬 견디기 쉬운 법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솔직함만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솔직함은 때로 흉기로 변해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부메랑일 수도 있는 것이었다.

 

인생이란 때떄로 우리로 하여금 기꺼이 악을 선택하게 만들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모순과 손잡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주리는 정말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나의 불행에 위로가 되는 것은 타인의 불행뿐이다. 그것이 인간이다. 억울하다는 생각만 줄일 수 있다면 불행의 극복은 의외로 쉽다. 상처는 상처로밖에 위로할 수 없다.

 

 

 

'독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채식주의자  (2) 2024.12.27
일의 기쁨과 슬픔  (1) 2024.12.25
결혼·여름  (0) 2024.12.20
달까지 가자  (3) 2024.11.24
소년이 온다  (19) 2024.11.18

 

소설은 영혜의 남편의 1인칭 시점으로 시작된다. 그는 영혜를 "그저 평범하고 수수한 여자"로 묘사하며 그녀를 선택한 이유를 설명한다.
그러나 이 '평범함'이란 단어는 오히려 그녀의 삶에 던져진 첫 번째 폭력을 암시한다. 남편에게 영혜는 독립적 존재가 아닌, 그의 안정된 삶을 보장해 줄 도구일 뿐이다.
영혜가 갑작스럽게 육식을 거부하고 채식을 선언한 것은 남편에게 충격으로 다가온다.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이라는 그녀의 새로운 정체성은 남편의 안정된 일상을 흔들며 갈등의 시작을 알린다.
특히 그녀의 결정은 남편의 개인적 불편함을 넘어, 가정 전체의 문제로 확대된다.
가족 식사 자리에서 아버지는 그녀의 채식행위에 대해 폭력을 휘두른다. 친정 아버지는 가부장제의 상징이자, 이 장면은 단순히 육식과 채식의 갈등을 넘어 전통적 가부장제와 개인적 자유의 충돌을 상징한다.
영혜가 손목을 그으며 저항하는 순간 그녀는 단순히 음식 취향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사회적 규율을 거부하는 존재로 변모한다.
이 장면은 그녀의 선택이 단순한 개인적 취향을 넘어서는 깊은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왜 우리는 누군가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하면 억압하려 드는가? 타인의 자유를 존중한다는 것이 사실... 그렇게나 많이 어려운 일인가? 조금만 생각해보자. 왜 그리 못견뎌하며 억압하려 드는걸까. 누가 칼이라도 들고 협박하던가?
영혜는 육식을 거부하며 육식문화와 가부장제라는 근대 문명의 억압을 거부한다.
그녀는 아버지의 폭력으로 상징되는 사회 규율에 저항하며 체제 밖으로 추방되는 인물이다.
그녀의 선택은 단순히 '채식주의'라는 단어로 설명될 수 없다. 나는 채식주의자라는 표현은 사실 매우 피상적인 형태를 꼬집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래에서 더 자세히 설명하겠다)
이는 근대 문명이 여성과 자연을 억압해온 방식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폭력이란? 상식, 육식문화와 가부장제로 대변되는 근대 문명, 인간의 생물적 조건으로서의 폭력 모두를 이야기한다.
인간은 다른 생명을 먹어야만 살아갈수있다. 즉, 생물학적 조건에서 야기되는 폭력은 가부장제가 사라져도 해소되지 않는 폭력이다.
인간은 결국 다른 유기물을 먹어야만 살 수 있는 잡식동물이라는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는 어떻게해도 폭력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엿볼수 있는 부분이 영혜에게 물어뜯긴 동박새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영혜는 자신의 둥근 젖가슴이 아무도 해치지 않아 좋다고하지만 몸이 야위자 뾰족해진 젖가슴에 대해 "뭘 찌르려고 이렇게 날카로워지는 거지?"하고 불안해 한다.
마지막 장면의 영혜의 노출된 상반신에서 드러나는 뾰족해진 젖가슴과 죽은 동박새를 통해 폭력성을 드러낸다.



2부는 형부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그는 예술가로서 영혜의 몸에서 발견한 몽고반점에 매혹된다.
이 반점은 단순히 신체적 특징이 아니다. 그것은 그녀의 타자성을 상징하며, 동시에 그의 금기된 욕망을 자극한다.
형부는 영혜를 "순수한 예술의 매개체"로 바라보며, 그녀의 몸을 꽃으로 치장해 자신의 예술로 재탄생시키려 한다.
우리는 형부가 그녀를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가 아닌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는 대상으로만 바라보고 있음을 알게 된다.
형부와 영혜의 관계는 애매하고 불편하다. 그들의 행위는 예술로 미화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윤리적 문제를 제기한다.
그녀의 동의와 자유 의지로 이루어진 듯 보이는 이 관계는 사실상 또 다른 억압의 형태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영혜는 점차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간다. 그녀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타자화되며,
더 이상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상태로 내몰린다. 결국 형부와의 관계는 그녀를 자유롭게 하기는커녕, 더 깊은 억압 속으로 밀어넣는 역설적 결과를 초래한다.
꽃이 되면 평화로워질줄 알았으나 결국 친언니 언니에게 캠코더 영상으로 큰 상처를 주고만다. 폭력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시도가 계속 또다른 폭력을 만들어낸다.
즉 폭력이 사회, 문화, 제도의 산물일 뿐만아니라 인간 삶의 근본적 조건이기도 하다. 채식주의자는 남성과 육식, 여성과 채식이라는 이분법적인 방법을 차용하는 듯 하면서 교묘하게 그것을 역설한다.
영혜와 형부가 육체적으로 결합하는 기괴한 장면에서 부분적으로 혼종성에 있다. 결합한건 인간의 몸이다. 그 결합은 성적 욕구에 의해 매개된다.
결합된 것은 동물적이다. 그러나 몸에 그려진건 꽃이다. 책에서도 "꽃과 짐승과 인간의 뒤섞인 한몸"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영혜가 몸에 꽃을 그린 J나 형부를 욕망하는 모습, 비쩍 마른 몸으로 정신병원에서 격렬히 몸부림 치는 모습도 이와 비슷한 효과를 자아낸다.



마지막 3부는 영혜의 언니인 인혜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인혜는 자신이 영혜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했음을 깨닫는다. 이 과정에서 영혜는 더 이상 인간 세계의 규율을 따르지 않으며, 음식을 완전히 거부한다.
그녀는 "식물이 되고 싶다"고 선언하며, 자연으로의 완전한 동화를 꿈꾼다. 그러나 이 꿈조차 이상적이지 않다. 영혜가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욕망은 인간과 자연의 경계에서 발생하는 또 다른 갈등을 보여준다.
그녀가 인간으로서의 삶을 거부하고자 하는 이유는 단순히 폭력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그 폭력을 완전히 소멸시킬 수 없다는 좌절감 때문이다.
영혜의 마지막 모습은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그녀는 활활 타오르는 나무를 응시하며 자신의 존재를 초월하고자 한다.
식물이 되길 원하지만 끝내는 동물일수밖에 없는 존재... 
한강 작가는 폭력이라는 개념이 완전히 사라진 세상을 망연히 꿈꾸기보다는 
인간 문명의 지반이 어떤 종류의 폭력들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직시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라고 말하고자 한 것같다.
위에서 말했듯 채식주의자라는 책의 제목은 피상적이다. 건강을 위해, 아토피, 알레르기 체질을 개선하기 위해, 환경을 보호하기위해 등등
여러가지 이유를 덧붙이지만 결국 채식주의자라는 단어는 영혜가 고기를 거부하는 이유를 속시원히 설명하지 못한다.
회사사람들과의 모임장소에서 영혜의 남편은 저런 피상적인 이유를 나열하며 영혜의 채식이유를 모임 사람들에게 설명한다.
그제야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있는 규범과 사상내에서 이해하고 영혜의 채식을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들인다.
인간은 자신이 알고 있는 개념 체계 내부에서만 타자를 이해할 수 있다. 언어로 대상을 파악하려는 시도는 그 대상의 실체를 언어 바깥으로 불가피하게 미끄러뜨린다.
나는 이 사실이 채식주의자 전체를 관통하는 문제의식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몽고반점에서 형부는 매우 이중적인 위치에 있다.
영혜의 식물성을 가장 먼저 알아보는 사람은 형부였다. 첫 만남 때부터 "야생의 나무 같은 힘"을 느끼고 영혜에게 몽고반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푸른 꽃이 열리는 장면을 떠올린다.
결과적으로 영혜가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게 만들어 준 것도 형부다. 형부는 "아무도 그녀를 도울 수 없었다.", "모든 사람이 철저한 타인 혹은 적이었을 것이다." 라는 표현을 하며 영혜의 처지를 이해하고 헤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부는 독자들에게는 왠지 불편하고 메스껍거나 역겨운 존재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형부가 철저히 자기의 시선에서 타자화된 영혜를 진단하고 욕망하기 때문이다. 형부는 영혜를 모든 욕망이 배제된 육체, 식물적 육체로 보지만 그건 영혜의 단편적인 부분일 뿐 그녀를 완벽히 이해한 것이 아니다.
완벽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부분은 아래 부분을 통해 알 수 있다.
영혜는 자신이 꿈을 꿔서 고기를 끊었다는 말이 타인들에게 이해받지 못할 것임을 잘 알고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혜는 형부에게 이에 대한 설명을 해주려하지만 형부는 "널 삼켜서, 널 녹여서 내 혈관 속에 흐르게 하고 싶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다 영혜의 말을 자장가삼아 잠이 드는 형부, 이는 결국 형부는 영혜에게 결국 '나'를 철저하게 타자화하는 타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인혜(영혜의 친언니)는 삶에 있어서는 안될 바람현장을 경험한(모르고 사는 것보단 어쩌면 들킨것이 다행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눈치채기 어렵지만 인혜는 영혜에게 치명적인 정신적 해를 입히는 인물이다.
캠코더를 발견하고 인혜가 남편에게 말하길 "아직 정신도 성치 않은 애를..."이라 말한다.
영혜를 비정상으로 판단하지만 사실 영혜는 회복중인 상태였다. 밥도 잘먹고 일자리도 구하기 직전이었고 형부를 통해 악몽도 점점 꾸지 않고 있었다.
"무섭지 않아요.. 무서워하지 않을거에요"
과정이 어찌되었든 결과적으로는 형부와의 만남을 통해 구원의 가능성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인혜는 그러한 가능성을 차단하게 되고, 그 이유는 단순 미움이나 괘씸보다는 반드시 치료가 필요하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알고있는 개념과 문화, 정서에서 이해하려는 태도는 결국 강제 입원이라는 폭력으로 이어지고 만다.
이 소설에서 영혜는 주요 서술자로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타인들에 의해 재현되는 영혜가 진짜 영혜인지를 의심하며 읽어야 한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영혜가 완전한 이상향을 좆고, 무해한 존재는 아니라는 것이다.
폭력의 질서에서 벗어나기 위해 식물되기를 꿈꾸지만 식물에게 일방적인 시선을 보내는 영혜의 모습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영혜는 세상의 나무들은 모두 형제 같다고 말한다. 이 말은 굉장히 생태주의적 표현이다.
식물들을 어떤 연대에 기반을 둔 평화로운 공동체로 보고 있다. 그러나 사실 이 소설에서 나무들은 굉장히 공격적이고 동물적이다.
소설 첫장면에 등장하는 나무들의 모습부터 그러한데, 영혜의 꿈속 나무들은
뾰족한 잎이 돋은 나무들을 헤치느라고 얼굴에, 팔에 상처가 났다라고 말한다. 가해의 굴레로부터 해방된 식물.. 물과 광합성만 필요한 식물.. 그런것은 사실 없다.
나무도 인간에게 상처를 준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대놓고 보여주면서 이 소설은 시작한다.
그렇다면 끝은 어떠한가?
"활활 타오르는 도로변의 나무들을, 무수한 짐승들처럼 몸을 일으켜 일렁이는 초록빛의 불꽃들을 쏘아본다:"
굉장히 역동적이며 위협적이다.
"짐승들처럼"이라는 표현을 대놓고 사용하며 동물 VS 식물에 대한 이분법에 균열을 낸다.
실제로 식물들의 세계를 보면 경쟁이 치열하고 살벌하다.
식물에게 평화나 연대같은 가치를 투영하는 것도 인간 중심적인 사유일 수 있다.
이러한 면에서 영혜의 나무가 되기가 실패한 이유는 어쩌면 자신이 동물이라는 현실을 외면해서뿐 아니라
나무들을 자신이 알 고 있는 나무라는 개념 체계 내에서만 바라보고 해석하는 폭력을 범했기 때문아닐까?
채식주의자는 폭력의 여러 형태를 다룬다. 그것은 물리적 폭력, 심리적 억압, 그리고 제도적 강요를 포함한다.



이 소설은 우리가 타인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때로는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특히 영혜라는 인물은 독자로 하여금 타자를 이해하는 데 있어 언제나 잠정적 한계가 있다는 점을 깨닫게 한다.
한강은 이 작품을 통해 독자들에게 묻는다. 우리는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아니면 우리의 틀 안에 맞추기 위해 그들을 재단하는가? 이 질문은 단순히 문학적 질문이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끊임없이 제기되는 도전이다.
우리가 불가피한 폭력의 요구를 기어이 감내하는 것과 타자를 함부로 의미화하지 않는 것은 양립가능하다.
이 소설은 영혜가 활활 타오르는 나무들을 대답을 기다리듯 쏘아보는 장면으로 끝난다.
이 장면은 나무 불꽃으로 표상되는 미지의 타자로부터 어떤 의미를 기대하면서도 언어의 한계를 의식하고 의미화를 유보하는 윤리를 보여준다,.
즉, 우리들의 의미화가 언제나 잠정적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면서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놓아야 한다.
둘째로 폭력이 삶의 근원적인 조건인 이상 우리에겐 폭력의 유무로 도덕적 선악을 단정하지 않는 새로운 의식이 필요하다.
여기서는 폭력의 발생자체가 아니라 누구의 누구를 향한 어떤 폭력인가가 주요한 문제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우리는 불가피한 폭력뿐 아니라 불가피한 돌봄의 연쇄에 의해서도 관계 맺고 있다.
폭력과 돌봄은 모두 삶의 근본적인 조건이지만 그 불가피성 내에서 우리는 누구와 어떤 관계에 연루될 것인지를 어느 정도 선택할 수 있다.
인혜는 이 기성적인 세계에 남아서 지우를 돌보기로 선택했다.
이 일은 가부장제가 부여한 노동이기도 하지만 인혜의 기쁨의 원천이자 삶을 어떻게든 붙잡아낼 책임을 스스로 부여한 결단의 결과이기도 하다.
우리의 살생을 완전히 속죄하기는 어렵겠지만 누구를 어떻게 돌볼 것인지를 선택하면서 폭력이라는 원죄가 유의미한 돌봄과 함께 순환하는 세계를 만들어야한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영혜는 더 이상 인간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 그녀의 존재는 인간과 자연, 폭력과 평화, 이해와 오해 사이에 놓여 있다.
독자들은 이 모호한 결말을 통해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한다. 채식주의자는 단순한 소설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와 그 복잡성을 탐구하는 하나의 거대한 질문이다.

 

 

 

이 책을 읽으며....
마치 영혜가 꿈속에서 고기를 거부하며 나무가 되고자 했던 그 갈망처럼,
나 또한 나를 옭아매는 것들을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을 느꼈다. 하지만 동시에, 영혜의 이야기는 내게 질문을 던졌다.
과연 벗어난다는 것이 가능할까? 그 과정은 정말로 평화로울까?

요즘의 일상 속에서 내가 선택한 것들조차 내가 아닌 누군가를 위한 것이 되어버리는 순간들.
마치 인혜가 가부장제의 틀 안에서 돌봄을 자신의 책임으로 받아들이듯, 나도 그저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은 나에게 선택의 무게를 다시금 돌아보게 했다. 영혜는 식물이 되길 원했지만, 결국 몸은 야위고 날카로워졌다.
그런 영혜를 바라보며 나는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지쳐가고 있는가?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영혜의 여정을 따라가며 나 또한 내 안의 폭력성을 마주했다.
폭력이라 하면 누군가를 해치는 직접적인 행위만 떠올렸던 내가, 사실은 나 자신에게 얼마나 잔인했는지를 깨달았다.
비교를 하며 무언가를 무가치하게 여기거나, 꿈을 스스로 묵살하며, 어떤때는 내 마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찔렀다.
그리고 나서야 깨달았다. 나를 돌보지 않는 것도 하나의 폭력이었다는 것을.

책의 마지막 장면, 활활 타오르는 나무들을 바라보던 영혜처럼 나도 불꽃들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싶었다.
그것은 단순히 절망의 상징이 아니라, 나를 묶었던 끈을 태워버릴 수 있다는 가능성이었다. 불꽃 속에는 미지의 타자, 새로운 해석, 다른 나의 모습이 있었다.
삶은 결국 폭력과 돌봄이 얽힌 복잡한 굴레다.
누구에게 돌볼 마음을 품고 누구를 해칠 위험을 안고 있는지를 고민하며 우리는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영혜의 이야기처럼 나도 내 삶 속에서 무엇을 돌보고 무엇을 놓아줄지 선택해야 한다.
지금은 조금 두렵고, 때론 불안하지만, 그 선택 안에 작은 희망이 있다는 것도 알 것 같다.

책을 덮으며 나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다짐했다. 언젠가 나도 활활 타오르는 불꽃처럼 나를 정의하려는 모든 의미를 태워버릴 수 있는 사람이 되리라고.
그리고 남겨진 재 속에서 나만의 의미를 새롭게 쌓아가리라고. 이 책은 내게 그런 희미한 빛을 남겨주었다.

 

 

 

 

그렇게 끝났다. 그날 이후 그들의 삶은 결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살아갔다. 등 뒤에 끈질긴 추문을 매단 채 가게를 꾸려나갔다. 시간은 가혹할 만큼 공정한 물결이어서, 안내로만 단단히 뭉쳐진 그녀의 삶도 함께 떠밀고 하류로 나아갔다.

 

 

 

그를 사랑한다는 확신이 그녀에게는 없었다.
그것을 부지중에 알면서 그녀는 그와 결혼했다.
혹 그녀에게는 자신을 좀더 위로 끌어올려줄 무엇인가가 필요했던 건 아닐까.

 

 

 

처음 얼마 동안은 여느 부부들처럼 그와 크고작은 언쟁을 하기도 했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체념할 수 있는 것들은 체념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그를 위한 것이었을까.
함께 살았던 팔년 동안, 그가 그녀를 좌절시킨 만큼 그녀 역시 그를 좌절시켰던 것은 아닐까.

 

 

 

문득 이 세상을 살아본 적 없다는 느낌이 드는 것에 그녀는 놀랐다. 사실이었다. 그녀는 살아본 적이 없었다. 기억할 수 있는 오래전의 어린시절부터, 다만 견뎌왔을 뿐이었다.

 

 

 

이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 더이상은 견딜 수 없다. 더 앞으로 갈 수 없다. 가고 싶지 않다.

 

 

 

그녀는 이미 깨달았다. 자신이 오래전부터 죽어 있었다는 것을.


 

 

 

 

'독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순  (0) 2025.01.21
일의 기쁨과 슬픔  (1) 2024.12.25
결혼·여름  (0) 2024.12.20
달까지 가자  (3) 2024.11.24
소년이 온다  (19) 2024.11.18

 

 

장류진 작가의 '달까지 가자'에 이어 '일의 기쁨과 슬픔'도 읽었다. 이 책은 군대에서 일과가 끝나고 먹는 라면, 회사에서 퇴근 후 허기진 상태에서 먹는 라면처럼 술술 입안으로 빨려들어가는 그 맛이다.

 

첫 번째 단편인 '잘살겠습니다'는 나이 많은 회사 동기 언니의 결혼과정을 다루는 이야기다. 빛나라는 인물은 매우 순진한 캐릭터이다.
그리고 정도의 차이일 뿐 우리 주변에 이런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이 존재한다.
빛나는 동기지만, 가까운 친구라기엔 애매한 어정쩡한 관계 속에서 그녀는 존재만으로도 화자를 지치게 만든다.
이러한 존재는 회사에서 특히 그 빛을 발하는데, 나같은 성격들의 사람들로 하여금 복장 터지는 답답함과 짜증스러움을 유발하곤 한다.
사람이 나쁜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해서든 나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고, 나의 일을 더 어렵게 만들어 놓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결과물을 만들어 내곤 한다.
중요한 점은 그러한 사실은 그들은 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의 존재조차 잊고 있던 화자는, 청첩장을 달라는 빛나의 말에 '동기 1호 결혼 커플을 축하하는 청첩장 모임'으로 퉁쳐 만나려고하지만,
빛나는 그녀를 내심 좀 더 가까운 존재로 여기었는 듯 1:1로 따로 만날 것을 제안한다. 
에비동을 특 에비동을 시켰기 때문에 새우가 더 많이 나온 것인데 새삼 놀라는 그녀였고
전세계약을 하며 확정일자 조차 모르고 결국 이중계약 사기를 당해버린 그녀였고
끝내 1:1로 밥을 얻어먹어놓고는 결혼식에 등장조차 안한 그녀였다. (그리고 축의금조차 내지 않는 넌센스 그 자체였다.)

 

 

 

"빛나 언니한테 가르쳐 주려고 그러는거야. 세상이 어떻게 어떤 원리로 돌아가는지. 오만원을 내야 오만원을 돌려받는 거고, 만이천원을 내면 만이천원짜리 축하는 받는 거라고. 아직도 모르나 본데, 여기는 원래 그런 곳이라고 말이야. 에비동에 새우가 빼곡하게 들어 있는 건 가게 주인이 착해서가 아니라 특 에비동을 주문했기 때문인 거고, 특 에비동은 일반 에비동보다 사천원이 더 비싸다는거. 월세가 싼 방에는 다 이유가 있고, 칠억짜리 아파트를 받았다면 칠억원어치의 김장, 설거지, 전 부치기, 그밖의 종종거림을 평생 갖다바쳐야 한다는 거. 디즈니 공주님 같은 찰랑찰랑 긴 머리로 대가없는 호의를 받으면 사람들은 그만큼 맡겨놓은 거라도 있는 빚쟁이들처럼 호시탐탐 노리다가 뭐라도 트집 잡아 깎아내린다는 거. 그걸 빛나 언니한테 알려주려고 이러는 거라고, 나는."

 

 

 

화자는 그녀에게 제대로 이 현실과 세상의 진리를 깨닫게 해주기 위해
철저히 빛나의 결혼식 선물을 준비한다. 그동안의 밥값, 커피값에 근거한 정확히 계산된 간단한 편지를 곁들인 올리브영에서 산 만이천원어치의 선물을 준비했다.
딱 그만큼의 선물로, 빛나에게 세상의 룰을 가르쳐 주겠다는 의도다.
그러나 빛나는 그 선물을 받고 감동을 받았는지 편지와 선물을 사진찍어 본인의 프로필 사진으로 올렸다.
어쩔 도리가 없다. 세상의 이치를 알려주려 했던 화자의 노력은 헛수고로 끝났고, 빛나의 순진함은 또 한 번 화자의 속을 긁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떡을 씹으며 빛나가 잘 살길 바란다. 바보 같고 어리숙하고 때론 짜증나지만, 그래도 그녀가 진심으로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은 남아 있다.
이 단편의 묘미는 여기 있다. 빛나를 향한 화자의 분노와 연민, 그리고 희망이 뒤섞인 감정은 마치 우리 모두의 관계 속 갈등을 상징하는 듯하다.
절대적인 악과 선은 없다. 웃프게도... 어쩌면 그녀는 화자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공감능력이나 지능이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화자는 답례로 받은 떡들을 먹으며 빛나가 부디 잘살기를 희망한다. 바보들이 참 밉다. 밉지만 그들의 순수하면서도 순진한 마음은 부정할 수 없고 그저 잘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잘 살겠습니다'는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한다. 어쩌면 빛나는 우리의 과거 모습일 수도 있고 혹은 우리가 미워할 수 없는 주변 사람일 수도 있다.
그녀는 답답하지만 밉지 않고 어리숙하지만 착한 마음만큼은 응원하게 된다.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우리는 항상 물질적인 것이든 마음인 것이든 공평을 추구한다. 잘 살겠습니다의 화자의 말대로 딱 그 값어치만큼으로 세상이 정말로 돌아간다면 얼마나 이상적일까?
그러나 세상은 사실 주는 만큼 받는 세상이 아니다. 어떨 때는 내가 더 주기도 하고, 내가 더 많이 누군가로부터 받기도 한다. 세상은 엔트로피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화자가 아무리 빛나를 가르치려 들어도 소용없다. 사람은 바꿀 수 없고, 빛나는 자신이 가진 정보와 역량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선한 마음을 다하고 있을 뿐이다..

 

 

 

혼자 끙끙앓으며 분노를 해보았자. 화자만 손해일 것이다. 나라면... 그게 그렇게 화나고 힘들다면 그냥 털어 놓는게 어떨지 싶다. 친한 동료면 좋고, 친구여도 좋다. 부정적인 감정은 빨리 소모해서 없애버리고 싶다. 그래.. 그냥 뇌의 화학적인 반응이야. 라고 생각하면서... 결국, '잘 살겠습니다'의 이야기는 단순한 불평이나 푸념이 아니라 세상과 인간관계의 복잡한 본질을 마주하는 과정에 대한 기록처럼 느껴진다. 빛나는 화자에게 끊임없이 분노를 안겨주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순진한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연민을 자아낸다. 그녀가 가진 부족함은 화자를 불편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그 부족함 안에 담긴 순수함은 쉽게 미워하기 어렵다.

 

 

작가는 아마도 세상에 완벽히 공평한 교환은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우리가 주고받는 모든 것들은 저울 위에 올라가는 즉시 균형을 잃고 그것이 삶의 자연스러운 질서가 된다.
빛나는 화자의 기대와는 달리 이 불균형 속에서도 나름대로 자신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화자는 빛나를 통해 우리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게 만든다.
나 역시 살면서 이런 빛나 같은 사람들을 만났고 때로는 그들과의 관계에서 속이 끓어올랐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순간에 느꼈던 감정들이 얼마나 하찮았는지를 깨닫게 된다.
어쩌면 내가 화가 난 이유는 상대가 아니라, 내 안의 기대와 욕심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잘 살겠습니다'의 마지막에서 화자가 빛나를 향해 잘 살기를 바라는 장면이 단순한 체념이 아니라 일종의 성장처럼 느껴졌다.
세상을 가르치려 애쓰는 대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흘려보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세상을 덜 힘들게 살아가는 방법이 아닐까?
빛나는 아마 끝까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만의 방식으로 누군가를 당황하게 하고 또 어딘가에서는 엉뚱한 감동을 주며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화자도 언젠가 자신의 노력과 분노가 그리 대단치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웃을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은 이 세상의 불균형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그 답은 각자의 몫이지만, 어쩌면 그 답은 생각보다 간단할지도 모른다. 그냥, 잘 살면 되는 것이다.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는 회사에서 좋아하는 여자 동료 지유가 남편과의 사별 후 후쿠오카에서 지낸다는 소식을 듣고 지훈이 단숨에 달려가 3년만의 재회를 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혼욕 온천탕이라는 장소가 주는 긴장감, 둘 사이의 기묘한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지훈은 결국 지유와의 하룻밤 계획이 실패했다. 나름의 계획을 완전히 지유에게 간파당했고,
지훈이 작전에 실패하고  홧김에 '이 씨발년이. 열었으면 닫아놔야 할 거 아냐.'라고 말하며 찌질하게 울며 잠드는 장면은 읽는 이들로 하여금 왠지모를 통쾌함과 우스꽝스러움에 웃음이 나게 한다.
둘 사이가 진전이 있으려면 지훈이 어떤 태도를 보였어야 했을까?
기본적으로 지훈은 나름대로 훈남 스타일로 묘사된다. 마음속의 독백 장면에서 나름 그는 그동안 여자들을 꼬시기 위한 작전들과 여자들이 본인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해 오만과 자만을 가지고 생각한다. 만약 지훈이 나였고, 정말 지유를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어떻게 할지 상상해 보았다.
우선 3년만에 만난 만큼 조심스럽게 다가가지 않았을까? 시간이 흐른만큼, 지유는 많이 달라져 있을지도 모르고 그동안의 공백이 있기에 더욱 신중히 만났을거라 생각한다.
애초에 그럴거라면, 나만의 시간을 보내는 비중을 더욱 높였을 것 같다. 잠깐 밥이나, 반주정도만 곁들이며 시간을 보내고
나름의 혼자 일본여행을 추구 했을 것 같다. 뭐... 가서 만나보니 지유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면, 다음에 다시올 2번째, 3번째 후쿠오카를 기약하지 않았을까?
설령 그런 긴장감이 연출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고 곧 이에 대한 결과로써 내가 실망하게 되는 상황을 마주한다 하더라도 지훈처럼 분통을 터뜨리진 않았을 것 같다.
마치 그게 마지막 기회였던 것 처럼 말이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 지훈은 공격력 스탯만 잔뜩 올렸고 방어력 스탯은 하나도 올리지 않은 게임 속 캐릭터 같다.
매우 공격적으로 대시를 하지만, 한수 위에 올라와있는 사람의 공격을 받고는 처참하게, 비참하게 무너져 내린다.
나는 어릴적에 아버지에게 항상 '겸손하라, 숙일줄 아는 사람이 되라'라는 말을 듣고 커왔다. 그리고 여전히 그 말을 100은 아니어도 90은 실천하기 위해 노력한다.
겸손과 숙이는 태도는 어릴 적엔 그저 당연한 미덕처럼 여겨졌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것이 인간관계의 핵심임을 깨닫게 된다. 지훈의 이야기를 보며 나는 그 교훈을 새삼 떠올렸다.
결국, 상대방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태도 없이 얻으려는 것은 모래 위에 쌓은 탑과도 같다는 것을 말이다.
지훈이 후쿠오카에서 얻은 경험은 어쩌면 실패일 수 있지만, 동시에 그에게 필요한 자각의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단순히 지유를 만나고 싶었던 게 아니라 자신에 대한 그녀의 감정을 확인받고 싶어 했다. 
그러나 관계란 혼자서 완성할 수 없는 퍼즐 같은 것이다. 나의 조각이 아무리 정교하고 화려하더라도 상대방의 조각과 맞물리지 않는다면 결국 그 그림은 완성되지 않는다.
지훈의 모습에서 나는 나 자신을, 그리고 우리가 관계에서 종종 저지르는 실수를 발견했다.
지훈에게는 상대방을 사로잡기 위한 전략이 아니라, 겸손히 상대를 바라보고,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는 그 첫 걸음이 필요했다. 그것이야말로 후쿠오카에서의 실패를 진정한 배움으로 전환할 수 있는 열쇠일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사람들과의 관계를 다시금 되돌아보게 되었다.
후쿠오카에서의 지훈처럼 우리도 때로는 삶의 작은 실패를 통해 더 나은 내가 되는 길을 배운다. 이번 단편이 지훈과 나에게 남긴 것은 바로 그런 성장의 기회였다.

 

 

- 끝 -

'독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순  (0) 2025.01.21
채식주의자  (2) 2024.12.27
결혼·여름  (0) 2024.12.20
달까지 가자  (3) 2024.11.24
소년이 온다  (19) 2024.11.18

알베르 카뮈는 이 작품을 통해 '부조리' 개념을 이야기한다. (부조리에 대한 개념은 그의 책 이방인에서도 다루어진다고 하는데, 이 내용은 추후에 다시 다루어보도록 하겠다)
참 어려운 책이다. 번역이 어렵게 된 탓일까?

인간은 삶의 의미를 끊임없이 찾으려 하지만, 그 과정은 본질적으로 무의미한 세상과 충돌하며 부조리를 낳는다.
그러나 카뮈는 이러한 부조리 속에서 항복하거나 어떤 알 수 없는 위안을 찾는 대신
인간은 이 세상에 발을 디디고 아름다움을 발견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역설한다.
결혼과 여름이라는 제목은 단순히 계절이나 의식적 행위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카뮈가 찬미한 지중해적 삶의 태도, 즉 세상의 아름다움과 절망을 동시에 끌어안는 자세를 의미한다.
여름은 풍요와 열정을, 결혼은 자연과 인간, 삶과 죽음의 융합을 상징한다.
특히 그가 묘사하는 자연의 장면들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무게를 직시하게 만드는 거울이라 해야 할까....
결혼은 한 개인의 선택이나 관계를 넘어서 삶과 세상에 대한 궁극적인 수용을 상징하며 여름은 이러한 수용 속에서도 삶의 생생함과 온기를 발견하는 카뮈적 시선을 보여준 것 같다.

 

 

샐러드의 끝에서 만난 하늘빛 맥주 한캔 (부제 : 샐러드 5일 챌린지를 마치며..)


삶은 종종 내게 하나의 모순처럼 느껴진다. 한편으로는 뜨거운 감정에 사로잡혀 무엇인가를 붙잡고자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붙잡으려는 것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가고 있음을 안다.
우리는 선택의 연속인 인생을 살고 있다. 누군가의 선택이 옳든 그르든 그것은 결국 그들의 몫이겠지만 나는 내 안에 움트는 부조리를 부정할 수 없다.

사랑은 부조리 속에서도 우리를 일어서게 만든다. 그것은 여름과 같다.
뜨겁고 찬란하며 그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우리는 그 속에 뛰어든다.
선택의 무게는 시간 앞에서 드러날 것이다. 나는 이 여름을 품고 가시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 어떠한 이름도 남기지 못하더라도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오늘도 샐러드 한 접시를 앞에 두고 앉아 있었다. 삼킬때 목구멍이 꽉차는 자그마한 고구마와 얇게 썬 할라피뇨와 상추 잎, 드레싱이 거의 묻지 않은 닭가슴살 조각들이 담긴 접시를 보며 내 선택이 삶의 어느 부분을 대표하는지 생각했다. 절제와 균형, 더 나은 나를 위해 계산된 행위. 하지만 얼음컵과 옆에 놓인 하늘빛 캔맥주는 그와 반대로 무언가 더 원초적인 갈망을 상징했다.
절제와 해방의 춤은 끝없이 반복되며 그 가운데서 흔들리는 나를 발견한다.
캔을 열자 탄산의 미세한 울림이 퍼진다. 맥주는 그 자체로 자연이었다. 태양 아래 열린 들판의 향기 그리고 흐르는 강물의 청량함. 그러나 그 속에는 인간이 자연을 길들이고자 만든 흔적이 배어 있었다. 샐러드가 내게 건강과 미래를 약속하는 것이라면, 맥주는 순간의 해방,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짧은 위로라고 할 수 있다.
알베르 카뮈는 자연을 삶의 은유로 사용했다. 그는 바다를 통해 무한함을, 태양을 통해 인간의 고독과 열정을 그려냈다. 내 앞의 샐러드와 맥주도 어쩌면 그런 대립의 상징일지도 모른다. 하나는 자발적인 통제와 삶의 목표를 향한 행위이고 다른 하나는 부조리 속에서 놓아버리고 싶은 마음의 반영이다.
삶은 때로 맥주의 탄산처럼 빠르게 사라지는 기쁨으로 채워지기도 하고 샐러드의 각양각색의 이파리들처럼 질긴 균형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리고 나는 그 사이 어딘가에서 흔들리고 있다. 맥주의 쓴맛과 샐러드의 밋밋함 속에 어떤 날은 하나를 택하고, 어떤 날은 둘 다 내 몫으로 삼으며.


하늘빛 맥주캔을 기울이며 나는 어느새 태양 아래 생겨난 그림자를 떠올린다. 빛이 내리쬐는 만큼 그림자는 더욱 짙어진다.
그것은 서로를 비추면서도 결코 하나로 어우러질 수 없는 두 존재처럼 나와 어떤 다른 마음 사이에 놓인 부조리한 틈을 상징한다.
겨울 한낮의 햇빛 아래 산책길, 그 빛은 모든 것을 더 선명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발밑에 그림자를 길게 드리운다. 그 빛은 달콤하지만 눈부심이 동반된다. 그 빛 속에서 고스란히 드러나는 나의 솔직한 감정들,
그러나 그림자는 늘 따라붙었다. 그것은 결코 나에게 속하지 않는 무엇에 대한 불가항력적인 깨달음이었다.
샐러드와 맥주처럼 어쩌면 처음부터 다른 궤도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들은 진실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햇빛처럼 뜨겁고 현실적이었다. 나는 지금도 샐러드 한 조각을 씹으며 그 흔적이 남긴 씁쓸함과 맥주의 청량함을 동시에 맛본다.
사람은 빛과 그림자 속에서 길을 찾는다. 그것은 내게 빛이었다가, 다시 그림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결국 나라는 사람의 궤적을 완성시킨다.
빛은 사라질지라도 나는 산책을 멈추지 않는다.
샐러드의 푸른색이 고요한 결단이라면, 맥주의 쌉쌀한 거품은 그 결단의 흔들림이다. 그러나 부조리는 바로 거기에 있다. 결단과 흔들림 모두가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사실에.
모든 그림자는 언젠가 끝난다. 그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새벽의 빛일 수도, 완전한 어둠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길 위에서 끊임없이 걷고 있는 나 자신이다.
삶은 나와 부조리 사이의 대화다. 노랑빛 거품 속에서, 초록 잎사귀 사이에서 그 대화를 계속 이어간다. 결말은 정해져 있지 않다. 그러나 어떤 실패도 영원하지 않으며 모든 성공은 기다릴 줄 아는 사람에게 찾아온다.

산책길의 태양이 저물수록 그림자는 짙어진다. 누군가는 그것을 어둠으로 보겠지만 나는 그 속에서 희미한 가능성을 본다.
카뮈는 부조리를 말하며 삶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과 답의 부재를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가 강조했던 건, 부조리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선택해야 한다는 우리의 태도였다.
샐러드의 차분함과 맥주의 자유로운 거품 사이에서 나는 이 모순된 세계를 껴안는다.
부조리의 경계에서 가장 흔들리는 것은 마음이다. 어떤 이는 완벽한 정답을 찾으려 하지만 나는 정답보다 나은 질문을 찾으려 애쓴다. 그리고 그 질문 속에서 나를 찾는다.

알제리의 바다에 있는 나를 상상한다. 삶의 길은 때로 나를 고요한 해변으로, 때로는 거센 폭풍으로 몰아넣는다.
바닷물의 냄새를 맡으며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가 찾고 있는 것은 평온인가 아니면 폭풍 속에서의 자유인가?
카뮈는 해답 대신 이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라고 말했다. 사랑과 삶이 모두 부조리의 경계에 서 있음을 인정하며 나는 이 모순을 껴안고 앞으로 나아간다.
어느 날 나는 샐러드의 초록빛 고요함을 끝까지 느끼는 동시에 맥주의 쌉쌀함을 흠뻑 누릴 것이다. 그리고 그날 나는 내 앞에 펼쳐질 모든 가능성을 마주할 것이다.
부조리가 있어도 삶은 여전히 나에게 웃음을 안겨줄테니

 

 

- 끝 -

'독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채식주의자  (2) 2024.12.27
일의 기쁨과 슬픔  (1) 2024.12.25
달까지 가자  (3) 2024.11.24
소년이 온다  (19) 2024.11.18
섬의 애슐리  (0) 2024.10.28

 

이 책을 읽기 시작한 순간 나는 책에 잡아먹혀버렸다...(?)
세탁기에서 자신의 일이 끝났다는 멜로디가 울렸지만 나의 소중한 빨래들은 "그래... 언젠가는 널어주겠지..." 라는 희망 속에서 한참 동안 방치됐다.
결국 책을 덮고 양심의 가책(?)을 느껴 억지로 빨래를 널었지만 널은 후 다시 책을 들고 침대로 직행했다.(빨래를 널고 난 뒤 원래는 불을 끄고 내일 출근을 위해 잠드는 것이었다.) 달까지 가자는 그만큼 중독성이 강하다.

 

 

 

"누가 내 얘기를 책으로 쓴거지?"  직장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경험해보았을 사건들이 모두 이 책에 모여있다.
팀장님과 동료들의 에피소드는 현실을 너무도 절묘하게 반영해서 본인들의 사연들과 매칭되며 킹받는 경험을 하게된다. 진짜다.
이리 자조적으로 웃길수가 없고, 직장에서만 발생할 수 있는 사람들과의 긴밀한 눈치, 언행 등에 대해 킹받을 수밖에 없다.
직장인이라면 어쩔 수 없이 매일 겪는 그 애증의 현실을 이렇게 유쾌하게 풀어낼 수가 있다니. 나는 이 책을 누군가에게 추천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책은 세 주인공의 이더리움 투자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당시 누구나 한 번쯤은 투자에 손을 댔거나 아니면 최소한 코인 얘기를 귀가 닳도록 들었을 것이다.
작가는 단순히 투자 이야기에 머무르지 않고 이를 통해 직장 내에서 벌어지는 기묘한 이야기들, 인간관계의 미묘한 역학까지 흥미진진하게 엮어냈다.
달까지 간다라는 책을 비유하자면... 판교의 '밥볶다'라는 밥집이 떠오른다. 이곳은 대패삼겹살과 채소, 김가루, 그리고 밥이 환상적으로 어우러진 볶음밥 맛집인데, 이 소설도 딱 그렇다.
마음이 맞는 동료들과 은밀하게 모가는 단체 메신저 방의 이야기들, 그리고 비밀스런 그들의 회동, 킹받게 하는 팀장, 거기에 화룡정점으로 가상화폐의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웃음과 공감을 자아내는 하나의 완벽한 문학 볶음밥을 만들어냈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독자는 어느새 밥볶다의 식탁 앞에 앉아 있게 된다. 독자들이 갖고 있는 직장인의 현실적인 냉혹함이 차갑고 싸늘히 식어있는 불판이라면, 책을 읽는 순간 가스불은 켜진다. 갖가지 이 책에서 보여주는 다양한 재미요소로 달구어지고 한데 모인다. 이내 "치익" 소리를 내며 코끝을 자극하고 곧이어 동료들과의 즐거운 시간, 이더리움의 희망과 웃음이 김처럼 피어오른다. 이 책을 읽는 우리는 퇴근을 하고 침대 위에서 이 책을 펼쳐읽으며 대단한 식재료나 화려한 파인 다이닝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배고픈 점심시간, 볶음밥 한 그릇으로도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는 우리 직장인의 삶에 대한 은유를 보여준달까?

 

 

 

몇번이나 강조한다. 달까지 가자는 단순히 웃기고 즐거운 책 그 이상이다. 직장인의 삶 속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동시에 소소한 행복과 유대감을 깨닫게 한다. 등장인물 셋은 귀엽고 통통튀는 매력도 있어 읽는 동안 은은한 웃음도 떠나질 않는다. 직장 생활에 지쳐 있거나, 이더리움 투자 열풍 속에서 좌절이나 승리감을 맛본 경험이 있다면 이 책을 통해 그 기억을 유쾌하게 떠올리며 재충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 책은 분명 당신을 웃게 만들 것이다. 웃음이 필요한 순간 이 책을 펼쳐보자. 비록 우리가 매일 현실의 "바닥을 치는 개잡주" 같은 날을 보낼지라도 웃음만큼은 "Outstanding"할 수 있을 것이라 나는 확신한다. (아님말고.)

 

 

 

내가 느낀 킹받는 장면들을 모두 모아보았다. 일부는 너무 길기 때문에 줄글형태로 요약해 기록해둔다.

 

 

 

"팀장님, 15분 전이에요. 꼭 지금 드셔야겠어요?"
"응, 나는 마셔야겠어. 여태까지 줄 선 게 아깝잖아. 거의 다 왔잖아."

 

 


까페 밖으로 나왔다. 10시 54분. 팀장이 "뛰어!"라고 외쳤다.

 

 

 

"그럼 다행이지. 다해씨가 아침부터 뚱한 표정 하고 있어서 기분 안 좋을 뻔했는데, 그 커피 마시고 기분 좋아졌잖아."
역시 보통 놈이 아니다. 확실히 노멀은 아니야. 나는 눈을 흐리게 뜬 채 방긋이 웃어 보였다.
"다행이네요, 다행"
"그렇지? 아주 다행이야."

 

 

 

각 등급의 알파벳은 이런 뜻이었다.
Outstanding: 특출함
Incredible: 뛰어남
Meet requirement: 요구 충족
Below requirement: 요구 이하
Need supplement: 보충 필요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바꿔 불렀다. 아무래도 이쪽이 훨씬 직관적이었다.
O: 오짐
I: 인정
M: 무난
B: 별로
N: 나가

 

 

 

연구개발실의 조직도에 뜬금없이 '빅데이터TF'라는 가지가 하나 생겨났고 그 아래에는 함박사와 그의 비서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중략...
"대체 그 아저씨가 작년에 뭘 했는데? 초코밤이랑 츄잉껌 개수 센 것밖에 더 있어?"

 

 

 

* 식후 커피가 스타벅스면 순수한 동료, 커피빈이면 썸인 이유에 대해...

 

 

 

12시 3분이 되는 순간 나는 바퀴 달린 의자를 스윽 밀고 일어나면서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 오늘 약속 있어서 점심 따로 먹을게요. 맛있게 드세요."
동시에 공용 옷걸이에 걸어둔 코프를 팔에 걸고 후다닥 복도로 나갔다.

 

 

 

이쪽으로 또 저쪽으로 뒤뚱뒤뚱 걸으면서 귀신처럼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쓰레기들을 피하며 으악! 으악! 소리 지르다 이내 웃었다.
참 이상했다. 소리를 지르고 난 뒤에는 곧바로 웃음이 따라나왔다. 비록 그게 헛웃음일지라도 말이다. 비명과 웃음은 어쩌면 한 세트 일지도 몰랐다.

 

 

 

그에게는 내가 점심시간을 3분 더 썼다는 사실이 중요한게 아니었다. 아랫사람인 내가 고분고분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 것이, 자신의 나이와 경력과 그로 인한 권위를 세워주지 않는 것이 못마땅한 거였다.

 

 

 

컨트롤 키와 W키를 동시에 눌렀다. 팀장이 내 등 뒤쪽으로 통로 삼아 지나갔다. 나는 또다시 손가락을 재빨리 놀렸다. 컨트롤 + 쉬프트 + T. 저 멀리 창문 너머로 함박사가 이를 쑤시면서 어슬렁어슬렁 걸어들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중개인 아주머니가 거 보라는 듯 뿌듯한 표정으로, 그러나 너무 호들갑스럽지는 않게 말했다.
"요게 또 너무 괜찮지요?"
대답은 못하고 고개만 연신 끄덕였다.

 

 

 

...투자했던 회사에 관한 뉴스가 나오면 언니는 전에 없이 살스럽게 욕을 해댔다. '쥐벼룩을 놔도 뛸 장에 저 혼자 바닥을 쳐 뚫고 앉아 있는 개잡주'라면서.

 

 

 

불행히도 팀장의 '다 같이'는 그런 뜻이 아니었다. 한테이블에 모두가 모여 정말로 '다 같이' 점을 보자는 말이었다. 서로의 점괘를 함께 듣자는 말이었다.

 

 

 

나는 결코 알고 싶지 않았던 윤과장의 결혼 준비 과정과 파혼 위기, 두 집안의 갈등 같은 것들을 들으면서 정말이지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그리고 바로 지금 나만큼이나 울고 싶은 사람은 윤과장일 거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다 나와. 열심히는 안 한다고. 꾀 쟁이라고. ...중략... 근데 열심히 하면 더 할 수 있는 여력이 있다네. 그치? 맞아? 아니야?"
미치겠다. 점점 더 맞는 말만 해서 갈수록 섬뜩해졌다. 애써 팀장의 눈길을 피해보ㅓ려 했지만 눈이 관자놀이에 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날 선 시선이 다 느껴졌다.

 

 

 

나만 당할 순 없었다. 팀장의 점괘도 같이 들어야겠다고, 그래야 속이 시원해질 것 같다고, 억울해서 나도 다 듣고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윤과장도 나랑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팀장의 입을 주시하고 있었다. 팀장이 나와 윤과장을 둘러보며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기들은 이제 가. 나는 개인적으로 물어보고 싶은 게 좀 있어서."
기가 찼다. 야, 너만 개인이니? 나도 개인이야! 정말 보통 놈이 아니었다.

 

 

 

* 남은 얼마남지 않은 점심시간 콩나물국밥을 후루룩 먹고올지 고민 하던 중 결국 핫도그 세개를 설탕 뿌려 먹는 장면

 

 

 

'과자 무료 제공'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버튼을 눌렀더니 '장점은 최소 10자 이상 입력해주세요'라는 알림창이 떴다.

 

 

 

"알겠어. 내가 예약할게. 뚜껑 열리는 걸로!"
하지만 지송이야 예약해둔 뚜껑 열리는 렌터카에 정작 지송이는 못 타게 될 위기였고, 동시에 은상 언니의 뚜껑이 열리기 직전이었다.

 

 

 

지송이는 아주 커다란 챙이 달린 플로피 밀짚모자를 쓰고 있었다. 은상 언니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껌뻑이며 말했다.
"쟤 우리랑 허니문 가?"

 

 

 

* 지송이의 트렁크가 고장나는 장면, 그리고 다해가 '오리지널'과 '스타일'의 차이를 느끼는 장면

 

 

 

"OS 업데이트부터 할게요. 해도 되죠?"
"응, 가상화폐 할 수 있게만 해주면 돼."
.....
중략
....
"아무래도 이제 때가 된 것 같아"
"무슨 때?"
"엑싯을 해야 할 때."

 

 

 

나도 그 얘기 들었는데...... 솔직히 그게 부럽나? 그게 좋을 것 같아? 좋을 것 같지? 알고보면 절대로 좋은 게 아니야. 중국 송나라 시대 학자 중에 정이라는 사람이 한 말이 있어. 인생삼불행.......
노력을 안하는거야. 타고난 재능은 딱 거기까지일 뿐인거야. 결국 가진 재능을 갈고닦질 못해. .............. 그러면 사람이 말이야, 발전이 없는거야. 발전이 없으면 도채되는 거고. 그리고 마지막이 뭐냐, 소년등과일불행이야. 일불행이 무슨뜻이야. 제일로다가 불행하다는 거야, 소년등과하는 것이.

 

 

 

"아니, 말이 잘못 나왔네요. 저 CLS랑 E클래스부터 볼게요. S클래스도 보여주시고요."
...중략...
이런 고급 세단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저 어니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하는 수밖에 없었다. 언니가 "흐음"하고 하고 감탄사를 내뱉으면 우리도 "으음"을 했고, "와우" 하면 "오우" 했다.

 

 

아니 그런데... 노파심에 말하지만 실제로 이러한 투자는 매우 좋지 않은 투자방법이다. 불확실하고 변동성이 큰 가상화폐를 적립식으로 매수하는 것은 시기에 따라서는 매우 부적절할 수 있다.

이 책은 사실 최고의 시나리오를 가정하에 이더리움 투자 시기를 결정했다.
책 속에서 다해는 2017년 5월부터 2018년 1월까지 이더리움을 적립식으로 매수하여 총 3억 2000만 원의 이익을 얻게 된다.

이는 등장인물들에게 해피엔딩을 가져다주는 중요한 배경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러한 투자는 언제나 장밋빛 결과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소설 속 투자 시점이 몇 달 늦어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2018년 4월부터 12월까지 적립식으로 매수를 했다면, 결과는 처참했을 것이다.
이 시기는 이더리움 가격이 급락한 최악의 시나리오에 해당한다. 단순 계산으로, 다해가 동일한 원금(약 1억 원 정도로 가정한다)을 투자했을 경우,

당시 평균 매수가와 12월의 최저가(약 82달러)를 비교하면 3억 2000만 원의 이익은커녕 약 5000만 원에서 8000만 원 사이의 손실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크다.

만약 이런 일이 작속에서 벌어졌다면 소설은 전혀 다른 결말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다해는 자신의 소소한 꿈마저 저버려야 했을 것이고. 은상과 지송의 관계 또한 다시 치열한 갈등으로 변했을 가능성이 높다.

다시금 암호화폐에 대한 투자열풍이 뜨거워지고 있는 오늘날, 이 책의 이야기는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에서 매우 축복받은 케이스임을 명심하자. :)

 

 

 

'독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의 기쁨과 슬픔  (1) 2024.12.25
결혼·여름  (0) 2024.12.20
소년이 온다  (19) 2024.11.18
섬의 애슐리  (0) 2024.10.28
옥상에서 만나요  (5) 2024.10.23

 

지난번 광주를 여행했을 때, 나는 이 책 소년이 온다를 미처 읽지 못했다. 아마 그때 이 책을 읽었더라면 나의 발걸음은 지금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향했을 것이다. 여행 중 들렀던 여러 장소들 속에서 그저 자동차로 근처를 지나갔었을지 모르는 가장 깊은 흔적을 남겼을 도청과 금남로를 떠올려본다. 그곳을 찾아갔다면 어떤 느낌이었을까? 도청 앞에 서서 차갑게 식은 돌바닥에 새겨진 역사의 고통을 떠올리고 그 고통 속에서 으스러져간 사람들의 숨결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금남로에서는 눈앞에 펼쳐진 현재의 번화와 과거의 끔찍했던 현실이 겹쳐 보이면서 그 간극 속에서 마음 한편이 무거워졌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 여행길에서 나는 광주의 복잡하고 환한 번화가를 거닐기도 하고 여유롭게 땡볕을 돌아다니며 배스가 전국에서 제일 많다는 영산강을 찾아, 줄기따라 하류에서 상류로 이동해가며 낚시와 미식, 음주가무 여행으로 하루를 보냈다. 세월이 그대로 남겨진 낡은 골목길을 걷기도하고 조용히 흐르는 영산강의 걸을 수 있는 곳들을 찾아다니며 한가로움을 즐겼던 그 날들. 나는 광주의 과거를 모르고도 그곳의 풍요로운 여행에 푹 빠져있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돌아보니, 그 여행의 즐거움이 한없이 가벼워 보인다. 내가 광주를 누볐던 그 땅이 사실은 얼마나 뜨겁고 처절했던 순간들을 품고 있는지, 그 속에서 피어난 자유와 연대의 정신이 오늘날의 광주를 만들었는지에 대해 아무런 인식 없이 떠돌았던 나 자신이 조금은 부끄럽기까지 했다. 역사의 무게를 알지 못한 채 그저 빛나는 오늘만 바라보며 지나친 여행이었지만 이 책은 나로 하여금 그 땅에 다시 가야 할 이유를 만들어주었다. 이번에는 도청에서, 금남로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느껴야 할 것이다.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배경으로 역사의 한 장면을 각기 다른 인물들의 시선으로 조명하며 그 깊은 상처를 들춰낸다. 내게 있어 이 소설은 단순히 당시의 참상을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 비극이 오늘날 우리의 삶과 인간 본질에 어떤 질문을 던지는지 성찰하게 만들었다. 다소 기분이 이상해지는 책이다. 그래서 읽기가 꽤나 힘들었고 시간도 들었지만 찬찬히 뜯어보고 의미를 고민해보았다. 이번 독후감에서는 동호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죽음과 생존 그리고 책에서 이야기하는 '혼'의 상징성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역사적 진실과 인간의 존엄에 대해 다시금 고민하게 하는 시간을 가져보고자 한다.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동호는 친구 정대의 죽음을 목격하고 그의 시신을 지키려 애쓰던 소년이다. 장례조차 치르지 못한 죽음이 남긴 상처는 단순히 개개인의 고통으로 그치지 않는다. 이 문장은 정대의 부재가 동호의 삶 전체를 삼켜버린 모습을 은유적으로 담아낸다. 장례식 없는 죽음은 완결되지 않은 비극이며 이는 이후의 장에서 남겨진 사람들의 몫에 대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당시 광주의 참상이 개인의 삶과 지역 사회를 어떻게 영원히 짓눌렀는지를 보여준다. 죽음의 처리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현실은 생존자들에게 끝없는 죄책감과 슬픔을 남겼고 동호의 내면을 끊임없이 파괴했다.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작품은 동호를 비롯한 광주의 피해자들이 겪은 도륙의 현장을 생생히 재현하며 인간 존재의 본질을 묻는다. 한순간에 짐승으로 취급되고 이름 없는 고깃덩어리로 던져지는 현실 속에서 인간의 존엄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역사의 비극은 인간이 얼마나 쉽게 타락할 수 있는지 증명하지만 동호와 같은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 존엄을 지키려는 필사적인 노력 또한 느낄 수 있다.

 

 

 

광주의 학살은 단순한 물리적 죽음이 아니라 인간의 기본 권리와 정체성을 짓밟는 일이었다. 동호가 본 군인들의 잔혹한 행위는 역사 속에서 반복된 비극이며 이를 외면하거나 부정하려는 정부의 모습은 구밀복검(口蜜腹劍)이었다. 겉으로는 국민을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면서도 뒤로는 잔혹하게 진실을 숨기고 무고한 생명을 파괴했던 것이다.

 

 

 

혼한테는 몸이 없는데, 어떻게 눈을 뜨고 우리를 지켜볼까.

 

 

 

소설에서 혼은 단순한 영혼이나 유령이 아니다. 그것은 잊히지 않는 기억과 진실을 증언하는 존재로서 상징성을 가진다. 이 질문은 죽음을 초월한 존재들이 여전히 살아남은 자들과 함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 혼은 피해자들이 남긴 고통과 정의에 대한 갈망이며 우리가 계속해서 직면해야 할 진실이다.
혼이 지켜본다는 것은 망각하려는 현대 사회의 태도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소설은 독자들에게 묻는다. 우리는 이들을 잊지 않고 그들이 남긴 역사의 흔적을 지킬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렇지 못했을 때 훗날 우리는 또 어떤 사건이 반복 될 것이며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인가?

 

 

 

당신을 잃은 뒤, 우리들의 시간은 저녁이 되었습니다.

 

 

 

광주 이후의 삶은 저녁으로 멈춰버린 것과 같다. 더 이상 밝아지지도 어두워지지도 않는 끝나지 않은 저녁. 이는 피해자와 생존자들이 겪는 정지된 삶을 상징한다. 참혹한 나날들이 지나고 빠르게 이후 일상의 복귀를 시도하지만 저녁의 어둠은 여전히 그들의 삶을 붙잡는다. 사건의 이후에도 그 당시의 현실을 알리고, 진상을 바로 잡기위해 끝없이 사람들이 희생되어야 했다. 저녁은 무력감과 고립감을 의미하기도 한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애국가와 태극기는 본래 국민의 존엄과 자유를 상징해야 한다. 하지만 광주에서 그것은 역설적으로 학살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이는 진실을 왜곡하고 침묵하려 했던 정부의 태도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런 비극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과거를 직시해야 한다는 점이다.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고통을 이해하며 여전히 진실을 외면하려는 힘에 맞서는 것이 우리의 과제다.

 

 

 

소년이 온다를 다 읽기도 전에 더 알아보고싶은 마음에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시청했을 때, 그 감정은 단순히 슬픔에 머물지 않았다. 분노와 죄책감, 그리고 두려움이 동시에 몰려왔다. (나라면 총을 들고 계엄군과 대치할 수 있을까? 진격하는 탱크 앞에 나가 설득, 회유할 수 있을까?) 이 책은 역사적 진실이 얼마나 철저히 은폐될 수 있는지 그 결과로 얼마나 많은 생명과 존엄이 부정될 수 있는지를 뼈아프게 일깨웠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러한 비극적인 진실이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제대로 교육되고 이해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5.18 민주화운동을 단순히 한 지역의 비극으로만 기억하거나 왜곡된 정보, 혹자는 정치적인 이슈에 가려진 채 진실을 접하지 못하고 있다. 비교적 가까운 현대사임에도 불구하고 교육과 공론화의 부재는 이러한 무지를 방치해왔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에 대해 스스로를 비판해야 한다.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살아가기 위한 나침반이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의 한국 사회는 이러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광주의 비극은 단순히 광주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억압과 폭력 속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이며 인간 존엄과 정의를 지키려는 노력의 상징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그들의 희생에 충분히 응답하지 못하고 있다. 이 사건을 단순히 시험 문제로만 기억하거나 일부의 문제로 치부하는 교육 체계와 사회적 무관심은 그들을 다시 한 번 죽이는 일이다.

 

 

 

다큐멘터리 속 장면들은 한강의 글과 맞닿아 있었다. 화면 속 시체로 가득 찬 체육관 울부짖는 가족들 그리고 손으로 눈을 가린 채 떠밀려가는 학생들. 총을 든 민간인 젊은이들. 책 속 동호의 눈앞에서 무너진 존엄성과 다큐멘터리가 보여준 현실은 하나의 큰 물음으로 이어졌다. 왜 우리는 이 이야기를 잊으려 하는가? 왜 우리는 이 역사를 마치 우리와 무관한 일처럼 외면하는가?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는 명확하다. 첫째, 우리는 5.18 민주화운동을 단순히 '민주주의의 교훈'이라는 낭만적인 구호로 소비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철저히 구조적이고 제도적인 문제를 성찰하며 앞으로도 되풀이되지 않도록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는 경고이다. 둘째, 우리는 진실을 직시하고 왜곡된 정보와 싸우며 이를 후대에 올바르게 전수해야 할 책임이 있다. 이는 단순히 교육자나 정치인의 일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기억하고 공유해야 할 공통의 의무이다.

 

 

 

지금의 한국 사회는 민주화된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그 날의 비극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교육 현장에서는 제대로 된 역사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고, 많은 사람들은 5.18의 참상을 뉴스나 유튜브의 일부 자료로만 접하며 단편적인 지식만을 얻는다. 이러한 현실은 진실을 왜곡하려는 세력에게 공간을 내어주는 셈이다.(음모론 같은 소릴하는게 아니다. 자신의 입장, 믿는 신념(?), 이득을 얻기 위해 실제로 왜곡하려는 자들, 가치를 훼손하는 자들이 있다는건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광주의 비극을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그들의 목소리를 더 많이 듣고 더 깊이 이해하며 이를 사회적으로 환기해야 한다.

 

 

 

이 책과 다큐멘터리가 남긴 감정은 단순히 눈물로 끝나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행동하라는 명령이다. 더 이상 '끝나지 않은 저녁' 속에 머무르지 않기 위해, 우리는 진실을 드러내고 공유하며, 교육과 제도적 변화를 요구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그들의 희생에 응답하는 유일한 방법이며 또한 미래를 위해 우리가 감당해야 할 의무다.
광주는 역사가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 있는 이야기다. 우리가 외면한다면 그날의 비극은 언제든 다시 찾아올 것이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무지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도륙된 고깃덩어리들이 아니어야 하니까."

 

.

.

.

 

번외

안녕하세요. 역사적 실제 사건을 다루는 책인만큼, 이 독후감 글을 읽으시는 분들도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해 되새길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제가 이 책을 읽으며 찾아본 몇가지 팩트 자료들을 읽기 쉽게 시간의 흐름순으로 간단히 준비해보았습니다. 제가 학습한 내용을 정리한 것으로 혹여 부족한 내용이 있다면 코멘트 달아주시면 보충토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제가 준비한 자료를 읽기전 다음 사항은 숙지해주세요

5.18 민주화운동은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으로 그 진실과 맥락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오늘날의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성찰을 위해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하의 내용은 정치적 이념이나 어떠한 특정 단체의 관점을 대변하지 않으며 오직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작성되었습니다. 이 글은 사건의 진상과 주요 내용을 객관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최대한 엄정한 자세를 유지하고자 하며 이에 대한 비판이나 의견이 있는 경우에도 반드시 구체적인 근거와 자료를 바탕으로 논의가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또한 역사는 사실에 기반한 기록과 공정한 해석에 의해 계승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편향된 관점이나 감정적인 반응은 배제되어야 하며 모든 논의는 사실 관계를 철저히 검증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5.18 민주화운동에 관한 논의는 이러한 원칙 하에서 진행되어야 하며 이를 벗어난 왜곡이나 선동은 민주주의 사회의 기본 원칙과 양립할 수 없습니다.

 

1. 5·18 민주화운동은 처음에 평화적인 시위로 시작되었다
1980년 5월 18일, 전남대학교 학생들이 집회와 시위를 통해 전두환 군부 세력의 비상계엄 확대와 민주화 억압에 항의하며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시위대는 주먹밥을 나누며 평화적으로 집회를 이어갔고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생필품을 지원하며 함께했습니다.
그러나 계엄군이 학생들과 시민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하면서 상황은 급격히 악화되었습니다.

2. 광주는 민주화 운동의 중심지였다
당시 전국적으로 계엄령이 내려진 가운데 가장 조직적이고 강력한 저항을 한 지역은 광주였습니다.
이는 단지 지역적 특성 때문이 아니라 시민들이 집단적으로 민주주의와 자유를 향한 열망을 행동으로 옮긴 결과였습니다.
전남도청에서 벌어진 최후의 저항은 한국 민주화 운동의 상징으로 남아 있습니다.

3. 계엄군은 과도한 폭력을 행사했다
계엄군은 민간인을 향해 무차별 발포를 가했고 진압 과정에서 시민들을 잔인하게 폭행하거나 고문했습니다.
당시 사망자는 최소 165명으로 공식 집계되지만(사망자 165명, 행방불명자 65명, 상이 후 사망자 376명 등 606명), 실종자와 확인되지 않은 희생자(암매장, 미신고 등)를 포함하면 실제 사망자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전투 병력으로 투입된 공수부대는 학생뿐 아니라 노인, 어린아이까지 폭력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4. 정부는 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하려 했다
당시 신군부는 5·18을 '폭동'으로 규정하며 시민군을 폭도로 몰아갔습니다.
사건 후 오랜 기간 동안 군사독재 정권은 언론 통제를 통해 진실을 감추고 왜곡했습니다.
군부와 정부는 광주 시민들이 북한의 사주를 받았다는 허위 사실을 퍼뜨렸습니다. 

5. 시민 정신
광주 시민들은 계엄군의 폭력 속에서도 서로 돕고 지켰습니다.
시민군은 계엄군의 무차별적인 폭력에 대응하여 무장을 시작했지만, 민간인을 보호하기 위해 철저히 규율을 유지했습니다. 

6. 국민적 저항의 시작
광주의 항쟁은 6월 민주항쟁 등 이후의 민주화 운동에 중요한 동력을 제공했습니다.
비록 광주의 진실이 오랫동안 가려졌지만 민주화 운동의 기억은 전국적으로 퍼졌고, 이는 결국 전두환 정권의 퇴진과 민주화 선언으로 이어졌습니다.

7. 밝혀진 진실
5·18 민주화운동의 진실은 1987년 이후 민주화 운동과 함께 점차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1995년, 특별법이 제정되어 전두환과 노태우 등 책임자들이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2011년에는 유엔이 5.18 민주화운동을 세계 역사적 기록물로 등재하였으며 이는 사건의 중요성과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은 상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5.18 민주화운동은 한국 민주주의의 터닝 포인트였으며 이를 통해 광주는 "민주주의 성지"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광주 시민들의 희생과 연대는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민주화 운동의 모범 사례로 평가받습니다.

8. 출처
 - 국가기록원, 5.18기념재단 공식 자료
 - 광주민주화운동사, 5.18기념재단
 - 5.18특별법 관련 재판 기록, 증언 자료.
 - 1980년대 언론 검열 기록, 헌정사 관련 자료.
 - 5.18기념재단 증언집.

 

 

 

 

끝.

 

 

'독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결혼·여름  (0) 2024.12.20
달까지 가자  (3) 2024.11.24
섬의 애슐리  (0) 2024.10.28
옥상에서 만나요  (5) 2024.10.23
이선 프롬  (4) 2024.10.09

 

애슐리는 섬에서 자신의 소소한 삶을 묵묵히 이어가면서도 본토를 향한 미묘한 열망과 두 사람, 셰인과 아투의 시선을 끌고 싶은 마음을 늘 가슴에 품고 있었던 것 같아.

그래도 그녀의 이 열등감은 결코 강렬한 어떤 부정적인 느낌이 아니었어, 음.. 마치 바다의 잔잔한 파도 같았지..

그러나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않으려는 그녀의 마음은 결국 자기를 희생하고 양보하는 모습으로 이어졌어.

 

 

 

그러고 보면, 애슐리가 진정으로 바랐던 건 단순히 인정받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어.

이 사람이든 저 사람이든, 애슐리는 늘 그들의 기대에 맞추려 노력했어.

목숨을 위협받으면서까지 이러한 모습들이 등장하는데, 난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그 모습들이 전혀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았어. 그 이유는 애슐리가 끝까지 순수하고 소박한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어쩌면 애슐리는 '착한 사람 증후군'일지도 몰라...)

어떤 부분들에서 내가 그렇게 느꼈는지에 대해 몇가지 애슐리에 대한 썰을 풀어볼게.

내 생각에 동의하는지 한번 읽어줘~

 

 

 

첫번째 썰

새엄마랑 아빠, 그리고 셰인이 본토로 떠날 때 애슐리는 따라가지 않았어.

"그래, 다들 행복하겠지~" 하면서도 마음 한켠에서는 자기가 그들 사이에서 외톨이일 뿐이라고 느꼈거든.

그러니 괜히 짐처럼 끼어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거지. 그래서 자기 식대로 섬에서 남아있기로 했어.

애슐리답게 그 결정을 하면서도 큰 소리 없이 조용하게 말이야.

사실, 조금만 자신을 위해 떼라도 써보면 좋았을 텐데... 너라면 뭐라구 할래?

참... 애슐리는 끝까지 자기 자신보다 남을 먼저 배려하는 소녀였어.

애슐리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한편으론 나도 저들과 함께 본토에서 새 출발해 볼까 싶은 마음이 살짝 들었겠지.

그래도 결국엔 "내가 가면 왠지 귀찮은 사람 되는 거 아닐까? 가면 내 섬에 남겨진 친구들은 어떡해?" 이런 생각에 멈췄을 거야.

솔직히 말해 너무 배려하다가 자기 자신을 또 놓아버린 셈이지... 사실, 마음 한편으로는 "나도 의지할 가족이 있었으면 좋겠어.." 싶지 않았겠어?

누가 봐도 너무 착한 우리 애슐리, 조금만 자기 자신을 위해 이기적으로 굴어봐도 아무도 뭐라 안 할 텐데 말이야.

 

 

 

두번째 썰

애슐리를 둘러싼 아이러니가 또 있지. 섬의 인기남이자 야망이 가득한 아투. 그는 공교롭게도 사진으로 인해 세계적으로 알려진 그녀가 인플루언서가 되었을 때 구애를 시작했어.. 그전엔 쌩까다가 말이야.... 참 웃프지?

아투가 사랑에 있어서도 진심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는 오로지 정치적인 야망으로만 가득 차 있었거든. 심지어 신도시 건설이 실패하자 자신을 위해서인지 애슐리를 위해서인지 모를 마지막 극적인(?) 결말을 계획해.

불타는 배에 그녀를 묶어 희생시키려 하는 장면이 바로 그거야. 그런데 애슐리, 그 와중에도 반항 한 번 없이 담담히 받아들였지. 얼마나 대단한 인내심이냐고!!

자 조금 앞으로 돌아가서... 애슐리 입장에서 아투가 자기를 향해 느닷없이 대시를 대책없이 시작했을때, 솔직히 기분이 묘했을 거야.

그동안 한 번도 신경 안 쓰더니 막상 유명해지자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걸 보면서도 애슐리는 "그래도 이게 사랑인가?" 하며 잠깐 기대했을지도 몰라.

하지만 아투가 하는 행동들이 하나같이 자기 정치적인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을 이용하고 있는걸 눈치챌 때 쯤 살짝 깨달았을지도.....

"아... 이건 나를 위한 관심이 아니구나…" 하면서도 괜히 또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래도 아투가 나를 필요로 하는 거잖아?" 이렇게 스스로를 위로했을지도 모르지. 참 애슐리답지?

만약 나였다면... 나는 바로 명치 개쎄게 때리고 반대로 걔를 묶어놓고 내가 수영해서 헤엄쳐 나올거야. 넌 어떻게 할래? 대답해봐.

 

 

 

세번째 썰

아투는 대놓고 악역이었지만, 셰인도 만만치않게 사람을 빡치게 만드는 구석이 있어.

애슐리의 이복 여동생인 셰인은 본토에서 얻은 나름의 교양(?)을 섬에서 뽐내며 언니를 깔보더라? "내가 본토에서 배웠는데~ 그거 그렇게 하는거 아닌데?" 이런 태도로! 아니, 거의 뭐 언니가 화장할 때 그 블러셔 치는 법까지 딴지 걸 태세더라니까?

심지어 이 동생은 결국 본토에서 사고가 나자 섬으로 돌아와 애슐리에게 온갖 요구를 해. 감놔라, 배놔라, 나랑 같이 사진 찍어라, 인터뷰 따오라, 이런 식으로 말이야.

왜 그랬겠냐고 아투놈처럼 얘도 자신의 이득을 위해 언니를 이용했을 뿐이었던거야. 개무시하다가 인플루언서돼니까 자기 스펙에 써먹을라고 그런거라고 아니 이거 ㄹ쓰다보니까 다시 개열받네

하지만 그런 요구조차도 애슐리에게는 여동생이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의미로 느껴졌던 거지. 작은 인정 한 마디가 그녀에겐 너무나 큰 의미였을 테니까.

실제로 작은 셰인의 한마디에...(셰인은 그냥 생각없이 말한 것 같은데..;;) 애슐리는 기분이 좋아지고말아....하...

어쨌든~ 딱 애슐리 스타일이잖아? 여동생이 내 말을 듣고 요구까지 해주니 그것만으로도 이미 자기를 인정해 주는 거라 생각했을지도.

아니, 마음이 너무 따뜻한 거 아니냐고!!!! 내가 애슐리였으면 사진 같이 찍는 척하다가 이상한 얼굴 나오게 일부러 엽사로 찍었을 거야.

결론적으로 ... 셰인은 자기 욕심만 챙기는 데 급급했지만 애슐리는 그 속에서도 누군가에게 사랑받는다는 의미를 찾아내려 한 거였어..

 

 

 

내가 정리한 세가지 썰 잘 보았니? 읽는 너도 인정하는 부분이지? 깊디 깊은 애슐리의 마음을 보며 우리도 무의식 속에 얼마나 고구마 같은 선택을 하고 있는지 되돌이켜보자.

애슐리가 소설속에선 표현하지 않았지만(겉으론 순하고 조용했지만) 그 내면에서는 끝없는 갈등과 자기희생을 해왔을지도 몰라.

그 섬의 명물 '앞서나가는 거북이'를 생각해보자. 사람들은 이 거북이들을 보면서 리더십이니, 노블레스 오블리주니 하며 존경을 보냈어.

하지만 애슐리 눈엔 달랐지. 뒤에서 앞거북이 꼬리를 물고, 끝없이 끌려가면서 그 '리더'를 따르는 꼴이 꼭 무슨 형벌 같다고 느낀 거야. 아닌가? 꼬리에 다른 거북이를 달고다니는 걸 형벌로 느낀건가? 애슐리가 둘 중 뭘 형벌로 느꼈는지 둘중엔 중요하지않아.

어쨌든 자기 발로 앞으로 나가는 게 아니라 어딘지도 모르게 이끌려가는 그 모습이 마치 자신을 닮았다고 여긴 걸지도 몰라.

사랑과 인정받기를 바라는 한 사람의 순수한 갈망 그리고 그 이면에 자리한 비극적이고도 아픈 희생이었어.

나에겐 세상 속에서 진심으로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지만 늘 외면당하거나 이용당하는 애슐리의 마음이 가슴 아프게 다가왔어.

그녀는 늘 누군가의 사랑과 인정을 받으려고 했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그걸 이용하더라.. 참 나쁘지?

애슐리는 그런 순간마다 어떤 마음이었을까? 자신이 누군가에게 방해가 될까봐 물러섰을 때 혹은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때..

그건 단순히 양보라기보다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자리를 찾고 싶었던 건 아닐까 싶어.

그리고 아투가 자신의 야망을 위해 그녀를 희생하려 할 때 비록 두려웠겠지만 애슐리는 이를 자신의 마지막 헌신으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

"결국 난 이렇게 끝나는구나.. 괜찮았어 이정도 삶이면.."하고 말이야. 셰인의 차가운 말 속에서도 애슐리는 여동생의 인정 한마디에 위안을 삼으며 그 관계에 작은 희망을 품었을 거고.

결국 애슐리는 우리의 또 다른 거울이야. 무언가를 쫓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거, 그리고 인정받기 위해 무리한 길을 따라가기보다는 자신의 길을 찾는 게 중요하다는 걸 보여주는 존재거든.

그러니까 애슐리와는 다르게 행동해보자, 어쩔 때는 딱 한 번이라도 "아니요!" 하고 거북이 줄에서 떨어져 나와 보는 용기를 가져보자.

애슐리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묻고 있어. "너도 혹시 저 거북이 줄을 물고 따라가고 있는 건 아닌지?"

 

 

 

애슐리의 마음이 가닿는 시...

즐거운 편지 - 황동규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끝.

'독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달까지 가자  (3) 2024.11.24
소년이 온다  (19) 2024.11.18
옥상에서 만나요  (5) 2024.10.23
이선 프롬  (4) 2024.10.09
지구에서 한아뿐  (6) 2024.09.04

 

 

 

웨딩드레스 44 

 

 


당신은 파롤(Parole)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파롤은 랑그(Langue)의 상보호완적인 의미로, 랑그는 한 언어가 갖는 추상적인 체계로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사회적 구성원 모두가 공유하는 약속이다. 그래서 랑그는 유한하다. 그리고 우리가 실제로 입밖으로 내뱉는 개인적 발화를 '파롤'이라 한다. 그래서 파롤은 랑그의 실제적 실현이라 할 수 있고, 개개인의 발화이므로 무한하다. 즉 요약하자면 랑그는 개념, 파롤은 표현이다. 그런데, 파롤은 파롤에 의한 프레임이 있다.

 

 

 

예를 들어, 'BMW 7시리즈'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BMW 7시리즈'라는 랑그를 나는 '대형세단'이라는 파롤로 표현한다.
내가 가진 '대형세단'이라는 이미지는 무언가 고급스럽고, 부의 상징이다.

그런데 '자가용' 구입을 싫어하는 존 리 선생님은 '자가용'은 사치이며, 이미 대중교통으로 충분히 대체 가능한 불필요한 물건일 뿐이다. 만약 존 리 선생님이라면 'BMW 7시리즈'를 나와 같은 '대형세단'이라는 프레임으로 바라볼까? 그렇지 않다. 아마도 그저 사치품에 불과한 '자가용'의 프레임으로 바라 볼 것이다. 이처럼 나와 존 리 선생님이 'BMW 7시리즈'를 다르게 바라보는 이유는 같은 랑그를 다른 파롤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면, '대부분 일치하는 파롤의 프레임'에 갖힌 사례가 무궁무진하다. 예를 들어, 웨딩드레스가 그 파롤이라 할 수 있겠다. 웨딩드레스는 무엇이 연상되는가? 왠지 화려해야하고, 결혼, 축복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대부분 공감할거라고 생각한다. 웨딩드레스에 대해 부정적인 프레임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웨딩드레스는 대부분의 사람이 프레임에 갖혀있는 파롤이다. 웨딩드레스 44는 이러한 파롤의 프레임을 깨뜨리는, 할인을 크게 받아 들여져온, 어느 웨딩드레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웨딩드레스를 대여한 44명의 이야기는 다양하다. 물론 결혼에 대한 이야기, 결혼 생활에 대한 삶을 담고 있다. 좋은 이야기도 있고, 나쁜 이야기도 있다. 그냥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일상 이야기도 있다. 정세랑 작가님에서 의도한 것인진 몰라도. 44개의 이야기 중 좋은 이야기는 짧고, 나쁜 이야기는 길다. 한번 다시 읽어보자.

 

 

 

[3번째 손님]

여자에겐 다른 계획이 많았다.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았고, 해외 연수도 계획되어 있었다.
"네가 원하는 대로 살게 해줄게. 그러기 위해 끝까지 노력할 거야."
그 말을 믿을 수 밖에 없었다.

 

 

 

[6번째 손님] 

"내 몸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부분이야. 지금은 너보다 마음에 들거든?"..............
역시나 멋진 타투였고 드레스와도 잘 어울렸다. 내 몸은 내 거야.

 

 

 

[9번째 손님]

아홉번째 커플은 원래 혼인신고만 하고 살려고 했다. 둘다 식에 대한 환상이 전혀 없었고 .......
그러나 그렇게 2년을 사는 동안 양가에서 폭격이 끊이지 않았다. 어떻게든 식은 꼭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자의 어머니가 울고 남자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렀다. 두 사람은 지고 말았다..............
여자는 고전문학 전공자였는데, 고전문학 속 영웅들이 대다수 고아인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았다.
고아들만이 진정으로 용감해질 수 있다고 말이다.

 

 

 

[15번째 손님]

"하지만 형부가 잘해주잖아요? 좋아 보였는데."
"남편이 문제가 아니야. 내가 제도에 숙이고 들어간 거야. 그리고 그걸 귀신같이 깨달은 한국사회는 나에게 당위로 말하기 시작했지"................
"예를들면요?"
"남편과 나는 같은 시험에 붙었잖아. 그런데 가족들이 내게만 '살살 다닐 직장을 들어가야 한다'고 말해. 왜 나는 살살 살아야 하지? 왜 그게 당연하지? 왜 나한테 그렇게 말해도 된다고 생각하지? 굴욕적이야."
거기까지 말하고 열다섯번째 여자는 입 밖으로 말해서 더 분명해지는 것들을 잠시 가만히 헤아렸다.

 

 

 

[25번째 손님]

"요리부터 배워."
한번은 그냥 넘어았다.
"쉽게 하는 이탈리아 요리, 이거 배울까?"
"좀! 한식부터 배워 좀! 밑반찬부터."
두번은 넘어갈 수 없었다....... 차분하게 반박해야 했지만 여자도 쌓였던게 많았다.
"다시 말해봐, 씨발새끼야."

 

 

 

[36번째 손님]

"그래도 당신은 나랑 결혼해서 다행이지? 나는 전혀 가부장이 아니잖아."
"글쎄."
...................
"내 말은 그런 시간들이 계속, 평생에 걸쳐 쌓인다는 거야. 쌓이다보면 큰 차이가 나는 거고. 생각해보면 이상하지 않아? 당신 할아버지 제사잖아? 난 만난 적도 없는 분이야. 왜 효도를 하청 주는데?" 
"어쨌든 그게 가부장제야. 당신 눈에는 안 보여도 내 눈에는 보여. 내 눈에만 보이는게 아주 많아"

 

 

 

여자의 계획과 남자의 약속이 엇갈리며 나타나는 갈등은, 결혼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얼마나 개인의 욕망과 꿈이 묻히기 쉬운지를 잘 보여준다. 남자가 아무리 여자의 자유를 보장하겠다고 말해도, 그 말은 결국 전통적 결혼 제도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 약속이었다. 이는 결혼이라는 제도 속에서 개인의 자아와 계획이 어떻게 조율되지 못하고 침식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여자의 타투와 그 타투에 대한 자기 확신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내 몸은 내 거야"라는 말은 결혼 안에서조차 여성의 몸과 삶에 대한 자기 결정권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억압될 수 있는지에 대한 저항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이는 결혼 제도 내에서 여성의 주체성을 잃지 않고 자신을 지켜나가려는 강한 의지를 상징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중간에 결혼식에 대한 환상이 없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결국 사회적 압력에 굴복하고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이는 상호 가족간의 전통적인 결혼관념이 여전히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두 사람의 개인적 선택이 사회적 기대에 의해 쉽게 무너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여자가 고전문학 속 영웅들은 고아라는 특성을 떠올리며 진정한 용기와 자유를 사회적 고립 속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점을 떠올린 것은 결혼 제도가 어떻게 개인을 구속하는지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자 풍자라 할 수 있다.

 

 

 

그와 비슷한 맥락에서 15번째 손님의 "왜 나는 살살 살아야 하지?"라는 질문은 결혼 후 여성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기대와 제약을 직설적으로 드러낸다. 같은 시험에 붙었음에도 여성이 더 적은 야망을 품고 "살살" 살아가야 한다는 압박은 결혼이 여성에게 요구하는 불합리한 역할을 폭로하고 있다.
마지막 인용에서 "나는 전혀 가부장이 아니잖아"라는 말은 남성이 가부장제의 일부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성은 결혼 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사회적 불평등을 경험하고 그 차이가 쌓여 커다란 격차로 이어진다. 이는 남성과 여성이 결혼을 통해 경험하는 사회적 현실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25번째 손님의 이야기는 누군가는 사이다라고 생각했을 수 있겠다. 결혼 생활 속에서 발생하는 권력 관계와 역할 강요에 대한 갈등을 보여준다. 남편이 아내에게 요리를 배우라고 요구하는 것은 가정 내에서 전통적으로 여성이 해야 한다고 여겨지는 역할을 강요하는 대표적인 예시다. '한식부터 배워라', '밑반찬부터 하라'는 식의 지시는 여성에게 특정한 집안일을 맡기고 그것이 마치 당연한 것처럼 요구하는 가부장적 관습을 드러낸다. 마지막에 여자가 "다시 말해봐, 씨발새끼야"라고 말하며 폭발한 장면은 단순한 폭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결혼 생활에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무언의 압박에 대한 강한 저항을 표현한 것이다. 이는 단순히 남편의 말에 대한 분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으며 가부장적인 결혼 제도와 그 안에서 여성이 느끼는 억압에 대한 상징적인 반발로 읽을 수 있다.

 

 

 

사실 내 생각에 이 소설은 결혼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작은 갈등들이 사실은 더 큰 사회적 불평등과 맞닿아 있음을 보여준다. 여성이 결혼 안에서 자신의 주체성을 지키기 위해 투쟁해야만 하는 상황을 비판적으로 묘사하며 이러한 권력 구조 속에서 개인의 감정이 어떻게 파괴되고 소모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아마도 가벼운 내용의 긍정적인 내용들이 없었다면 너무도 편파적이게 느껴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간에 반짝 나타나는 타코야끼 댄스 커플은 아주 귀여웠다. 그래서 나도 은근하게 한번 춰보기도했다.)
결론적으로 이 소설은 화려함과 축복을 상징하는 결혼, 웨딩드레스에 대한 파롤의 프레임과 그 속에 숨겨진 사회적 불평등을 파헤치며 우리가 결혼을 단순히 개인의 선택으로만 바라볼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나에게 있어서는 결혼 제도가 얼마나 깊이 사회적 구조에 얽혀 있는지를 생각해보게 했고 그 안에서 개인의 자아가 어떻게 억압되거나 구속될 수 있는지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시각을 주는 내용들이었다.
당신도 이 글을 읽었다면 여전히 웨딩드레스에 대한 파롤 프레임이 유효한가?

 

 

 

 

 

보늬

 

 

 

당신은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여 본 적이 있는가?

당장 나에게 닥칠 어떤 구체적인 불행이나, 심지어는 내가 제 명까지 못살고 죽는다던가 말이다.
실제로 뉴스를 보면 우리는 그런 일들을 많이 간접경험하고 있다. 우리는 죽음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것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다가올지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이 죽음을 더욱 두려운 존재로 만든다.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방영했던 부산 돌려차기 사건은 묻지마 폭행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공포와 경각심을 일깨웠다.

 

 



 

 

 

우리가 이런 일을 당하지 않을거라고 보장할 수 있는가? 그 중에서도 돌연사라는 것은 예기치 못한 순간에 찾아오며 남겨진 이들에게 깊은 충격과 상실감을 안겨준다. 그와 동시에 그 사건을 겪게 될 본인에게도 죽음을 미처 준비하기도 전에 삶을 마감해야 한다는 일은 안타까운 일이다. 나는 이미 이전에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간다" 책을 통해 나는 어떠한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 나의 죽음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한 경험이 있다. 가족들에게 미리 자신의 장례가 어떻게 이루어졌으면 좋겠는지, 재산이나 금전적인 것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그 외에 정리해야 할 인간관계에서 아무말도 하지 못한채 세상속에서 잊히고 사라져가야하는 것은 마땅하지 못하다. 그런 비극 앞에서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어느새 차츰차츰 잦아드는 슬픔을 받아들이고 묵묵히 삶을 살아갈지 모른다. 또 누군가는 그 충격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 한다. 돌연사.net은 바로 그런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에서 출발했다.

 

 

 

우선, 이 소설의 내용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사이트가 돌연사한 사람들을 수집하고 그들의 삶을 선으로 연결하려는 시도는 개인의 죽음이 고립된 사건이 아닌, 사회적, 관계적 맥락에서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각자의 삶이 그물처럼 엮여 있는 세상 속에서 그들은 죽음을 통해 살아있는 사람들 사이의 보이지 않는 연결 고리를 확인하려 하지만 내가보기엔 사실 이 부분은 큰 의미가 없어보였다. 그들이 정말로 찾고 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잠시 고민에 잠시 잠겼고 책을 다 읽고도 그 부분을 되짚어 다시 읽어보았다. 내가 생각한 이 주인공들의 사이트 구축은 궁극적으로 죽음의 이유를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 비극 속에서 남겨진 유족으로서의 의미 그리고 그들에게 남겨진 삶의 무게를 마주하는 것이 아닐까? 어떤 의미를 찾으려 시도했던 것은 그저 표면적인, 어쩌면 형식적인 이유를 갖다댄 것일 뿐...
자, 다시 생각해보자. 규진은 왜 돌연사.net을 만들어서 보윤과 매지에게 선보였을까? 내 생각에 규진은 돌연사라는 그 불안과 공포를 어떤 식으로든 통제하려는 시도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돌연사라는 비극적인 사건을 단순한 하나의 데이터로 취급하며 이를 사람들과 연결된 지점으로 분석하려 하고, 사용자로부터 업로드된 데이터에 대해 검열한다. 이는 감정적으로는 냉정해 보일 수 있지만(그들은 실제로 엄격하게 운영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데이터를 삭제할지 애매한 사례에서는 보류라는 선택을 한다.) 한편으로는 죽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노력처럼 보이기도 한다.

 

 

 

중간에서 사이트가 확장되며 '돌연사의 경계'에 대한 논의가 등장하는 부분은 서두에서도 말했지만 예전에 읽었던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간다'를 떠올리게 한다. 과연 무엇이 돌연사이고, 무엇이 아닌가에 대한 기준을 명확히 정하는 일이 어렵다는 사실은 우리가 사회 속에서 얼마나 많은 '보이지 않는 죽음'을 간과하고 있는지를 상기시킨다. 예를 들어, 과로로 인한 죽음은 갑작스러운 사고가 아닌 서서히 다가온 비극이지만 그 결과는 마찬가지로 예측할 수 없는 종말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렇다면 과로사 역시 돌연사의 범주에 포함되어야 할까? 이 소설을 읽었다면.. 아마도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이 질문은 우리 사회가 과연 죽음을 어떻게 정의하고 어떤 죽음을 더욱 심각하게 받아들이는지에 대한 성찰을 요구한다.
아무쪼록 냉정하게 운영하려 했으나, 보윤과 규진, 매지는 원래의 의도와는 달리 유족들이 사이트에서 위로를 얻어간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돌연사로 인해 가족을 잃은 유족들에게는 상실의 고통 속에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겪은 슬픔을 나누며 위로받는 과정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 사이트는 단순한 정보 제공의 역할을 넘어 상실을 공유하고 함께 견디는 공간으로 변모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고통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위로를 받고 죽음의 무게를 혼자 감당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안도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이 소설에서 직면하는 사회적 문제는 단지 돌연사 그 자체가 아니다. 돌연사라는 비극은 우리의 사회가 법의 사각지대에 위치한 돌연사, 보호받지 못한 돌연사, 각종 산업재해와 어쩌면 막을 수도 있었던 수 많은 사고들을 얼마나 외면해왔는지를 상기시킨다. 과로사, 극단적인 선택, 과도한 사회적 압박 속에서 서서히 무너져가는 이들은 결국 돌연사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고 이 소설에서는 이야기하고 있었다.
결국... 그렇다면 돌연사는 단지 예측할 수 없는 죽음이 아니라, 사회적 문제로부터 비롯된 죽음이라는 더 넓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나는 마지막 부분의 "하다가 죽지 않는 것을 하고 싶다." 이 말은 단순히 '살아남는 것'을 넘어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하며 삶을 이어가고 싶다는 욕망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우리는 그 속에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이루고자 한다.
보윤과 규진, 매지는 어쩌면 죽음을 기록하고 추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제는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삶의 가치를 되돌아보게 하고 그들이 서로의 고통을 공유하며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하다가 죽지 않는거, 하고 싶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모두 그 두 일에 대해, 혹은 둘의 교집합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게 분명했다.

 

 

 

 

해피 쿠키 이어

 

 

 

내 생각에 정세랑 작가의 이상형이 있다면 해피 쿠키 이어의 남자주인공 이스마일이 아닐까? 그래서 자신이 바라는 바람직한 남성상을 옥상에서 만나요에 수록된 소설 중 해피 쿠키 이어의 유일한 1인칭 남자주인공으로 만들었을지 모른다. 판타지적(?) 요소로 특이점이 있다면 바로 과자귀다. 나는 사고로 잘려나간 이스마일의 귀에 자라나는 과자는 단순한 판타지적 설정을 넘어 사랑을 나누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 이스마일은 자신의 옆집 여자친구와 사랑을 나누며 그 과자 귀마저 아낌없이 내어준다. 과자 귀를 뜯어먹어도 그는 불평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이 야윈 그녀를 조금이라도 살찌게 하고 건강하게 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내어줄 준비가 되어있다. 놀랍게도 이 과자 귀는 매번 다른 종류로 자라난다. 과자귀가 매번 다른 과자로 달라지듯 이스마일의 사랑 또한 단조롭지 않다. 마치 해리포터의 강낭콩 젤리처럼 그때그때 다르게 나타나는 귀는 여자친구에게 작은 설렘을 준다. 이스마일은 그런 존재처럼 느껴졌다.

 

 

 

마지막 장면에서 이스마일의 과자 귀는 결국 더이상 자라지 않는다. 여자친구와 된장찌개를 함께 먹고 이별하는 순간... 그의 임무가 끝났기 때문이다. 이스마일은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그녀를 사랑했고 더이상 귀가 자라지 않는 것은 그가 그녀를 위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주었다는 걸 표현한다. 이스마일은 그저 그녀가 아프지 않기를 바랐고 그녀의 곁에서 조용히 사랑을 나눴다. 그가 한국에서 살아가는 아랍인이라는 설정은 한국 사회에서 소외된 계층을 은유하는 듯 보이지만, 이스마일의 진정성 있는 사랑에는 그러한 사회적 위치나 배경이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이스마일은 이 소설집에 등장하는 여느 남성 인물들과는 유난히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는 전혀 폭력적이지 않으며 오일 프린스, 명예살인, 향후 10년 중동 정세, 민주국가, 빨갱이, 독도 등등에 대한 가치, 혹자는 어떠한 프레임에 대해서도 편향이 없다.

 

 

 

이 부분에 대해 구체적으로 내 해설을 정리해보자면 이스마일은 세상의 복잡한 문제나 논쟁에 휘말리기보다는 눈앞에 있는 사람을 이해하고 그들의 필요에 응답하는 데 집중한다. 그의 관심사는 정치적이거나 이념적인 것이 아니라 여자친구가 아프지 않도록 혹은 그녀가 편안하고 행복하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그가 가진 사랑은 순수하고 무언가를 기대하지 않으며 오직 상대방의 행복을 위한 행동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이스마일의 태도는 사회에서 흔히들 주변에서도 볼 수 있는 강한 의견 표출이나 권력 투쟁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갈등을 피하고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방법을 선택한다. 그의 비폭력적인 태도는 그의 서툰 한국어 실력, 혹자는 외국인 여부를 떠나 얼마나 성숙하고 온화한 사람인지를 보여준다. 또한 그는 정치적, 사회적 이슈들에 대해서도 편견 없이 받아들이며 특정 프레임이나 이념에 구애받지 않고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이런 그에 대해... 나는 단순히 소설 속 남성 주인공이 아니라, 정세랑 작가가 이상적으로 그린 '이해하고 배려하는 인간'의 모습임을 드러낸다고 느꼈다.

 

 

 

그는 "콩 알레르기"가 있는 옆집 여자를 위해 요리를 한다. 그는 그것이 오바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나는 정작 그것이 오바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 소설에서 여자가 콩 알레르기가 있다는 설정은 단순한 신체적 제약을 넘어 이스마일과 그녀 사이의 관계를 심화시키는 중요한 촉매로 작용한다. 콩 알레르기는 그녀가 겪고 있는 내적인 고통을 상징한다. 즉 이스마일이 그녀의 삶에 얼마나 깊이 들어가 그녀를 배려하고 이해하려 하는지를 보여주려는 장치이다. 이스마일은 그녀의 알레르기를 단순히 불편함으로 치부하지 않고 그것을 극복하는 데 힘쓰며 그녀를 위해 요리까지 하며 신경을 쓴다.

 

 

 

특히 옆집 여자(여자친구가 되기 전)가 아파하는 것을 걱정하며, 포스트잇으로 안전하게 밥을 먹자고 제안하는 장면은 이스마일의 세심한 배려와 따뜻함을 잘 보여준다. (아마도 옆집 여자가 기침한다는 이유로 초인종 누르며 밥같이 먹자고 하면 옆집 여자가 아니라 경찰이 긴급출동을 했을 수도 있다.) 이 장면은 단순한 식사 제안이 아니라 여자의 고통을 완벽히 이해하고 그녀의 안전과 편안함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그의 마음이 담겨있다. (포스트잇은 꽤 괜찮은 수단인 것 같다...) 그는 콩 알레르기를 가진 여자에게 조금도 무리한 기대를 하지 않고 오히려 그녀가 안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며 자신을 나누려 한다. 그의 포스트잇 제안은 단순하지만 그 속에 담긴 진심은 매우 깊다. 이 행동이야말로 이스마일의 무해함과 배려가 가장 잘 드러나는 순간이다. 결국 이러한 순수한 마음과 무해함이 여자를 감동시키고 그들을 이어주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스마일은 여자에게 어떤 강요나 압박을 하지 않으며 그저 그녀가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조용히 옆에 있어준다. 이 점이 바로 여자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며 사랑이라는 관계는 누가 더 많은 것을 요구하거나 주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진심으로 상대방을 배려하고 이해하는가에 달려 있음을 이스마일의 행동을 통해 깨달을 수 있다. 이 소설에서 여자가 이스마일의 사랑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그의 순수한 마음과 무해함 덕분이었다. 그는 무리하게 그녀를 쟁취하려고 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의 마음을 조심스럽게 표현하면서 그녀가 안심하고 다가올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는 단순한 로맨스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이스마일이 보여준 사랑은 상대방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함께 걸어가는 과정이었고 그런 태도야말로 현대인으로서의 진정하고 올바른 형태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그녀가 회사의 비리를 고발하여 사회생활에서 고통을 겪을 때였다. 그는 단순히 그녀를 위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녀의 선택을 존중하며 옆에서 묵묵히 함께한다. 그녀가 고발로 인해 받는 사회적 압박과 불이익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지만 이스마일은 이를 개인적인 문제로만 보지 않고 그녀가 옳다고 믿는 선택을 지지하며 그녀의 신념과 가치를 받아들인다. 그는 자신의 의견을 강요하거나 그녀를 대신해 나서지 않는다. 대신 그녀가 올바르다고 믿는 길을 가는 동안 변함없는 응원을 보내며 그녀가 힘들어할 때 그녀의 편이 되어 준다. 이는 이스마일의 사랑이 단순히 '곁에 있음'의 의미를 넘어, 어려운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는 지지를 의미한다. 그가 그녀의 선택을 지지하며 곁에서 묵묵히 응원하는 모습은 이스마일이 깊은 배려와 이해심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아마 이때 이스마일이 여자친구에게 "아니 잘 다니다가 왜그랬어? 얼른 잘못했다고 사과하자 자기야~", "안그래도 월세 내야하는데... 그건 어떡하려고?"라는 식의 전개가 펼쳐졌다면 마지막 된장찌개와 한식같았던 키스는 없었을 것이다. 이스마일은 그녀에게 무언가를 강요하거나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가 독립적으로 자신의 신념을 실현할 수 있도록 옆에서 따뜻하게 바라봐주며 그녀의 아픔과 어려움을 공유하려 한다. 이는 이스마일의 사랑이 타인의 행복과 자율성을 존중하는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의 이런 지지는 단순히 연인의 역할을 넘어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두 사람이 어떻게 서로를 이해하고 도울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스마일은 여자친구가 겪는 사회적 문제와 불의를 외면하지 않고 그 속에서 그녀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그저 조용히 응원할 뿐이다.

 

 

 

일이 잘되려면 모든 게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잘되듯이, 일이 잘못되려 해도 마찬가지로 맞물려 잘못된다. 세단계에 걸쳐 사고가 일어났다. 사악한 손이 설계한 도미노 같았다.

 

 

 

덩어리가 되고 싶지 않았다. 실제로는 덩어리래도. 나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독후감을 마치며

이 소설은 사실 현실적인 결혼이야기가 중심인 책이다. 나는 그 속에서 겪는 여성들의 고충을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볼 수 있었다. 물론, 그런 무거운 주제의 이야기도 중요하지만, 솔직히 말해 나에게 더 마음에 와닿았던 건 이 책에서만 느껴질 수 있는 따뜻한 분위기, 인물들의 소소한 대화에서 느껴지는 심리적 감정선들... 그리고 장마다 나오는 귀여운 표지 삽화들이었다. 읽는 내내 내 주변의 소중한 친구들, 그리고 내 마음속의 그 어떤 누군가가 떠올랐고 덕분에 미소 지으며 기분 좋게 책장을 넘겼다.

 

 

 

그렇다면 우리는 결혼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봐야 할까? 꼭 거창한 답을 찾기보다는 소소한 일상 속에서 서로를 아끼고 배려하는 마음 그리고 그 속에서 찾아오는 소소한 행복이 더 소중한 게 아닐까 싶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문득 내가 예전에 보았던 떠오른 짧은 영상하나가 떠올랐다. 아마 정세랑 작가님도 공감을 많이 하실 것 같은 영상이다. 어쩌면 "그래, 옥상에서 만나요로 이 말을 하고 싶었어!" 라고 하실지도 모른다.
결혼에 대해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할지..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도 이 영상을 보며 정말 중요한건 무엇일까에 대해 다시금 되새겨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그럼 긴 독후감을 따뜻한 마음으로 마무리 지어본다. :)

 

 

 

 

 

 

우린 어째서 이렇게 슬프도록 스트레이트일까. 이렇지 않았다면 남자친구들, 하고 복수로 말해야하는 극적이고 피곤한 인생을 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아무도 너만큼 파츠가 맞지 않아, 내가 말했을 때 너는 다시 확인했어. 피 에이 알 티 에스, 그 파츠? 하고 물었지. 자주 쓰는 표현인데 그렇게 되물으니 작고 견고한 부속품이 된 것 같았어.
조금 모양이 다른, 하지만 나란히 들어가는 파츠.

 

 

 

소환되어 온 오바가 나 대신 싸웠어. 건성으로 싸웠는데도 아빠를 설득해냈어.
오빠의 결정적인 한마디는 '남들이 흉본다'였지. 어릴 때 내내 때리고 괴롭혔던 걸 그 설득으로 갚았다고 생각해.

 

 

 

그 사람에겐 그렇지 않았나봐. 그 점잖던 사람이 웬 인터넷 싸이트에 내 이름과 얼굴을 다 공개하며 자기 집이 가난하다고 홀어머니를 대놓고 무시하면서 도망간 여자라고 글을 올리기 시작했거든. 가난하기로 치면 나도 가난하고 사실 내가 도망친 건 가난보다 좀더 어둡게 끈적이는 어떤 것으로부터였는데 나느 무슨 녀라고 유행하는 비속어들로 요약되어 버렸어. 그 사람은 새벽에 전화해 돌아와달라고 울면서도 매일매일 글을 올리더라. 욕설이 섞인 게시물과 간절한 전화 사이의 간극이 더 소름 끼쳤어.

 

 

 

-효진 중-

 

 

 

"솔직히 역사는 그 순간을 살았던 그 사람들만의 것이라고 생각해. 그러니 전근대사는 무기로 쓰면 안되고, 근현대사에 있어선 더 철저하게 책임을 져야겠지. 민족주의자 말고 각자 나라에서 좋은 시민들이 되면 지금과는 다를거야. 어디 가서 이렇게 솔직히 말하기는 사실 어렵지만, 요즘 애들은 스스로 무장해제 하느냐고 한마디 들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네 말은 그거잖아. 우리가 언젠가 뿔뿔이 돌아가고 '알다시피'에 다른 멤버들이 들어온다 해도 지금 이 순간은 우리들 것이라서 아무도 가져가지 못한다는 거. 다른 사람에겐 지분이 없다는 거. 효짱 얘기가 그 얘기 아니야?"

 

 

 

-알다시피, 은열 중-

 

 

 

"결혼해서 막 좋은 건 아닌데... 어쨌든 집에서 훌라후프는 돌아가."
"훌라후프요?"
"결혼 전에 어릴 때 생각나서 훌라후프를 샀다가, 나 막 울었잖아. 원룸에서 아무리 자리를 옮겨봐도 훌라후프가 안 돌아가는 거야. 싸구려 옷걸이니 부직포 서랍이니 온통 걸려서.... 이러니저러니 해도 둘이 합쳐 살면 집에서 훌라후프 정도는 돌아가니까, 숨이 쉬어지더라고."

 

 

 

너라면 이해할 수 있을 거야. 모든 사랑 이야기는 사실 정망에 관한 이야기라는 걸. 그러니 부디 발견해줘. 나와 내 언니들의 이야기를. 너의 문명적 사랑을. 그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줄 기이한 수단을.

 

 

 

- 옥상에서 만나요 중 -

 

 

 

지원이 말했을 때 친구들은 뜨악해하는 눈치였다. 여섯명 중에 아이가 있는 사람은 지원과 경윤뿐이었는데, 경윤의 딸은 지원이 보기에 다섯명이라도 키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비교하지 않으려 해도 비교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의 삶은 근사하고 자신만 지옥에 버려진 듯한 날들이 이어졌고, 짓무른 마음을 들키지 애썼지만 종종 들켰다. 그럴 때 친구들이 잠깐 짓는 아연한 표정에 지원은 더욱 비참해지고 말았다.

 

 

 

"아들 둘이라 그런 것 같아. 손자들의 랭크가 달이나 며느리 랭크보다 높은 거야, 어른들 마음엔."

 

 

 

- 이혼 세일 중 -

 

 

 

 

 

끝.

'독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년이 온다  (19) 2024.11.18
섬의 애슐리  (0) 2024.10.28
이선 프롬  (4) 2024.10.09
지구에서 한아뿐  (6) 2024.09.04
밝은 밤  (0) 2024.08.22

 

회사 동료가 읽고 추천해준 책이었다. 책 뒷면 설명란에 애정 없는 결혼 속에서 '낡은 폐선'처럼 살아가는 이선 프롬이라는 문구를 읽고 호기심에 읽게 되었다. 그동안 읽기 편안한 책만 읽어서 그런지 책 초반에는 특유의 번역체로 읽기가 다소 불편했으나 곧 이야기 속 인물들의 감정선에 빠져들게 되었다.

 

책 소개 및 요약

나의 해설에 앞서 작가와 이 책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자면, 이 책의 작가 에디스 워튼(Edith Wharton)은 최초의 여성 퓰리처상 수상 작가이기도 하다.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생각하면 여성 작가가 귀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영어로 작가를 뜻하는 writter라는 단어를 보면 남성형만 있고 여성형이 없다. 그 당시 시대적 배경에 따르면 글쓰기는 으레 남성의 일이지 여성이 하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 문화권에서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기에 글 쓰는 직업을 가진 여성을 가리킬 때는 굳이 '여류'라는 표를 달아 남성 작가와 구분 짓는다. 언어학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유표화라고 한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불과 몇십 년 전만 하더라도 전문직에 속하는 직업치고 여성이나 여류라고 유표화하지 않는 직업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이런 의미에서 워튼 작가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의 미국 여성 작가들 중 순수 문학의 길을 걸은 최초의 작가라 할 수 있다.

 

 

이선 프롬은 미국 작가 에디스 워튼(Edith Wharton)이 1911년에 발표한 소설로 사랑과 비극 그리고 인간의 내면적 갈등을 서정적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주요 등장인물로는 이선, 그의 아내 지나, 그리고 이 집에서 가정부로 일을 하는 지나의 사촌 매티이다. 워튼은 이 소설을 통해 한계 상황에 처한 인간의 감정과 그로 인해 파생되는 복잡한 심리적 변화를 섬세하게 그려냈다. 이선 프롬은 작고 황량한 마을에서 살아가는 농부로 자신의 꿈과 열망을 억누르며 살아가는 인물이다. 워튼은 이선을 통해 당시 사회의 제약과 운명에 갇힌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며 그가 처한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갈등을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선의 이야기는 사랑에 대한 열망과 이를 이루지 못하는 좌절이 뒤섞인 비극적 운명으로 그의 내면은 마치 얼어붙은 뉴잉글랜드의 겨울처럼 차갑고 고립되어 있다. 소설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워튼의 묘사 기법이다. 그녀는 뉴잉글랜드의 혹독한 겨울 풍경을 이선의 내적 갈등과 고립감을 반영하는 상징으로 사용한다. 눈 덮인 들판, 얼어붙은 나무, 차가운 바람은 이선이 느끼는 정서적 추위를 극적으로 부각시키며 독자는 그를 둘러싼 환경이 그의 운명을 더욱 굳어지게 만드는 요소임을 느끼게 된다. 워튼은 이러한 자연 묘사를 통해 감정을 형상화하며 이선이 처한 비극을 더욱 강렬하게 전달한다.

 

 

이선과 매티의 관계는 소설 속에서의 애틋함과 사랑에 대한 간절함이 독자들의 마음에까지 스며들도록 한다. 매티는 이선이 꿈꾸던 자유와 사랑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녀와 함께 있을 때 이선은 마치 얼어붙었던 마음이 녹아내리는 듯한 순간을 경험한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는 금지된 사랑이다. 이는 그들의 운명을 더욱 비극적으로 만들며, 독자로 하여금 그들의 사랑을 안타까워하면서도, 필연적인 결말에 대해 예감하게 만든다. 결국, 이선 프롬은 인간의 욕망과 도덕적 책임, 그리고 운명 사이의 충돌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워튼은 사랑과 희생, 그리고 그로 인한 고통을 담담하면서도 서정적인 문체로 그려내며, 독자들에게 감정의 울림을 전달한다. 이선이 겪는 고통은 개인의 불행을 넘어, 모든 인간이 한 번쯤 경험하는 삶의 비극적 측면을 상기시킨다. 그가 처한 상황은 나로 하여금 삶의 무거운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갈등하는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이렇듯, 이선 프롬은 단순한 비극을 넘어선 인간의 내면 탐구를 서정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한계 상황에 처한 인간이 어떻게 그 안에서 살아가고 또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고찰하게 한다.

 

 

데니스 이디에게 질투를 느끼는 이선

교회 청년부 축제에서 춤을 추는 매티와 데니스 이디. 이들의 관계는 소설 이선 프롬에서 중요한 갈등 요소로 작용한다. 데니스 이디는 마을의 부유한 청년으로, 이선의 아내 지나의 사촌인 매티 실버에게 관심을 보인다. 데니스는 젊고 활기차며, 외향적인 성격으로 매티에게 매료되어 그녀에게 적극적으로 호의를 베푼다. 그의 부유함과 매티를 향한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구애는 이선에게 깊은 불안과 질투를 유발한다. 소설 속에서 나타나는 이선의 감성선을 나까지 긴장하게 만들었다.

 

 

이선은 매티에게 연정을 품고 있지만, 지나와의 결혼 생활로 인해 그녀에게 다가갈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매티는 이선에게 있어서 현실의 고통 속에서 유일하게 따뜻함을 느끼게 해주는 존재다. 이때 이선이 느끼는 감정은 사랑이라기보다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강렬한 갈망으로 표현될 수 있다. 그런 매티에게 데니스가 다가가는 모습을 보면서 이선은 불안과 질투로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선이 데니스와 매티 사이에서 느끼는 질투는 이선의 내면 갈등을 더욱 부각시킨다. 데니스는 이선이 감히 표현하지 못하는 자유롭고 대담한 젊음을 상징한다. 매티와 데니스가 함께 있는 장면을 목격할 때마다 이선은 자신이 이룰 수 없는 꿈과 현실의 차이를 더 뼈저리게 느낀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그가 매티에 대한 감정이 더욱 불타오르도록 하는 촉매 역할을 하게 되고 이선이 매티에게 더욱 적극적으로 이성호감을 표현하도록 만든다.

 

 

이선의 감정 변화

이선 프롬에서 이선이 매티에 대한 감정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미묘하게 변화한다. 처음에 이선은 매티를 단순히 지나의 병간호를 돕는 존재로 여겼으나 점차 그녀에 대한 연정을 품게 된다. 매티는 이선의 무미건조한 삶 속에서 활력을 불어넣는 존재로 자리 잡는다. 그러나 이 감정은 애초에 금지된 사랑이라는 한계 속에서 피어나는 만큼 이선은 매티를 향한 마음을 억누르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감정은 점점 더 깊어지고 복잡해진다. 이선의 감정선은 매티와 함께하는 작은 순간들 속에서 서서히 절정에 이른다. 두 사람이 함께 눈 속을 걸으며 따뜻한 대화를 나누거나 매티가 그의 집에서 가사일을 도울 때마다 이선의 마음은 점점 더 그녀에게 끌린다. 끝내는 지나가 병원에 가기 위해 하루가 없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게 될 정도였으니까.(지나가 없으면 매티와 단 둘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므로) 매티의 호감까지 확인한 이선은 더욱 불타오르게 되고 지나를 버리고 서부로 매티와 도망치는 극단적인 계획까지 구상하게 된다.(결말을 본다면, 차라리 그 계획을 실행하는게 나았을 것이다.) 매티의 사소한 행동이나 말투 하나하나가 이선에게는 무미건조한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작은 빛이 되었으며 그녀와의 일상적인 교감이 그에게는 큰 의미를 가지게 된다. 소설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는 이선과 매티가 함께 썰매를 타며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순간이다. 이들은 썰매를 타고 눈 덮인 언덕을 내려가며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지만, 그들의 마지막 썰매 타기는 비극적인 결말을 향해 나아가고 만다. 이 장면에서 두 사람의 대화는 소박하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깊고 애절하다.

 

 

에필로그를 읽고

에필로그에서 화자가 이선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는 나이 들어버린 매티와 지나의 모습을 발견하고 충격을 받는다. 젊고 생기발랄했던 매티는 이제 지나의 옛 모습처럼 병들고 쓸쓸한 상태로, 지나의 병간호를 받고 있다. 이 순간 화자는 그들의 젊음과 삶의 가능성이 모두 사라지고 서로에게 얽매여버린 삶을 목격하게 된다. 이선의 집 안에는 고립감과 좌절 그리고 시간의 무게가 짓누르고 있으며, 화자는 이들이 처한 상황을 보며 무거운 감정을 느낀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이선과 매티가 함께 목숨을 끊으려는 시도는 실패했고, 원래 아팠던 지나가 불구가 되어버린 메티를 돌보고있고 이선 또한 다리에 큰 부상을 입은 이유를 깨닫고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작가 에디스 워튼이 이 장면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인간이 자신의 욕망과 꿈을 억누르고 살아갈 때 시간이 흘러 어떤 비극적 결과에 직면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선과 매티는 결국 자신들의 사랑을 이루지 못한 채, 남은 인생을 고립과 후회의 공간 속에서 보내게 된다. 워튼은 이 비극적 결말을 통해 억눌린 욕망과 선택하지 못한 삶이 얼마나 무겁고 파괴적인지 경고하고 있다. 화자는 이 집 안에서 이들의 희망이 산산조각 난 모습을 마주하고, 이선의 선택과 그로 인해 잃어버린 가능성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가 떠나는 순간, 독자들은 이들의 삶이 이제 회복 불가능한 상태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며, 이는 소설이 끝나도 오래도록 여운을 남긴다.

 

 

이 결말은 단순히 이선, 매티, 지나의 비극을 넘어, 우리의 삶에서 선택의 중요성과 그 결과에 대한 경고를 담고 있다. 워튼은 우리에게 한 번의 선택이 얼마나 오랫동안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그리고 억눌린 감정과 욕망이 어떻게 인간을 갉아먹는지 보여주고 있다. 결국, 이선의 비극은 단순히 한 남자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억압된 욕망이 삶을 파괴할 수 있다는 인간의 삶에 대한 보편적인 진실을 이야기한다.

 

 

도덕에 따른 욕망의 구속

옮긴이 김옥동 작가님은 이 책이 출간된 지 백 년이 훌쩍 넘었음을 언급하며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이 작품이 어떤 의미를 줄 수 있을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인간의 욕망과, 도덕, 젠더와 결혼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을 윤리나 도덕의 이름으로 억압해야 할까? 아니면 욕망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충족시키는 것이 건강한 삶일까? 옮긴이 김옥동 작가가 던진 질문처럼 이선 프롬에서 다루어진 인간의 욕망, 도덕, 젠더, 결혼은 여전히 현대 사회에서도 유효한 주제들이다. 그러나 현대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과거와 달리 이러한 주제에 대한 접근 방식이 상당히 진보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과거의 이선과 매티가 도덕적 제약과 사회적 구조 속에서 그들의 사랑을 억누를 수밖에 없었던 반면, 오늘날의 사회는 보다 개인의 욕망과 자율성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변화했다. 이러한 변화는 이선과 매티의 이야기를 다른 방식으로 상상하게 만든다.

 

 

현대 사회에서는 개인의 행복과 자율이 중요한 가치로 여겨지며, 결혼 역시 선택 가능한 관계 중 하나일 뿐 절대적인 구속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선이 만약 현대에 살았다면, 그는 매티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좀 더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매티 또한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있는 더 많은 자유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이들의 관계는 비극적이기보다는 오히려 두 사람 모두에게 성장과 자유를 가져다주는 긍정적인 경험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도망칠 자금 50달러가 없어서 좌절한다던가, 그로인해 썰매를 나무에 들이받고 서로의 삶을 끝내기를 바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새로운 결말을 상상해보자면 이선은 매티와 함께 자신들의 욕망을 억누르지 않고 과감히 새로운 삶을 선택했을 것이다. 매티와 이선은 서로를 통해 억압된 삶에서 벗어나 새로운 미래를 꿈꾸며 서부로 마을을 떠난다. 매티는 그녀의 자유로움을 이선에게 전파하며 그를 고립된 농장에서 벗어나게 했을 것이다. 그들이 떠나는 길은 이제 더 이상 눈 덮인 황량한 스탁필드의 들판이 아닌 새로운 가능성과 기회로 가득 찬 길로 묘사될 수 있다. 이선의 마음 속 얼어붙었던 감정들은 따뜻한 봄날처럼 녹아내리고 그들의 썰매는 비극의 눈길을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향한 환희의 질주가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현대인이 과거에 비해 도덕이라는 애매모호할 수 있고 주관적인 영역에 대해 얼마나 진보했는지를 깨닫게 된다. 오늘날 우리는 사랑에 있어서 도덕적, 사회적 억압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개인의 자율성과 행복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다. 과거의 이선과 매티가 불가능했던 선택을 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며 이들이 그토록 갈망했던 자유와 사랑은 오늘날 더 쉽게 허락된 가치로 인정받고 있다. 이들의 이야기는 이제 더 이상 비극으로 끝나지 않으며 새로운 시작으로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이선과 매티의 사랑이 현대 사회에서 이루어졌다면 그들은 도덕적 압박과 사회적 구조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충실히 따르며 행복을 추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인간의 욕망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건강하게 드러내고 충족시키는 것이 오늘날의 삶에서는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았다는 점에서 현대인은 확실히 과거보다 더 큰 자유를 누리며, 더 나은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삼각관계

지나는 질병으로 인해 매티에게 의지하면서도 그녀를 잠재적 경쟁자로 경계하는 이중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사회적 관습과 도덕적 규범에 따라 지나는 이선과 매티의 관계를 명확하게 의심했으나 그것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거나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제한적이었다. 소설 속 지나는 자신의 불안감과 의심을 통해 이선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하고 궁극적으로 매티를 내쫓으려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이 사건이 현대에 이르렀다면 지나는 전통적인 결혼의 틀에서 벗어나 더 복잡하고 다양한 감정과 선택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을 것이다. 현대의 지나는 이선과 매티의 관계를 좀 더 명확하게 직면할 수 있는 도구와 사회적 환경을 갖추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현대의 지나가 이선과 매티의 관계를 알게 되었을 때, 단순히 경쟁자로서 매티를 몰아내려는 감정보다 자신이 결혼 생활에서 원하는 것 그리고 상대방의 욕망에 대해 더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될 가능성이 크다.

 

 

현대의 지나라면 아마도 결혼의 의미와 자신의 행복을 더 깊이 고민하고, 때로는 결혼이 필연적인 구속이 아니라 선택 가능한 관계임을 인지했을 것이다. 만약 그녀가 이선과의 관계가 회복 불가능하다고 느꼈다면, 그 관계를 유지하는 대신, 자신의 삶을 재정비하고 이선과 갈라서거나, 서로에게 더 나은 방향을 모색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런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지나 또한 자신의 욕망과 정체성을 재발견하고 더 건강한 선택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소설 속 지나는 자신의 불안과 의심을 무력하게 억누르고 이선을 질타하거나 매티를 내보내는 선택을 함으로써 권위를 행사하지만, 그 이면에는 무력감이 자리 잡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상황을 개선할 방법이 많지 않았고 사회적 관습에 얽매여 있었다. 반면, 현대의 지나는 자신의 욕망을 더 당당히 표현하고 관계에 대해 보다 실용적이고 독립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자율성을 가졌을 것이다. 그녀는 이선에게 정직하게 감정을 드러내고 관계에서 자신이 바라는 바를 명확히 제시하거나, 이선을 떠나는 선택으로 스스로의 삶을 다시 주도했을 것이다.

 

 

이러한 상상을 통해 우리는 어떤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까? 결국, 이선, 매티, 지나 모두 억압된 감정과 갈등 속에서 스스로를 갉아먹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상대방의 욕망에 대해 더 정직해질 수 있는 환경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인간의 욕망과 도덕적 책임이 충돌할 때, 이를 숨기고 억누르기보다, 솔직하게 직면하고, 모든 당사자가 자신을 위한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을 추구해야 한다.

 

 

---

 

 

"맷, 난 손발이 꽁꽁 묵였어.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그가 다시 말을 꺼냈다.
"이선 아저씨, 가끔 제게 편지해 주세요."
"아, 편지가 무슨 소용이 있겠어? 난 손을 뻗어 너를 만지고 싶어. 너를 위해 모든 것을 하고, 또 너를 보살피고 싶단 말이야. 네가 아플 때, 네가 외로울 때 같이 있고 싶어."
"아저씨는 제가 잘 지낼 거라는 생각 말고 다른 생각은 절대 하지 마세요."
"그럼 내가 필요 없다는 말이야? 결혼할 생각인 거지!"
"참, 이선 아저씨도!" 그녀가 소리쳤다.
"맷 어째서 네게 그런 느낌을 받는지 난 잘 모르겠다. 그보다는 네가 차라리 죽는 게 나아!" (p 143)

 

 

"일어나! 어서 일어나라니깐!" 그가 매티를 재촉했다. 하지만 매티는 계쏙해서 "왜 앞에 앉으려는 거예요?" 하고 되풀이 해 말했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네가 나를 안고 있는 걸 느끼고 싶으니까." 그는 더듬거리며 매티를 끌어 일으켰다.
매티는 그의 대답이 만족스러웠거나, 아니면 단호한 그의 목소리에 굴복한 듯 했다. 이선은 몸을 숙이고 손을 더듬어 어둠 속에서 자신보다 앞에 탔던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유리처럼 반들거리는 길을 찾아 그 가장자리 사이에 조심스럽게 썰매를 놓았다. 매티는 이선이 썰매 앞쪽에 다리를 꼬고 자리를 잡는 동안 기다렸다. 그런 다음 재빨리 그의 등뒤에 웅크려 앉아 두 팔로 그를 꼭 잡았다. 목에 닿은 그녀의 숨결에 그는 다시 한번 몸을 떨고 뛰어오르다시피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다른 선택지가 뇌리를 스쳤다. 그려의 말이 옳았다. 이 길이 서로 헤어지는 것보다 나았다. 그는 몸을 뒤로 젖히고 그녀의 입술을 자기 입술로 끌어 당겼다........
  막 두 사람이 출발하는 순간 밤색 말의 울음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귀에 익은 간절한 부름, 그리고 이 소리가 불러오는 혼란스러운 이미지들이 그를 따라 첫번째 코스까지 내려왔다. 반쯤 내려가자 가파른 내리막길이었다가 오르막이었고, 그 다음에는 또다시 현기증 나는 긴 내리막이었다. 이 길을 날개 돋은 듯 달릴 때 스탁필드가 공간의 한 점처럼 한없이 아래로 떨어지며 그들을 멀리 구름 낀 밤하늘 속으로 날아오르는 듯했따. 이때 그 큰 느릅나무가 눈앞에 불쑥 나타나 굽은 길에서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되뇌었다. "우린 할 수 있어. 난 알아, 우리가 할 수 있다는 걸..." (p. 152-153)

 

 

 

'독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섬의 애슐리  (0) 2024.10.28
옥상에서 만나요  (5) 2024.10.23
지구에서 한아뿐  (6) 2024.09.04
밝은 밤  (0) 2024.08.22
덧니가 보고 싶어  (0) 2024.08.11

+ Recent posts